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사회민주당 내부 지식인들의 기회주의를 고전은 어떻게 평가했는가

[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의 러시아 번역판 서문 (2)

[편집자 주: 본지는 지난 제7호에 신양식 회원의 "레닌의 「[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 러시아 번역판에 부치는 서문」을 읽고"를 게재했다. 이 글은 물론, 필자인 신양식 회원이 "우리에게는 이들 편지―[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 편집자]―가 없...지만 그것 없이 레닌의 글만으로도 충분히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한 것처럼, 레닌의 '서문' 없이도 충분히 그 논의의 내용과 중요성, 그리고 의의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907년 4월에 집필된 그 '서문' 자체를 독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일부의 의견이 있었고, 이에 2번에 나누어 그것을 번역․게재하기로 했고, 이 글은 지난 호에 이어 그 후반부인 "사회민주당 내부 지식인들의 기회주의를 고전은 어떻게 평가했는가"이다. 번역은, 영어판 [(레닌)전집(Collected Works)](제4판, 1972), 제12권, pp. 359-78(본문) 및 pp. 540-46([전집] 편집자 주)에 의거하였고, 일본어 판 [전집]의 번역을 부분적으로 참고하였다.]




사회민주당 내부 지식인들의 기회주의를 고전은 어떻게 평가했는가


1894년. 농민문제. 엥겔스는 1894년 11월 10일의 [조르게에게 보낸: 역자]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대륙에서는 성과가 올라감에 따라 더 많은 성과를 거두고 싶다는 욕구가 강화되고 있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농민사냥이 유행으로 되고 있다. 우선 프랑스인들은 낭뜨에서 라파르그*1)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우리를 위해서 조처해주고 있는 소농의 몰락을 ... 우리가 개입하여 촉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 아니다 ... 라고 선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는 세금이나 고리대, 지주로부터 소농을 직접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언명하고 있다.**2) 그러나 우리는 이에 동조할 수 없는데, 첫째로는 그것이 어리석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런데 폴마르***3)가 프랑크푸르트에 나타나, 그가 상부(上部) 바이에른에서 상대해야 하는 농민은, 라인 지방의 빚에 쪼들린 소농이 아니라, 남․여 농장일꾼을 착취하고 가축과 곡물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중농과 심지어 대농임에도 불구하고, 농민 일반을 매수하고자 하고 있다. 모든 원칙을 버리지 않고는 그러한 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4)

1894년 12월 4일. "...극히 기회주의적으로 돼버렸고 거의 평범한 인민당으로 돼버린 바이에른인들(말하자면, 대다수의 지도자들과 다수의 신입당원들)은 바이에른의 의회에서 예산안에 일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특히 폴마르는 농민들 사이에서 선동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상부 바이에른의 대농―25 내지 80에이커(10 내지 30헥타르[약 3만 평 내지 9만 평: 역자])의 땅을 소유하고, 그리하여 임금노동자들이 없이는 경영할 수 없는 사람들―을 획득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지, 그들의 농장일꾼들을 획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5)

이렇게 우리는, 10년 이상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의 기회주의와 체계적이고 단호하게 투쟁했으며, 사회주의 내부의 지식인적 속물근성 및 소부르주아적 관점을 공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맑스주의적 정책과 전술의 모범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일반대중은 알고 있지만, 맑스주의의 창시자들이 그 당의 "우익"(엥겔스의 표현)에 대해서 얼마나 부단한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알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엥겔스 사후(死後) 곧 이 은폐된 전쟁이 공개적인 것으로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수십 년에 걸친 역사적 발전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엥겔스의 (그리고 맑스의) 두 갈래의 충고와 지시, 정정(訂正), 우려, 훈계를 아주 명확히 자각하고 있다. 그들이 영국과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끈질기게 호소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운동과 결합하고, 협소하고 편협한 종파주의적 정신을 그들 조직으로부터 근절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에게는 속물근성과 "의회주의적 백치병"(1879년 9월 19일자 편지*6)에서의 맑스의 표현), 소부르주아 지식인적 기회주의에 굴복하는 것을 경계할 것을 가장 끈질기게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사회민주주의적 떠버리들은 전형적으로, 첫 번째 종류의 충고에 대해서는 재잘거리면서도, 두 번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7) 맑스와 엥겔스의 편지를 평가함에 있어서의 그러한 일면성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무언가 ... "일면성"의 최대의 지표가 아닐까?

