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좌충우돌 남도 기행에서 만난 사람들

3월의 마지막 밤, 순천행 고속버스 막차에 몸을 실었다. 순천-해남-산청-제주로 이어지는 남도 기행(?)의 첫 행선지였다. 4월 초에 집중된 여러 지역의 위령제와 행사를 둘러보는 출장길이었으나, 위령제와 행사장소가 모두 학살지이니 학살지 순례이기도 한 셈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입법 투쟁이니 뭐니 때문에 4-5일씩이나 뭉터기 시간을 낸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던지라 올해에는 열일 제치고 꼭 가보리라 작정한 터였다. 열흘 전부터 지역의 일꾼들에게 연락해 일정과 숙소도 확인해두고 함께 갈 사람들도 챙겼다. 4년하고도 석달 동안이나 사무실에 거의 유폐돼 있다시피 하던 혜영이도 함께 가기로 했고, 신참 활동가 동운이도 동행했다. 진실위 출근을 눈앞에 두고 있던 홍섭이를 빼고 범국민위 사무처가 총출동했다. 김영훈 제주시장님의 배려가 그런 무모한(?) 계획의 뒷받침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순천에 도착하니 새벽 4시가 막 지났다. 위령탑 제막식이 11시이니, 아침까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한 계획에 따라 택시기사에게 물어 가까운 찜질방을 찾았다. 한국 자본주의의 최근 산물인 찜질방은 남녀가 더불어 몸을 지지며 건강을 챙기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임시로 묵을 거처를 찾는 가난한 여행자들에게도 필수 코스가 되었으니, 모든 사물은 역시 고정된 시선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만물은 유전한다고 하지 않는가. 학살지 순례의 첫 풍경으로 찜질방을 언급하는 게 좀 이상도 하다만은, 난생 처음 들어가본 그곳의 정경은 참 보기 좋았는데, 조물주의 눈에는 더욱 흡족해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니, 가난한 여행자들이여, 주머니 돈을 헤아리며 값싼 숙소 구하려 애쓰지 마시고 주저 말고 가까운 찜질방을 찾으시라.


눈 비비고 일어나 아침참을 간단히 때우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팔마체육관으로 들어서니, 체육관 뒤편에 흰 천을 뒤집어쓴 조형물이 보이고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얼굴이 상기된 순천유족회 장준표 회장님과 여러 유족들, 그리고 순천시민연대의 여러 일꾼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대전과 익산, 함평, 구례, 여수 등지에서 오신 유족회장님들과 유족들도 만났다. 철이 철인지라 정치 지망생들도 많다. 위령탑 건립을 지원해주셨다는 순천시장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담당국장이 대신 나왔고, 시의회의장과 의원, 도의원들도 여럿 눈에 띈다.


이윽고 제막식이 시작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들에 이어 탑을 덮고 있던 천이 벗겨지고, 오늘의 주인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순사건 위령탑'...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말에서부터 건립추진자들의 고심이 느껴진다. 추상물 일색인 탑의 외관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복잡다기한 한국현대사의 질곡들, 항쟁과 진압과 학살, 그리고 그 추모의 뜻과 극복의지까지 한꺼번에 담으려 하니, 그것도 공식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엄연한 국가기관인 순천시의 지원까지 받으며 건립되는 탑이니, 어련할까. 탑이 서는 자리도 다중이 환시하는 길거리가 아니라 체육관 뒤편 잔디밭이다. 그럼에도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세우려는 의지는 분명하게 읽히는 그런 형상이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탑의 뒷면에는 '여순항쟁 위령탑'이라고 씌어 있다 한다.)


어쨌든 순천시민들의 힘으로 국가의 공식 위령사업 이전에 여순사건의 1만 피학살자를 기리는 탑이 섰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위령탑'이라는 표현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탑의 건립에 십시일반 힘을 모은 순천시민연대와 순천시민들, 피해자 유족들, 그리고 시민들의 뜻에 화답한 순천시에 일단 큰 박수를 보낸다. 연사들 중에서는 당시 여순반란군에 가담했다가 진압 후 빨치산으로 입산해 싸우다 생존하여 지금은 조용히 통일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흰옷 입은 노인이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에는 아직도 그런 기인들이 많다. 기인들이 많은 나라는 '정상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겠지.


