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의 러시아 번역판 서문 (1)

[편집자 주: 본지는 지난 호에 신양식 회원의 "레닌의 「ꡔ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ꡕ 러시아 번역판에 부치는 서문」을 읽고"를 게재했다. 이 글은 물론, 필자인 신양식 회원이 "우리에게는 이들 편지―[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 편집자]―가 없...지만 그것 없이 레닌의 글만으로도 충분히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레닌의 '서문' 없이도 충분히 그 논의의 내용과 중요성, 그리고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07년 4월에 집필된 그 '서문' 자체를 독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일부의 의견이 있었고, 이에 2번에 나누어 그것을 번역․게재한다. 번역은, 영어판 ꡔ(레닌)전집(Collected Works)ꡕ(제4판, 1972), 제12권, pp. 359-78(본문) 및 pp. 540-46(ꡔ전집ꡕ 편집자 주)에 의거하였고, 일본어 판 ꡔ전집ꡕ의 번역을 부분적으로 참고하였다.]


여기에 러시아의 공중(公衆)에게 소개되는, 맑스, 엥겔스, 디츠겐,*1) 베커**2) 등 지난 세기 국제적 노동자계급운동 지도자들의 서간집은 우리의 선진적 맑스주의 문헌을 긴요하게 보완해준다.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에서 이들 편지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자세히 논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출판되는 편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터내셔날의 역사(Jaechh, ꡔ인터내셔날ꡕ, 러시아어 번역은 Znaniye 판 참조), 그리고 또 독일과 미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의 역사(Franz Mehring, ꡔ독일 사회민주당의 역사ꡕ 및 Morris Hillquit, ꡔ합중국 사회주의의 역사ꡕ 참조) 등에 관한 주요 저작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는 점만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이 서간집의 내용들을 개괄하거나, 그 서간집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대해서 평가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메링(Mehring)이 그의 논문 "Der Sorgesche Briefwechsel"([조르게 왕복서한집], Neue Zeit, 25. Jahrg., Nr. 1 und 2)***3)에서 아주 훌륭히 해냈는데, 이는 필시 출판사에 의해 이 번역판의 부록으로 수록되거나, 혹은 별도의 러시아판으로 간행될 것이다.

현재의 혁명적 시기에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특히 관심이 있는 것은, 거의 30년(1867-95) 동안의 맑스와 엥겔스의 활동의 자세한 측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교훈들이다. 조르게에게 보낸 맑스와 엥겔스의 서한들을 소개하려는, 우리의 사회민주주의적****4) 문헌 속의 최초의 시도들이 러시아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전술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문제들과 역시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플레하노프의 Sovremennaya Zhin 및 멘쉐비키의 Otkliki*****5))은, 그리하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독자들로 하여금 특별히 주목하도록 하려는 것은, 간행되는 서한집 가운데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정당의 당면 임무라는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구절들이다.

서간 속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독일의 노동자계급운동과 관련한 절박한 문제들을 가장 빈번히 다루고 있다. 그들은 당시 영국에 살면서 미국의 동무와 교신하던 독일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맑스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들에서는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운동, 특히 빠리 꼬뮌에 대해서 훨씬 자주, 그리고 훨씬 자세히 자신의 견해를 표명했다.*6)

맑스와 엥겔스가 영국과 미국, 그리고 독일의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해서 언급한 것들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한편에서 독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영국과 미국은 자본주의의 상이한 발전단계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들 국가의 전반적인 정치생활에 대한,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상이한 지배형태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비교는 훨씬 더 중요해진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우리는 여기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의 실례(實例), 즉 상이한 정치적․경제적 조건들이라는 특정한 지형에 문제를 적용하면서 그 문제의 다양한 사항들, 다양한 측면들을 전면에 내세워 강조하는 능력을 보게 된다. 노동자 정당의 실천적 정책과 전술이라는 관점에서는,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제 임무를 ꡔ공산당 선언ꡕ의 창시자들이 상이한 국가들에서의 국민적 노동자계급운동의 상이한 단계에 따라서 규정했던 방식의 실례를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 된다.

영국과 미국의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맑스와 엥겔스가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운동으로부터의 그 고립이다.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연맹(Social-Democratic Federation)에 대한, 그리고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수많은 모든 언급의 요지는, 그들이 맑스주의를 교조(dogma), 즉 "경직된(starre) 정설"로 환원시켜버렸다는, 그들이 그것을 "행동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신조"**7)로 간주하고 있다는, 그들이 자신들을 이론적으로는 무력하지만 그들과 나란히 행군하고 있는 살아 있는 강력한 대중적 노동자계급운동에 적응시킬 능력이 없다는 비난이다. 엥겔스는 1887년 1월 27일의 편지에서, "1864년부터 1874년까지 우리가 우리의 강령을 공개적으로 채택하는 사람들하고만 함께 일하겠다고 고집했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 있겠는가?"***8) 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 이전의 편지(1886. 12. 28.)에서 그는, 미국의 노동자계급에 미치는 헨리 조지(Henry George)****9)의 사상의 영향과 관련, 이렇게 쓰고 있다.


