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첫번째

이 책에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뒤 한참 고심을 했다. 어떤 내용을 어떤 수위에서 쓰는 것이 좋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간인학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즉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는 원론적인 시각, 피해구제와 사회정의의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쟁점과 현안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글의 내용과 질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민간인학살 문제는 이미 일이 광범하게 진행된 과거사인 동시에, 그 영향이 현재까지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과 투쟁들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현재사이기도 하며, 또한 향후 한국사회의 진로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척도가 되는 미래사이기도 하다. 나의 고민은 현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 어찌 보면 지극히 지엽적이고도 첨예한 문제에 집중돼 있는 터라, 그 고민을 함께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과 어떻게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지난번 첫번째 글에서는 비교적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행수필 형식으로 운을 떼어보았다. 그러나 기초적인 이해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전달될지, 혹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지 하는 우려에 마음이 생각만큼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서 이번 호부터는 앞으로 두세 차례에 걸쳐 우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글을 나눠 실은 뒤, 그뒤부터 현안이나 쟁점, 본질, 현상을 짚어보는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아직까지도 민간인학살 문제는 그 의미심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서 변방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회운동가들의 이해 수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만 글 사이사이에 현안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간간이 짚어 현장성을 보완해볼까 한다. 피와 살이 튀는 좀더 생생한 글은 그후에 쓰겠다. 관심있는 분들은 www.genocide.or.kr를 가끔 들여다보시길 권한다.



1. 죽이는 이야기


전쟁 때 한반도에서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 저질러졌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온 산하가 피로 철철 넘치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우리 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자 등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반백년 전 우리 대한민국은 온갖 유형의 ‘학살’의 전시장이요 백화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죽었느냐고?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전투로 인한 군인, 민간인 희생자를 제외하고 순전히 ‘학살’당한 민간인만을 센 숫자다.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


전쟁 때는 으레 사람이 많이 죽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전투와 무관한 학살이 굉장히 많았다! 아무리 전쟁 때라도 전투와 무관하게 자행된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또 적군이라도 항복의사가 명백하다면 처형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이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은 최후까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라는 이름에 걸맞은 보편적인 상식이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범주 안에 넣어주기 힘든 인간들이 많아 인간성을 다채롭고 화려하게 만들긴 하지만...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잔인한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다. 총살과 기총소사, 폭격에 의한 참살은 기본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굶겨죽이고, 산 채로 생매장해 죽이고, 물 속에 처넣어 죽이고, 굴 속에 떨어뜨려 죽였다. 목 졸라죽이고, 껍질을 벗긴 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찢어죽이는 끔찍한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고,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을 대신 죽인 경우,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일가족을 몰살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죽인 사람도 가지각색이었다. 남한 측에서는 미군과 국군과 경찰이, 그리고 비정규무장대와 치안대가 학살의 전선에 나섰고, 북한 측에서는 인민군과 빨치산, 지방 좌익세력이 크고 작은 학살에 가담했다. 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이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수가 적이 아니라 우리 군경에 의해 우리 국민이 집단학살당했다는 점이다. 전체 학살 중 미군,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와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이 다수를 차지하고,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훨씬 적다. 당시 이승만 정권과 그 후견인인 미국이 다수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또는 묵인했다는 증거가 적지 않다. 이는 국제법과 인도주의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국민주권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비추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이자 국가폭력이었다.


죽은 사람도 천차만별이었다.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가 몰살되다시피 했고, 부역혐의자와 제2전선 지역 주민, 통비혐의자, 피난민이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 없이 붙잡혀가 불귀의 객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고, 미군과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편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분류된 친일파, 친미파, 경찰관, 우익단체원, 군인가족들도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요컨대 피학살자는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치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우익인사 등, 사실상 국민 모두였다.


크고 작은 학살 현장에서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의 향연이 난무했다. 반도 곳곳에 인권유린의 전시장이 설치되었고,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들이 자행되었다. 부녀자의 강간 능욕은 기본이고, 젖가슴 난자 살해 후 암매장, 알몸 고문, 부자간 뺨 때리기, 며느리 말태우기, 친족간에 생피붙이고 덥석 말아 굴리는 장면까지 연출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죽은 이의 부인을 강제로 첩 삼기까지 했는데, 천덕꾸러기가 된 전 남편의 아들은 문전걸식하는 거지가 되고 여자는 미쳐버렸다. 사람들을 상대로 일본도와 M1 소총의 성능을 실험하고 죽음까지도 실험 관찰하고, 가족이 총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죽은 아들의 간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게 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도 저질렀다. 일가족 몰살로 빈 집이 속출했고, 토벌군이 휩쓸고 간 마을은 잿더미로 화했다.