고사떡에다 막걸리라도 한잔 하고 가라는 유족회와 시민연대 사람들의 거듭된 권유를 야멸차게 뿌리치고 해남으로 향했다. 해남 위령제가 오후 3시였던 것이다. 가랑비가 장대비로 변해 내리퍼붓는 해남길에는 사무처 식구들 외에 문경 채의진, 익산 이창근 유족회장님이 동행했다. 순천과 해남은 전라남도의 동서 끝이라서 차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인지라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여유만 있다면 벌교 꼬막 맛도 보고, 보성 차밭도 좀 구경하고, 크지 않은 산임에도 빨치산 투쟁이 오래도록 계속되었다는 장흥 장평의 산세도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15분쯤 늦게 도착하니, 위령제가 이미 군 체육관을 빌려 거행되고 있었다. 기껏해야 100명쯤 모여 있을 거라는 예상은 체육관 앞에 빼곡히 들어선 차들을 본 순간부터 깨졌다. 전쟁 전후에 인민군 위장 완도부대에 의한 학살, 보도연맹원 학살, 빨치산 토벌과정에서의 학살 등으로 3천 명 정도의 민간인이 불법학살당했다는 해남 땅, 그런데도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유족들이 우리 아버지도 죽었소 하며 나서질 않아 십수 명이 조촐하게 제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저 땅끝 해남 땅에서 군 체육관을 빌려, 군수도, 군의회의장도 참석한 가운데, 군의 공식 지원과 대사찰의 협조를 받으며, 군 차원의 위령제가 열리다니, 감개무량이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일찍부터 해남 땅의 민간인학살을 조사해온 해남신문의 박영자 기자는 날씨만 좋았으면 체육관이 꽉 찼을 텐데 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상기된 얼굴로 사람들을 맞고 행사를 주관하는 오길록, 오원록 두 전현 유족회장의 발걸음에서 전례없는 힘이 느껴진다. 기우제 때 외에는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는다는 대흥사의 괘불과 천장을 가로지르며 둘러쳐져 있는 오색 띠가 체육관의 썰렁함을 일격에 날려버린다. 진실화해 법이 만들어지고 위원회도 구성됐으니, 이제 곧 우리 사건도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이 유족들의 얼굴마다 가득가득하다. 위원회의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전국적인 조사에 착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으로 유족들의 기대감을 배반하며 더 일치된 단결과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고 역설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왜 그리도 착잡하던지... 그럼에도 유족들은 고생 많다며 서울 손님들 마냥 환대해주고, 두 회장님은 고맙고 미안하다며 여비까지 손에 쥐여주신다.


전남 지방의 학살과 그 기억 양태, 위령사업을 조사하는 정호기 박사의 차를 얻어 타고서 억수같이 들이붓는 비를 뚫고 다시 순천으로 향했다. 진주행 버스와 진주 터미널, 산청 덕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은 생략한다. 일행은 곡절 끝에 자정을 한참 넘기고서야 겨우 산청 위령제가 열리는 지리산록에 여장을 풀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4월 2일 오전 11시, 지리산록 길 가의 위령비 앞(학살지인 신천초등학교 인근)에서 산청 시천삼장 위령제가 열렸다. 1994년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했다는 위령비의 제목부터가 정맹근 산청유족회장님의 말마따나 ‘짠하다.’ 이름하여 ‘난몰주민위령비’. 난리 중에 죽어간 주민들의 넋을 달래는 비라는 뜻이다. 군인들이 공비를 토벌한다는 명분하에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놓고서 그냥 난리 중에 죽어갔다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당시의 녹록치 않은 분위기에서 유족들은 그나마 비석이라도 세워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형제의 넋을 달래며 제사라도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합동위령제를 모셔온 지 올해로 13번째라고 한다.


산청 위령제는 우리 정회장님의 차분한 성품 만큼이나 조촐하게 치러진다. 소담스럽게 차려진 제상에 유족들이 전통의례에 맞춰 제례를 치르고 나서 간단한 인사말로 끝맺음한다. 그래도 올해는 법제정 이후 처음 치르는 위령제니만큼 형식을 조금 갖추어도 좋으련만,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정회장이 그런 무리한 수를 낼 리 없다. 하기야 법만 제정되었을 뿐 언제 조사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게 성숙하지 않은 상황이니, 아직은 유족들만의 조촐한 제사가 제격일 것도 같다. 그래도 철이 철인지라 이곳에도 역시 정치 지망생들의 얼굴은 빠지지 않는다. 유족들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자고 주문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편할 리 없다.


