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와 한국의 노동자계급

―'전시작전통제권' 관련 공방을 보면서―

서두 잡담(?)


한국의 현대사는 군사계엄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당연히 한국의 현대사가 그만큼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군사계엄을 꺼내는 것은, 그렇게 점철된 계급투쟁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려는 게 아니라, 그 계엄 하에서 언론, 특히 신문 지면에 대한 한 가지 기억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계엄이 선포되면 경찰의 치안업무뿐 아니라 언론도 군대의 자의적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내가 경험을 기억할 만큼 다소라도 지각이 들어서(?) 경험하게 된 최초의 계엄은 1960년 4월 혁명 당시의 그것과 특히 1961년 박정희․김종필 등에 의한 군사쿠데타 당시의 그것이었는데, 당시 어린 눈에도 많은 것이 의아하고 당혹스러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그랬던 것은 신문 지면의 여기저기가 뭉터기로 시커멓게 먹칠되거나 백지상태로 발행․배달되던 사실이었다. 물론 계엄당국, 그러니까 쿠데타군의 무자비한 검열 탓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 겪은 계엄, 그러니까 1979년 10월 부마민중항쟁을 탄압하기 위해 발동된 후 박정희의 피살, 12․12 쿠데타, 이듬해 4월 사북 광부들의 항쟁, 5월 광주민중항쟁과 대량학살 등을 거치면서 1980년 여름까지 지속된 계엄 때에는 어떤 신문도 그렇게 먹칠되거나 백지상태로 배달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아마 실제로도 그렇게 먹칠되거나 백지상태로 발행․배달되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그런 사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말 극소수의 경우였을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먹칠되거나 백지상태로 발행․배달된 것이 군의 부당하고 강압적인 통제에 대해서 신문사가 비록 소극적이나마 저항한 것을 의미한다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매끄럽게 편집된 신문은 최소한의 소극적 저항도 없이 노예적으로 굴종했다는 것, 나아가서는 적당히 타협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통제에 적극적으로 야합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총칼을 들이댄 탄압과 통제에 대해 어떤 적극적인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명색이 '언론' 운운하는 자들이 그러한 억압적 계엄 상황 하에서 최소한의 소극적인 저항도 없이 매끄럽게 편집된 신문을 발행했다는 사실은, 설령 그들이 적극적으로 야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소극적인 야합, 따라서 언론인으로서는 범죄행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미관계와 한국의 노동자계급 ―'전시작전통제권' 관련 공방을 보면서―"라는 주제의 글을 시작하면서 왜 서두에 계엄이니, 계엄 하에서의 신문지면이니 하는 엉뚱한 얘기를 꺼내는가?

바로 이 주제야말로, 군사계엄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에 의한 억압적인 사상․양심의 통제 때문에 결코 온전하게 서술될 수 없고, 따라서 '노예적 언어'로 불완전하게밖에는 서술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자칫 이 주제가 아무런 객관적인 제약 없이 서술된 걸로 간주될 것이고, 그만큼 독자를 오도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을 밝혀두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주제를 "한미관계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이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제가 그렇게 제한적으로 규정되는 한, 최소한의 타당한 논의도 아예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타당한 논의라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작동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여 역시 최소한 "조선․한국․미국의 관계와 ...", 혹은 "한국․조선․미국의 관계와 ..."라는 식으로 주제가 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그러한 주제 설정과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고, 따라서 이 글은 그만큼 불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은 그 자체 미리 논의의 범위를 극히 제한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불구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제한 논의와 관련해서도 법률적 제약을 고려하여 그 서술의 방식과 내용에 제한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 연하는 많은 사람들이 북[즉, 조선, 혹은 저들의 표현으로는 '북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얘기를 하지만, 사실 나는 그들 대부분을 경멸한다. 생각해보라, 일방적인 비난만을 요구하는 파쇼적 법률이 요구하는 대로 떠들어대는 그런 '지식인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를. 혹시, 파쇼 법률이 요구하는 대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학자적 판단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야말로 바로 그 파쇼적 법률이 지배하는 조건 하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는, 그런 얼치기 지식인 아니겠는가?



