연대,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아스트라 테일러, 리아 헌트-헨드릭스 인터뷰

출처: Gayatri Malhotra, Unsplash

좌파의 전통에서 '연대'만큼 중심적인 단어는 드물며, 좌파 활동가들에 의해 그것보다 더 자주 말해지고 노래로 불리는 단어도 없다. 이 개념은 진보적 또는 사회주의적 운동의 어떠한 형태에서도 핵심적이다. 다수를 위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자화된 개인으로서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선(collective good)을 위해 다른 이들과 연대하며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자신의 안녕과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며, 함께할 때 더 나아질 수 있다.  

아스트라 테일러와 리아 헌트-헨드릭스는 자신들의 책 ⟪연대: 세계를 변화시키는 아이디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Solidarity: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a World-Changing Idea)⟫에서 이 단어의 개념과 역사를 탐구한다. 2024년 대통령 선거 이전에 녹음된, '자코뱅(Jacobin)'의  팟캐스트 '더 디그(The Dig)'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자코뱅 편집자 미카 우트리히트가 호스트로, 테일러 그리고 헌트-헨드릭스와 함께 연대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탐구한다: 연대에 대한 현재 우리의 이해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해방적이라기보다는 반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의 입장도 존재하는가? 억압과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연대를 약화시키기보다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대의 원칙에 기반해 조직된 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재난, 대규모의 집단 학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속하며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테일러와 헌트-헨드릭스는 연대가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대화의 팟캐스트 버전을 이 링크에서 들을 수 있다. 대화는 길이와 명확성을 고려하여 편집되었다.

[미카 우트리히트]  책 제목이 단어 하나로 이루어진 경우, 그 단어의 기본 정의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럼 그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연대란 무엇인가?  

[리아 헌트-헨드릭스]  음, 책을 쓴 목적 중 하나는 한 문장으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개념의 발전 역사와 맥락은 매우 흥미롭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 빠르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연대는 우리 사이의 상호 연결성과 차이를 넘어선 연결에 관한 것이다. 연대는 통합이나 동일함, 일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가로 지르는 연결에 관한 것이다.  

이 단어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연대는 빚의 개념이었다. '오블리가티오 인 솔리둠(obligatio in solidum)', 즉 '연대 채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한 집단이 함께 빚을 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개념이었다. 예를 들어, 몇 사람이 함께 집을 사려고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자기 몫을 낼 수 없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머지 부분을 메우는 것이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에서 19세기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현대 프랑스 법으로 전해졌다. 그런 다음, 거의 은유적으로 법에서 대중 담론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함께 지는 빚, 서로에게 지는 빚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연대주의(Solidarists)'라는 정치적 경향도 생겨났다. 이들은 현대 복지 국가, 사회보장 제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공교육과 의료를 옹호하며, 우리에게는 이전 세대에게 빚진 것이 있고 미래 세대에도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연대의 진정한 정의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 지르는 연결이다.  

개인의 고립된 상태와는 거의 반대의 개념으로, 어떠한 개인도 혼자 존재하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우리는 언어를 물려받고, 아이디어를 물려받으며, 제도와 예술을 물려받는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졌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모든 것을 이어갈 책임을 지고 있다.  

[아스트라 테일러] 나는 세계 최초의 채무자 조합인 '데트 컬렉티브'(Debt Collective)'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다. 어떤 면에서 리아가 연대 개념의 어원적 뿌리와 역사에 대해 나와 공유했던 통찰이 이 프로젝트에 나를 매료시켰다. 어느 날 리아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아스트라, 연대라는 개념은 사실 우리가 함께 지고 있는 빚을 의미해. 이런 상호 의존성을 뜻하지." 그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와, 나는 이 주제로 책을 쓸 수 있겠어."  

이것은 우리가 제시하는 논지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연대는 우리 사이의 유대를 나타내는 단어다.

[아스트라 테일러] 리아와의 대화에서 내가 보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많은 정치철학에서 우리가 관계적 요소, 즉 우리가 서로 연결된 방식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평등에 대해서도, 정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의 기둥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연대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제대로 된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관계적 개념, 우리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무언가, 우리의 상호 연결성을 설명하는 무언가 없이 소문자 'd'로 시작하는 민주주의를 생각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 책으로 하고자 하는 다양한 일이 있지만,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연대가 사실상 민주주의의 선행조건이라는 것이다. 연대는 이러한 민주적 정치 이상들 가운데 하나로 포함될 자격이 있다.  

[미카 우트리히트] 나는 개인주의적 주장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항상 느껴왔다. 왜냐하면 도덕적이거나 사회적, 정치적 질문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개인주의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이전 세대의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육체로부터 이 세상으로 이끌려왔다.  

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재배한 음식으로 영양을 공급받아 계속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자동차나 운영하는 대중교통이 있어야 이동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옷이 있어야 입을 수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일상적인 일을 하기 위해 광부들, 태양광 패널 제작자들, 댐 건설자들이 만들어낸 전기가 필요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낸다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착각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 없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연대라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마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이 들린다. 그가 쓴 놀라운 문장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든 깨닫지 않든, 우리 각자는 영원히 빚을 지고 있으며, 알려진 사람들뿐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남성과 여성들에게도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전 세계 절반 이상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아침 식사도 끝내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 욕실로 가면 태평양 섬 주민이 우리를 위해 제공한 스펀지를 집어 든다. 프랑스인이 만든 비누를 사용하고, 터키인이 제공한 수건을 사용한다. 식탁에서는 남미인이 제공한 커피를 마시거나, 중국인이 제공한 차를 마시거나, 서아프리카인이 제공한 코코아를 마신다. 우리가 일터로 향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전 세계 절반 이상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1800년대의 초기 연대 이론가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했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 시기는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때였고,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사회적 규범과 제도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던 시기였다.  

