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한 노동자 당의 태도

번역 : 최상철(운영위원)



[역자 주 : 이 글은 V. I. Lenin, “The Attitude of the Workers’ Party to Religion”, Lenin Collected Works, Progress Publishers, 1973, Moscow, Volume 15, pp. 402-413.)을 번역한 것이다. 전진출판사판 [레닌 저작집 4-3], 1991, pp. 404-413, p. 570의 번역을 참조하였다. 원문은 1909년 5월 13일(신력 26일) [프롤레타리](Proletary) 제 45호에 발표되었다]




종교회의예산 논쟁 동안 수크로프 의원이 두마에서 한 연설과, 우리의 두마 그룹이 이 연설초안을 검토할 때 내부에서 일어난 토론(둘 다 이번 호에 실렸다)은 지금과 같은 특수한 시점에 극히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를 제기했다. 종교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한 관심을 오늘날 많은 “사교”써클들이 보이고 있으며, 이 관심은 노동계급운동 가까이 있는 지식인 대열뿐 아니라 약간의 노동자 써클들에도 침투했다.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공개 진술하는 것은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절대적 의무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전체 세계관은 과학적 사회주의, 즉 맑스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누차 천명한 바와 같이 맑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과 독일 포이에르바흐 유물론(19세기 전반기)의 전통을 온전히 이어받은 변증법적 유물론 ― 절대적 무신론이며 모든 종교에 대해 단호히 적대적인 유물론이다. 유물론자이자 무신자론자이지만 일관된 유물론자가 아니고 종교와 종교적 철학에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놓은 듀링에 대한 기소장인 엥겔스의 [반듀링론](맑스는 수고로 읽었다) 전체를 상기해 보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그의 논평을 상기해보자. 엥겔스는 포이에르바흐는 종교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혁신하기 위해서, 새로운 “고양된” 종교를 발명하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종교와 싸운다고 비판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 맑스의 이 언명은 전체 맑스주의자 종교관의 주춧돌이다.1) 맑스주의는 언제나 모든 현대의 종교와 교회, 모든 종교 조직을 ― 착취를 옹호하고 노동계급의 의식을 혼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 부르주아 반동의 도구로 간주해왔다.

그와 동시에 엥겔스는, 대종교전 선전포고라는 의미에서 노동자 당의 강령에 명시적인 무신론 선언을 도입하려는, 사회민주주의자들보다 “더 좌익적” 또는 “더 혁명적”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자주 비난했다. 1874년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블랑키주의 코뮨 망명가들의 유명한 선전포고에 대해 비평하면서, 엥겔스는 종교에 대한 떠들썩한 선언을 어리석음의 발로라 하고, 그러한 선전포고는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부흥시키고 진정으로 종교를 사멸케 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했다. 엥겔스가 블랑키주의자들을 비난 했던 이유는, 노동대중의 계급투쟁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층을 의식적ㆍ혁명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포괄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종교의 멍에로부터 피억압 대중을 진정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반면, 종교에 대한 선전포고를 노동자 당의 정치적 임무라고 선언하는 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적 주절거림임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 그리고 1877년 [반듀링론]에서 관념론과 종교에 대한 철학자 듀링의 아주 사소한 양보도 가차없이 공격함과 동시에, 엥겔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종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듀링의 사이비-혁명적 생각을 그에 못지않게 단호히 비난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종교에 대한 그러한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보다 더한 비스마르크가 되는 것(to out-Bismark Bismark)”이다, 즉 성직자들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어리석은 투쟁(악명높은 “문화투쟁”, Kulturkampt, 즉 1870년대 비스마르크가 카톨릭교에 대한 경찰 박해를 수단으로 독일카톨릭당 “중앙” 당에 대해 벌인 투쟁)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투쟁에 의해 비스마르크는 단지 카톨릭의 전투적 교권주의를 자극하고 진정한 문화활동에는 해를 입혔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는 정치적 분열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분열이 돌출하게 하여 노동계급과 다른 민주주의적 집단들 중 몇몇 부위의 주의를 계급ㆍ혁명투쟁의 긴급한 과제들에서 극히 피상적이고 거짓된 부르주아적 반교권주의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비스마르크의 바보짓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싶어하는 자칭 초혁명가 듀링을 비판하면서, 노동자의 당은 종교를 사멸의 길로 인도할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교육하는 임무를 끈기있게 수행할 능력을 갖추어야지, 종교에 대한 정치적 전쟁이라는 도박판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3) 이 견해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바로 본질적인 부분이 되었다. 예를 들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예수회에 대한 자유와 그들의 독일로의 편입, 그리고 각 특정 종교에 대한 경찰 탄압 방식의 완전한 포기와 같은 것들이다. “종교는 사적인 문제이다”: 에르푸르트 강령(1891)의 이 유명한 명제는 사회민주주의의 이러한 정치전술들을 총괄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이러한 전술들이 일상사로 되어왔으며, 반대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기회주의적 왜곡을 낳았다. 에르푸르트 강령의 이 명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인 우리가, 우리의 당이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또 종교가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로서, 하나의 정당으로서 우리에게 사적인 문제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엥겔스는 이 기회주의적인 견해와 직접 논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1890년대에 그것에 논쟁적인 형태가 아니라 실증적인 형태로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핵심적으로 말하면,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국가와 관련해서이지, 자기 자신들이나 맑스주의 그리고 노동자 당과 관련한 것은 아니라는 그가 신중히 밑줄을 그은 성명서의 형태로 이 일을 했다.4)

