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통합운동, 소중한 도전이자 실험

[연재](2) 유럽 Syriza, Left Bloc, NPA를 중심으로

4. 프랑스: NPA와 Left Front(FG)

1997~2002년까지 집권하였던 사회당은 공산당과 함께 범좌파plural left 정부를 만들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2002년 우파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2002년 대선 1차전에서 시라크는 19.88%,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르펭은 16.86%를 얻어 결선에 진출하였고, 사회당의 죠스펭은 16.18%, 공산당은 3.37%로 죽을 쓴 가운데, LCR의 부장스노 4.25%, LO 5.72%, 노동자당 0.47%로 변혁적 좌파far-left가 10%를 넘었다.

4-1. 2006년 반자유주의 통합후보 운동과 두 개의 평가

2005년 ‘NO’ 투쟁-유럽헌법 비준 반대투쟁-은 혁명적 좌파(주로 LCR), 공산당, 좌파 생태주의자, 녹색당 일부, 사회당 일부(집행부와 달리 당원의 대부분은 반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멜랑숑만 공공연히 NO투쟁에 합류했다), 노동조합운동가과 단체, 여성주의운동, 지구정의운동global justice의 활동가들이 참여하였고, 국민투표에서 승리하였다. 2006년 사르코지 우파 정부는 25세 이하에게 CPE(고용주에게 해고사유 없이 자유롭게 해고할 권리를 주는 최초 고용계약)를 강요하려고 했다. 3개월의 대중적인 동원 후에 300만 명의 시위대가 도로로 진출했다. 노동자와 청년들의 강력한 운동은 자유주의 우파 정부를 처음으로 패퇴시켰다.

NO 투쟁과 CPE 반대투쟁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소중한 성과이고, 이를 기반으로 2007년 4월 말에 있을 대선과 6월의 총선에서 사회당에 대당하기 위해 ‘반자유주의 통합후보’를 세우는 선거연합운동이 힘을 얻었다. NO투쟁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모여 2007년 대선에서 통합대응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으나 3B(LCR의 Olivier Besancenot, 공산당 서기장 Buffet, 환경운동가인 Bove)가 경쟁하다가 깨졌다. 이 선거에서 부장스노만 4%, 보베와 뷔페, 또 다른 트로츠키 당인 LO가 각각 2% 정도의 득표를 하였다.

‘반자유주의 통합 좌파’라는 생각은 바로 그 정치적 제안을 방어하기 위해 복수후보나 후보의 분산에 대해 반대했다. 이러한 목적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의 결집과 지역에 기반한 통합 단체를 만들자는 새로운 제안이 만들어졌다. 대략 15,000명을 포함하는 600~700개의 단체가 참여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헌법반대 공동행동에 참여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투쟁가들, 노조 조합원, 사회운동 조직가들이 참여했다. ... LCR 다수파(60%)는 2006년 전국회의를 조직하여 나중에 통합협상이 결정되면 사퇴할 것이라면서 부장스노의 출마를 결정했다. ‘소수파-통합 경향unitary current’-(40%)는 LCR이 통합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 부장스노의 선거전을 출범시키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통합운동에 들어가야 되고 최상의 협상을 얻는 데에 전력을 다하자는 입장이었다.1)

LCR은 ‘반자유주의 통합후보’ 운동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공감하면서도 참여하는 세력들 특히 PCF(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컸다. LCR 다수파는 협상안이 “최저임금수준, 핵무기의 최대한 빠른 제거, 프랑스의 즉각적인 NATO 철수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런 점들이 공동행동에 절대적인 장애가 아니며 부장스노를 후보로 선출했지만 정치협상이 이루어지면 언제든지 후보를 사퇴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반자유주의 후보는 사회당이 이끄는 정부에 들어가지 않고 총선에서 모든 반자유주의 후보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더라도 사회당 정부를 지지하거나 의회의 다수파에 속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지만 그러한 답변을 듣지 못해서 공동후보 선출의 과정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2) 다음은 소수파의 반론이다.

합의문에는 “우리는 사회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당은 특히 자유주의와의 명백한 단절에 등을 돌렸다. 우리가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의회에 있는 우리 그룹들은 이러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다수파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법률안을 대중의 이익을 위한 방향에서 표결할 것이다”고 되어 있었다.