또한 개인이라는 개념이 시대의 중심 아이디어로 부상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연대주의자들과 에밀 뒤르켐 같은 사상가들은 이에 맞서 "그러나 우리는 과학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좋은 예로 들며 설명했다. 다리와 팔, 심장과 폐는 모두 완전히 다르지만, 전체로서 함께 작동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는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국제 연맹의 초대 의장 중 한 명이 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연대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에 기초했지만, 이제 박애를 대신해 연대가 우리가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연대는 우리의 상호 의존성이라는 과학적 사실과 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를 결합하기 때문이다.  

뒤르켐과 부르주아 및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기술적으로는 본질적으로 상호 의존적이지만, 반드시 그것을 느끼거나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며, 상호 의존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조직하는 실천과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쓰고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려는 또 다른 이유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해야 하며, 우리가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아스트라 테일러] 우리는 책의 서두에서 연대의 지적 역사를 다룬다. 리아가 방금 설명하기 시작한 이 역사는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런 사상가들의 작업은 특히 미국에서는 널리 논의되지 않는다. 우리는 연대주의자들과 레옹 부르주아가 프랑스 복지국가를 형성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향력의 정점을 찍었고, 그 비극 이후로 잊혀졌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이 중요한 지적 전통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연대의 한 갈래에 불과하다. 우리가 1800년대와 1900년대 초반, 산업혁명을 살펴볼 때, 우리가 하려는 이야기는 연대가 실제로 이론화되었던 일종의 두 평행하는 궤도이다. 

하나는 연대의 아이디어에 명시적으로 중심을 두고 있으며, 이에 매우 열광하는 운동이다. 우리가 인용한 글 중에는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광적으로 헌신하는 만큼 연대에 미쳐야 한다고 누군가 말한 내용이 있다. 연대는 유행어가 되었고, 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긴급성을 띠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업혁명의 주요 시기가 시작되는 시기를 살고 있었고, 사람들이 이주하고, 사회가 변화하며, 민주적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무엇이 사회를 하나로 묶을 것인가? 과거의 제도와 삶의 방식이 무너지는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연대는 인간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착되고 이론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뒤르켐의 기여다. 그는 연대를 일종의 사회적 유대, 사회적 결속의 힘으로 이론화했다. 다른 궤도는 노동운동인데, 우리가 오늘날 연대를 가장 강하게 연관시키는 전통이기도 하다. 이 전통은 갈등, 특히 계급 갈등에 더 중점을 둔다. 단순히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운 방식으로라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만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켜 정의롭게 만들 수 있을까? 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논쟁과 권력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리아와 나는 결국 두 전통이 모두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함께해야 하고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결속과 갈등이 모두 필요하다. 당시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레옹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계층이다. 그는 상류층 정치인으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사회와 국가를 조직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방임 경제 원칙은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이 방식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협력자들과 함께 '사회적 부채(social debt)'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그 시기의 많은 사상가들처럼,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의무에 중점을 두었다. 우리가 책임을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여겼고, 실제로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은 '사회적 재산(social property)'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산이 사회적 관계에서 가치를 얻는 것이지, 단순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우리가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도구 상자와 같은 개념들을 제공했으며, 연대의 더 전투적인 전통과 함께 사용해볼 만한 개념들이다.  

[미카 우트리히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대 개념의 종교적 측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하며 뒤르켐을 인용한다. 당신들은 연대가 단순히 물질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 "거의 영적인 측면을 가진 신성한 연대라는 공유된 감각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연대에 관한, 이 일종의 신성화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리아 헌트-헨드릭스]  이는 우리의 조직 경험뿐 아니라 뒤르켐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저작을 살펴보면, 그는 노동 분업에서 시작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분열되고 있지만, 노동 분업이 경제적으로 우리를 하나로 묶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고립감과 사회적 상실감을 느끼며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살에 대한 책을 썼다. 그의 작업 후반부에서 그는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를 쓰며 신성 개념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다. 우리를 실제로 하나로 묶는 것은 경제나 노동 분업이 아니라, 공유된 신성 개념(concepts of the sacred)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지,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 결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실천, 의식, 신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초자연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돌이나 나무, 강과 같은 무엇이든 신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였다.  

우리는 책의 마지막 장을 신성에 할애했는데, 이는 연대가 작동한다고 생각되는 여러 수준을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의 많은 부분은 역사적이고 거시적 정치 수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우리는 조직적 수준에서도 시간을 할애했다. 즉, 우리 자신을 어떻게 조직해 투쟁과 캠페인, 조직 속에서 우리의 사회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했다.  

신성은 개인과 서로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용기, 겸손, 호기심 같은 미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변화가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친절은 사회운동, 조직, 일상생활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것은 일상적인 행동에서 서로를 신성하게 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급진적인 정치와 중대한 사회 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매일 서로를 대하는 방식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스트라 테일러] 우리가 이 장을 쓰기 시작했을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신성한(sacred)'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할 것인가? 책의 마지막을 약간 감성적인 톤으로 끝내기로 할 것인가? 그러나 결국, 이 장은 내가 쓰기에 가장 좋아하는 장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상 이 장은 책의 핵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연대가 여러 수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대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통찰의 일부는, 우리가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연대를 기반으로 한 조직을 만들고, 더 연대적인 세계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물론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형성체다. 우리는 국가 수준에서 더 연대적인 정책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를 복지국가를 넘어선 일종의 '연대 국가(solidarity state)'라고 부른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처음에 말했듯이, 연대는 관계적이다. 연대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이유다. 왜냐하면 연대는 매일, 사람 대 사람, 관계 대 관계로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뒤르켐으로 돌아갔고, “아, 그가 뭔가를 잡아냈다”고 느꼈다. 우리가 정의한 신성의 일부는, 그것이 결국 당신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존중하는가? 자본주의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주의를 끈다. 우리는 시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참여할 것을 강요받는다. 만약 우리가 '401(k)'와 같은 퇴직연금이 있을 만큼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것을 관리해야 한다. 노후에 빈곤해지지 않으려면, 시장이 우리의 시간과 주의를 사로잡고, 따라서 우리의 경건함도 사로잡는다.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돈이라는 제단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를 재평가하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 우리는 연대를 믿는 사람들로서, 사회주의자로서, 생명은 신성하지만 돈은 신성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주의를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우리의 관계와 운동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의한다.  