"진실한 노동자 정당에 대한 내년 11월의 1백만 혹은 2백만 노동자들의 표는 현재로서는 이론적으로 완벽한 강령에 대한 10만 표보다 한없이 가치가 있다."


이는 대단히 흥미 있는 구절이다. 우리나라에는 '노동자 대회'라는 사상, 혹은 라린(Larin)*****10)의 "폭넓은 노동자 정당" 식의 무언가를 옹호하기 위해서 서둘러 그것들을 이용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있다. 왜 차라리 '좌익 블록'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닌지, 이들 성급한, 엥겔스 '이용자들'에게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인용되고 있는 편지들은, 미국의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헨리 조지를 찍던 시대와 관련한 것이다. 비쉬네베츠키(Wischnewetzky) 부인―러시아인과 결혼한 미국 여성으로, 엥겔스의 저작들의 번역자―은, 엥겔스의 답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헨리 조지를 철저히 비판해달라고 엥겔스에게 요청했다. [이에 대해서: 역자] 엥겔스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완전히 순수한 강령 위에서가 아닐지라도, 노동자 정당이 조직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회신했다(1886. 12. 28.). 나중에, 노동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게 될 터이며, "그들 자신의 오류로부터 배울 터이다." 그러나 "노동자 정당의 국민적 확립―어떠한 강령 위에서든―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커다란 오류라고 생각한다...."*11)

엥겔스는 물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헨리 조지 사상의 우매성과 반동적 성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고, 또 자주 그에 대해서 언급했다. 조르게의 서간집은 1881년 6월 20일자의 맑스의 극히 흥미 있는 편지를 담고 있는데, 거기에서 맑스는 헨리 조지를 급진적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그로 성격규정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 남자는 전적으로 뒤떨어져 있다(total arrière)"고 맑스는 쓰고 있다.**12) 그렇지만 엥겔스는, 대중들에게 "그들 자신의 실수의 결과들"을 말해줄 사람들이 있는 한, 선거에서 이러한 반동적 사회주의자와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엥겔스, 1886년 11월 29일자 편지에서).***13)

당시 존재하던 미국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ur)에 관해서 엥겔스는 같은 편지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기사단의 가장 취약한 (문자 그대로! 가장 썩은, faulste) 면은 그들의 정치적 중립성이었다.... 새롭게 운동에 들어오는 모든 나라에게 중요한, 커다란 첫 걸음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독자적인 정당으로 조직하는 것이며, 그것이 명확한 노동자 정당인 한, 어떻게 해서든 조직해야 한다."****14)

이것으로부터는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무당파적 노동자대회 등으로의 도약을 옹호하는 그 무엇 하나도 전혀 연역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교조', '정설', '종파주의' 등으로 환원한다는 엥겔스의 비난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급진적인 '사회반동파'와의 공동의 선거운동을 때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여기에서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층 더 흥미 있는 것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의 이러한 유사점들(우리는 논적에 답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영국과 미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의 기본적 특징들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는 것이다. 이들 특징이란,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전국적인, 민주적 임무가 없다는 것,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정치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것, 한줌밖에 안 되는 사회주의자 그룹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종파주의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 선거 때에 노동자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극히 작은 성공조차 거두고 있지 못한 것, 등등이다. 누구든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들을 망각하고 '미국과 러시아의 유사점들'로부터 광범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려고 나선다면, 이는 극단적인 피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의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직을 엥겔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것은, 가장 강고하게 확립된 민주주의적 제도들이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이것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순수하게 사회주의적인 임무들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비록 빈약한 강령을 가졌더라도,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가 당시까지 노동자들의 정치적 독립의 어떤 기미조차 없었던 나라들이나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이 대부분 부르주아지의 뒷꽁무니에 질질 끌려 다녔고, 당시도 그러하던 나라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정당을 결성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정당을 결성했고, 부르주아 정치가들에 대한 투표라는 전통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혀 없으며, 또한 당면한 임무가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그러한 나라 혹은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려는 것은 맑스의 역사적 방법을 우롱하는 것일 터이다.

영국 및 미국의 운동에 관한 엥겔스의 견해를 독일의 운동에 관한 그의 견해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사상이 독자들에게 보다 더 명료해질 것이다.

극히 흥미로운 그러한[독일의 운동에 관한: 역자] 견해들은 이 서간집에도 많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들 견해 전체를 붉은 실처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 대단히 다른 것― 즉, 노동자 정당의 '우익'에 대한 경고, 사회민주당 내의 기회주의에 대한 가차없는(때로는―1877-79년의 맑스의 경우처럼―맹렬한) 전쟁이다.

우선 편지를 인용함으로써 이를 확증하고, 그리고 나서 이러한 사실을 평가하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회히베르크(Höchberg)*****15)와 그 일파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지적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논문 "조르게 왕복서한집" 속에서 프란츠 메링은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맑스의 공격―그 후의 엥겔스의 공격은 물론―의 어조를 낮추려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다소 지나치게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회히베르크와 그 일파에 관해서 메링은 라살레(Lassalle)와 라쌀레파에 대한 맑스의 판단은 잘못이라는 그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반복하는 바이지만, 여기에서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맑스의 공격이 옳은가, 침소봉대되어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내부의 일정한 조류들에 대한 맑스의 원칙적인 평가다.