10월에는 통합집단들의 600명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회의에서 사회운동, 반전 및 지구정의운동에 의해 다듬어진 최상의 요구들을 받아들인 125개의 강령적 제안 문건을 채택했다. 사회변혁을 선호하는 좌파와 사회운동이 제출한 모든 주요한 조치들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해고, 임금, 서비스, 이주자, 외국인의 선거권,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모든 군사적 개입의 반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 등). 그리고 원자력에 호의적인 공산당의 전통적인 입장과 좌파와 생태주의자들의 원자력 폐기 입장 사이에서 “새로운 발전소의 건설을 중단하고 전 사회적인 공개 토론 후의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타협되었다. 12월 9~10일 800명 이상의 대표자들이 모였고 공산당이 다수였던 회의는 비공산당 후보를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뷔페가 단체들의 후보가 되는 것을 막았다. 물론 공산당은 사회당과의 단절에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였고, 당원들을 단체들의 통합논의에 적극 참여시킨다든지 당내토론으로 뷔페를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5만 명의 당원 중 만 명이 통합운동을 위해서는 뷔페가 후보로 나서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지도부의 입장에 반대표를 던졌고 이들은 공산당 통합파unitary communists라는 공개적인 협회로 발전하였다.3)

그런데 뷔페를 관철시키려고 책동한다든지 합의문에도 불구하고 계속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LCR의 불신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LCR이 철수한 것은 대의에도 맞지 않았고, 이로 인해 LCR은 대다수의 사회운동단체가 참여하고 대중적 동원력을 가지고 있는 이 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고 고립되었다.

4-2. Left Front(Front de Gauche, FG)의 출범

반자유주의 통합후보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2008년 11월 프랑스공산당(PCF 혹은 CP), 사회당을 탈당한 멜랑숑이 이끄는 좌파당(Parti de Gauche, PG), NPA가 출범할 무렵 LCR에서 30% 정도의 소수파였다가 떨어져 나온 Christian Picquet의 통합좌파Unitary Left(Gauche Unitaire, GU)가 주축이 되어 선거연합인 Left Front를 출범시켰다. 2009년 6월 유럽의회선거에서 Left Front는 6.05%로 4명의 당선자를 내었고, NPA는 4.88%를 얻었지만 의회진출에 실패하였다. “2009년 캠페인의 성공이 공산당의 연대 지향을 바꾸었다. 지방선거의 후보는 80%가 공산당이었지만 2012년 대선에서는 멜랑숑을 후보로 선출했다. Left Front는 11%를 획득했다. Left Front의 다른 세력들은 총선 전에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고, 공산당은 결정을 미루다가 선거가 끝난 후 사회당과 정부 구성을 하지 않고 Left Front와 연대를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3개 정파로 시작된 Left Front는 12개로 불어났다. 여기에는 NPA의 지도부에 비판적이었던 수렴과 대안Convergence and Alternative 경향이 2011년 NPA 총회 후에, 그리고 2012년 7월엔 반자본좌파Anticapitalist Left가 결합했고 여기엔 LCR의 해체와 NPA의 결성을 주도했던 지도부의 절반이 포함되어 있다.4)

4-3. NPA의 구상과 출범-‘새로운 시대, 새로운 강령, 새로운 당’
NPA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강령, 새로운 당’5)을 표방하면서, 2008년 2월 신당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2009년 2월 조직을 해산하고 NPA로 출범하였다. 2002년 대선 무렵 1,500명이었던 LCR은 2007년엔 3,000명으로 불어났다. 2009년 해산 무렵엔 2,500~3,000명 정도였지만 NPA 창립 때에는 가입자가 9,123명이었고, 몇 주만에 12,000명으로 불어났다.