국제 노동자계급운동이 심각한 동요와 우유부단의 징조를 보여주고 있고, 기회주의와 "의회주의적 백치병", 속물적 개혁주의의 극단이 혁명적 조합주의(syndicalism)라는 또 다른 극단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지금 ― 영국 및 미국의 사회주의와 독일 사회주의에 대해 가한 맑스와 엥겔스의 "정정"은 각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당이 없고, 의회에 사회민주당의 의원이 없으며, 선거에서도, 신문 등에도 어떤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활동도 없는 나라들 ― 그러한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걸 무릅쓰고 협소한 종파주의를 일소하고, 노동자계급운동과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뒤흔들라고 맑스와 엥겔스는 가르쳤다. 왜냐하면,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거의 어떤 정치적 독립성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역사적 과제가 거의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 이러한 국가들에서는, 정치 무대는 의기양양하고 자기만족적인 부르주아지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고, 세계 어느 곳에서 보다도 유례없이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타락시키고, 매수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영국 및 미국의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해서 했던 이들 충고가 러시아의 상황에 단순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그 방법을 해명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국가들에서의 노동자계급운동의 구체적 역사적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사소하고 종파주의적이며 지식인적인 이해를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직 완수되어 있지 않고, "의회주의적 형태들로 장식된 군사적 전제정치"([고타강령 비판]에서의 맑스의 표현)***8)가 지배해왔고, 아직도 지배하고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에 이끌려 들어와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활동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들 ― 그러한 나라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임무와 범위를 의회주의적으로 비속화하고, 속물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인 지금 맑스주의의 이 측면을 강조하고 내세우는 것이 더욱 우리의 임무인데,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거대하고 '뛰어난', 그리고 자금이 풍부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신문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웃 독일 노동자계급운동의 '모범적인' 충성심과 의회주의적 합법성, 겸손, 온건을 시끄럽게 나팔 불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배반자들의 이러한 타산적인 거짓말은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카데트****9) 진영의 전직 장관이나 장래의 장관의 개인적인 부패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지주 및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깊은 경제적 이해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말, 이러한 "우민화"(愚民化)("Massenverdummung"―1886년 11월 29일자 편지*****10)에서의 엥겔스의 표현)와 싸우는 데에는 모든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와 엥겔스의 편지들이 필수불가결의 무기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들의 타산적인 거짓말은 인민에게 독일 사회민주당원들의 모범적인 "겸손"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사회민주당원들의 지도자인 맑스주의 이론의 창시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혁명적인 연설과 행동 덕택에 피렉*11) 일파(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내의 기회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위선은 극히 무기력하게 들렸다"(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 하원에서의 노동자당의 형성과 데카즈빌(Decazeville)의 파업**12)인데, 이 파업은 프랑스의 급진당원들을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분리시켰다). "지난번의 사회주의자단속법에 관한 토론에서는 오직 리프크네히트와 베벨***13)만이 연설했고, 두 사람 모두 훌륭하게 연설했다. 이 토론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번 성실한 사람들 사이에 우리의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국제적 사회주의운동에서의 독일인들의 지도력이, 특히 그토록 많은 속물들을 의회에 보낸 후에(물론 이는 불가피했지만), 도전받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일에서는 평온무사한 시절에는 모든 것이 속물적으로 된다. 그 때문에, 프랑스인들의 경쟁이라고 하는 자극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1886년 4월 29일자 편지).****14)


이야말로, 주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데올로기적 영향 하에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가장 철저히 배워야 할 교훈이다.

이들 교훈은, 19세기 최대의 위인들의 서간(書簡)의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경험에 대한 동지적이고 솔직한 비판, 외교적이고 사소한 타산과는 거리가 먼 비판의 모든 정신과 내용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편지가 실로 얼마나 철저히 이러한 정신으로 차 있는가는, 다음의 상대적으로 특수하면서도 지극히 전형적인 구절에서도 볼 수 있다.*****15)