반갑게 배웅해주는 유족들, 그리고 산청군의원 신분으로 학살규명에 앞장서고 있는 서봉석 의원을 뒤로 하고, 그곳에서 합류한 거창 사람들과 함께 인근의 빨치산 토벌전시관을 찾았다. 산청군이 아마도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지리산 중산리 계곡 중턱에 지어놓은 전시관에는 토벌대의 작전상황과 관련 정보, 노획물들이 전시돼 있고, 뒷마당에는 빨치산 아지트도 재현해놓고 있다. 전시관 앞마당의 조형물들은 대체로 대립을 넘어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자는 취지를 나름대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전시관 안에 들어서는 순간 화해와 통일의 길이 얼마나 요원한지 온몸으로 느껴진다. 화해와 통일이란 상대를 나처럼 인정하고 존중할 때에야 가능할진대, 전시물들은 토벌대의 시각과 영웅담 일색이다. 빨치산들이 왜 소중한 목숨 걸고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갔는지 그 단초조차도 찾아보기 힘들고, 토벌 과정에서 떼죽음을 당한 수천 수만 주민들은 아예 존재조차도 없다. 이래 가지고서야 어디 화해와 통일을 입에 담을 수나 있을까?


일행은 씁쓸함을 머금은 채 정회장의 안내로 계곡을 타고 내려와 외공리 학살현장을 찾았다. 1951년 초에 군인들이 민간인 500-800명을 14대의 군용트럭에 싣고 와 학살 후 6개의 구덩이에 암매장했다는 곳이다. 산청과 진주의 사회단체들이 학살지에서 암매장된 유골들을 확인한 후 다시 묻어두었는데, 아직까지 유족들도 나타나지 않고 진상에 접근조차도 못하고 있는 곳이다. 다만 인상, 경농, 금중이라는 모표와 뱃지들이 서울 인근에서 실려온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할 뿐이다. 이름 없는 이 수많은 무덤들이 과연 언제나 이름을 찾아 후손들의 제례나마 받을 수 있을지, 국가는 언제나 최소한의 의무나마 이행할지 막막하다.


일행은 다시 정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산청 시천삼장 지역주민의 최대 암매장지를 찾았다. 원리의 덕산고등학교 뒤편인데, 지금은 학살지 위로 농로가 나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 유해는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은 형세다. 이곳에서 70-80명이 학살, 암매장당했다는데, 정회장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곳도 바로 이곳이란다. 산청유족회를 이끌며 전국유족협의회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시는 정회장도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찡하여 오기가 싫어진단다. 아버지의 시신을 농로 밑바닥에 묻어둔 채 확인도 못하고서 평생을 살아오신 심정을 그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산청 지역의 세 곳 학살지를 둘러본 후 일행은 무거운 가슴을 안고서 진주 공항으로 향했다. 제주 4.3위령제에 참석하고 예비검속 유족들도 만나보고 학살지와 위령사업 현장도 둘러보는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상규명 운동도 비교적 일찍 시작되고 제주도민의 단결된 힘으로 법도 일찍 제정하고 조사도 어느 정도 진척되고 이제 위령사업과 기념사업이 막 시작된 4.3은 한국전쟁전후의 모든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 공은 이어받고 과는 시정하여 학살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 우리 앞에 주어진 과제다. 항쟁과 저항, 진압과 학살, 그 결과와 의미를 재정리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다. 삼다의 섬, 유채꽃 만발한 신혼여행지에서 학살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기대된다.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파란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강하고 있다. 요즘 시간 감각을 바꾸어버린 서울-대전간 KTX보다도 더 심하다. 난생 두 번째로 찾는 제주도의 이국적 풍광은 내게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오십을 눈앞에 둔 나이에 겨우 두 번째라니, 비행기값도 시간도 늘 넉넉지 못했던 내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인 셈이다. 어찌 됐든 다시 보는 제주도는 역시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는 아름다운 섬이다. 제주도와의 연이 조금만 더 굵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남아 있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제주도에 머무는 3박3일 동안 줄곧 이어진 김영훈 제주시장님의 극진한 배려가 시작됐다. 미리 고백하건대,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입에 꼭 맞는 술과 음식에다 좋은 사람들, 거기에 시장님의 극진한 배려까지 더해져 3일 동안 나는 찾아온 목적도 잠깐 잠깐 잊으며 제주도에 흠뻑 취해 지냈다. 하지만 그 점을 너무 내세우면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되도록 생략하며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풀어갈 테니, 감안하고 읽어주시기를.