맑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라쌀레파 및 뒤링(Dühring)과의 타협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면서(1877년 10월 19일자 편지), 또한 "사회주의에 '보다 높고, 이상주의적인*16)' 방향을 부여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그 유물론적 기초(누구든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진지한 객관적인 연구를 요구하는 기초)를, 정의와 자유, 평등, 우애라는 여신을 가진 현대의 신화로 대체하고자 하는, 설익은 학생이나 지나치게 현명한 박사들 [독일에서 '박사'는 우리<=러시아: 역자>의 '박사후보' 혹은 '1급학사'에 해당하는 학위다] 일당과의" 타협도 비난하고 있다. "잡지 ꡔ쭈쿤프트ꡕ를 발행하고 있는 회히베르크 박사는 이러한 경향의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팔아서' ―아마 '가장 고상한' 의도에서였겠지만, 나는 '의도'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입당하였다. ꡔ쭈쿤프트ꡕ에서의 그의 강령보다 더 비참한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오만함'으로 나타난 적이 거의 없다."(편지, 제70호).**17)

거의 2년 후에 쓰여진 다른 편지에서(1879년 9월 19일) 맑스는, 엥겔스와 그가 J. 모스트(Most)***18)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풍문을 반박하면서, 조르게에게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ꡔ쭈쿤프트ꡕ는 회히베르크와 쉬람(Schramm),****19) 그리고 에두아르트 베른쉬타인(Eduard Bernstein)*****20)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출판물과 협력하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바로 그 회히베르크가 참가하고 그의 재정적 지원으로 새로운 당 기관지를 창간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맑스와 엥겔스는 처음에는 이들 '박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강단사회주의자들*21)로 이루어지는 어중이떠중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지명하는 히르쉬(Hirsch)**22)를 수석편집자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는데, 나중에는 베벨(Bebel)***23)이나 리프크네히트(Liebknecht),****24) 기타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에게 직접 회람편지를 보내, 만일 회히베르크나 쉬람, 베른쉬타인의 경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당과 이론의 그러한 비속화"(Verluderung[타락]―독일어로는 훨씬 더 강한 어조의 단어)와 공개적으로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때는 메링이 그의 ꡔ독일 사회민주당의 역사ꡕ에서 "혼란의 해"("Ein Jahr der Verwirrung")라고 묘사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한 시기였다. "사회주의자 단속법" 이후, 당은 곧바로 올바른 노선을 찾지 못하고, 처음에는 모스트의 무정부주의와 회히베르크 일파의 기회주의 사이에서 동요했다. 이들[회히베르크 일파: 역자]에 관해서 맑스는 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알맹이가 없고, 실천적으로는 쓸모가 없는 이들은, 사회주의(그것을 그들은 대학의 처방전에 따라서 조제했지만)와 특히 사회민주당의 이빨을 뽑기를 원하고, 노동자들을 교화시키기를, 자신들의 혼란스러운 서당개식 풍월(half-knowledge)로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교양의 요소들"을 불어넣기를 원하며, 무엇보다도 당을 소부르주아지의 눈에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들기를 원한다. 그들은 참으로 가엾은 반혁명적 가납사니들이다."*****25)

맑스의 '격렬한' 공격의 결과, 기회주의자들은 퇴각하여 ― 모습을 감추었다. 1879년 11월 19일자 편지에서는 맑스는 편집위원회에서 회히베르크가 제외되었으며, 베벨, 리프크네히트, 브라케(Bracke)*26) 등, 당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 모두가 그의 사상을 거부했다고 선언하고 있다.**27) 사회민주당의 기관지 ꡔ조치알 데모크라트ꡕ(Sozial-Demokrat, 사회민주주의자)는, 당시엔 당의 혁명적인 부분에 속해 있던 폴마르(Vollmar)***28)의 편집으로 간행되기 시작했다. 1년 후(1880년 11월 5일) 맑스는, 자신과 엥겔스는 이 ꡔ조치알 데모크라트ꡕ의 "비참한"(miserable) 행동방식과 끊임없이 투쟁해 왔으며, 자주 자신들의 의견을 날카롭게 표현해왔다(wobei's oft scharf hergeht)고 말하고 있다. 리프크네히트는 1880년에 맑스를 방문하여, 모든 면에서 '개선'을 하겠다고 약속했다.****29)

평화가 회복되고, 싸움은 표면화되지 않았다. 회히베르크는 퇴각했고, 베른쉬타인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 적어도 1895년에 엥겔스가 죽기까지는.