이상이 종교 문제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가 한 언명의 외(外)적 역사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저돌적인 태도를 지닌 이들에게는,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이 역사가 의미없는 맑스주의적 모순과 동요가 실타래처럼 얽힌 것, “일관된” 무신론과 종교에 대한 “뇌물”의 뒤범벅, 신에 대한 명전쟁(r-r-revolutionary war)과 신앙심 깊은 노동자들에게 “아첨하고”싶은 비겁한 욕망 사이의 “무원칙한” 동요, 그들을 놀래켜 도망가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등으로 보인다. 무정부주의적 말장사들의 문헌에는 맑스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식의 공격이 다량으로 들어 있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정말 진지하게 대할 수 있고, 그 철학적 원칙들과 국제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을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교와 관련된 맑스주의 진술이 철두철미 일관되며 맑스와 엥겔스의 조심스러운 사유의 산물이라는 점과, 어설픈 평론가와 무식쟁이가 동요라고 하는 것이 실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부터의 직접적이며 불가피한 추론 결과라는 점을 쉽게 알 것이다. 종교와 관련된 맑스주의의 외관상의 “중용”이 잠정적인 “전술적” 고려나, 누구도 “놀래켜 도망가지 않게 하려는” 바람 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류이리라. 반대로 이 문제에서도 맑스주의 정치노선은 그 철학적 원칙들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맑스주의는 유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18세기 백과전서파의 유물론이나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이 그러한 것처럼 종교에 대해 가차없이 적대적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백과전서파나 포이에르바흐보다 더 한층 앞선 것인데, 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 철학을 역사의 영역과 사회과학의 영역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싸워야 한다 ― 이것은 모든 유물론, 따라서 맑스주의의 ABC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ABC에서 멈춘 유물론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그 이상이다. 맑스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종교와 싸울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신앙과 종교의 원천을 대중 속에서 유물론적 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대종교투쟁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 설교에 제한될 수 없으며, 그런 설교로 변형되어서도 안된다. 그 투쟁을 종교의 사회적 뿌리 제거를 목표로하는 계급운동의 구체적 실천과 결합시켜야 한다. 왜 종교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후진적 부분들에서, 반(半)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부분들에서, 농민 대중에서 자신의 발판을 유지하는 것일까? 인민의 무지 때문이라고 부르주아 진보주의자, 급진적 및 부르주아적 유물론자는 대답한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다, “종교는 몰락하고 무신론이여 영원하라. 우리의 주요 임무는 무신론적 견해를 전파하는 것이다!” 반면 맑스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견해, 편협한 부르주아 도덕가들의 견해이다. 그것은 종교의 깊은 뿌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설명을 하기는 한다. 유물론적 방식이 아니라 관념론적 방식으로. 현대의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종교의 뿌리는 대부분 사회적이다. 오늘날 종교의 가장 깊은 뿌리는 사회적으로 짓밟힌 노동대중의 상태와, 매일 매시간 노동인민에게 전쟁과 지진 등과 같은 이례적 사건들보다 천 배는 더 혹독한 가장 끔찍스러운 고통과, 가장 야만적인 고문을 가하는 자본주의의 맹목적 힘에 직면한 노동인민의 명백한 속수무책인 상태이다. “두려움이 신을 만들었다.” 자본의 맹목적인 힘 ― 인민 대중이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맹목적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소유자의 생활의 걸음걸음마다 “갑작스런”, “예기치 못한” “우연적인” 파멸과 파괴와 궁핍과 타락 그리고 기아에 의한 죽음으로 위협하는 힘 ― 그런 것이 현대 종교의 뿌리이며, 유치원생 유물론자로 머무르고 싶지 않다면 유물론자가 제일 먼저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교육 서적도 대중들 스스로 종교의 이러한 뿌리와 싸우는 법, 즉 자본의 지배의 모든 형태에 대해 단결하여, 조직적이며, 계획적이며 의식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울 때까지, 자본주의적 고된 노동에 짓눌리고 자본주의의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힘에 좌우되는 대중의 마음에서 종교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이 말이 종교에 대항하는 교육 서적들은 유해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의 무신론 선전을 그 기본적 임무 ―착취자들에 대한 피착취대중의 계급투쟁을 발전시킨다는 임무 ― 에 종속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변증법적 유물론, 즉 맑스와 엥겔스 철학의 원리들을 숙고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명제를 이해할 수 없을지(최소한 즉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 하고 그는 물을 것이다. 명확한 사상의 설파인 이데올로기 선전,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문화와 진보의 적(종교)에 대한 투쟁을, 계급투쟁 즉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 명확한 실천적 목적을 위한 투쟁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최근에 맑스주의에 대한 이의들 가운데 하나로 맑스 변증법에 대한 완벽한 몰이해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 이의 제기자들을 혼돈케 하는 모순은 언어상의 또는 발명한 모순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현실적 모순, 즉 변증법적 모순이다. 이론적인 무신론 선전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정 부위의 종교적 신념의 파괴와 이 부위들의 계급투쟁의 조건, 진보, 성공 사이에 엄격한 선을 긋는 것은 비변증법적으로 추론하는 것이며, 이동하는 상대적인 경계를 절대적 경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 생활에서는 불가분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산업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의식적이며, 사회민주주의자이고 당연히 무신론자인 선진적 부분과, 아직도 농촌적 전통과 인습에 얽매여있고, 신을 믿고 교회에 다니며, 기독 노동조합도 조직하고 있는 지역 사제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다소 후진적인 노동자들로 나뉘어져 있다고 가정해 보자. 