첫일정은 4월 2일 밤 문화공원에서 열린 제주4.3위령제 전야제 ‘생명꽃 피어 평화를 노래하다’였다. 오랜 연륜에 어울리게 규모와 진행, 무대와 청중들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내게 더 강력하게 다가온 느낌은 뭔가 겉돌고 있다는 거였다. 생명 평화를 목놓아 노래하지만 알맹이가 빠진 채 박제화돼 있다는 느낌, 4.3의 현재화를 이야기하지만 허공 속에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 항쟁의 자리매김을 외치지만 현실의 거대한 조류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는 느낌 같은 것들이다. 전야제만이 아니라 내가 가본 4.3의 모든 행사장, 위령공원은 물론 심지어는 학살지에서까지도 내내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거로부터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음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워 몸에다 뜨거운 물을 들이붓고는 택시를 집어타고서 4.3 58주기 위령제가 열리는 4.3평화공원으로 향했다. 어젯밤 전야제에서부터 마시기 시작한 막걸리에다 뒤풀이 겸 환영 자리에서의 과음이 겹쳐 일정에 차질을 빚은 것이다. 대통령의 위령제 첫 참가와 거듭된 사과 표명이 오늘 위령제의 최고 화두이긴 했으나, 내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시가지에서 한참이나 외곽으로 밀려난 평화공원의 위치였다. ‘평화의 섬’을 표방하는 제주도에서 왜 평화공원을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 한적한 외곽에 배치한 걸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역시 돈 때문이었단다. 시가지 가까운 곳에서 12만평 부지를 확보하기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최초 계획인 5만 평 부지를 확보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단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신일진대, 비록 2만 평짜리 아담한 공원일지라도 시가지 인근에 터를 잡는 게 옳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한창 건설중인 4.3평화공원의 모습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견문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아마 5.18 묘지에 실망하고 거창 위령공원에서는 참담함까지 느낀 경험의 역작용도 있지 않은가 싶다. 평화공원의 시설물들이 위령제 전시물이나 행사 진행공간들과 여러 모로 겹쳐 있었던데다 시간도 짧았고 역량도 미치지 못해 세세한 묘사는 불가능하지만, 서서히 꼴을 갖추어가는 4.3평화공원의 전반적인 외양은 추모와 평화라는 이미지를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4.3의 연륜에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식견이 반영된 것이리라.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제 조용할 때 다시 한번 현장을 찾고 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 자리가 파할 때쯤 전야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강창일 의원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4.3운동의 한 주역이자 한국전쟁기 학살규명운동의 초동 주체이기도 한 강의원은 4.3운동의 처음과 끝에 모두 관계하고 있으니 4.3이 공식화되고 평화공원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요즈음 아마 어느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을 것이다. 쓴 소리 한마디 덧붙이자면, 한국전쟁기 학살문제 전반에는 기대만큼 깊숙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고, 제주에서의 한턱 언질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오후 첫 순서로 제주예비검속연합유족회 간부들을 만났다. 4.3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 초기 학살의 전형적인 사건으로서 국민보도연맹을 포함한 개전 초 예비검속 학살의 실마리를 풀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제주예비검속학살의 피학살자는 모두 1,500명으로 추정되는데, 지역별로 4개의 유족회가 결성되어 있다. 가끔씩 상경하여 제주예비검속학살의 특수성을 귀가 닳도록 강조해온 박영찬 회장님이야 여러 번 뵈었지만, 다른 간부들은 거의가 초면이었다. 서울에 계신 몇몇 유족을 빼고는 법제정 투쟁에 거의 관여하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유족들한테서 받은 느낌은 지금껏 본 다른 지역의 다른 유족들의 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유족들이 품은 천추의 한이야 지역마다 사건마다 다를 리 없겠지만, 아마도 4.3이 반 이상 제도화되다 보니 진상규명이 미흡하다며 진실화해위원회에 다시 진실규명 신청을 낸 예비검속 학살도 반의 반 이상은 제도화된 탓이 아닌가 싶다. 일단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고 있고, 자신들의 요구를 제도 속에서 적극 풀어내려는 의지도 분명하며, 요구의 내용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육지와 자신들을 대별하여 사고하는 제주도 민초들은 적어도 학살 문제에서만은 한 걸음 앞서 나아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 방향타가 제대로 세워졌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한 예로, 피학살자들의 유골 수백 구가 비행장 아스팔트 밑에 그대로 묻혀 있고 진실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주도에서 7천여만 원을 지원받아 세웠다는 제주북부예비검속 희생자 위령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나라는 언제나 제 수순을 밟아 제 길을 찾아갈지.