이런 참상들을 목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 악몽들, 눈을 감아도 질끈 동여 감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그 참상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제정신이었을까? 지난 반백년간의 우리 대한민국은 가히 거대한 정신병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을 보고 들은 이들, 광기에 휩쓸려 학살에 가담한 이들에게 그 기억은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일이었고, 도리질을 쳐서라도 꼭 떨어내야만 그래도 이 질긴 목숨을 연명해갈 수 있는 그런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학살을 자행한 권력은 남은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가 되었다. 특히, 우리 측의 군경과 우익단체,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예 없던 일로 하거나 사실을 거꾸로 왜곡했다. 그럼에도 간간이 비어져 나오는 학살의 진실은 철퇴를 맞았다. 학살의 ‘학’자라도 입밖에 꺼내는 사람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 되었다.


도매금으로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 피학살자의 유족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재포장했다. 군대나 우익단체에 들어가 신분을 ‘세척’했다. 권력의 실세가 된 가해자 집단과 어울려 그들과 교분을 쌓았다. 핍박받는 고향을 등지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 새롭게 정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2세들에게까지 할아버지 세대의 죽음의 진상을 함구하면서, 오히려 ‘입 조심, 몸 조심’을 가훈으로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죽은 이들과 함께 학살 사실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일백만의 우주와 함께 온 우주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우주가 열렸다. 그 곳은 오로지 오른쪽으로만 보고 오른쪽으로만 듣고 오른쪽으로만 생각하는 세계였다. 왼쪽으로, 아니 한가운데로라도 눈을 돌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별난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중립적인 사고도, 합리적인 사고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되는 평화통일론조차도 당시에는 ‘빨갱이’ 사상으로 몰렸다.


어디에 그런 세계가 있었느냐고? 반도의 남쪽,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북쪽도, 한반도 전역이 모두 그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그 잔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대명천지에 무슨 그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딴 나라 이야기 아니냐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유태인 학살이나 남경 대학살, 만주의 731 부대, 캄보디아, 베트남, 르완다, 칠레, 아르헨티나, 코소보, 동티모르, 아니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이야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 대한민국의 이야기다. 반백년 전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반백년 전, 한반도는 피바다였다. 대립과 원한과 증오와 복수의 피바다였다.



2.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왜 그랬을까? 전쟁 때는 물론 사람이 많이 죽는다. 전투중에든 전투와 무관하게든 많은 사람이 죽는다. 전쟁은 누가 뭐라 해도 적을 섬멸하는 과정이고, 후환을 없애고자 때로는 적의 씨까지 말린다. 예로부터 반역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관행이 있었지 않나?


그렇다면 승자의 시각에서 그때를 한번 돌아보자. 자료와 정보가 제한된 북한 쪽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가 사는 이곳 남한 쪽 승자의 시각에서 상황을 돌아보자.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당시의 권력자에게 그토록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까?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이 시작된 기점은 4.3과 여순사건이다.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다. 그에 앞서 1946년의 대구 10.1 사건 직후의 대대적인 탄압과 민간인학살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학살이 그렇게 광범하진 않았다.


1948년 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폭넓은 저항과 반대가 시작되었다. 단선단정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당시 5.10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참고로, 당시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이에는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단선단정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곧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즉,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에 국민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8 투쟁, 제주 4.3 등이 그 반영이었고, 5.10 선거, 8.15 정부수립 이후까지 계속된 제주 항쟁, 뒤이은 여순 항쟁이 그 속편이었으며, 8.15에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저항에 무자비한 진압과 민간인학살로 대응했다. 이후 국민적 저항의 중심은 평지를 떠나 산으로 진지를 옮겼고, 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작은 전쟁’의 평지판, 도시판은 파업과 쟁의, 폭력과 테러와 암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이승만 정부와 그 일파는 저항을 억누르고 체제를 굳히고자 1948년 말에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49년에는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청년단체를 하나로 통합해갔다. 일종의 병영국가, 전시체제를 구축해간 것이다.


6.25전쟁은 해방공간의 난맥상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대신 일거에 폭력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 책임에서는 북도, 남도,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남쪽에는 극우반공체제의 기반이 굳혀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남한의 강력한 후견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전쟁기 남한 지역의 민간인학살은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승만 정부와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하여 이승만 정부를 주무르고 있던 미국의 정략적 판단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어찌 보면 전쟁은 기회일 수 있었다.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빈 곳을 메우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나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섬멸’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전쟁의 속성을 잘 알았고, 잘 이용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졌다. 한 술 더 떠서, 순수한 반공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을 물렸다. 살아남은 국민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맹목적인 반공주의자, 맹목적인 반공국가의 신민이 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처럼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체제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졌다.