한미 문제에 대한 노동자계급 내의 두 극단적 경향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에는 한미 문제와 관련, 서로 대립적인 양 극단의 견해와 태도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비록 공공연하게 말하려 하지는 않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의 공지의 사실이다. 혹자는 'NL'․'PD'라고도 얘기하고, 혹자는 '좌파'와 '우파' 혹은 '우파'와 '좌파'라고도 한다. (다만,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말해두자면, 한국의 노동운동 내에 이 두 견해나 태도만이 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견해와 태도가 운동 내의 양대 조류라는 사실은 누구도 결코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좀 단순화시켜서 얘기하자면, 나는 이 양대 조류에 대해서, 그들의 주의․주장 및 투쟁의 경향에서 볼 때, 한편은 기본적으로 몰계급적․민족주의적이며 심지어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인 경향까지 농후하며,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주관과 상관없이, 몰정치적이며 경제주의적 경향이 농후하여, 공히 객관적 상황을 올바로 파악․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우선, 좌파 혹은 PD라고 불리는 조류에 대해서 보면, 이들은 미국, 즉 미 독점자본과 그 국가에 의한 한국 '지배', 그들이 독점자본을 위시한 한국 내의 지배세력과의 동맹자이고 정치적․군사적 후원자라는 사실, 그리하여 국내의 어느 계급․계층에 못지않은 실질적인 지배․착취 세력이며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주요한 힘이라는 데에 대해서 사실상 문제의식이 거의 없고, 또 문제의식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반제․반미 운동과 투쟁을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투쟁'으로,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규정하는 경우조차 결코 적지 않다.

반제․반미 운동과 투쟁을 이렇게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투쟁'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물론 그 투쟁 주체들의 인식 및 태도 탓도 있다. 그들이 가히 헌신적으로 반제․반미 투쟁을 벌이지만, 많은 경우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태도에 입각한 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의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투쟁'을 비판하고 그러한 경향과 경쟁․투쟁하는 문제와, 한국의 토착지배계급을 하위의 파트너로 거느리는 미국의 지배적 동맹과 그 노동자․인민에 대한 직․간접의 지배, 그리고 그것을 보증하는 무력으로서의 미군의 주둔을 올바로 이해하고 대처․투쟁하는 문제는 당연히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투쟁이 결코 미국의 지배와 미군의 주둔에 대한 정치적 문제의식의 결여 혹은 부족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 것이다.

미국의 지배 및 미군의 주둔 문제에 대한 이른바 좌파 혹은 PD의 정당한 문제의식의 이러한 결여 내지 부족은 당연히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이 해결해야 하는 주요한 내적 과제의 하나로 되어 있다.

우선,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격파․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의 하나, 어쩌면 가장 난적일 것임에 틀림이 없는 그러한 대상, 그러한 문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양, 혹은 별반 중요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은 문제인 양 간주하고 대처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 현실적, 유물변증법적이지 못한 주관적인 인식이자 태도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현실적이고 주관적인 인식과 태도․대응을 통해서는 당연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즉, 그러한 인식과 태도․대응을 통해서는 미 제국주의의 지배를 결코 극복할 수 없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 내지 부족은, 한국의 노동자계급 구성원 가운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 그러나 다만 정서적이고 정제되지 못한 반제․반미 문제의식을 가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투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물론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운동․투쟁'을 비판하는 이른바 좌파가 결코 원하지 않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 미군의 주둔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은 이들 좌파에게서 그에 대한 문제의식도, 투쟁도 발견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못하고 있고, 이 때문에 그들(NL)이 반제․반미 투쟁을 벌이는 쪽으로 가게 되고, 그(NL)쪽의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편향에 포섭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민족주의화․애국주의화 경향을 촉진․강화하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이른바 좌파 측의 한미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 내지 부족은 '좌파'에 의한 운동의 성격도 편향적으로 규정해가고 있다. '노동운동의 정치화' 혹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정치운동의 주요한 내용의 일부이어야 할 반제․반미라는 내용이 빠져 있기 때문에 운동의 정치적 내용 역시 공허해지고, 운동과 투쟁의 전투성에 상관없이 경제주의로 경사돼가고 있는 것이다. 즉, 운동과 투쟁의 주요 내용과 방향이 어쩔 수 없이 임금과 고용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성이 희박한 경제주의적 운동, 경제주의적 투쟁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한국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의 이른바 좌파 혹은 PD는 '우파' 혹은 NL의 '소부르주아적․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운동과 투쟁, 노선'을 비판하고 경원시하는 것을 넘어, 민족문제 혹은 반제․반미문제의 의의와 역사성, 그 정치성과 진지하게 대결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세와 인식, 투쟁을 통해서만 그들은 현실적, 실천적으로 유효하게 '소부르주아적․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운동과 투쟁, 노선'을 비판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의 그러한 민족주의적 편향을 극복하면서 해방을 향해 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이른바 우파 혹은 NL은 어떤가?