이는 또한 좋은 조직자가 되는 것의 핵심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이 더 넓은 연합으로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반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을 도구나 객체가 아니라 진짜 인간, 잠재적 동지로 대한다. 좌파로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개인적인 수준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구조를 바꿀 힘을 갖게 된다.  

[미카 우트리히트] 당신들이 책을 이렇게 끝낸 것이 기뻤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온 종교적 배경과 매우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루터교 신학자인 폴 틸리히 같은 사상가를 떠올린다. 그는 신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에서 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논증했다. 문제는 그 신이 그가 말하는 "궁극적인 것(ultimate)"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궁극적인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지향하는지에 있다. 이것은 첫 번째 계명,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시장은 신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이 시장이라는 것을 섬기는 데 맞추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은 기독교적 틀에서 보면 일종의 거짓 우상 숭배다. 그러나 연대는 실제로 궁극적인 것을 지향한다. 그것은 우리 서로의 상호 연결성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중심에 두고, 함께 삶을 꾸리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 우상 숭배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을 중심에 두는 것처럼 들린다. 그것은 바로 서로 간의 상호 연결성과 서로에 대한 책임이다.  

[아스트라 테일러] 아멘.  

[미카 우트리히트] 당신들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연대가 세상이 돌아가는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 정책이나 정책 결과의 성공 또는 실패는 그것이 얼마나 연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수혜자들 사이에 연대감을 얼마나 잘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모두에게 연대를 필수적인 가치로 만드는 그런 자리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삶에 필수적인 연대를 심어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먼저 연대를 하나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행동해야 할까? 아니면 연대감을 장려하고 구축하며 강화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 실천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할까?  

[아스트라 테일러] 나는 첫 번째 단계가 연대를 정치적 이상들 가운데 하나로 되돌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대를 단순히 수사적 영역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플래카드에 적는 말이 아니다. 이메일 서명에 넣는 말도 아니다. 연대는 실제로 실천에서의 핵심 원칙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첫 번째 단계라고 본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물론 이메일에 "연대하며(In solidarity)"라고 서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도 할 수 있다.  

[아스트라 테일러] 그렇다, 그렇게 해라.  

[미카 우트리히트] 나는 당신이 "연대하며"라고 서명한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아스트라 테일러] 나는 연대에 마땅한 평가를 부여하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대를 수단이자 목표로 본다. 그것은 우리가 힘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자,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정치적 지평선을 지칭한다.  

나는 좌파로서 우리가 단순히 우리는 궁극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적인 사회,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상호 의존성을 자각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종의 '연대적 사회운영(solidarity statecraft)'을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사회 정책에 연대를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옆으로 스며들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연대적 사회운영은 일종의 영혼적 작업(soulcraft)이다.  

정책이 사람들의 감각과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전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유명한 발언이 있다. 그는 "경제학은 방법이고, 목표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더욱 치열하고 경쟁적인 사회, 사회 안전망이 축소된 사회를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이웃을 어떻게 보고, 국가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변화시킬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프로젝트 2025(Project 2025)'에서도 비슷한 정신을 본다.  

이 프로젝트는 복지 정책을 철폐하고, '깨어있음(wokeness)'과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 국민들에게 복된 문화를 강요하고,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남은 국가를 장악하겠다는 매우 대담한 선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중립적으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사회학자들이 '정책 피드백 루프(policy feedback loops)'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정책이 어떻게 상호 연결성, 상호 의존성, 연대감을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또한 가장 소박한 개혁조차도 싸움과 경쟁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직장, 학교, 거리에서 연대를 구축해야 하며, 국가 구조의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나는 우리가 사회 정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경제적 재분배를 촉진하고 아무도 그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바닥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주거, 교통, 교육, 의료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정책에 진정으로 참여하고, 자신을 주체로 이해하며,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사회적 부채 속에서 서로 얽혀 있음을 깨닫게 하려면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우리는 생존과 안녕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대부분의 좌파는 연대를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연대는 단지 일종의 사회적 결속이나 상호 연결성일 뿐이다. 사회적 분열의 시대에 연대는 분명히 매우 긍정적이고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여성 혐오자들이 여성을 증오하는 데 있어서의 연대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에서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증오 파업을 벌였던 백인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처럼, 연대가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의 연대와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변혁적 연대(transformative solidarity)'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가?  

[리아 헌트-헨드릭스] 그렇다. 연대는 어떤 면에서 중립적인 용어이며,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당신이 몇 가지 훌륭한 예를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의 캠페인은 우리가 '반동적 연대(reactionary solidarity)'라고 부르는 것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는 집단을 내부로 끌어당기고, 배타적이며, 경계가 엄격하고, '우리'를 보호하고 '그들'을 말살해야 할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는 폭력을 용인한다.  

지배 계급은 매우 강한 계급 연대를 가지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는 반동적 연대의 한 형태다. 우리는 이것을 '변혁적 연대(transformative solidarity)'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한다. 변혁적 연대도 '우리'와 '그들'을 포함하는데, 이는 어떤 종류의 집단도 정체성과 경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혁적 연대는 경계가 더 개방적이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점거 운동(Occupy Wall Street)이 99% 대 1%를 설정했을 때, 그것은 가능한 한 포괄적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대다수의 이익에 반하며 착취와 억압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이런 것들은 식별되고 이름 붙여져야 한다. 우리가 단지 모두 함께하고 항상 동일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가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살해야 할 집단이 아니라 변혁해야 할 집단이다.  