더 나아가 이 지역의 경제 투쟁이 파업으로 귀결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맑스주의자의 의미는 파업운동의 성공을 다른 어떤 것보다 우위에 두고,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무신론자와 기독교인으로 분열하는 것에 강한 제동을 걸며, 그러한 모든 분열에 강력히 반대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무신론적 선전은 불필요하고 유해할 수 있다 ― 그러나 후진적 부분들을 놀래켜 달아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선거에서 의석을 잃지나 않을까 하는 등의 속물적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현실적 과정에 대한 고려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이 과정에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조건에서 뻔한 무신론적 선전보다 백배는 쉽게 기독교적 노동자들을 사회민주주의와 무신론으로 개종시킬 것이다. 그런 순간 그런 상황에서 무신론을 설교하는 것은 사제 그것도 파업운동 참여에 따른 노동자들의 분리가 신앙에 따른 분리로 대체되는 것만을 바라는 사제들을 이롭게 할 뿐일 것이다. 무정부주의자가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신에 대한 전쟁을 설교했다면 그는 실제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항상 실제로 부르주아지를 돕고 있듯이) 사제들과 부르주아지를 돕고 있었을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유물론자 즉 종교의 적임에 틀림없으나, 동시에 종교에 대한 투쟁을 추상적인 방식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이론적인, 결코 변하지 않는 설교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진행되고 있고 다른 어떤 것보다 대중을 더 쉽게 교육할 수 있는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이다. 맑스주의자는 구체적 정세를 전체로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언제나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 사이의 경계선 ― 상대적이며, 이동하며, 가변적이지만 존재하는 경계선 ― 을 찾아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무정부주의의 추상적이며 말뿐이나 실제로는 텅빈 “혁명주의”에 굴복해서는 안되며, 마찬가지로 종교에 대한 투쟁에서 주춤하고 이 투쟁이 자신의 의무임을 망각하면서 신앙과 화해하여 계급투쟁의 이해가 아니라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아무도 쫓아내지 않는다는, 아무도 놀래키지 않는다는 쁘띠적인 비열한 타산 ―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등등을 지침으로 삼는 쁘띠부르주아적 및 부르주아적 지식인의 속물주의와 기회주의에 굴복해서도 안된다.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종교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와 관계된 모든 측면의 문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제가 사회민주당원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이 종종 제기된다. 이 질문에 대해 흔히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실례로 인용하면서 무조건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이 경험은 맑스주의의 원리를 노동자 운동에 적용한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는 없는 서유럽의 특별한 조건들(이 조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의 결과였으며, 따라서 이 경우 무조건적인 긍정적 대답은 옳지 않다. 사제들은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무조건 단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느 쪽도 그의 역규정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제가 공동의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에게 와서 당 강령에 반대하지 않고 당의 임무를 진지하게 수행한다면, 그에게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열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 강령의 정신 및 원칙과 그 사제의 종교적 확신 사이의 모순은 그 자신에게만 관련된 것, 즉 자기 자신만의 모순이고, 정치조직은 자기 당원들과 당 강령 사이에 모순이 없는지 그 성원들을 시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히도 그러한 사례가 서구에서조차 희귀한 예외라면, 러시아에서는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사제가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당 내에서 종교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하고 거의 전적인 활동으로 삼는다면, 물어 볼 것도 없이 당은 그를 대열에서 내쫓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사회민주당 입당을 허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집하는 데 신중하게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적 확신을 조금이라도 공격하는데 절대 반대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모집하는 목적은 그들을 우리 강령의 정신에서 교육하기 위한 것이지 강령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투쟁을 허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당 내에서 의견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이 자유는 그룹형성의 자유라는 한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당의 다수가 청산한 견해를 적극 설교하는 자들과 손잡고 나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 “사회주의는 나의 종교다”라고 선언하며, 또 이 선언과 보조를 같이하는 견해를 옹호한다면 사회민주당 당원들은 어떤 상황에서나 똑같이 견책받아야 하는가? 아니다! 이것이 맑스주의로 다시 말해 사회주의로부터 일탈임은 반박할 여지없이 확실하나, 이 일탈의 중요성, 말하자면 그 상대적 중요성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먼저 선동가나 혹은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는 사람이 자기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견해를 노동자들이 익숙한 용어로 더 생생하게 제시하기 위해 주제에 대한 소개로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다른 경우는 한 작가가 (예를 들면 루나차르스키5)와 그 동료의 정신에서) “건신주의” 또는 건신주의적 사회주의를 설교하기 시작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에 견책이 단순한 흠집내기 심지어 선동가의 자유, “교육” 방법을 선택할 그의 자유에 대한 부적절한 구속이라면, 두 번째 경우에는 당적 견책이 필수적이며 본질적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회주의는 종교다”라는 진술이 종교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형태라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주의에서 종교로 이행하는 형태이다.