'자․민․통', 즉 '자주․민주․통일'이라는, 그들 사이에 보편적인 강령적 구호, 문제의식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말할 나위도 없이 이들은 반제․반미의 문제를 한국사회, 한국의 노동자․민중이 해결․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핵심적, 최우선적 문제로 제기하고 있고, 또 이를 위해서 실제로 '헌신적이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과 투쟁에 힘입어서, '좌파적 경향'으로부터의 수많은 비판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대체로 이러한 경향의 활동가, 조합운동가들로 재생산되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적극적․활동적 부분의 다수파를 점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이 반제․반미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헌신적이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 가고 있는 데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높고 귀중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 역시 몇 가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적 문제를 안고 있고, 그 중에 어떤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반제․반미의식이 대체로 몰계급적, 따라서 소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인데, 이 점을 잠깐 뒤로 미루자면,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의식과 투쟁에는, 마오(毛) 식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전술적 시기" 혹은 "주요모순"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거나 잘못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전술적 시기와 그에 따른 주요모순을 고려하지 않고, 반제․반미의 문제․투쟁을 '사실상 언제나' '최우선적 과제', '최우선적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예를 들어,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직후부터, 그러니까 이미 오래 전에 운동을 청산한 사람이지만, 아무튼 당시 이러한 민족주의적 조류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었던 모 씨가 1980년대 후반에 [모순론]을 비롯한 마오의 몇몇 저작을 번역․출판해내면서,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은 계급모순이며, 그 주요모순은 민족모순" 운운했던 데에서 대표적으로 그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과 경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파' 혹은 NL이 이렇게 전술적 시기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사실상 언제나' 반제․반미 문제, 그 투쟁을 '최우선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운동과 투쟁이 '좌파' 혹은 PD의 비판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파' 혹은 NL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아까도 지적한 것처럼, 한미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투쟁이 다분히 몰계급적, 즉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들은 미군의 주둔도, 미국의 지배도, 남․북의 분단과 대치도 계급적 대립․투쟁․지배의 외화형태, 현상형태로 파악하고 대응하는 대신에 이것들을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노동자계급은 반제․반미 투쟁에서 물론 '주력부대'로 간주되고 있지만, 이는, 그들이 처해 있는 계급적 처지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국민 가운데 양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편의주의적인 이유 때문이다.

노동자계금운동 내의 이들 '우파' 혹은 NL의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경향은 이데올로기적으로뿐 아니라 현실적인 인맥, 운동에서도 그러한 경향의 소부르주아 인사들, 운동단체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데, 그 몰계급성 때문에 그들의 운동과 투쟁, 노선 등은 대단히 혼란되고 모순된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자본주의 국가는 당연히 지배계급으로서의 (독점)자본가계급의 지배․이해조정 기구이다. 그리고 당연히 종속적 한․미(․일) 동맹의 주체이고, 노동자계급으로서는 화해․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다. 그런데 저들은 국가에 대한 이러한 계급적․과학적 인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와 정부를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으로 파악하여 '반미투쟁의 동반자'인 것처럼 인식하고 대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같은 민중주의적 성향의 정권 담당자들은, 예컨대 최근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같은 것을 "국가 주권의 문제" 운운하면서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저들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경향의 담당자들은 예컨대 미군의 주둔을 지지․옹호하고 평택으로의 미군기지의 확장 이전을 강행하는 자들과 전시작전통제권 문제와 관련하여 '주권' 운운하는 자들이 정확히 동일한 자들이고 동일한 세력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고 대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저들의 이러한 혼란과 모순은 당연히 직접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그 운동을 약화시키고, 그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국가, 자본, 계급 등의 문제에 대한 화려한 수사(修辭)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계급적․과학적인 인식과 대응은 없기 때문인데, 예컨대 지금 민주노총 지도부나 한노사연(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의 이데올로기 단체들이 이른바 '노사정(대표자)회의' 참가 등으로 벌이고 있는 코퍼러티즘적, 사회적 합의주의적 행보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노동자계급 해방의 노선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철저히, 그러나 다만 주관적으로는 경제적 고통을 약간은 완화시킨 형태로, (독점)자본가계급에게 종속시켜두려는 노선이다.