[아스트라 테일러] 1%의 경우, 우리는 그들이 가진 부를 박탈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억만장자를 폐지한다고 말할 때, 억만장자들을 모아 처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도록 경제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우리는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 상태가 스펙트럼의 어느 한쪽 끝에 있는 사람에게도 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론 머스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 최상위 계층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꼭대기에 머무르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것 또한 비참한 삶이다. 변혁적 연대는 모든 사람에게 이로운 결과를 지향하지만, 그 과정에서 갈등이 있음을 인정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당신들은 책에서 연대에 뿌리를 둔 정책과 사회를 이루기 위해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이는 이미 좌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식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연대라는 원칙을 더 넓은 진보적 신념, 혹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종교적 원칙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좌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투쟁이라는 요소가 다소 설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자원을 독점하지 않으며, 동료 인간들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 투쟁하거나 그들을 패배시켜야 할 적으로 여기는 개념은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연대의 이상과 투쟁에 대한 꺼림칙함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극복하고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아스트라 테일러] 리아가 '분극화(polarization)'라는 단어를 적용했는데, 지금은 그 단어가 대화에서 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된 후, 우리가 너무 분극화되었고, 더 많은 정중함을 갖추며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본다. 아니, 분극화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축(axis)을 중심으로 분극화되느냐는 것이다. 적을 설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적을 정의하는 것은 곧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에 참여하고 분극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분극화를 줄이는 것이 어떻게든 더 이상 갈등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이 책에서 논쟁하고 있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혹은 분극화를 대화와 토론, 단지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줄일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서도 논쟁하고 있다. 분극화는 구조적이다. 분극화는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구조적 수준에서 다루어야 한다.  

[아스트라 테일러] 문제는 우리가 분극화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다. 분극화는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화되어 있다. 그것이 이 사회가 만들어진 방식이다.  

우리는 단지 대화, 설득, 혹은 논쟁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책에서 우리는 “수의 힘(Power in Numbers)”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조직화에 대해 다루며, 당신이 상상하는 청중을 염두에 두고 논의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접근하거나, 로비를 하거나, 가장 훌륭한 논증을 제시하거나, 가장 설득력 있는 백서를 발행하려는 시도를 해왔다는 것을 이해하라. 그러나 결국 역사적 기록을 돌아보면, 우리가 이제 시민권 운동, 장애 정의 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의 승리라고 기리는 거의 모든 것들은 혼란, 심각한 갈등, 대담하고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했다. 이 모든 행동은 이후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역사에서 종종 희석되어 버렸다. 

[미카 우트리히트] 나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Letter from a Birmingham Jail)⟫가 미국에서 연대와 관련된 이 질문에 답하는 중요한 문서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킹은 미국의 상상 속에서 '건전화된' 인물이 되었고 그가 투쟁을 벌이고, 적을 규정하며, 그들을 패배시키려는 측면은 오늘날 우리가 킹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중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편지를 읽어보면 킹은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남부의 백인 온건파 성직자들, 그의 목표에는 공감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거리에서 갈등을 조성하는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킹은 그들에게 매우 사랑스럽고 인내심 있는 어조로 말하지만, 우리가 사랑과 연대에 뿌리를 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확고히 말하고 있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맞다.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즉 시민권 운동에 있거나 오늘날의 싸움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갈등은 그들이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당신의 우익 성향의 삼촌이 단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다. 폭스 뉴스(Fox News)가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마치 이민자들이 주요 문제인 것처럼 초점을 맞추는 것은 미국 사회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서사를 만들어내며 갈등을 조장한다.  

이는 이언 헤이니 로페즈의 ⟪도그 휘슬 정치학(Dog Whistle Politics)⟫에서 주장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 그는 지배 계급이 어떻게 우리를 분열시키는지에 대해 썼다. 갈등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안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하면 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부유층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디어에 자금을 대며, 다른 인구 집단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도그 휘슬 전략으로 관심을 돌린다.  

트럼프와 [제이 디] 밴스가 아이티 이민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전형적인 도그 휘슬 정치의 예다. 이를 극복하려면 투쟁과 이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노동운동은 그런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 중 하나다. 이것이 노동조합이 중요한 이유다. 노동조합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에 참여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한다.  

[아스트라 테일러] 어떻게 목표에 공감하지만 더 야심차고 전투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설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가끔은 사람들이 어려운 방식으로 배우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화에서는 때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좋다, 해보자. 설득하러 가자. 의회 의원들을 만나러 가자. 우리의 대표들을 만나 우리에게 어떤 부당한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자. 그들은 그저 정보를 알 필요가 있다."

조직화의 일부는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시도해 보고 그 한계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종 사람들이 약탈적인 기업들로부터 피해를 입었을 때 그들의 본능은 소송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 그 길을 한번 가보라. 그리고 그게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라. 때로 사람들은 정당한 채널을 통해 변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이는 매우 급진화된 경험이 될 수 있다. 가끔 우리는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겪도록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는 그 과정을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겠지만, 고통과 고난에 대해 강자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큼 강력한 교사는 없다.  

[미카 우트리히트] 당신들이 책에서 사회 정책에 대한 공적 담론에서 '납세자(taxpayer)'라는 표현의 수사적 변화에 대해 언급했다. 왜 납세자에 대한 논의가 연대에서 벗어나 반동적 전환을 나타내며, 가능한 대안은 무엇인가?  

[아스트라 테일러] 우리는 "나누고 정복하라(Divide and Conquer)"라는 장에서 납세자에 대해 논의하며 연대가 어떻게 의도적으로 약화되고 있는지를 다룬다. 이것을 명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중립적인 경기장에서 변혁적 연대를 조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수 세기에 걸쳐 변혁적 연대에 대한 의도적이고, 잘 자금이 지원된, 치명적인 전쟁이 있었다. 이 나라의 식민지 시대를 돌아보면, 노동조합은 불법이었다. 노동조합은 처음부터 범죄화되었으며, 1935년 와그너법(Wagner Act)이 제정되기 전까지 합법화되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적대적인 환경에서 연대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연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방해받고 있다.  