남은 시간이 조금 어정쩡하여, 일행은 용두암 근처의 짙푸른 바닷물을 뒤로 하고 한라산 중턱으로 향했다. 범국민위의 위령사업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는 거창 한대수 선생 왈, 자신의 지인이 관음사 근처의 풍광 좋은 곳에서 찻집을 하고 있다며 막간을 이용해 차 한잔 하자는 거였다. 한선생의 안목은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생전에 그렇게 크고 멋진 소나무는 처음 보았고 또 시간만 넉넉하다면 한 이삼일 묵고 갔으면 좋겠다 싶은 분위기였으니.


거리굿 좀 보다가 저녁을 먹자는 제주시장님의 연락을 받고서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산을 내려와 제주시청 옆 공터에서 열린 거리굿 ‘다시 피는 꽃’ 현장을 찾았다. 거리굿이야 솔직히 대수로울 게 없었지만, 그 복잡한 거리 한켠을 상설 공연장으로 내준 제주시, 그리고 크고 작은 온갖 연희패들이 그곳을 무대삼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민들과 거리낌없이 나누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다. 4.3은 학살 문제만이 아니라 그 처참한 학살을 끈으로 하여 제주의 문화예술을 한 차원 높이고 있었다.


저녁식사에 곁들인 제주의 술맛은 일품이었다. 무슨 값비싼 민속주가 아니라 흔하디 흔한 막걸리와 소주가 내 입맛에 꼭 맞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범국민위 식구들을 초대하여 극진히 대해준 시장님의 배려가 술맛을 배가시켰음은 물론이다. 김영훈 시장 역시 4.3운동의 한 주역으로서 기자 시절부터 4.3규명에 진력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도의회의장을 거쳐 시장 직을 수행하면서 4.3문제의 해결에 큰 힘을 싣고 있으며, 한국전쟁기 학살 전반에도 큰 관심을 쏟고 있는 인물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내친 김에 꼭 만나려 했던 4.3연구소 회원들을 찾았다. 저녁자리에 합석한 오승국 사무처장의 이야기가 마침 회원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이다. 제주에 오면 한턱 내겠다더니 개인 일로 빠진 박찬식 연구실장을 빼고는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학살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항쟁의 현대적 복원 이야기가 잠시 화두에 올랐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제도화된 4.3의 면면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은 피할 수가 없었다. 단적인 예로, 한동안 연구원 두셋의 규모를 유지하던 연구소가 4.3관련 조사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연구원만 십여 명도 모자라는 상태이고, 또 그 결과로 연구소도 전에 없이 활력을 띠게 되었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국가는 저비용으로 자신의 책무를 이행하고 연구소는 또 필요한 경비지원을 받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공생관계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시민사회에 헐값으로 자신의 책무를 이양하고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색내는 국가, 그런 국가의 뒤를 받쳐주는 시민사회의 모습이 결코 바람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뒤늦게 나타나 그 자리를 주도한 고희범 신임이사장― 역시 제주 출신 4.3 주역 중 하나로, 한겨레 사장 퇴직 후 최근에 이사장직을 맡은 인물―의 넉살좋은 ‘4.3 영령이 주는 귀신 술’에 밤은 깊어가고, 그 ‘4.3영령주’에 동운이는 맛이 가서 다음날 시름시름 앓았다.


4월 4일, 이날은 전문가의 정식 안내를 받으며 4.3투어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빡빡한 일정 때문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오후부터 몰아친 비바람이 오히려 일행을 하루 더 제주도에 묶어두면서 만사를 풀어헤쳐버렸다. 가이드는 젊은 시절부터 4.3을 조사하다가 제주도의회에서 오랜 동안 4.3 일을 도맡아 해온 강덕환 선생, 도내 최고의 4.3 가이드이자 시인이기도 하단다. 한국전쟁기 학살 전반을 챙기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무래도 4.3 일반보다는 제주예비검속에 비중이 더 있었던 터라 강선생의 특기가 제대로 살아나긴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상황을 너무 다잡지 않으면서 선선히 풀어가는 품세가 일견 어눌해 보이는 말투에도 역시 전문가답다. 투어 기록은 지면 관계상 간단한 스케치로 대신한다.