1882년 6월 20일에 엥겔스는 조르게에게 편지를 보내, 이 투쟁을 과거지사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독일에서는 일들이 훌륭히 진척되고 있다. 사실 당 내의 문사(文士)들이 반동적인 ... 전환을 꾀했지만, 그러한 시도들은 비참하게 좌절되었다. 도처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학대는 노동자들을 3년 전보다 훨씬 더 혁명적으로 만들었다. ... 이들(당내의 문사들)은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온순과 유화(宥和), 아부와 겸양으로써 '사회주의자 단속법'의 폐지를 구걸해받기를 원했는데, 이는 그 법률이 그들의 문필 수입(收入)을 격감시켰기 때문이다. 그 법률이 폐지되자 마자 ... 분열은 명백히 공공연한 것으로 되고, 피렉 일파(Vierecks)*****30)와 회히베르크 일파는 독자적인 우익을 형성할 것인데, 그들이 최종적으로 엉덩방아를 찧을 때까지는 때때로 그들과 교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 단속법'이 공표된 직후에, 즉 회히베르크와 쉬람이, 당의 과거 활동을 가장 파렴치하게 평가하는 ꡔ연감ꡕ을 출판하면서, 보다 더 교양 있는([이 "교양 있는"을: 역자] 'gebildetes' 대신에 'jebildetes'라고 쓰고 있는데, 이로서 엥겔스는 독일 문필가들의 베를린식 악쎈트를 풍자하고 있다), 세련된, 그리고 우아한, 당의 행동을 요구했을 때에 이미 그것을 예고한 바 있다."*31)

베른쉬타인주의에 대한 1882년의 이 예언은 1898년과 그 후 수년 동안에 인상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리고 특히 맑스의 사후(死後) 엥겔스는, 과장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지만, 독일의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는 것들을 바로잡는 데에 지칠 줄 모르고 노력했다.

1884년 말. 증기선보조금("Dampfersubvention"―메링의 ꡔ독일 사회민주당의 역사ꡕ 참조)에 찬성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이 비난을 받았다. 엥겔스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서신왕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르게에게 알렸다(1884년 12월 31일자 편지).**32)

1885년. '증기선 보조금' 문제 전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엥겔스는 "거의 분열에까지 이르렀다"고 쓰고 있다(6월 3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의 "속물근성"은 "엄청났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적 의원단은 불가피하다"고 엥겔스는 말했다."***33)

1887년. 피렉(회히베르크 타입의 사회민주주의자)과 같은 의원을 뽑음으로써 당이 망신을 당했다는 편지를 보내온 조르게에게 엥겔스는 답장을 보냈다. 엥겔스는, 어쩔 수 없으며, 노동자당은 의회를 위한 좋은 의원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변명했다. "우익의 신사들은, 오직 '사회주의자 단속법' 때문에 자신들이 묵인되고 있으며, 당이 다시 행동의 자유를 찾는 날에는 바로 그날 자신들이 당 밖으로 축출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당이 그 의회의 영웅들보다, 그 반대편보다 나아야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스럽다(1887년 3월 3일). 엥겔스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 리프크네히트는 조정주의자이고, 차이를 언제나 말로써 얼버무리고 있다고. 그러나 사태가 분열에까지 이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우리 편이 될 것이다.****34)

1889년. 두 개의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자 대회가 빠리에서 열렸다. (프랑스의 가능주의자들*****35)을 위시한) 기회주의자들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분열했다. (당시 68세였던) 엥겔스는 젊은이의 열정으로 투쟁에 나섰다. 많은 편지들(1889년 1월 12일에서 7월 20일까지)이 기회주의자들과의 그 투쟁에 관한 것이다. 그들[기회주의자들: 역자]뿐 아니라 ―리프크네히트, 베벨, 등등― 독일인들도 그들의 화해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질책을 받고 있다.

가능주의자들은 프랑스 정부에 의해서 매수되었다고 엥겔스는 1889년 1월 12일자의 편지에 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연맹'(S.D.F.)의 회원들을, 가능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36) "이 빌어먹을 대회 때문에 여기저기 편지를 쓰고, 뛰어다니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시간이 없다"(1889년 3월 11일). 가능주의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 쪽 사람들은 밤을 자고 있다며, 엥겔스는 분개하고 있다. 이제는 아우어(Auer)와 쉬펠(Schippel)**37)까지 우리한테 가능주의자들의 대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침내" 리프크네히트의 눈을 열었다. 엥겔스는, 베른쉬타인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팜플렛들(이 팜플렛들은 베른쉬타인이 서명하고 있지만, 엥겔스는 이것들을 "우리의 팜플렛들"이라고 불렀다)을 썼다.***38)

"S.D.F.를 제외하면, 가능주의자들은 유럽 전체에서 단 하나의 사회주의자 조직도 가지고 있지 않다"(1889년 6월 8일). "그들은 그리하여 비사회주의적 노동조합들에 의지하고 있다"(우리나라에서, 폭넓은 노동자당, 노동자 대회 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를 참고하라!). "미국으로부터는 '노동기사단'에서 단 한 명이 올 것이다". 적(敵)은 바꾸닌주의자들과의 투쟁 때와 같은 무리들이었다.****39) "차이는 오직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가능주의자들의 깃발로 바뀌었을 뿐이며, 조그마한 이권에, 특히 지도자들을 위한 보수가 좋은 지위(시의희, 직업소개소, 등등)의 대가로 원칙을 부르주아지에게 팔아넘기고 있다." 브루스(Brousse, 가능주의자들의 지도자)*****40)와 하인드먼(Hyndman, 가능주의자들과 연합한 S.D.F.[(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의 지도자)*41)은 "권위주의적인 맑스주의"를 공격하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날의 핵심"을 형성하기를 원했다.

