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오해 그리고 서글픈 풍경


풍경1

때는 노동조합 상근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던 해 봄날. 집회에 갔다가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가벼운 인사와 안부가 오가고 그 사람이 짐짓 묻는다.


“정 동지, 서사노에서 일하신다면서요?”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 당원이세요?”

“아닌데요. 그런데 왜요?”

“아니요. 사람들이 서사노에 새로운 상근자가 왔는데 **당에서 심었다고 말들을 하길래”

(속으로) “이런 닝기리 내가 콩이여 팥이여, 심긴 뭘 심어?! 이런 걸 물어보는 너는 뭐냐?”

(실제로) “허허허, 잘 모르겠네요?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그럼 전 이만.”

(총총히 사라지는 그 사람)


곰곰이 생각해본다. 왜 그런 오해를 받았을까? 어렴풋하게 짐작되는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설령 내가 **당에서 심었던들 그게 무슨 큰 문제인가? 그 사람은 정말 뭐가 궁금했을까? 이런 오해는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자리에서 민주노총이든 연맹이든 정치방침이라고 발표하면서 실제 특정정당 지원책만 잔뜩 늘어놓아서 그게 어떻게 정치방침이냐고 투덜댔더니 아니나 다를까 옆에 사람이 “그럼 정 동지는 **당을 지지하시나 보죠?”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니요. 당에 관심 없습니다.”라고 해버렸다. 말해놓고 나니 엄청 썰렁하더라.

나는 이른바 어떤 ‘정파’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의 정치성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보면 나름대로 친절하게 답해준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정체를 다 밝힌다는 게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상대방이 다른 정파이기 때문에 사업을 못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다른 정파에 대한 막연한 호불호가 존재하기도 하고, 같이 무언가를 하다보면 서로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사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럴때는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 차이를 인정하고 났더니 함께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나는 정치적 차이성으로 구별되어지는 정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문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권모술수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종파나 분파가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정파와 종파(분파)를 구분 못하고 ‘정파주의 청산’이니 ‘해소’니 말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이어 나오는 지극히 관료적인 ‘통 큰 단결’이라는 표현이 더 싫다.

여하튼 ‘나는 당신의 정치와 정파에 대해 일단 인정한다. 그것이 나와 지금 당장 맞지 않더라도 우리가 함께해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함께하면 좋겠다. 그러니 당신도 나의 정치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을 자제해 주기 바라며 당신의 왕성한 호기심이 우리의 연대와 단결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해달라.’ 이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 싶다.




풍경 2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은 줄여서 서사노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서사노라는 약칭을 쓰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서사노는 아는데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은 모르는 당황스런 경험을 몇 번 겪었기 때문이다. 또 노동조합 이름이 길어서 그런지 가끔 진보언론에 기사가 날 때는 꼭 틀린다. 몇 번 지적했더니 제대로 써줄 생각은 안하고 아예 ‘서사노’라고 줄여서 쓴다. 조합원들도 가끔 헷갈리니 말 다했다.

가장 큰 문제는 서사노가 ‘서울지역 사회주의 어쩌구’ 인줄 알았다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서사노’ 라는 약칭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만은 아닌듯하다. 그러니깐, “너희들은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조합이다.”라는 의미를 잔뜩 비꼰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긴 사무금융연맹 전임 위원장 곽아무개씨는 이렇게도 이야기 했었다.


“서사노?! 거기는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정체를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의 정체는 사실 매우 분명하다. 우리의 정체를 아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것들은 이렇다.

우리는 1999년 노동조합 시작부터 대공장중심의 기업별노동조합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미조직된 절대다수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노동운동의 미래가 없다고 말해왔다. 우리는 관료주의에 찌든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이 상근활동가를 부당하게 해고했던 사무금융연맹 상근활동가 해고사태 때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민주노조운동 정신복원과 해고자 원직복직, 위원장 사과를 요구했었다. 우리는 이수호 집행부의 기만적인 사회적합의주의 추진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우리 2대, 3대 김경진 위원장은 2004년 11월 추운 겨울날 국회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고공농성을 벌였고 이와 관련해서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다. 우리 현 위원장은 전비연 동지들과 서울노동청 점거투쟁 때문에 조사를 받았는데 검사가 벌금을 500만원을 매길 거라고 했단다. 본인 역시 창피하지만 국회 기습시위로 벌금 100만원을 받았다가 재판을 통해서 50만원으로 깎인바 있다. 또 우리는 강승규 비리사태 당시 이수호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가장 최근에 우리는 어용KT노조가 유덕상, 이해관 동지를 제명처리 한 것에 대해 비판 성명서를 발표했다.

“서울지역 사회주의 어쩌구”라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조합에게 칭찬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대중조직이 마치 정치조직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여러모로 노동조합 활동에 있어서 장점 보다는 단점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가 했던 위의 활동들이 혹 그런 시각의 바탕이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겠다. 우리는 그저 우리 노조 조끼 뒷면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가자 노동해방’이라는 문구에 부끄럽지 않게 활동하고자 할 뿐이다.



풍경 3

노동운동하는 나에 대한 집안의 시각이 약간 변화되기 시작한 건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면서 부터이다. ‘니가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냐’며 기회 있을 때 마다 ‘당장 때려치우고 돈 벌어 장가갈 준비나 하라’던 부모님이 ‘저 녀석도 계속 노조일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한자리 할지도 몰라!!’라고 생각이 바뀌신 듯하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전처럼 잔소리가 다시 넘칠 것이 뻔한지라 그냥 짐짓 모른척 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


“민주노총이 우리 사업장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회사는 망할 것이다.”

“당신 지금 이 말이 심각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 한다는 건 알고 있나? 당장 사과해라!”

“사실을 이야기 한 거다. 7천, 8천만원 연봉 받는 것도 모자라서 뇌물까지 받고, 신문에 다 나오지 않았나.”


현대차노조와 기아차노조의 취업비리 그리고 강승규 뇌물사태 이후에 우리 노조 지부 사업장의 단체교섭 자리에서 재수없는 사용자에게 들었던 말 중 하나다. 그러면서 내가 굉장히 많은 월급을 받고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 하더라.

민주노총에 속한 노조의 상근자인 나에게 민주노총이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왜곡당하는 현실은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러나 아주 일부의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대단히 찝찝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한탄하기에는 발등을 너무 많이 찍혀서 이제는 아프지도 않다.

‘너도 이제 풀리는 거냐’는 쓸데없는 관심들. ‘너도 혹시?’ 라는 재수 없는 의심들. ‘너는 정말 그러지 마라’는 간곡한 당부들에 대해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고 앞으로도 변할 건 없을 것이다’라며 자위하고 혼자 바보처럼 뇌까리는 것으로는 이 부끄러워진 얼굴을 감추기에 또한 역부족이다.



에필로그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은 ‘서울경인지역의 사무직과 금융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중 중소영세사업장 미조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무금융연맹 산하의 유일한 지역업종노동조합이다.’ 그리고 나는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 조직부장이다.’ 이것만 잘 기억해 두어도 우울한 오해는 많이 줄어들 텐데 말이지... ≪노사과연≫


우울한 오해 그리고 서글픈 풍경



정현철 |자료회원, 서울경인사무서비스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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