NPA 창립 과정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 얻은 120만 명과 150만 표라는 사회적 동원에서 표현된 가능성을 보면, 조직의 실제와 조직이 대표하는 사람들과의 심대한 차이가 있었다. ... 트로츠키주의라는 정체성과 극좌파적인 조직으로는 새로운 과제를 담당할 수 없었다. NPA 프로젝트를 위한 제안은 명백하게 반자본 지향에 기초하면서, 체제를 타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조직, 착취와 지구자원의 지배와 파괴의 체제를 끝장내는 것을 분계점으로 하였다. 이러한 반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당에 대한 엄격한 독립이고, 부르주아 제도의 틀 안에서의 어떠한 연립정부의 협정도 거절하는 것이고 지역수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008년 1월 LCR 총회에서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까지 새로운 당을 건설하고 조직을 해산한다는 결정은 83%의 지지를 얻었다.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수십 개의 새로운 지역위원회가 만들어졌고, 350개 가까운 지역위원회를 갖춘 전국적 구조가 되었고, 2008년 6월말 전국위원회 회의가 열려 LCR의 제안이 아닌 NPA 준비위원회의 제안을 채택하고 전국공동조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008년 LCR 여름학교에서 강령초안이 마련되고, 수백 개의 수정안은 11월 공동조직위원회CAN에서 3개의 문헌(창립원칙, 규약, 지향)으로 통합되고 다시 수백 개의 수정안이 나왔다.

창립원칙에서 NPA는 ‘혁명적 당revolutionary party’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화하기를 원하는 당a party wanting to revolutionize society’으로 규정하였다. 혁명적 맑스주의적 경향에 속하는 LCR이 쓰는 개념인 혁명적 당은 혁명을 위한 강령과 규약을 갖는 당이다.

‘사회를 혁명화한다’는 의미는 체제를 전복한다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인 가정에 관한 고려를 진척시키지 않고 이 이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규정이다. 또한 국가의 성격에 관하여 국가와 그 기구(제도)는 정치적 사회적 변혁에 사용될 수 없고 그러므로 파괴되어야 하는 부르주아를 위한 도구라는 맑스주의적 입장을 반영하였다.

창립총회에선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의 3개의 안이 표결에 붙여져 ‘21세기 사회주의’가 채택되었다. 창립원칙에는 “자본주의의 지구적 위기에 대한 유일한 답이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는 투쟁은 민주주의적, 생태주의적, 여성주의적인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고 표현되었다.6)

4-4. 당과 통일전선 논쟁

NPA가 출범하자 SWP의 Calinicos는 NPA가 통일전선이며 LCR은 그 안에서 혁명적 분파로서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7) LCR의 지도부였고 제4인터 집행위원인 NPA의 Sabado는 “NPA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반자본주의 정당으로서 의회가 아니라 투쟁과 사회운동에 중심을 두는 당이다. 중도좌파나 사회자유주의와의 동맹이나 공동정부에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을 창립원칙으로 하는 당이며, 반자유주의에 멈추지 않고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지배계급의 권력의 타도를 지향하는 당”이라고 반론하였다.8)

직업적 혁명가로 이루어진 당과 그에 지도받는 대중이라는 관념은 ‘지도’를 강조하는 트로츠키주의에서 더욱 심해졌다. 대중정당이 아닌 굳건한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혁명당(실제로는 종파당)의 입장에 선 Calinicos는 대중과 접촉하기 위해 통일전선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지독한 엘리트주의적 입장 때문에 대중정당과 전략당의 관점을 이해 못하는 Calinicos의 주장은 기각될 수밖에 없다.9)

4-5. 2010년 지방선거와 히잡 논란

2010년 3월의 지방의회 선거는 1차 선거에서 기권율이 53.67%에 달했고, 집권당 연합 26.02%, 사회당 29.14%, 국민전선 11.42%, Left Front 5.84%를 얻었다. 2010년 초 NPA의 Vaucluse 지부는 노조에서 회계담당을 하는 무슬림 여성인 Ilham Moussaid를 후보로 선출했다. 이 지역이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히잡을 쓰고 유세했고, NPA의 일부 활동가들은 유세장에서 이슬람 혐오주의를 반대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히잡은 한 개인의 신앙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사회에서는 여성의 복종을 위한 도구로서 혐오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성주의와 세속주의의 입장에 투철하다는 NPA는 Ilham의 출마로 논란이 일자 부장스노가 한 개인의 신앙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중앙위의 성명은 Ilham이 투철한 여성주의자이고 히잡만 썼는데도 부르카를 쓴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느니, 출마 결정이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사회당과 공산당에도 히잡을 쓴 후보가 있는데 NPA만 문제 삼는다는 식의 당당하지 못한 성명10)을 발표하였고, 전국회의에서는 히잡을 쓴 사람은 NPA의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결의안까지 제출되었다. 히잡 논란의 핵심은 프랑스의 인종주의 또는 반이슬람주의인데, 마치 NPA가 여성주의의 대의를 버린 것처럼 보수언론에 의해 왜곡되면서 NPA는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리고 여성주의자들의 불만과 이탈을 가져왔다.