"독일인이 얼마나 순진한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무엇이 정말 문제로 되어 있는지를 베벨에게 설명하는 데에도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다"(1889년 6월 8일).**42) 그리고 2개의 대회가 열리고,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수가 (조합주의자, S.D.F., 일부의 오스트리아인들, 등과 연합한) 가능주의자들을 능가했을 때, 엥겔스는 환호했다(1889년 7월 17일).***43) 리프크네히트 등의 화해주의적 계획과 제안이 실패로 끝난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1889년 7월 20일). "온갖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장 아픈 곳을 걷어차인 것은 자업자득이다. 이는 그들에게 당분간은 양약(良藥)이 될 것이다."****44)

... 메링이, 맑스와 엥겔스는 "좋은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쓰고 있는 것(ꡔ조르게 왕복서한집ꡕ)은 옳다. "그들은 타격을 가할 때에도 오래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받는 타격에 대해서도 훌쩍이며 울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의 바늘로 나의 두껍고 잘 무두질된, 해묵은 가죽[피부: 역자]을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45)라고, 엥겔스는 쓴 적이 있다.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획득한 이러한 무감각을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고, 메링은 그들에 관해서 쓰고 있다.

1893년. 페이비언주의자들*46)에 대한 질책. 이는 베른쉬타인주의자들을 심판할 때에 저절로 떠오른다(왜냐하면, 베른쉬타인이 영국에서 페이비언주의자들의 경험을 이용하여 그의 기회주의를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여기 런던의 페이비언주의자들은,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을 간파할 만큼의 이해력은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거대한 임무를 거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어 친절하게도 스스로 선두에 서려고 하고 있는 출세주의자 일당이다. 혁명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근본원리다. 그들은 뛰어난(par excellence) '교양인'이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지방자치 사회주의다. 아무튼 당장은, 국민이 아니라 지역공동체가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의 이러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극단적인, 그러나 불가피한 귀결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유주의자들을 적으로 삼아 결정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그들을 사회주의적인 귀결 쪽으로 밀고 가고, 그리하여 그들과 내통하여 자유주의에 사회주의를 침투시킨다고 하는 그들의 전술, ― 자유주의자들에 사회주의적 후보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 후보들을 자유주의자들에게 강매하고, 억지로 혹은 속임수로 그들에게 강요하는 그들의 전술이 나온다. 그들은 물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속고 있고, 스스로 기만당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단히 부지런하게 그들은, 온갖 잡동사니 속에서, 몇몇 훌륭한 선전문건도 만들어 냈고, 이는 사실상 영국인들이 이 방면에서 생산한 것 중에 최상의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을 잠재운다는 그들의 특수한 임무에 이르자 마자, 그것은 모두 타락해 버린다. 그리고 맑스와 우리 모두에 대한 광적(狂的)인 증오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 계급투쟁 때문에."

"이 사람들은 물론 많은 부르주아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돈을 가지고 있다...."**47)

(역자 주: 이 "서문"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사회민주당 내 지식인들의 기회주의를 고전은 어떻게 평가했는가"는 다음호에 싣습니다.) (번역: 편집부)



자료

ꡔ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ꡕ의

러시아 번역판 서문 (1)



V. I. 레닌




*) [역자 주] Joseph Dietzgen (1828-1888) ― 피혁노동자로서 유물론 철학자. 공산주의자동맹원. ꡔ어떤 육체노동자가 본 두뇌노동의 본질ꡕ 등의 저서가 있고, 맑스주의 철학에 기여한 바가 많았지만, 그 견해에는 또한 불명확한 점도 많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레닌의 ꡔ유물론과 경험비판론ꡕ을 참조.


**) [역자 주] Johannes Becker (1809-1886) ― 독일의 공산주의적 혁명가, 제1인터내셔날의 지도자. 바덴 폭동, 이탈리아 혁명 등에 참가. 맑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날에서 활동, 스위스에 독일인 지부를 조직하고, 특히 무정부주의자와의 투쟁이 격화되었을 때에 대륙에서 맑스의 견해의 주요한 옹호자였다. 제네바에서 발행된 제1인터내셔날의 기관지 ꡔ포르보테ꡕ(Vorbote, 선구자, 1866-71)의 발행인 겸 편집자.


***) [역자 주] Friedrich Albert Sorge (1828-1906) ― 독일의 맑스주의자. 1849년의 바덴 폭동에 참가한 후 런던으로 망명, 1852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주. 1868년 뉴욕에서 '독일노동자총동맹'을 조직하여 제1인터내셔날에 가입했고, 제1인터내셔날의 본부가 뉴욕으로 이전한 후에는 서기장에 취임. 1972년, 헤이그에서의 제1인터내셔날 최후의 대회에 출석. 맑스와 엥겔스의 친구이고, 그 서간집을 편집했다. 주로 ꡔ노이에 짜이트ꡕ(Neue Zeit, 신시대)에 많은 논문을 썼고, 국제노동운동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 [역자 주]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물론 예컨대 제2차 대전 이후의 현대 사회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현대 사회민주주의 전의' '정통의' 사회주의다.