규제와 법을 통해, 지금 우리는 전국적으로 시위대를 공격하며 연대를 범죄화하는 것을 보고 있다. 전국적으로 국내 테러법이 강화되고 있다. 길이나 교통을 막는 것이 이제는 중범죄로 격상되고 있다. 캅 시티(Cop City) 항의 이후 애틀랜타에서 벌금 기금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임신중지 제공자들, 심지어 임신 중지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을 돕는 이들에 대한 공격도 이루어지고 있다.  

연대는 명백히 엘리트들에게 매우 위협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연대를 방해하기 위해 이렇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더 미묘한 방식도 있다. 단지 소비주의 문화, 경쟁적 개인주의 문화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신화나 서사를 통해서도 이를 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납세자"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가 실제로 시민이 아니라 마치 납세자로서 우리가 무임승차자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납세자라는 틀은 로널드 레이건 시대 정치에서 매우 두드러졌다. 당시에는 복지 국가를 철회하려는 의도적 시도가 있었다. 이는 가족들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고등 교육에 대한 공격과도 연관이 있었다. 그 아이디어는 학생들이나 싱글맘들이 훌륭하고 존경받는 납세자, 즉 항상 백인, 신체 건강한 노동 계층 남성으로부터 자원을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를 볼 수 있다. 학자금 대출 탕감 운동에서, 기사 댓글을 단 랜덤한 사람들부터 의회 사람들, 뉴욕 타임스 편집자들과의 대화에서도 항상 "학자금 대출을 탕감하는 아이디어가 납세자들에게 공정한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국가, 그리고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너무 강력하다. 이는 연대와 완전히 반대된다. 나는 이 단어가 공적 담론에서 퇴출되는 것을 보고 싶다.  

[미카 우트리히트] 이런 담론은 당신이 세금을 내는지 여부에만 기초해 정치적 주체성을 만들어낸다. 세금을 낸다면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아스트라 테일러] 또 하나 우스운 점은, 부유층과 대기업은 공정하게 세금을 내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내는 세금 유형은 역진적이다. 판매세 같은 것이 좋은 예다. 그러니까, 심지어 그들의 기이한 논리에 비추어 보아도 이건 말이 안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상호 의존성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키는 데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반연대적인 지점이다. 이것은 "나는 납세자고, 이만큼을 내며, 나는 고립된 섬이다"라는 식이다. 대신 "나는 사회적 부채를 갚고 있고, 그것이 직접적인 방식으로든 계산하기 어려운 방식으로든 나에게 혜택이 될 수 있다"라고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그리고 당신은 집단의 구성원이 아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이라면,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납세자라면, 당신은 단지 납세자로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할 책임만 가지고 있다. 세금 납부자에게 어떤 요구를 하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주제를 바꿔서 물어보겠다. 당신은 21세기에 소비, 사회생활,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개인주의적이고 반연대적인 접근법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가 이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 적이 있는가? 연대가 본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일지라도, 그런 개인주의를 극복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아스트라 테일러] 사실, 나는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당신의 대답이 궁금하다. 나는 당신이 삶 전체를 우리가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미카 우트리히트] 우리는 항상 개인주의보다 연대를 선택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본질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이 나라에서 접하는 모든 자본주의적 선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질문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본질적으로 연대적이라는 사실에 큰 희망을 느낀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를 원하고,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다른 사회를 원한다. 이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세상은 이 세상뿐"이라는 말을 계속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나는 그 점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맛본 소비의 개인주의적 형태에서 물러서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맞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물러서는 것을 상상하기보다는 붕괴가 더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나는 트럼프 시대와 권위주의의 부상이 신자유주의가 자기모순에 직면하며 한계점에 이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이 통제 불능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는 소비와 정보의 즉각성, 정보와 물질주의의 과잉과 넘침과도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게 느껴진다.  

사회는 항상 선형적이지 않은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경제 체제를 모색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있다.  

나는 최근 노동운동의 부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20세기 중반에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30%였다. 지금은 10%로 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30%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그 이상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아마존(Amazon)과 인공지능 회사의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진다면, 생산과 소비의 메커니즘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변화의 문턱에 서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우리가 더 큰 고립과 허무주의로 나아갈지, 아니면 연대로 나아갈지는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이는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선택이다: 허무주의냐, 연대냐.  

[아스트라 테일러]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개인적 소비(​​private consumption) 대신 공공적 사치(public luxury)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도서관 같은 것에 투자하고 그 목적을 확장하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단지 책만이 아니라 도구와 기술, 수업, 그리고 우리를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또는 고전적인 예로는 수영장이 있다. 만약 훌륭한 공공 수영장과 수영할 공간, 사우나, 운동할 기회,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가 있는 사회적 공간이 있다면, 이는 단지 물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감정적이고 사회적인 혜택도 제공한다.  

우리는 그런 공간들을 연대의 장소라고 본다. 헤더 맥기는 ⟪우리의 총합(The Sum of Us)⟫에서 이것에 대해 정말 아름답게 썼다. 과거 공공 수영장이 있었고, 이들은 백인 우월주의 때문에 말라붙었으며, 이제는 이런 식의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려면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는 자신의 염소 처리된 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수영장들은 나이와 인종을 넘어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장소였고, 연대의 지점이 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를 예로 들어보자. 그곳에는 자연적으로 데워진 지열 수영장이 있다. 모든 동네에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일종의 공공 공간이 있으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이 아이슬란드 연대의 핵심 요소다. 이것이 바로 공공적 사치다.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다. 내게는 정말 멋진 일처럼 들린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소비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더 깊은 불안의 증상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규제적인 일도 있다. 우리는 제품이 고장 나도록 만드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 제품을 일부러 고장 나게 만들면 불법이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항상 새로운 물건을 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공공재(public wealth)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설득력 있다는 것은 단지 글로 된 논증의 설득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무언가를 말한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민중을 위한 궁전(Palaces for the People)⟫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공재는 일종의 신성한 것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공동체의 자부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런 공간들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사실, 수영장에 가서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중 일부는 아는 사람이고, 일부는 모르는 사람인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뒷마당에서 혼자 구간을 반복하며 수영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이런 방식이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다.  