이제 “종교는 사적인 문제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기회주의적 해석을 낳은 서구의 조건들로 넘어가자. 물론 그것에 공헌한 것은 일시적인 이득을 위해 노동계급운동의 근본적 이해를 희생하는 것과 같은, 전체로서의 기회주의를 낳은 일반적인 요소들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국가가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지만, 인민의 아편에 대한 투쟁, 종교적 미신에 대한 투쟁 등을 “사적인 문제”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기회주의자들은 그 문제를 사회민주당이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왜곡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기회주의적 왜곡(종교에 관한 연설을 검토하고 있던 우리의 두마 그룹 내부 토론은 이 점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에 덧붙여, 또한 종교 문제에 대한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오늘날 같은, 과도하게 표현한다면, 지나친 무관심을 낳은 특별한 역사적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들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종교와 싸운다는 임무는 역사적으로 볼 때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임무이며, 서구에서 이 임무는 혁명 시대에 또는 봉건제와 중세제도에 대한 그 공격 시대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상당 정도 완수되었다(혹은 방해받았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 전쟁의 전통이 있으며, 사회주의(백과전서파, 포이에르바흐) 태동 이전에 오래 지속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우리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조건 때문에, 이 임무도 거의 전적으로 노동계급의 양 어깨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쁘띠부르주아(나로드니끼) 민주주의는 이 점에서 (갓 태어난 검은 백인단6)적 카데트나, [베히]7)의 카데트적 검은 백인단이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 많은 일을 했다기 보다는, 유럽에서 이룩한 것에 비해 오히려 너무 적은 일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 전쟁의 전통은 유럽에서 무정부주의에 의한 이 전쟁에 대한 특히 부르주아적인 왜곡을 낳았는데 ― 맑스주의자들이 거듭해서 오랫동안 설명해 왔듯이 무정부주의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근거한 자세를 취한다. 라틴 국가들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과 블랑키주의자들, 독일에서는 모스트(우연인지는 몰라도 듀링의 제자였다)와 그 일당들, 1880년대 오스트리아의 무정부주의자들, 이들 모두는 종교에 대한 투쟁에서 혁명적 주절거림을 초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무정부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금 다른 극단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이것은 제법 이해할 만하고 어느 정도는 이치에 닫지만,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리라.