*****) Sovremennaya Zhin(ꡔ현대생활ꡕ) ― 1906년 4월부터 1907년 3월까지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멘쉐비키의 잡지. Otkliki(ꡔ논평ꡕ) ― 1906년과 1907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간행된 멘쉐비키의 평론집으로서, 3집이 발행되었다.


*) N. Lenin이 편집하고 서문을 쓴 러시아 번역판, ꡔ쿠겔만 박사에게 보낸 맑스의 편지들ꡕ(Letters of Karl Marx to Dr. Kugelmann), St. Petersburg, 1907 참조.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ꡔ서간문 선집ꡕ), 모스크바, 1955, p. 469.


***)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p. 476-77.


****) [역자 주] Henry George (1839-1897) ―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평론가. 주요 저서는 ꡔ진보와 빈곤ꡕ(1879), ꡔ아일랜드의 토지문제ꡕ(1881), ꡔ사회문제ꡕ(1883) 등. 노동과 자본 간의 이해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 인민대중의 빈곤의 주요 원인은 지대에 있다며, 모든 사회적 해악을 제거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서 지대의 국유화, 즉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상업의 자유를 열렬히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는 레프 똘스또이가 그와 같은 견해를 품고 있었고, 최근 한국에서 이른바 "토지정의 실현"을 주장하는 학자․활동가들 역시 그 아류다.


*****) [역자 주] Larin, U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파의 오랜 활동가이자 경제학자. 처음엔 멘쉐비키, 반동기에는 당해체주의자로 '8월 블록'에 참가. 제1차 대전 중에는 국제주의자로서 1917년에 볼쉐비키에 입당. 10월 혁명 후에는 당 및 경제기관의 요직에서 근무. 일련의 경제학적 저작이 있다.


*1)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p. 474-75.


**)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 415.


***)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 471.


****) 같은 책, p. 470. 노동기사단(The Noble Order at the Knights of Labour) ― 1869년에 재봉사 스티븐스(Uriah Smith Stephens)에 의해서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미국 노동자계급의 조직. 1881년까지는 국적에 상관없이 다양한 범주의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의 직종별 조합을 결합시킨 비밀조직이었다. 1874년에는 그 수가 총원의 4분의 1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비노동자들의 가입이 허용되었다(변호사, 은행원,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알콜성 음료를 생산 혹은 판매하는 것을 생계로 삼고 있는 사람들, 직업 도박꾼 및 주식시장의 투기꾼들의 가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1884년의 조직원은 7만 명이었는데, 1886년에는 이미 70만 명으로 증가했다. 기사단의 주요 목적은 노동자들의 교육과,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기사단의 지도부는 조직원들에게 정치투쟁을 하지 않도록 강제했다. 그들은 노동자 정당의 결성에 반대했고, 공장주들에 대항한 매일 매일의 경제투쟁에 반대했으며, 고용주들과의 협조 및 중재나 평화적인 합의에 의한 분쟁의 타결을 선호했다. 노동자계급운동이 힘을 획득하여 많은 파업이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던 1880년대에조차 노동기사단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자세를 견지했다. 그들은 협력을 자본주의의 만악(萬惡)과 싸우는 한 수단으로 간주했다.

  1886년에 노동기사단의 지도자들은 8시간 노동일을 위한 노동자들의 전국적 총파업에 반대했고, 기사단의 많은 일반 조직원들이 파업에 참가했지만, 참가를 금지함으로써 지도부는 마침내 그 파업을 깨는 데에 성공했다. 다수의 조직원들과 기회주의적 지도자들 간의 모순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1886년 이후 노동기사단은 대중 속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1890년대 말에는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지도자들의 배신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노동기사단은 특히 그 존립 초기에는 미국의 노동자계급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역자 주] Karl Höchberg (1833-85) ― 대부르주아 출신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1877년에 잡지 ꡔ쭈쿤프트ꡕ(Zukunft, 미래)를 발행, 계급투쟁이라는 원칙에 반대하면서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경향을 얼버무렸다. 1870년대 후반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당에 자금을 공급하면서 운동을 개량주의 쪽으로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사회주의자단속법의 시기에 ꡔ사회과학․사회정책연감ꡕ을 발행, 당의 정책을 '우측으로부터' 비판했다.


*6) [역자 주] 여기서 '이상주의적인'이라고 번역한 말의 영문판 ꡔ전집ꡕ(Collected Works, Vo. 12, p. 366)에서의 표현은 'idealistic'으로서, 일본어 ꡔ전집ꡕ(제12권, p. 366)에서는 '관념론적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p. 375-76.


***) [역자 주] Johann Most (1848-1906) ― 나중에 무정부주의자가 된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1874년에서 1878년까지 국회의원. 독일에서 추방되어 런던에서 잡지 ꡔ프라이하이트ꡕ(Freiheit, 자유)를 내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정책을 공격했기 때문에 바덴 대회에서 제명되었다. 1880년대에는 뉴욕으로 이사하여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한때 뒤링의 추종자로서 엥겔스의 ꡔ반뒤링론ꡕ의 당 기관지 게재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 [역자 주] Konrad Schramm ―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기회주의자.