요컨대, 한국전쟁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극우반공체제를 정착시켜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어떻게 친일파가 득세하고 또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는 것도 그 하나다. 그 경위는 이렇다. 해방 후 3년간 이 땅에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주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의는 높았으나,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들을 대부분 재등용했다. 기회를 엿보던 친일파들은 일제하의 지위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대한민국에서도 지배세력이 되었다. 친일파들에게 자신들의 전력을 잘 아는 독립운동가들은 눈엣가시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친일파들은 구세주로 등장한 ‘반공’을 기치로 내세우며 좌익계는 물론 우익계 독립운동가들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다. 전쟁이 끝나면서 친일파들은 남한의 강력한 기득권층을 형성했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학살자들이 친일파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미군정을 중심으로 친미파가 폭넓게 형성되었고, 친미파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했다. 미군정과 이후의 미 군사고문단, 전쟁 후 진주한 미군은 친미파를 앞세워 자신의 걸림돌을 치워나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최고위층은 대부분 친미파였고, 남한의 최고위층에서 학살 지시가 내려졌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그뿐 아니라 미군은 직접 학살에 가담도 했다. 잘 알려진 노근리 사건, 곡계굴 사건말고도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학살 사례는 무수히 많고, 부산 대구 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되었다.


국가보안법도 이 학살의 와중에 만들어졌다.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에 악용돼옴으로써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 태생을 살펴보면 법이 악용되었다기보다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반민족적, 반역사적 행위였다.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밖의 많은 단선단정 반대투쟁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정권안보를 위해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1948년 12월 1일), 이어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1949년 6월 5일) 분산된 우익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정권의 보위에 나선다. 즉, 정권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후 군사독재권력이 반공을 빌미로 민주인사 탄압에 이 법을 남용하면서 국보법의 폐해가 더욱 커져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일차적 책임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국민의 군대와 경찰과 그 위임을 받은 우익단체가 오히려 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 기간과 이후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 그리고 1950년 7월 초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넘어간 상황 등을 감안할 때 미군의 직접 학살은 물론 이 기간에 자행된 모든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미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민간인학살은 제네바협약에 반하는 전쟁범죄이며 국제법상으로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 물론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의 경우에는 북한 정부와 당시의 좌익단체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


전쟁중의 학살이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느냐, 학살 명령이 모두 불가역적이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반문도 가능하다. 학살의 와중에서도 가끔씩 ‘선한 이웃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서는 지서장과 의용소방대장이 학살명령에도 불구하고 200명을 살려주었다. 그 결과 인민군 점령기나 국방군 수복시에도 아무런 학살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군 출신이던 제주도 성산포 경찰서장 문형순은 해병대 정보참모로부터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1950년)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라는 공문 지시를 받았으나 지시가 "부당함으로 불이행"하겠다고 하여 그곳 관내에서는 다행히도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4.3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수자 110여 명을 무죄 방면하기도 했다. 충남 천안에서도 다른 시군과는 달리 경찰서장 등의 결단으로 보도연맹 학살이 없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우리 마을은 덕망있는 아무개의 지도하에 서로 서로 보호해주는 분위기여서 점령 전후, 수복 후에도 학살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그러나 전쟁은 없던 틈도 벌려놓는 속성이 있어서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고,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이성을 잃은 국가권력이 있었다.




3. 학살의 성격과 그 영향


일반적으로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집단 등의 전체 또는 부분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행해진 학살”을 집단학살(genocide)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수많은 집단학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이 연구된 유태인 학살은 특별히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규모의 무차별적 학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량학살(massacre)이라는 말이 있다. 학살은 또 그 성격에 따라 인종, 종교, 정치, 이념적 학살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대부분 정치적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공정권 또는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적하에 정치적 반대자나 그 동조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으므로 이념적 학살의 성격도 강하다. 한편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의 경우에는 인종차별적 성격도 짙게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해방 이후의 국민국가 수립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폭력, 내전의 와중에 일어났고 내전 당사자들인 국가가 사실상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 국가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 냉전체제 수립 과정에서 한반도에 우익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외세에 의한 학살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반면에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의 경우, 학살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군과는 크게 대비된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또한 일제하 폭력체제의 연장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식민지 지배의 기둥이던 치안유지법의 연장으로서, 일제 말의 사상범 통제정책을 답습, 강화한 것이었다. 계엄령과 예비구금, 사상전향제도 역시 일제의 유산으로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제도들을 불법으로 적용하여 학살을 뒷받침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 반공주의는 ‘반공’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고 공산주의는 완전 박멸해야 한다는 파시즘 논리의 극치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하의 억압기구인 일제 군대와 경찰을 그대로 살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은 자신의 친일 전력을 반공으로 포장하면서 야만적인 학살의 최전선에 나섰다.