4-6. NPA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둘러싼 논쟁들

부장스노가 세 번째의 출마를 고사하자 2011년 6월 NPA 전국회의에서 과반수가 조금 넘는 지도부와 혁명파들은 포드 공장 노동자로 공장폐쇄 반대투쟁에 앞장섰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Philippe Poutou를 대선후보로 선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통합파는 이를 종파주의라고 비판했고, 2명의 여성 공동대표 중 한명을 후보로 해야 한다는 여성주의자들의 반발도 컸다. 25%였던 통합파는 구다수파를 상당수 끌어들여 40%로 성장했지만 패배했다. 2012년 대선에서 Poutou는 1.15%, Left Front의 멜랑숑은 11.10%를 얻었다. 예견된 참패였다.

Left Front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선거공간에서의 연이은 참패를 배경으로 NPA는 다수파와, 반자본좌파, 혁명파로 나뉘어 논쟁하였다. 배타적인 급진성이 아니라 대중정당으로 서야 한다는 주장, 혁명적 전략과 전망 없이 선거공간에만 매몰되었다는 혁명파의 주장, 지도부의 종파적 자만심과 정치적 무능력이 Left Front라는 통일전선에의 합류를 방해했다는 통합파들과 반자본좌파의 진단과 불만이 나왔다. 결국 NPA는 다수파 지도부의 무능한 정치력(혹은 딜레마) 그리고 Left Front의 중력과 중압을 이기지 못하면서 끊임없는 이탈에 직면했다. 특히 LCR의 핵심멤버들의 상당수가 반자본좌파로 결합하여 Left Front에 합류하고 NPA를 이탈하였다.

대중정당론
NPA에 참여하는 많은 이유들 중에 주된 것들은 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투쟁하는 당이 유실되거나 유약한 동원을 대체한 이미 대리주의적 경향이다.

창립원칙에는 “제도 좌파 당들의 안과 주변에서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이들 좌파들의 기만과 배반을 깨뜨리고 다른 기초 위에서 착취받는 자의 새로운 정치적 대표체, 즉 새로운 반자본당, 체제와 끝까지 투쟁하는 당, 사회의 혁명적인 변화를 위한 당을 만들려고 한다”고 되어 있다. … 공산당이나 그보다 적게는 사회당의 당원에서 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적 투쟁에 결합하는 사람들 즉 반지구화 운동, 환경주의자들, 노동조합 활동가들, 공동체 운동가들, 반제국주의자 등으로부터 오고 있다. 이들이 주된 참여자일 때 그들의 변화는 좌파라는 역사적 맥락과는 다른 특별한 경로의 산물이다. 이것을 벗어나서는 대중정당을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종파적 편향에 빠진다.

혁명적 시기가 아닐 때 혁명적 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은 대중정당을 가정한다. 그런 당이 있을 때 통일전선을 꾸리고 전복적 운동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나아가고 그람시 스타일의 헤게모니를 위한 정책을 편다. 혁명적 당건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혁명적 시기에 들어가지 않는 한 혁명적인 대중 정당은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주변화를 피하면서 심지어 그 시기에 보다 큰 야망을 목표로 할 수 없을지라도 근본적인 모순을 성숙시키는 지원의 기능이 보증되는 당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급진적인 주변을 향한 사회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전환과 함께 오직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11)