*****) [역자 주] Eduard Bernstein (1850-1932) ―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이른바 '수정주의'를 주창하여 맑스주의의 이론적 기초에 전면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수정을 가하려고 시도했다.


*1) 강단사회주의자들(Katheder-Socialists) 혹은 강단개혁주의자들(Katheder-reformers) ― 1870년대 및 1880년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한 조류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대학의 강단(독일어로 Katheder)에서 사회주의를 가장하여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개혁주의를 옹호했다. 맑스주의와 노동자계급운동의 확산 때문에 착취계급 사이에 발생한 공포와 근로인민을 계속 종속시켜두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찾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노력이 강단사회주의(Katheder-Socialism)를 낳았다. 아돌프 바그너(Adolp Wagner), 구스타프 쉬몰러(Gustav Schmoller), 로렌츠 브렌타노(Lorenz Brentano), 그리고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같은 강단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국가는 계급을 초월해 있으며, 그것은 상호 적대적인 계급들을 화해시킬 수 있고, 자본가들의 이해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근로인민의 요구들을 가능한 한 모두 고려하면서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경찰이 규제하는 임금노동의 법제화와 중세적 동업조합의 재건을 제안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강단사회주의가 얼마나 반동적인가를 폭로했다. 레닌은 강단사회주의자들을, 맑스의 혁명적 가르침을 증오하는 "경찰적 부르주아 대학 학문"의 빈대들이라고 불렀다. 러시아에서 강단사회주의자들의 견해는 '합법적 맑스주의자들'에 의해서 보급되었다.


**) [역자 주] Karl Hirsch (1841-1900) ―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1968년에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ꡔ데모크라티쉐스 뵈헨블라트ꡕ(demokratisches Wochenblatt, 민주주의 주간신문)를 편집, 1870-71년에는 ꡔ폴크스쉬타트ꡕ(인민국가)의 편집자, 1974년 빠리로 이사했고, 나중에 벨기에로 이사해 주간지를 편집했다.


***) [역자 주] August Bebel (1840-1913) ― 독일 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날의 창립자이자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


****) [역자 주] Wilhelm Liebknecht (1826-1900) ― 베벨과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의 한 사람. 제2인터내셔날의 조직가.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의 아버지. 맑스와 엥겔스의 친구. 1848년 혁명에 참가. 런던에 망명한 후 한때 맑스와 함께 생활했다. 1869년부터 사망 시까지 당 기관지 ꡔ폴크스쉬타트ꡕ(인민국가), 나중에 ꡔ포르베르츠ꡕ(전진)의 편집자. 기회주의자와의 투쟁에서 동요하고 유화적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을 받았다.


*****) 같은 ꡔ서간문 선집ꡕ, p. 396. [1979년 9월 18일자의 편지: 역자]


*6) [역자 주] Wilhelm Bracke (1843-1880) ―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의 한 사람. 맑스 및 엥겔스와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 A. Sorge, Stuttgart, 1921,

    SS. 164-65.


***) [역자 주] Georg von Vollmar (1850-1922) ― 독일 사회민주당의 우익 지도자, 기회주의자. 처음에는 혁명적이었으나 후진적인 바이에른에서 활동하면서 보수적으로 되었고, 1891년 '사회주의자 단속법'의 폐지 후에는 국가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엥겔스에 의해서 비판받은 "소농보호․존속"론으로 유명하고, 나중에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열렬한 지지자로 되었다.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 A. Sorge, S. 169.


*****) [역자 주] Louis Viereck (1851년생) ― 독일 사회민주당 우익, 뒤링의 후계자. 일단 도미(渡美)했다가 되돌아와 국회의원이 된다. 1885년에 재차 미국으로 이주한 후 노동운동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1) 같은 책, ss. 183-84. ꡔ사회과학․사회정책연감ꡕ ― 1879년에 쮜리히에서 독일의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 K. 회히베르크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 증기선 보조금에 대해서는 사회민주당 의원들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1884년말에 비스마르크 수상은, 독일의 식민지 팽창정책을 위해서, 동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정기노선을 설치하도록 해운회사들에게 보조금을 줄 것을 의회가 제도화하기를 원했다. 베벨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의원단의 좌익은 증기선 보조금을 거부했지만, 다수를 점했던, 아우어(Auer), 디츠(Dietz) 등등의 우익은, 심지어 의회에서 공식적인 논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해운회사들에 보조금을 주는 데에 찬성발언을 했다. 1885년 3월 의회에서의 논의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단의 우익은 동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노선을 개시하는 데에 찬성했는데, 자신들의 몇 가지 조건, 특히 새로운 선박들이 독일의 조선소에서 건조된다는 조건을 수락한다는 전제 하에서 비스마르크의 계획에 동의했던 것이다.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체가 정부의 계획에 반대표를 던진 것은 단지 의회가 [사민당 의원단 우익의: 역자] 이 요구를 거부한 후였다. 의원단 다수파의 행동은 신문 ꡔ조치알 데모크라트ꡕ에서,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조직들에 의해서 날카롭게 비판되었다. 차이가 너무나 날카로웠기 때문에 당을 거의 분열시킬 지경이었고, 엥겔스는 사회민주당 의원단 우익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했다!(Marx u. Engels, Briefe an Bebel, SS. 384, 392;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A. Sorge, S. 203; Marx u. Engels, Briefe über "Das Kapital", Dietz Verlag, Berlin, 1953, S. 294 참조).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A. Sorge, SS. 203-04.