20세기의 현대전에서는 총력전과 비무장민간인의 대량학살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적 자원이 총동원되고 군사영역과 민간영역이 잘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인학살이 광범하게 자행되는 것이다.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명령체계에 따른 기계적 업무수행을 구조화하여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불식시키는 관료제, 이른바 ‘깨끗한 살인’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발전 등이 대량학살을 촉진한다. 한국전쟁에서도 이와 같은 현대전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법적으로 보면,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법조문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의 생명과 신체 보호는 국가의 제일차적 임무다. 그런데 국가가 스스로의 기본 임무를 버리고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그것도 집단으로 앗아가버린 것은 국가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 최고최대의 국가범죄다. 민주주의 원칙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기본권 중의 기본권을 유린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국가범죄다. 국가 스스로가 국민 통합체임을 포기하고 일부 국민 또는 다수 국민을 적대시한 자기 존재 부정행위다.


다시 말해서,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로서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이 국가권력의 명목하에 국가권력 자체를 유린한 행위이며, 국가권력의 주체인 다수 국민들의 생명과 존엄을 유린한 행위다. 민간인학살은 수임자인 정치권력이 위임자인 국가권력의 주체를 유린한 행위라는 점에서 헌법질서를 파괴한 초월적 위법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왜 흔히 알려진 ‘양민학살’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민간인학살’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것이다. ‘양민’이라는 말에는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뜻과 함께 ‘착하다’ ‘사상적으로 건전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않은’ 좌익은 적법한 절차 없이도 죽일 수 있다, ‘빨갱이는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는 우리 헌법에서도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는 만인의 권리이고, 설사 좌익이었다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전시라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 이후의 역대 독재권력이 반독재 인사들을 늘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탄압, 고문, 살해했던 점을 상기해보면 ‘양민’이라는 말이 얼마나 반인권의 소지가 많은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반인권적 해석이 따르는 양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종전 후 한국은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 같은 적극적 이념이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안티테제인 반공이 사실상 ‘국시’로 간주되는 단일 응집체가 되었다. 평등은 물론 통일과 평화와 민주와 자유라는 말까지도 불순한 말이 되었고, ‘평화통일’ 주장까지도 사상을 의심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맹신적 반공주의가 반도의 남쪽을 휩쓸면서 사회 곳곳에 ‘레드 콤플렉스’가 굳게 뿌리내렸다. 국민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며 자라났는데, 심지어는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서울역 출정을 앞둔 대학 내 결의대회에서 한 총학생회장까지도 자신의 ‘순수함’을 과시하고자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고 거리에 나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전시만이 아니라 종전 후에도 ‘빨갱이’는 거의 다른 인종으로 간주되었다. 이웃 부족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먹을 게 없어지는 사막지대 가뭄 때의 야만스런 부족들처럼, 종족이 다른 부족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먹어 치워버리는 식인종 부족들처럼, 이 땅의 우익들에게 빨갱이는 죽여도 괜찮고 고문을 하고 온갖 인권유린을 해도 괜찮은 다른 인종이었다. 그리고 이 땅의 민초들은 서슬 퍼런 그 기세에 눌려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했다. 심지어는 국가 범죄에 자신의 부모형제자매를 잃은 유족들까지도 자기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거듭거듭 되뇌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대규모 집단학살과 뒤이어 정착한 맹신적 반공주의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랐다.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보신주의,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어심리,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주의, 사회문제나 사회적 의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소신과 무책임, 가진 자, 힘센 자에게 굴종하는 비굴함, 정도보다는 편법을 좇고 기만도 서슴지 않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악한 물신숭배와 권력추구, 웬만한 인권유린에는 눈도 깜빡 안 하는 극도의 인권 불감증, 극단적 잣대로 사상과 이념과 양심을 백안시하는 지적 풍조, 민주적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지역부터 전국까지 극우패거리들이 판치는 패권사회 등등이 모두 그 유산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이렇듯 우리 사회를 불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반공의 천국이 되었고, 이 나라에는 합리적 사고는 물론 중도적 사고조차도 설 땅이 없었다. 대다수의 대한민국인은 일종의 정신적 불구자였다. <노사과연>


(오늘은 여기까지... 지면이 허락한다면 다음 호에는 이런 참혹한 학살이 지금까지 어떻게 은폐, 왜곡돼왔는지, 그리고 그 학살의 여파는 어땠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미리 예고하자면,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은 지금까지도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좀더 냉정하게는 학살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나선 지금의 진실화해위원회조차도 학살 사실을 축소 왜곡하여 또 한 번의 학살을 자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이해, 그 첫번째



이무열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