혁명파의 주장
이 동지들(다수파 문건 서명자들)은 ... 급진좌파의 다른 세력과의 관계에서 NPA의 위치라는 상부구조의 운동에 기초한 방법론을 취하였다. ... 특히 그들이 노동운동의 완만하고 진보적인 재조직화를 예상할 때 권력장악 문제의 현실화는 오늘날 현재의 정치적 지평 아래에 있을 것이라는 Francis Sitel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 이데올로기적인 역류가 광범했던 이전의 상황의 영향 아래 많은 동지들은 그들이 접촉하고자 했던 환경에 보다 잘 맞도록 강령, 전략, 사상적 주장을 더 희석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사상은 전략이 없이 당을 만들 수 있고, 과거의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산업노동운동에 대한 NPA의 초기 약점은 이런 투쟁들이 만개하고 있는데도 선거과정에만 토론을 제한함으로써 악화되었다. Flanders 정유공장에서 부장스노가 방문해서 지지해 달라고 했지만 심지어 이 투쟁이 전국적인 정유소 투쟁을 촉발하고 있었을 때에 조차 안 갔다. Philips Dreux 투쟁 때 이 부문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공장이 폐쇄되고 산업부 장관까지 개입할 때 NPA는 개입하지 않았다.
우리가 더 이상 변혁은 전체 대중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반란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때 사회변혁의 주체와 우선적인 건설이 문제로 남는다. ...

NPA의 출범 전 20여 년 동안 노동계급 속에 자신을 세우려고 했던 LCR은 Daniel Bensaïd가 ‘사회의 환상’이라고 불렀던 수많은 부분적 운동의 단순한 합계가 사회변혁의 엔진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중요하게 채용했다. ‘개입 영역’이라는 논리는 이러한 조직적 전망에서 구체화되었다. 여성주의 운동, 환경운동, EU 운동, 실업자 운동, LGBTI(성소수자)운동, 주택운동, 학생운동, 주민운동 등 ... 종파적인 입장에서 억압에 대한 투쟁, 심지어 학생운동에 대한 개입조차 무시하는 LO의 접근과는 다르게 LCR 그리고 NPA는 어떤 위계도 없이 다양한 전선으로 분산되었다.

NPA를 계급투쟁의 장에서 무능력한 상황으로 이끈 것은 상부구조와 선거 공간을 점거하겠다는 건설정책 때문이었다. ... 이 질문은 LCR의 NPA로의 전환이 양식과 제도를 합한 다른 전략에 의한 혁명적 전략의 대체인지를 묻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제도로부터의 독립을 입에 올린다. “이것은 체제에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정부의 구성을 가능케 하고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선도할 동원에서 오는 권력의 균형이다.” ... 동원에 의해 지지되는 참다운 좌파정부라는 생각 ... ‘자본가 정부와 대중 동원’의 조합이라는 이러한 사상은 최소한 서부 유럽과 같은 나라에서는 새로운 권력이 보통선거에 기초한 선출된 의회를 포함하는 정치적 제도의 아주 바깥에서 생겨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Antoine Artous를 포함한 LCR에서 시작된 이론에 기초한 것이다. 이 사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가 이러한 이중권력의 출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청년들은 공산주의자이고 혁명가라는 명백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부장스노를 찍었다. 만약에 당건설의 초기에 우리가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토론을 했었더라면, 계급투쟁에서 그들과 공동의 경험을 쌓았다면, NPA의 출범에 끌렸던 사람들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NPA는 새로운 기반 즉 혁명적 기반 위에서 재건되어야 한다. 계급투쟁의 주된 현상에 대한 역동적인 개입의 회복에서의 진전, 국제주의, 역동적이고 공격적인 이데올로기 투쟁, 이것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상황의 전면에 나서게 하는데 필요한 조치들이다.12)

다수파의 인식
2012년 4월 대선에서 멜랑숑은 11.01%를 얻었다. 그들은 급진좌파의 영역을 장악하고 혁명적 좌파를 주변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좌파 개량주의 정치세력이 재건되었다. 멜랑숑의 인상적인 선거전은 어쨌든 NPA의 독자적인 선거전을 정당화하는 심각한 모호함과 모순이 있다. NPA와 Left Front는 사회적 이슈(임금, 고용, 공공 서비스의 방어) 혹은 민주적 요구(이주민의 권리방어를 위한 비례대표)와 같은 주제에 대하여 입장이 같다. 하지만 프랑스 핵산업과 수많은 연계를 가진 공산당 지도부와 NPA는 핵에너지와 같은 주제에서 첨예하게 나뉜다.