****) 같은 책, S. 256.


*****) 가능주의자들(Possibilists, Brousse, Benoit Malon, 등등) ― 혁명적 투쟁방법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분리시킨, 프랑스 사회주의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조류. 1882년 쌩뜨 에띠엔느 대회에서의 프랑스노동자당으로부터의 분열 후에 가능주의자들은 노동자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강령과 혁명적 전략을 거부했고, 노동자계급운동의 사회주의적 목표를 무시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능한 것"에 한정할 것을 제안했다―'가능주의자들'이라는 이름은 거기에서 유래했다. 가능주의자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지역과 덜 발전한 노동자계급 사이에 영향력이 있었다. [이하는, 일본어 판 ꡔ전집ꡕ의 역자 주에서] 1902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대립하여, 다른 개량주의적 그룹과 함께 기회주의적인 프랑스 사회당을 결성했고, 2개의 사회당은 1905년에 합당했다.


*6)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A. Sorge, S. 307.


**) [역자 주] Max Schippel (1858년생) ―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 수정파, 국회의원. 1894년 이래 중앙 주간신문 ꡔ조치알 데모크라트ꡕ(사회민주주의자)의 발행인, ꡔ사회주의 월간ꡕ의 기고자.


***) 같은 책, S. 311.


****) 바꾸닌주의자들(Bakuninists) ―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무정부주의적 경향의 지지자들. 그 창시자 미하일 바꾸닌(Mikhail Bakunin, 1814-1876)의 이름을 땄다. 바꾸닌주의의 기본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함해,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바꾸닌주의자들은, 혁명은, '특출한' 개인들로 구성되는 혁명적 비밀결사에 의해서 지도되는, 즉각적인 인민봉기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꾸닌주의자들의 이론과 전술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호되게 비난받았다. 레닌은 바꾸닌주의를 "자기구원의 가망이 없는 소부르주아지의" 세계관이라고 규정했다. 바꾸닌주의는 나로드니키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원천의 하나였다.

          [나로드니키주의(Narodism) ― 19세기 60년대와 70년대에 성장했고, 주로 사회 하층 출신의 진보적 인텔리들로 구성된, 러시아 혁명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조류. 절대주의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투쟁으로 궐기시킬 목적으로 혁명적 청년들이 촌락으로, "인민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나로드니키들은,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는 전혀 발전의 전망이 없는 우연적인 현상이며, 이 때문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성장하지도 발전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나르드니키들은 농민들이야말로 혁명의 주력군이라고 간주했고, 촌락공동체를 사회주의의 맹아로 여겼다. 나로드니키들은, 역사는 영웅들, 특출한 인물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대중은 수동적으로 그들의 뒤를 따른다는 관점을 유지하면서, 역사 발전에서의 계급투쟁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 나아갔다.]


*****) [역자 주] Paul Brousse (1854-1912) ―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이른바 가능주의자, 의사 출신. 1871년의 빠리 꼬뮌 후 스위스로 도망하여 바꾸닌과 가까워졌다. 1880년 빠리로 돌아왔다. 1881년 게드(Jules Guesde, 1845-1922)와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가 제출한 당 강령을 비판하면서 맑스주의와의 투쟁을 개시했다. 다음 해에 가능주의자당을 창립. 이 당은 당면한 시기에 실행 가능한 개개의 부분적 요구를 체계적으로 실현시켜감으로써 사회주의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1890년, 당은 분열했지만, 브루스는 계속 우익의 수령으로 머물렀다. 1905년에 통일사회당에 가입, 1906년 국회의원이 되었다.


*1) [역자 주] Henry Hyndman (1843-1921) ― 부르주아 저널리스트 출신의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 1881년 맑스의 영향 하에 사회주의 선전을 시작하면서 사회민주주의연맹(S.D.F.)을 창립. 이는 나중에 독립노동당과 합당하여 영국 사회당이 되었다. 1896년 런던의 국제사회주의자 대회 의장. 1900-1910년, 국제사회주의 뷰로의 일원. 맑스나 엥겔스와 개인적으로 알고, 맑스주의자라고 자임하고 있었지만, 배외주의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제1차 대전 중에 영국 사회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0월 혁명 후에는 쏘비에트 제도를 공격하면서 계급협조를 주장했다.


**) Marx and Engels, Sel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p. 486-87.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A. Sorge, S. 316.


****) 같은 책, S. 319.


*****) Die Neue Zeit, 1907, 25. Jahrg., Erster Band, S. 13.


*6) [일본어판 ꡔ전집ꡕ의 역자 주] 페이비언주의자들(Fabiens) ― 1884년에 한 무리의 부르주아 인텔리들에 의해서 창립된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페이비언협회'에 붐비는 사람들.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투쟁으로부터 일탈시키면서, 자질구레한 개량의 길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537.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8호 (200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