[아스트라 테일러] 맞다. 아름다운 공공 공원은 잔디밭과는 다르다. 그것은 다른 에너지와 다른 관계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연대를 구축하는 장소로, 가상의 연대 국가의 핵심 요소로 본다.  

[미카 우트리히트] 리아, 당신은 방금 노동운동에 대해 언급했다. 당신들이 이 책을 쓴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즉시 노동 변호사이자 작가인 토머스 게건의 회고록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Which Side Are You On?)⟫을 떠올렸다. 그는 노동조합과 함께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미국적 가치들과 함께 미국 문화의 블랙홀로 들어가는 매력, 단 한 가지, 개인주의를 제외한. 그리고 이 블랙홀에서 맥주 캔을 벌컥벌컥 마시는 중년의 뚱뚱한 남자들이 손을 잡고 서로를 만지며 '영원한 연대(Solidarity Forever)'를 부른다. 이것은 당신이 본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것일 것이다. 노동운동은 자신을 애플 파이만큼 미국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노동조합 회관에 가든, 어떤 노동조합 집회에 가든 연설을 들어보라. 나는 이를 알아차리기까지 몇 년이 걸렸지만, 그곳에는 침묵이, 개인주의라는 주제에 대해 귀가 멎을 듯한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침묵이 존재한다. [...] 개인주의는 파업 파괴자들을 위한 것이다."

노동운동은 미국과 전 세계에서 연대라는 개념을 유지해온 중심적인 존재였으며, 연대를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원동력이었다. 나는 노동운동에 대한 명백한 열망이 있다는 사실에서 큰 희망을 느낀다. 노동조합은 몇십 년 만에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노동자 수백만 명 사이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진정한 갈망이 있다. 그들은 노동시장 속에서 개인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품위 있고 존엄한 삶을 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도구, 집단적 결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 나라에서 1세기가 넘는 조직 노동에 대한 전쟁과 노동조합에 불리한 제도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나도 희망적이라고 느낀다. 지난 1년 동안 전미자동차노조(United Auto Workers)가 훨씬 더 전투적으로 변하고, 남부의 새로운 공장을 조직하며 자동차 공급망과 전기차 공장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았다. 팀스터즈(Teamsters)가 아마존 노동조합(Amazon Labor Union)과 협력하는 모습도 보았다.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전투적인 움직임을 보고 있으며, 트레이더 조스 유나이티드(Trader Joe’s United)와 스타벅스 워커스 유나이티드(Starbucks Workers United)처럼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노동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엄청난 수요가 있고, 나는 노동조합들이 새로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더 많은 투자를 시작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리스 보너는 자코뱅에서 노동조합 재정에 대해 썼는데, 노동조합들은 실제로 은행 자산과 월스트리트 주식을 포함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노동자를 조직하는 데 쓰는 돈은 과거보다 약 10억 달러나 적다. 돈은 있다. 수요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혀 새로운 수준에서 조직화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결정이다.  

토머스 게건의 인용은 정말 웃긴데, 사람들은 중년의 백인 남성들이 맥주를 마시며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가장 다양한 사회 단면을 포괄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노동운동은 다인종 연대를 실제로 구축할 수 있는 장소다. 이 분야에서 재건할 기회가 있다. 노동운동에는 엄청난 힘이 있으며,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우파가 '단결강제로부터의 자유로울 권리법(right-to-work laws)'을 통해 이를 해체하려고 그렇게나 공들인 것이다.  

남부의 일부 지역은 '단결강제로부터의 자유로울 권리법'이 통과되기 전에는 북부보다 더 높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가졌었다. 지금은 이를 재건할 진정한 기회가 있다. 나는 연대라는 아이디어에 관심 있는 누구든 이 재건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은 마치 '연대의 교회'와도 같다. 이곳은 우리가 함께 일하고, 함께 투쟁하며, 관계를 구축하고, 미국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소다.  