Left Front의 선거전의 역동성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공산당과 멜랑숑은 자본과 권력과 대결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공공은행부문을 요구하지만 민간은행과 공공은행의 경쟁에 호감을 가지면서 은행 몰수와 사회적 통제하의 국유화를 거부한다. … Left Front의 지도자들은 생태적인 계획경제를 얘기했지만 이러한 계획을 위한 전략적 자원 특히 경제와 운송, 에너지와 같은 핵심부문의 사회화를 말하지 않는다. Left Front 지도부의 개량주의적 경향은 멜랑숑의 공화주의적 입장과 함께 한다. 그들은 시민혁명이나 투표함에 의한 혁명을 지배계급의 국가제도의 존중에 종속시킨다.

Left Front의 모든 가정은 개량주의적이다. Left Front에 참여하라는 주장이 조직의 안팎에서 나오고 있지만 반자본주의자의 조직은 Left Front의 전술적인 진화에 의존할 수 없다. Left Front에 참여하는 것은 공산당 지도부와 멜랑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반자본주의자의 독립적 조직은 전술적인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적 경향의 역사적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현재 NPA에는 두 개의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당 건설을 계속하는 것과 특히 Left Front와의 관계에서 공동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13)


4-7. 반자본좌파(Anticapitalist Left : Gauche Anticapitaliste, GA)의 이탈

반자본좌파는 2012년 7월 NPA 전국회의가 끝나자 선언과 성명을 발표하고 NPA를 이탈하여 Left Front에 합류하였다. 그들의 고민을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들의 투쟁에 의미를 줄 수 있는 틀 안에서 역할을 하길 원한다. ... 생태사회주의적 기획을 위해 반자본주의 세력을 집결시켜 Left Front를 개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 긴축에 반대하는 정치적 사회적 블록의 건설이라는 긴급한 시점에서 Left Front는 중요한 받침대이다. Left Front는 사회당 정부의 정책에 대해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거듭 확인해 왔고 ... Left Front 내의 모순의 관리는 계급투쟁을 발전시킬 역동성을 계속시키고, 동원을 고무하고, 극우를 후퇴시키고, 환경, 여성주의, 국제주의, 반인종주의, 소수자LGBTI 의제를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정치적 의지에 의해 가능하다. 유럽의 위기는 급진좌파의 대응을 요구한다. ... 유럽의 위기에 반대하는 좌파블럭의 건설을 요구하고, 동시에 동원과 저항, … 유럽에 대한 대안을 요구한다. 이것은 프랑스에서는 Left Front에 들어가 그 변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넓게 보면 반자본 대안세력의 동맹은 전 유럽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14)

4-8. 2013년 2차 총회와 4개 정치방침안

2013년 2월 초 NPA 총회에는 4개의 정치방침안platform이 제출되었다. 즉, 사회자유주의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치적 대안이 없이는 사회적 승리를 할 수 없다는 반자본좌파가 옹호하는 잘못된 주장 때문에 다수파 지도부가 투쟁이 아니라 선거정치 동맹에 집중하면서 현장, 청년,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에 집중한다는 창립원칙을 배반했다는 Y안(지역토론에서 31.9%), Left Front를 투쟁의 장애물로 규정하면서 NPA를 혁명적으로 재건할 것을 요구하는 Z안(9%), 당이 LCR로부터 유래된 영구 분파와 직업적 (혁명가들의-인용자) 지도부가 지배하는 정치문화를 바꾸고 당을 다양한 투쟁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구상을 함께 작업하는 것을 허용하는 포괄적인 공간으로 만들자는 W안(8.2%), “현 시기의 긴급한 주제는 우파와 극우파와 싸우는 ‘정부에 대한 좌파반대’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향으로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노동운동의 모든 조직들에게 위기를 벗어나는 데에 필요한 정치적 대안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계급투쟁을 통하여 강요된 세력관계를 넘어 의회적 협정만으로는 생겨날 수 없는 ‘반긴축 정부’를 호소”한다면서, Left Front와 동맹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반긴축 정부’는 반자본주의적인 조세제도, 은행 몰수, 대기업집단의 사회화, 모든 해고의 금지, 부채상환을 거부하기 위한 시민부채조사위원회, 프랑스의 핵에너지 의존을 종식시키기 위한 긴급계획을 포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집행부의 X안(51%)이 제출되었다. X안은 최종적으로 55.9%를 얻어 채택되었고 공동성명은 발표할 수 없었다.15)