1889년 영국에서는, 훈련되지 않은 비숙련 노동자들(가스노동자, 부두노동자 등)의 젊고 신선한 운동, 새롭고 혁명적인 정신에 찬 운동이 일어났다. 엥겔스는 그것을 크게 기뻐했다. 맑스의 딸인 텃시(Tussy)*16)가 이들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동했는데, 엥겔스는 그녀의 이 역할을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1889년 12월 7일에 런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여기에서 가장 불길한 일은, 노동자들의 뼈 속 깊이까지 파고든 부르주아적 '점잔'이다. 그 각각의 계층이 의문의 여지없이 인정되고 있으며, 각각의 계층은 그 자신에 대한 긍지와 동시에 윗사람과 상급자에 대한 타고난 존경심을 품고 있는, 무수한 계층으로의 사회의 분열이 참으로 오래되었고 또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는 아직도 아주 쉽게 미끼로써 사람들을 낚고 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존 번스**17)는, 자기 자신의 계급에서의 인기보다는, 추기경 매닝***18)이나 런던 시장, 부르주아지 일반에게 인기 있는 것을 은밀히 더 자랑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퇴역 중위인― 챔피언****19)은 수년 전 부르주아와, 특히 그 보수적 분자들과 어울려, 성직자들의 교회대회 등에서 사회주의를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톰 만*****20)조차 런던 시장과 오찬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하기를 즐겨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프랑스인들과 비교해보면,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알 수 있다."*21)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다른 예. 1891년에는 유럽전쟁이 발발할 위험성이 있었다. 엥겔스는 그 문제에 관하여 베벨과 교신했고, 그들 두 사람은, 만일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한다면,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인들 및 그들의 어떤 동맹자들과도 필사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에 합의했다. "만일 독일이 짓밟힌다면, 우리 역시 짓밟힐 것이며, 최선이래야 전쟁은, 혁명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독일은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것일 것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권력을 쥐고 1793년**22)을 연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891년 10월 24일 편지).***23)

1905년의 러시아 노동자당의 '자코뱅적' 전망은 비(非)사회민주주의적이라고 왜장쳤던 저들 기회주의자들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당이 임시정부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능성에 대해서 엥겔스는 베벨에게 솔직히 제안했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당의 임무에 대하여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연히 러시아의 혁명과 그 위대한 세계적 의의에 대하여 열렬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서간집에서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혁명에 대한 이러한 열렬한 기대가 거의 20년간에 걸쳐 있음을 볼 것이다.

1877년 9월 27일자 맑스의 편지를 보자. 그는 동방의 위기(Eastern crisis)****24)에 대해서 극히 열광하고 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격변의 문턱에 서 있었고, 그를 위한 모든 요소는 성숙되어 있다.... 용감한 터키인들은 그들이 가한 타격을 통해서 그 폭발을 수년간이나 앞당겼다.... 그 격변은 규칙대로(secundum artem) 헌법 게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고, 그리고 나서는 일이 척척 진행될 것이다(et puis il y aura un beau tapage). 어머니인 자연이 우리에게 특히 불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전에 그 즐거움을 보게 될 것이다."*****25) (당시 맑스는 59세였다.)

어머니인 자연은 맑스에게 "그 즐거움을" 볼 만큼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 또한 허락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헌법 게임'을 예언했고, 이는 그의 말들이 마치 러시아의 제1차 및 제2차 두마와 관련하여 어제 쓰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인민에게 '헌법 게임'을 반대하도록 경고한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보이콧 전술의 "살아 있는 혼"이었다....

다시, 맑스의 1880년 11월 5일자 편지를 보자. 그는 러시아에서의 [자본론]의 성공을 크게 기뻐했고, 새로 생긴 '전반적 재분배' 그룹에 반대하여 '나로드나야 볼야'(인민의 의지) 조직의 편을 들었다.*26) 맑스는 그들['전반적 재분배' 그룹]의 견해 속에 포함되어 있던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반적 재분배' 파의 나로드니키들이 훗날 사회민주주의자들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고, 또 알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맑스는 자신의 모든 통렬한 풍자를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이들 신사분들은 모든 정치적․혁명적 행동을 반대한다. 러시아는 공중제비를 하여 무정부주의적-공산주의적-무신론적 천년왕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동안에 그들은 가장 장황한 공리공론으로 이 비약을 준비할 것인데, 이 공리공론의 이른바 원리란 것은 고(故) 바꾸닌**27) 이후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팔고 있는 것들이다."***28)


이로부터 우리는, 맑스가 1905년 및 그 이후 수년 동안의 러시아에서의 사회민주당의 "정치적․혁명적 행동"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했을까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29)