[미카 우트리히트] 당신은 책에서 우파의 "'깨어있음(wokeness)'에 대한 전쟁"이 연대의 초기 움직임을 근절하려는 시도라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는 '깨어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억압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연대의 감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점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 좌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나 소통 방식 중 일부가 종종 본질적으로 반연대적이라는 점도 명확하다고 본다. 어떤 정체성과 억압에 대한 담론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구축하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투쟁에 참여하는 존재로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투쟁, 특정한 억압 혹은 '교차하는' 억압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고유하고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억압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연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스트라 테일러] 우리가 이해하는 연대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가로 지르는 관계에 관한 것이다. 연대는 통합이 아니다. 연대는 동일함이 아니다. 연대에는 차이의 측면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변혁적 연대(transformative solidarity)'는 차이를 넘어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반동적 연대(reactionary solidarity)'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반동적 연대는 본질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백인 우월주의, 여성 혐오, 이민자 대 원주민, “진짜 미국인” 같은 것이다. 차이라는 측면은 중요하며, 이는 역사적 기록에서도 반영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다양한 정체성 범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흑인성(blackness)이라는 범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나타났고,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누가 백인으로 간주되는지도 변화해왔으며, 노동자(worker)라는 범주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자라는 범주는 단순히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며,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을 발견하고, 자신을 단순히 기술자, 도안가, 화가, 용접공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범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 연대는 정체성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정체성은 우리가 만들고 다시 만드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하며, 이를 본질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책에서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변혁적이고 고무적인 접근법과 반동적 접근법에 대해 많이 논의한다. 우리는 인종과 계급을 함께 생각해야 하며, 단지 경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정체성 문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문 앞에서 정체성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물질적 관계만 생각하라”고 말하면, 사람들과 멀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정체성과 경험을 함께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도록 활용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갇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좌파가 우파의 "깨어있음에 대한 전쟁"에 기름을 붓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이는 우리의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정체성 정치에는 잘못된 면이 있다. 나도 그것이 본능적으로 싫다. 그것은 최악의 정체성 정치다. 하지만 사람들이 도덕적 직관을 가지고 불의에 깨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다른 틀을 제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정체성 정치는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지배적인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 다른 패러다임과 틀이 있다는 것을, 차이를 넘어 연대를 구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을, 왜 우리가 ‘억압 올림픽(oppression olympics)’에 빠져서는 안 되는지를 말해줘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자신과 우리의 정체성을 개념화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창의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이언 헤이니 로페즈가 정치적 소통에 대해 연구한 흥미로운 내용을 언급했는데, 그는 인종차별을 단순히 인종 집단 간의 싸움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보는 접근 방식을 제안한다. 로페즈는 이를 '재벌들의 낫(plutocrats’ scythe)'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방식의 인종차별 담론이 최근 몇 년간 일부 주요 운동 지도자들에 의해 채택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특히 전미자동차노조의 회장인 숀 폐인이 성적 지향, 인종, 이민자 신분 같은 문제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사장들의 시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떠올린다. '재벌들의 낫'이라는 논거를 설명하고, 이러한 방식을 운동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연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려달라.  

[리아 헌트-헨드릭스] 이언 헤이니 로페즈는 ⟪도그 휘슬 정치학(Dog Whistle Politics)⟫에서 지배 계급이 경제나 과세에 대한 논의를 방해하기 위해 인종차별을 분열의 도구로 사용하는 역사를 다룬다. '복지 여왕(welfare queens)'이라거나, '거리의 깡패(thugs on the streets)'라거나, '범죄'같은 주제로 논의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략이 도널드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을 본다.  

내가 공동 설립하고 함께 일하는 '웨이 투 윈(Way to Win)'이라는 단체는 이런 상황을 간략히 요약해 보여주는 정치 광고를 제작해왔다. 반면 공화당은 이민자나 범죄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공포를 조장하고 주의를 분산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견뎌야 한다. 우리가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차이를 넘어 함께 모이고, 우리의 공통된 유대를 발견하며,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민주당은 가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그들은 다시 “우리는 국경에서 엄격하다”, “우리는 범죄에 강경하다” 같은 주장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로페즈가 설명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우파의 전략을 분석하는 데 정말 훌륭한 통찰이며, 이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식을 제시한다.  

[아스트라 테일러] 로페즈가 실험한 이런 프레임은 단순히 “인종차별은 나쁘다” 혹은 “인종차별주의자는 나쁘다” 같은 메시지에 반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이 있다. 혹은 지나치게 “깨어있다(woke)”는 인상을 주는 메시지에도 반발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왜”라는 요소를 추가하면 훨씬 더 다양한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부유층이 기괴한 부와 권력을 수확하기 위해 여러분을 분열시키기 위해 인종차별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낫'인 이유다. 그들은 인종차별을 이 기괴한 수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민주당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이를 완전히 내재화하지 못했다. '스쿼드(Squad)' 멤버들은 그렇게 했다. 당의 진보적 세력도 그렇다. 그러나 카멀라 해리스는 범죄에 강경하고 국경 보안에 강경한 입장을 강조했다. 그것은 연대의 플랫폼이 아니다. 그것은 트럼프의 반동적 연대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플랫폼이다.  

[미카 우트리히트] 이것은 아마도 이민에 대한 공적 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지금, 양대 정당 모두 이주민들에 대한 적대감과 강경한 국경 정책에서 서로를 능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 대중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일정한 수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히 앞으로 몇 년간 이민 정책을 연대의 감각으로 이끄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나라에 오는 난민과 이주민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는 가까운 미래에 기후 변화의 악화로 인해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아스트라 테일러] 동의한다. 문제는 이주민들에 대한 이런 반감이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우파가 반동적 연대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얻는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신의 상사가 당신에게 적정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주민이 들어와 임금을 낮추거나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사에 대한 비난은 사라진다. 이는 매우 유용하다. 그리고 민주당은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전략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댄 덴비어가 자신의 훌륭한 책에서 보여주었듯, 이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민주당 주류의 이민 접근법과 일맥상통한다.  

당신이 말했듯,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적대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고, 이런 공포가 어떻게 조장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 반동적 연대에 대해 더 진보적이고 강력한 연대 정치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애석하게 여겨야 한다. 민주당 주류는 여전히 '연합 구축(coalition-building)' 접근법에 갇혀 있다. 이 집단에는 이익을 조금, 저 집단에는 조금씩 주고, 이주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간신히 버티려는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더 깊고 변혁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왜 사람들이 이주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미국이 그렇게 훌륭해서가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반드시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 부족, 기회 부족, 안전 부족, 기후 위기, 전쟁과 혼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는 것이다. 이것은 더 깊은 수준의 국제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우리는 국제주의에 관한 장을 책에 포함시켰다. 한 나라 안에서 연대 국가(solidarity state)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살펴볼 수 있지만, 우리는 국제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민에 대한 논의를 외교 정책과 우리가 원하는 글로벌 질서의 모습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 장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바 중 하나는 글로벌 질서에 대한 두 가지 지배적인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본이 국경을 빠르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하면서 사람은 이동하지 못하게 하는 '기업적 세계화(corporate globalization)' 이고, 다른 하나는 더 보호주의적이고 고립주의적인 '민족주의(nationalism)' 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사실, 이 둘은 실제로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기업적 세계화는 엄청난 불평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자극한다.  