총회 결과에 대해 Y안은 “반자본좌파GA가 지지하는 Left Front와의 항구적인 사회적 정치적 전선의 정책을 다시 채택했다”고 평가했고, Z안도 “낡은 지도부가 자본주의의 제도의 틀 안에서 개량주의자와 반신자유주의자와 함께 좌파정부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반자본좌파는 축사에서 “우리는 Left Front 내에서 장애와 차이를 아직까지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안에 있는 반자본주의자와 생태사회주의자들의 재편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이유이다. 우리는 계급투쟁, 반자본주의 그리고 그 해법은 제도의 수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우리들이 공유하여 온 원칙이 Left Front 내에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NPA의 노선이 그리스의 Antarsya와 비교되는 시대의 요구와 동떨어진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정치적 고립의 선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16)

NPA가 Left Front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쟁점이 되어서는 안된다. Left Front는 전술국면에서의 선거연합이고 NPA는 변혁세력의 전략적 당이기 때문에 두 기획을 동급으로 취급할 수 없고 따라서 전략적 독자성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맞다. 또한 선거연합 내에서 당연히 독자성은 존중되지만 개량주의 세력이 다수인 Left Front 내에서 헤게모니를 다퉈야 할지, 아니면 밖에서 Left Front에 대당하여 다퉈야 할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NPA가 선거연합의 문제를 잘 풀지 못함으로써 조직원의 대량 이탈과 시련에 봉착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혁세력들이 변혁에 대한 전망과 전략에 대하여 아직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NPA의 위기의 근원에는 이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5. 맺으며