첫 행선지는 제주 백조일손 묘역. 백조일손은 ‘할아버지는 일백임에도 자손들이 하나로 엉겨 붙어 있으니,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데, 백조일손 묘역은 제주예비검속 피학살지나 묘역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러기까지는 일찍부터 이 문제에 발벗고 나서 진상을 파헤친 이도영 박사와 현장을 안내해준 양 고문님 등 유족들의 노고가 컸다. 묘역 앞에 전시된, 5.16 직후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위령비의 잔해가 그 지난했던 역사를 말해준다. 학살지는 인근의 일제 탄약고 터인 섯알오름으로, 한쪽에 백조일손 피학살자들 132명이 무참하게 죽은 채 버려졌고, 맞은편에는 만벵디 피학살자 63명의 시신이 너부러져 있었는데, 공포 분위기 때문에 6년이 지나서야 시신들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거두지 못한 유해들이 천지에 그득한 걸 생각하면, 그만해도 천만다행으로 유족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만벵디 묘역. 만벵디는 ‘물이 가득 찬 벌판’이라는 뜻이라는데, 이곳에는 한림면에서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 묘역을 만들며 세운 위령비에 태극 문양이 선연히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앞의 백조일손 위령비에도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에 대한 유족들의 애증과 원망, 바람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아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자신의 선조들을 잡아다 죽인 국가의 국민임을 그렇게도 주장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 위령비나마 세울 수 있었을까?


일행은 퍼붓는 비를 뚫고서 내친 김에 4.3의 상징적인 유적지 두 곳을 찾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4.3 토벌 과정에서 한라산의 중산간 마을 수십 개가 초토화작전의 제물이 되어 간 곳 없이 사라졌는데, 우리가 찾은 한 마을에서는 제주도 치고 비교적 너른 들판임에도 당시 몰살된 주민들 55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하나가 휑하니 선 채로 여행자들을 맞을 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우울한 빗속 풍경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 찾은 곳은 마을 주민들의 자체 모금으로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부터 4.3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모든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고자 만든 영모원으로서, 규모로 보나 의미로 보나 국가나 지방자치체 차원에서 추진한 여느 추모공원에 빠지지 않을 모범 사례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4.3 토벌에 참여했다가 순직한 군경의 명단은 있는데, 입산 투쟁하다 산화한 주민들의 이름은 빠져 있다는 거였다. 마을 주민들의 추모 대상에서조차 빠진 그들의 영령은 누가 기려주고, 그들의 삶의 자취는 누가 기록해주고, 그들의 죽음의 의미는 누가 살려줄까?


비바람이 묶어놓은 제주에서의 여분의 하룻밤, 정한 일정은 아쉬운 대로 모두 소화하고 남은 하룻밤에 친구가 돼준 것은 역시 지금도 그리운 제주의 막걸리와 소주, 그리고 제주 사람들이었고, 또 덕분에 서울 진실화해위원회에 막 불려갔다가 내려온 조정희도 제주에서 만났다. 산수 좋은 제주 출신이 아니랄까봐 연신 도는 소줏잔도 사양 않고 척척 받아드는 품이 역시 4.3의 딸이다. 예나 제나 나의 과음을 심히 염려하는 혜영이의 시선이 곱지 않지만, 제주에서만이라도 내게 무한의 자유를 허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아침, 비행기 시간이 여유가 있어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식당에서 먹는 해초국(이름을 잊어버렸다)의 속풀이 효과도 일품이다. 모처럼 만에 가진 4박 5일의 남도 학살지 기행도 이것으로 끝이다. 그 의미는 아마 내가 정신을 놓지 않는 이상 내 몸 속, 마음 속, 머리 속 어딘가에서 살아 움직일 테지만,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아니, 할 수만 있으면 외면하려 드는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그에 일면 분노하면서도 일면 기대고 싶어하는 민초들의 태도가 주는 아이러니다. 그 역설의 해법은? 《노사과연》


덧붙이는 말

이무열님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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