다음으로는, 1887년 4월 6일자 엥겔스의 편지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에 위기가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최근의 암살은 오히려 사태를 망쳐놓았다...." 1887년 4월 9일자 편지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군대는 불만과,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장교들로 가득 차 있다." (엥겔스는 당시 '나로드나야 볼야'<인민의 의지> 조직의 혁명적 투쟁에 감명을 받아, 장교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나중에 18년 후에 찬란하게 발휘된 러시아 병사와 수병의 혁명적 정신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나는 사태가 해를 넘겨 지속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단 그것[혁명]이 폭발한다면(losgeht), 그때는 만세!"*****30)

1887년 4월 23일자 편지. "독일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와 박해가 이어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현재 몇 개월인가만 문제인 러시아의 혁명이 발발할[losgeschlagen werden) 때에, 독일에서도 곧바로 그를 따라 혁명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31)

그 몇 개월은 결국 대단히 긴 것이 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속물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이마에 주름을 잡으면서, 엥겔스의 "혁명주의"를 엄중히 비난하거나, 노(老) 망명혁명가의 낡은 유토피아를 관대하게 비웃을 것이다.

그렇다. 맑스와 엥겔스는 혁명이 가깝다고 규정한 점에서, 혁명의 승리(예컨대 1848년 독일의)에 희망을 건 점에서, 독일 "공화국"(당시 엥겔스는, 1848-49년의 국가 헌법 전쟁의 참가자로서의 기분을 회상하면서, "공화국을 위해서 죽는 것이야말로"라고 쓰고 있다**32))이 임박했다고 믿은 점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자주 오류를 범했다. 1871년에 그들이 "남부 프랑스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일에 종사하고, "그를 위해서 그들(1871년 7월 21일자 편지 제14호에서, 베커[Becker]는 그 자신과 동지들을 가리켜 "우리"라고 쓰고 있다)이 인력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걸고 희생했을" 때에, 그들은 오류를 범했다. 같은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3월과 4월에 우리가 보다 많은 자금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남부 프랑스 전체를 궐기시켜 빠리의 꼬뮌을 구했을 것이다"(p. 29). 그러나 그러한 오류들―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작고 평범하며 사소한 임무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려 했고, 또 끌어올린, 혁명적 사상의 거인들의 오류들―은, 혁명적 허영의 무상함이나, 혁명적 투쟁의 무익성, 반혁명적인 "입헌적" 망상의 매력을 칭송하고, 외치고, 호소하고, 지지하는, 공인(公認) 자유주의의 진부한 지혜보다 천배나 더 고상하고 위대하며, 역사적으로 더욱 가치 있고, 진실하다....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비록 오류에 가득한 그것일지라도, 그들의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 자유를 획득할 것이고, 유럽에 자극을 줄 것이다. ― 그리고 속물들은 그들의 혁명적 무위(無爲[=無活動])의 무오류를 자랑하게 내버려 두자. (번역: 편집부)




자료


[요하네스 베커, 요제프 디츠겐, 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맑스 등이 프리드리히 조르게 등에게 보내는 편지]의 러시아 번역판 서문 (2)



V. I. 레닌





*) [역자 주] Paul Lafargue (1842-1911) ― 쿠바 출신의 프랑스 사회주의자. 맑스의 둘째 사위. 빠리 꼬뮌에서 대활약을 하고, [자본론] 제1권 등, 맑스와 엥겔스의 여러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프랑스 노동당을 결성하여 지도하는 등 프랑스의 맑스주의 노동자계급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말년에는 우울증에 빠져 1911년에 부부가 함께 자살했다.


**) [역자 주] 1894년 9월 14일부터 16일까지 낭뜨에서 개최된 프랑스 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의 라파르그의 보고 [농민소유지와 경제발전]을 가리킨다.


***) [역자 주] 지난 호, p. 162의 주 28) 참조.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557.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 A. Sorge, S. 415.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397.


**) [역자 주] 속물근성과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야말로 한국에서도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인텔리 활동가들 대부분의 전형적인 '품성'이 아닌가!?


***) [고타강령 비판], MEW, Bd. 19, S. 29.


****) [역자 주] 러시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입헌민주당.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471.


*1) [역자 주] 지난 호, p. 163의 주 30) 참조.