살펴본 바와 같이 Synaspismos와 Left Bloc, NPA는 관료화된 공산당의 바깥에서 변혁세력들이 정파와 종파의 한계를 넘어 통합을 추진하고, 새로운 가치와 의제인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사회운동과 대중투쟁에 결합하면서 ‘넓은 당’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데올로기 우선적 응집이 아닌 가치를 중심으로 하면서 지배세력과의 현실적 대결을 추구하는 변혁적이면서 대중적인 대안세력이 되고자하였다. 그리고 모두 분파활동의 자유와 지도부의 비례선출제 등 당내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가 강요하는 고통은 보수 양당 또는 우파와 사민당의 양당체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는 경제위기를 불러온 사회자유주의 세력인 사민당-PASOK의 극적인 몰락 속에 강경하고 완고한 KKE를 넘어 보다 유연한 Syriza가 대중적 불만과 지지를 수렴하였다. 포르투갈 역시 경제위기를 불러온 사회자유주의 세력인 사회당이 우파에게 정권을 내주었지만 여전히 양대 정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대중적 동원력이 있는 사회개량주의적인 공산당의 뒤를 이어 Syriza보다도 제도적 성향이 강한 Left Bloc이 소수정당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프랑스는 사회자유주의 세력인 사회당이 우파와 권력을 교대하는 양당체제가 고착화된 가운데, 트로츠키주의 정파당이었지만 여성과 생태 의제는 물론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에 적극 결합해왔던 LCR이 ‘변혁성과 대중성을 담보할 변혁적 넓은 당’이란 기획으로 NPA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변혁적 대중정당으로서 활동의 전형을 만들기 전에 공산당을 포함한 사회개량주의세력이 다수인 선거연합인 Left Front와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함으로써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처럼 좌파통합운동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역사적 좌절과 신자유주의세계화 축적체제가 강요되는 가운데 주변화되고 고립되고 분산되었던 변혁좌파세력이 정파운동과 종파운동의 한계를 넘어 통합을 추진하고 나아가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 레닌주의적 전략과 당 모델의 한계나 굳어진 해석을 넘어 새로운 의제와 주체와 운동지형에 부응하고자 하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통합이라는 급진/변혁좌파세력의 재건축 기획이 어떠한 변혁적 전망과 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변혁세력이 변혁성과 대중성을 담보하는 방도는 무엇인지, Syriza와 Left Bloc이 제도내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NPA의 위기의 진단과 해법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다. 그럼에도 변혁세력이 정파와 종파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통합을 추진하고 새로운 의제와 과제에 대응하는 시도인 좌파통합운동은 소중한 도전이고 아직 진행 중인 실험이다. 우리는 이 운동을 주시하고 치열하게 분석을 계속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 주
1) Alain Mathieu, Patrick Tamerlan, “Preparing for the presidential elections - a minority report” (5 June 2007)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277.
2) François Duval, “On the French Left: what’s going on?” (23 February 2007)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221.
3) Alain Mathieu, Patrick Tamerlan, 앞의 글.
4) Murray Smith, “France: The Rise of the Left Front A New Force on the Left, in Socialist Project” (E-Bulletin No. 685, August 22, 2012) also at http://www.socialistproject.ca/bullet/685.php.
5) Alain Krivine, Daniel Bensaïd, François Sabado, Pierre Rousset, “From the LCR to the NPA” (3 January 2009)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585.
6) Guillaume Liégard, “The New Anti-Capitalist Party, a promising birth“ (2 April 2009) at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639.
7) Alex Callinicos, “Where is the radical left going?” (24 November 2008) at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560.
8) François Sabado, “The NPA, a new experience of building an anti-capitalist party -A reply to Alex Calinicos” (24 November 2008)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559.
9) ‘숙주론’이나 ‘공동전선’을 운운하며 개량주의나 기회주의 세력은 물론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동거도 불사하는 ‘다함께’의 자기기만도 여기에서 나왔다.
10) “Ilham Moussaid : statement by the National Executive Committee of the NPA”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1823.
11) Samuel Johsua, “The crisis of the NPA and the words to say” (June 7, 2011) at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21850. 이하 http://www.europe-solidaire.org/에서 인용한 불어 원문은 구글 번역을 이용했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
12) Daniela Cobet, “AT THREE YEARS OF THE FOUNDING CONGRESS-Confronting Project NPA political and strategic lessons of the class struggle” (January 6, 2012) at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23943.
13) François Sabado, “Front de gauche: and now?” (10 May 2012) at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article2603.
14) GA (France), “Therefore we will join the Left Front” (July 9, 2012) at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25800.
15) 총회를 참관한 Callinicos는 SWP는 40년 이상 정치적 불일치는 총회 전 오직 내부토론의 시기에만 공개적인 분파를 허용해 왔다면서, LCR과 제4인터가 고질적인 영구분파를 허용하는 제도를 NPA 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NPA의 위기를 가져온 이탈은 분파가 허용되지 않아도 이견이 토론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고질화된 분파를 위기의 원인 중의 하나로 지목하는 것은 SWP에 고질화된 반민주적 발상이라고 하겠다. 당이라는 자주적 실천체에서 의견개진과 토론의 자유 그리고 같은 의견을 갖은 사람들이 의견그룹이나 분파를 만드는 것은 억압할 대상도 아니고 억압을 해도 억압되지 않는다. 또한 의견그룹과 분파의 허용은 서로 침투할 수 있는 교육적 기능이 있다. 따라서 특정시기에만 의견개진을 허용하는 SWP의 규약이 반민주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Alex Callinicos, “France: anti-capitalist politics in crisis” (27 March 12) at http://www.isj.org.uk/?id=794. 최근 SWP가 조직 내의 성폭력 사건을 관료주의적으로 은폐한 것에 대하여 지도부 삼인방(Delta 3)의 폐쇄성과 비민주적 독선이 주된 이유로 지적된 바 있다.
16) Dick Nichols, “France: New Anti-Capitalist Party congress wrestles with challenge of the Left Front” (February 15, 2013) at http://links.org.au/node/3227.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맑스꼬뮤날레(5/10~5/12 서강대)에서 발표될 예정이며 필자의 양해를 얻어 미리 게재한다. 발표는 5/12(일) 10:00 서강대 다산관 D502호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