이외에 저들의 몰계급적인 민족주의, 국가․애국주의는 자신들의 대오 속에 진한 출세주의를 낳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계급운동은 대개 활동가로서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궁핍과 그에 따른 생활상의 고달픔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드물지 않게 외부의 화려한 유혹이 손짓하곤 하기 때문에, 기왕에도 적잖은 변절자, 청산자를 낳아오고 있었고, 특히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에는 더욱 그래 왔다. 그런데 민족주의적, 국가․애국주의적 경향은 거기에 또 다른 동기, 즉 그 변절과 청산을 자신들의 '애국' 등의 명분으로 변호하면서 그러한 변절과 청산을 더욱 부추기는 동기를 안고 있다. 그러한 변절과 청산, 출세주의에는 당연히 수많은 비판과 비난이 가해지기 때문에 그 변절․청산․출세자 역시 어쩔 수 없이 때때로 회한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그러한 회한과 죄의식을 달래면서 당연한 당위인 애국을 위해 자신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라고 정당화․합리화시켜 주는 것이다. 반제․반미를 얘기하면서도 한․미․일 삼각동맹의 한 축인 한국 정부, 특히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 등에,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 단체 등에 유난히 많은 NL적 성향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출세'해 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일을 무어라 합리화시키고, 자부심을 과장하든, 그들은 변절자이고, 착취된 잉여노동의 사냥꾼일 뿐이며, 착취․지배세력, 지배장치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른바 우파 혹은 NL의 반제․반미 의식과 투쟁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계급적․과학적 관점과 인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관점과 인식에 기초한 그것인 한, 그 투쟁과 노선은 그 자체로서도 혼란과 모순에 찬 것, 그리하여 독점부르주아지에 의해서 자주 교활하게 이용당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노동자계급운동의 발전을 다분히 저해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 관점과 인식은 시급히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둘러싼 공방


최근에는 한․미 문제, 혹은 한․조․미의 문제가 어느 때에 못지않은 첨예한 문제로 정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우선, 목을 조여 조선[북]의 정권과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미국의 의지가 '북핵' 문제니, 북의 미사일 문제니, '위폐' 문제니 등등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문제들을 유발하면서 동북아의 정세를 긴장시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도, 그 정치적․계급적 성격에 대해서도, 서두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여기에서는 논의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음에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 문제나 한미 FTA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조금만 정치적․계급적 시각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누구의 눈에나 전선과 그 성격이 명확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자.

여기에서 특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 사회의 지배계급․지배세력 내부에서 오히려 시끄럽게, 그리고 외관상으로만 보면 짙은 적의조차 숨기지 않으면서 주고받고 있는, 한미 간의 '전시작전통제권'의 귀속을 둘러싼 공방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과 그를 지지하는 일부 '개혁언론'은 늦어도 1912년 이전, 빠르면 2009년 중에 그 '환수'를 추진하고 있고, 이에 반해서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이나 한나라당, 기타 전통적인 극우․파쇼적 관변․사회단체들, 기독교단체들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이를 규탄,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수만․수십만의 대중을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서울역 광장에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보여주곤 한다.

이 전선의 성격은 과연 무엇인가?

전시작전통제권의 이른바 환수 문제를 둘러싸고 노무현 정권과 극우세력․단체들 간에 주고받고 있는 공방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 사이에 마치 어떤 계급적 적대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회에서 독점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헤게모니가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관철됨으로써 생기는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 그들 간의 대립은, 그것이 아무리 격렬하게 진행되더라도, 어떤 것이 미국(의 독점자본)과의 동맹을 강고하게 유지하여 노동자․인민에 대한 내외 독점자본의 확고한 지배를 계속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냐에 대한 판단을 둘러싼 지배계급 내부의 투쟁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와 주고받고 있는 공방의 성격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칭 타칭의 많은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헛소리들을 해댐으로써 대중을 오도하고 있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예를 들자면, 지난 8월 하순에, '개혁신문'으로 통하는 모 신문에 실린 이 모 교수의 "전시작전권과 여론의 과잉 흥분"이라는 논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 "폭염 속에서 별안간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가 달아올랐다. 국내의 보수와 진보는 두 패로 갈라져 끝장 토론을 벌이다가 광복절에는 거리에서 세력 대결을 벌였다." 운운.

다름 아니라,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문제 혹은 그 '환수' 시기 문제를 둘러싼 작금의 공방을 지배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제시하는 대신에 "국내의 보수와 진보" 간의 투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 혹은 관점은 단지 문제의 이 모 교수만의 것이 아닌데, 이는 이들 자칭 타칭의 진보적 교수들이 좌측은 보지 못하는 (극)우향 시야협착증에 걸려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극)우향 시야협착증의 원인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및 헤게모니의 일방적 관철이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및 헤게모니의 이러한 일방적 관철은 한국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특히 지난 세기 말에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의 현 반동기에는 사실상 세계적인 현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극)우향 시야협착증 또한 세계적인 유행병증으로 되어 있다.