글로벌 질서를 바라보는 세 번째 전통이 있다. 이것은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에서 출발하여, 노동자들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로 이어지고, 이후 탈식민지 운동으로 연결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 국가의 많은 지도자들이 scythe개발주의 정책을 사용하고, 냉전 시기에 제3세계 블록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은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신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를 유엔에 제안하며, 국제 공동체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한 또 다른 비전을 제시했다.  

이민에 대한 논의는 미국이 이러한 비전을 억누르는 데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중미와 남미 전역에서 많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우익 쿠데타를 벌였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지역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이주 흐름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역사적이고 글로벌한 맥락 없이 이민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이는 이언 헤이니 로페즈가 추천하는 방식과 동일하게 중요하다. 더 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재벌들의 낫'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민에 대한 더 큰 이야기를 해야 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책에 자선(philanthropy)에 관한 장이 있다. 이는 자선이 오늘날 불행하게도 진보적 운동을 구축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리아, 당신이 유의미한 부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선이 당신이 하는 일의 핵심이기 때문에도 적절하다. 당신의 자선에 관한 장은 때때로 상당히 신랄하다. 심지어 가장 선의로 이루어진 기부에도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당신은 이 개념에 대해 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부 프로젝트나 운동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자선 기부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또한, 당신이 하는 기부와 같은 자금 지원이 기부자의 변덕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연대의 기반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리아 헌트-헨드릭스] 우리는 자선을 '연대의 유사품(semblance of solidarity)'이라고 부른다. 자선은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종종 권력과 통제의 원천이다. 그러면 진보적 조직화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영리 사회운동은 실제로 자원이 필요하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는 성인 대부분의 시간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데 보냈다. 그리고 '솔리대어(Solidaire)'라는 진보적 자선가 네트워크를 만들었는데, 이 네트워크는 신속한 대응 자금 지원과 운동과의 협력에 중점을 둔다.  

최근 자선 활동에는 '신뢰 기반 자선(trust-based philanthropy)'이라는 새로운 방향이 등장했는데, 이는 재단이 수혜자들에게 덜 요구하고, 적은 보고서와 적은 측정 기준을 요구하며, 더 많은 신뢰를 쌓도록 교육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답의 일부지만, 솔직히 나는 자선이 어떤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영리 구조 전체가 뒤집어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부를 보호하고, 자선 신탁과 재단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연간 5%를 기부하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부를 독점하는 방식이다.  

나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다. 부분적으로는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구성원들에 의해 자금을 지원받고, 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 자금을 지원받는다. 나는 자금 흐름을 만드는 것에 관한 많은 실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선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어렵다. 모순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 결함 있는 구조에 갇혀 있다. 좋은 진보적 작업을 하려면 당신의 진정한 비전과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부자들에게 의존해야 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비전을 변형하거나 포장해야 한다.  

[미카 우트리히트] 결론에서 당신들은 이렇게 썼다.  

"변혁적 연대의 유대를 형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가 볼 수 없고, 사실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입증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할 때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다. 연대를 친족, 인종, 국적 등의 유사성이라는 경계를 넘어 확장하려면 우리가 우리의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또한 이렇게도 썼다.  

"변혁적 연대를 선택하는 것은 완전히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조직화 작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어떤 특정한 운동이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

이것은 우리가 앞서 논의한 종교적인 영역, 즉 '연대의 신앙적 도약'으로 돌아가게 한다. 연대는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연대를 선택하는 것이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논할 수 있다. 비록 항상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왜 연대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달라.  

[아스트라 테일러] 연대는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신앙적 도약(leap of faith)이다. 당신은 실패와 좌절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더 긴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사실 연대가 확실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의 전체 제목을 ⟪연대: 우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Solidarity: The Only Thing That Can Save Us)⟫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시기가 있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연대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 모든 선한 것을 이끌어왔다. 우리가 지금 기념하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사회적 진보는 사람들이 연대의 유대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것이 신앙적 도약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노력이다. 더 크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권위주의의 위협 증가, 삶의 금융화 심화, 기후 변화 등 수많은 위기에 직면한 이 시점에서 연대의 외침은 더 크고 강렬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연대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며, 우리는 연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훨씬 더 많은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아 헌트-헨드릭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산업혁명 이후 연대를 선택해온 사람들, 예를 들어 로자 룩셈부르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탈식민지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 노동 지도자들과 같은 이들의 전통에 관한 지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속하고 싶은 전통을 떠올릴 수 없다. 이 전통은 별을 향해 손을 뻗고, 큰 비전을 품고, 큰 희망을 가진 다음 일을 실행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삶을 사는 가장 좋은 방식이며, 가장 재미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Solidarity Is the Only Thing That Can Save Us”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아스트라 테일러(Astra Taylor)는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며 조직자이다. 그의 최신 영화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Democracy?)⟫이며, 최신 저서는 ⟪세상을 다시 만들다: 에세이, 성찰, 반란(Remake the World: Essays, Reflections, Rebellions)⟫이다. 리아 헌트-헨드릭스(Leah Hunt-Hendrix)는 활동가이자 정치 이론가이며 운동 구축자이다. 그는 '웨이 투 윈(Way to Win)'을 포함해 세 개의 단체를 공동 설립했다. 미카 우트리히트(Micah Uetricht)는 자코뱅(Jacobin)의 편집장이다. 그는 ⟪미국을 위한 파업: 긴축에 맞선 시카고 교사들(Strike for America: Chicago Teachers Against Austerity)⟫의 저자이며, ⟪버니보다 더 거대하다: 샌더스 캠페인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로(Bigger than Bernie: How We Go from the Sanders Campaign to Democratic Socialism⟫의 공동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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