**) 데카즈빌의 파업 ― 1886년 1월에 프랑스의 데카즈빌에서 일어난 광부들의 파업. 이 파업은 군대에 의해서 진압되었는데, 급진당원들을 포함한 부르주아 의원들은 파업 참가자에 대한 이 진압을 지지했다. 그 결과 노동자 의원들은 급진당으로부터 탈당, 하원에 독립적인 노동자 의원단을 구성했다.


***) [역자 주] 지난 호, p. 161의 주 23) 및 24) 참조.


****) V. I. Lenin, On Britain, Moscow, 1959, p. 162 참조.


*****) "서문"의 다음 절("1889년 영국에서는, 훈련되지 않은 비숙련 노동자들(가스노동자, 부두노동자, 등)의 젊고 신선한 운동..."부터)은, 1907년 4월 8일자 Nashe Ekho 제 13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

      "맑스, 엥겔스와 그 동료들의, 미국에 있는 전우인 조르게와의 서간집이 곧 P. 다우지 출판사에서 출판될 것이다. 이 출판에 의해 일어난 관심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 책의 러시아 번역판 서문 가운데, 맑스와 엥겔스가 러시아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혁명에 대해서 취했던 태도를 다루고 있는 부분을 여기에 전재하고자 한다.  우선, 프랑스 혁명의 의의와 독일에서 가능한 혁명에 관한 엥겔스의 두 개의 전형적인 구절로부터 시작하자."


*6) [역자 주] 맑스의 막내 딸 엘리너 (Eleanor Marx, 1855-1989).


**) [역자 주] John Burns (1858년생) ― 기계제작노동자로서 영국의 유명한 노동운동가. 1889년 런던 부두노동자의 대파업을 지도했으나, 나중에는 노동운동을 배반하고 부르주아 내각에 입각했다.


***) [역자 주] Cardinal Manning (Henry Edward Manning, 1808-1892) ― 추기경으로서 영국 카톨릭 교회의 수장. 교황의 현세에 있어서의 권력의 열렬한 지지자. 노년엔 자주 노동자와 기업주 간의 충돌의 조정자 역할을 했다.


****) [역자 주] Henry Champion (1859-1928) ― 1882년 이집트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군을 떠난 영국의 퇴역 중위. 처음에는 헨리 조지[지난 호, p. 155의 주 9) 참조]의 지지자였으나, 후에 사회민주주의연맹의 회원이 되었다. 1886년 가두시위의 지도자의 한 사람. 다음해에 사회민주주의연맹에서 제명되고, Nineteen Century ([19세기])의 편집국에 들어간다. 1889년 부두노동자 파업을 지도하고, 노동자연맹을 조직, 그 기관지 Labour Elector ([노동자 유권자])를 편집했다. 1894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 그곳의 사회민주당 조직에서 활동했다.


*****) [역자 주] Tom Mann (1856-1941) ― 영국의 금속노동자. 1884년부터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연맹'의 회원. 1889년 부두노동자 파업의 지도자 및 국제운수노동자연맹의 의장으로서 노동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1890년대에는 '독립노동당' 서기장. 1901-08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노동운동을 지도. 쌩디칼리즘에 공명했고, 1927년 이후 영국공산당 중앙위원, 프로핀테른(Profintern, 1921년 7월 코민테른이 반파시즘 투쟁의 일환으로 조직한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날', 1945년 세계노동조합연맹[WFTU]로 계승되었다)과 코민테른 활동에 참가했다.


*1)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491.


**) [역자 주] 1793년 1월의 루이 16세 처형으로 초래된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의 압력 하에서 1793년 5월 31일 민중세력이 국민공회를 습격, 상층 부르주아지 중심의 지롱드당의 지배를 끝내고 자코뱅당의 지배를 확립한 것을 가리킨다.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 A. Sorge, S. 371.


****) 맑스가 말하는 "동방의 위기"는 1877-78년의 러시아-터키 전쟁을 가리킨다.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376.


*6) Narodnaya Volya (인민의 의지) 조직 ― 비밀결사인 Zemlya i Volya (토지와 자유)가 분열한 후 1879년 8월에 결성된 나로드니키 테러리스트들의 비밀정치조직. 조직의 최고기구는 집행위원회였는데, 거기에는 젤랴보프(A. I. Zhelyabov), 미하일로프(A. D. Mikhailov), 프롤렌코(M. F. Frolenko), 모로초프(N. A. Morozov), 피그너(V. N. Figner), 페로프스카야(S. L. Perovskaya)와 크뱌트코프스키(A. A. Kvyatkovsky)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로드나야 볼야 조직의 회원들은, 여전히 유토피아적인 나로드니키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동시에 전제정치의 타도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여 정치투쟁에 들어갔다. 그들의 강령은 "보통선거에 기반한 항구적인 인민의 대표(즉, 의회)와 민주적인 제 자유의 선포, 토지의 인민에게의 양도, 공장을 노동자들에게 양도하는 상세한 조치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로드나야 볼야는 정치투쟁에 나섬으로써 한 발 전진했으나, 그것을 사회주의와 연결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레닌은 쓰고 있다.