예컨대, 요즘 새삼스럽게도 경북대의 김형기 교수 등이나 열린우리당의 김영춘 의원 등이 사실상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고 "수구좌파로 전락할 위험성" 운운하는 말과 함께 다시 제기하고 있지만, 본래 영국노동당의 블레어 정권이나 독일 사민당의 쉬뢰더 정권의 사실상 공식적인 노선으로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김대중 정권 시절에 권력에 참여한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교수 등이 복창함으로써 잠시 유행했던 이른바 "제3의 길"이니 "새로운 중도"니 하는 잡담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를 "우로는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좌로는 사회주의의 경직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이념"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것은 다 그만 두더라도, 그들이 "좌측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의 실체는 사실은 "좌측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우익화된 현대 사회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렇게 우익화된 현대 사회민주주의가  "좌측의 사회주의"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독점자본의 세계를 넘어서 그 좌측은 볼 수 없는 예의 (극)우향 시야협착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고, 이는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가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관철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병증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를 둘러싼 공방을 그렇게 "보수와 진보" 간의 투쟁으로 보는 것도 바로 실제의 진보는 보지 못하는 그러한 (극)우향 시야협착증의 발로인 것이다.

나는 지금,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문제를,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이 '주권'의 문제로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그 및 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이른바 '개혁언론'이나 '개혁적․진보적 지식인들'이 특히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선거 등을 염두에 두고 '정략적인 동기와 목적에서' 그것을 주권의 문제로 주장하든 말든,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문제는 분명 국가주권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노무현 정권은 민중주의적인 호재를 쥐고 있는 것이고, 한나라당 등은 극우적․주관적 확신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정치적으로 바보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들 지배계급 내부의 정파적 이해관계야 어떻든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문제인 것은 그것이 주권의 문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주권, 그 국가의 계급성이다. 즉, 예의 문제를 둘러싸고 지금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저들이 모두 사실은, 노동자․인민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들이 대표하고 있는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그렇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지배계급, 지배 엘리트들과 미국(의 독점자본)과의 관계를 간파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동안 독점자본을 위시한 지배세력,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헤게모니가 외관상 안정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일방적으로 관철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한편에서는 국가보안법 등의 파쇼적 법률의 지배를 통해서이고, 다른 한편에서 궁극적으로는 오직 한미동맹이 강고하게 존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시기) 문제를 둘러싸고 지배계급 내부에서 저토록 격렬한 공방․투쟁이 벌어지는 것도 바로 그것, 즉 저들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유지․관철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오직 한미동맹이 강고하게 존재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뒤집어 얘기하면, '해방' 후 한국사회의 계급투쟁이 그만큼 격렬했고, 지금도 비록 기본적으로는 잠재적이지만 역시 그렇게 격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한국의 토착 지배계급은 단독으로는 불가능하고, 미국과의 강고한 동맹에 의해서만 그 지배를 유지․관철할 수 있는 것이고, 저들 스스로 누구보다도 더 잘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저 소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가 어느 지역의 주민과 민족을 안정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 주민과 민족 내부에 그만큼 강력한 현지 동맹자가 존재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지배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인가 하는 것은 비근하게 오늘날 우리가 예컨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목격하고 있는 그대로다.

따라서 미국은 그러한 이유와 동기, 목적에서 그 동안 이 땅의 각계각층에 그들의 동맹자들을 광범하게 계획적으로 육성해 왔다, 다양한 방법과 지원을 통해서. 예를 들면, 군대나 각 방면의 관료계, 그리고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학계와 예술계에 걸치기까지 미국은 과거 수십 년간 수많은 '유망한' 인재들을 예컨대 미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 연수기관 등에 예컨대 스칼라쉽(장학금)을 제공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유학시켰고, 그리하여 그들의 동맹자, 자발적 현지대리인으로 키워왔고, 바로 그들이 오늘날 이 사회의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고, 각계에 강고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동맹세력은 한국의 독점자본이고, 이들 역시 미국에 의해서 육성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은 냉전기에 자본주의 경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쇼윈도우'로서 한국경제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을 비판적 견해랍시고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경제를 '쇼윈도우'로서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을 현지 동맹세력, 지배의 현지 대리인으로서 육성한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 문제로 되돌아가면, 오늘날 그것을 둘러싸고 저들이 벌이고 있는 소동은 바로 상황과 전망에 대한 그들 간의 견해․판단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을 비롯한 '조기환수파'가 조기 환수야말로 주한미군을 위시한 해외주둔군의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는 미국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며, 그렇게 부합함으로써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에 반해서, 한나라당이나 기타 전통적인 극우세력들은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를 계기로 한 한미연합사령부의 해체가 한미동맹의 약화로, 따라서 독점자본 지배의 약화․위기로 귀결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서 그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과연>


정세

한미관계와 한국의 노동자계급

―'전시작전통제권' 관련 공방을 보면서―



채만수 |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