          나로드나야 볼야 그룹은 전제정치에 반대하여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했지만, 그것은 "적극적인" 영웅들과 "소극적인" 대중이라는 잘못된 이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들은, 인민의 참여 없이, 개별적 테러와 정부에 대한 협박, 정부의 해체라는 수단을 통한 자기 자신들의 힘만을 사용하여 사회를 변혁할 것을 기대했다.

          1881년 3월 1일 (알렉산더 2세의 암살) 이후, 정부는 야만적인 탄압, 처형, 도발행위를 통해서 나로드나야 볼야를 짓밟았다. 1880년대 내내 나로드나야 볼야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거듭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예컨대, 1886년에는 울랴우오프(A. I. Uyauov, 레닌의 형제)와 쉐비레프(P. Y. Shevyrev)의 지도 하에, 나로드나야 볼야의 전통을 잇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1887년에 알렉산더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후 조직은 발각되어, 적극적인 회원들이 처형되었다.

          레닌은 나로드나야 볼야의 잘못된 유토피아적 강령을 비판했지만, 그 회원들의 짜리즘에 반대한 자기희생적인 투쟁에 대해서는 극히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그들의 지하운동 기술과 엄격하게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높이 평가했다.

          전반적인 재분배 (플레하노프[G. V. Plekhanov]. 포포프[M. R. Popov], 악셀로드[P. B. Axelrod], 도이취[L. G. Deutsch], 스테파노비치[V. V. Stefanovich], 자술리치[V. I. Zasulich], 아프테크만[O. V. Aptekman], 이그나토프[V. N. Ignatov], 그리고 나중에는 불라노프[A. P. Bulanov, 등등) ― 그 강령에서 옛 Zemlya i Volya(토지와 자유)의 기본 강령인 모든 토지의 경작자에게의 평등한 재분배를 요구했던 조직. 플레하노프와 도이취, 자술리치, 스테파노비치는 1880년에 해외로 나갔고, 러시아에서 뿐 아니라 거기에서도 잡지 Chorny Peredel([전반적 재분배])과 신문 Zerno([곡물])를 발행했다. '전반적 재분배‘ 그룹의 일부(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도이취 및 이그나토프)는 나중에 맑스주의자가 되어, 1883년에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자 조직―노동해방단―을 건설했다. 1881년 3월 1일 이후 이 조직의 나머지는 나로드나야 볼야에 결합했다.


**) [역자 주] Mikhail A. Bakunin (1814-76) ― 러시아 귀족 출신의 급진적 무정부주의자로서, 제1 인터내셔날에서 맑스와 격렬하게 대립했던 인물.


***)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405.


****) [레닌의 원래 주] 덧붙여 말하자면, 나의 기억에 착오가 없다면, 1900-03년에 플레하노프나 자술리치가 나에게, [우리의 의견의 차이][플레하노프의 저서: 역자] 및 임박한 러시아의 혁명의 성격과 관련하여 엥겔스가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편지가 있었는지, 지금도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공개해야 할 시점이 온 것 아닌지 등을 정확히 아는 것도 흥미 있을 것이다.***

           *** 플레하노프의 소책자 [우리의 의견의 차이] 및 러시아에 다가오고 있는 혁명의 성격에 관해서 엥겔스는 1885년 4월 23일자로 V. I.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고 있다. 이 편지는 1925년에 처음으로 논문집 [노동해방단] 제3호에 공개되었다. (Marx and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Moscow, 1955, p. 458-61 참조.)


*****) Briefe und Auszüge aus Briefen an F. A. Sorge, S. 260.


*1) 같은 책, S. 262.


**) Marx-Engels-Lenin, Zur deutschen Geschichte, Bd. II, 1. Halbband, Dietz Verlag, Berlin, 1954, S. 525.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제9호 (200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