둘째로, 서구에서는 민족 부르주아혁명이 끝난 , 다소간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도입된 후, 종교에 대한 민주주의적 투쟁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제까지 부르주아 정부들이 교권주의에 대한 유사-자유주의적 “공격”을 조직함으로써, 고의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사회주의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던 사회주의에 맞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투쟁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한 것이 독일에서는 문화투쟁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교권주의에 대한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의 투쟁의 성격이었다. 노동계급 대중의 관심을 사회주의에서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서 부르주아적 반교권주의 ― 이것이 서구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종교투쟁에 대한 현대의 “무관심”이 확산되기 전에 성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아주 이해할 만하고 이치에 닿는데,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종교에 대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시킴으로써 부르주아적 및 비스마르크적 반교권주의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조건이 아주 다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우리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지도자이다. 그 당은 낡은 공식 종교와 그것을 소생시키려는 온갖 시도와 그것을 위해 새롭고 다른 근거를 마련하려는 온갖 시도를 포함한 중세제도의 모든 속성에 대한 투쟁에서 이데올로기적 지도자여야 한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국가는 종교를 사적인 문제로 선언해야 한다는 노동자 당의 요구를 종교는 사회민주주의자 자신들에게 또 사회민주당에게 사적인 문제라는 선언으로 대체해버린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회주의를 바로잡는 데 비교적 관대했다면, 러시아 기회주의자들이 이 독일식 왜곡을 수입하는 것에 대해 엥겔스가 백배는 더 혹독하게 비판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두마 연단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우리의 두마 그룹은 아주 올바르게 행동했으며, 이러하게 종교 문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든 언명의 기초로 기여할 선례를 창조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무신론적 주장을 아주 상세히 전개해야 했을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종교에 대한 투쟁을 과장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을 위험에 처하게 했을 것이다. 또 그렇게 했다면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적 투쟁과 사회주의적 투쟁 사이의 구별을 지워버렸을 것이다. 검은 백인단 두마에서 사회민주주의 그룹의 첫 번째 의무는 영예롭게 이행되었다.

두 번째 ―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 의무, 즉 노동계급에 대항해서 싸우는 검은 백인단 정부와 부르주아지를 지원하는 교회와 사제의 계급적 역할을 설명하는 것도 영예롭게 이행되었다. 물론 이 주제에 관해 더욱 더 할 말이 있고, 또 미래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수르코프 동지의 연설을 더욱 더 풍부히 하여 말할 줄 알게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연설은 우수했으며, 모든 당 조직들을 통해 그것을 유포하는 것은 우리 당의 직접적 의무이다.

세 번째 의무는 독일 기회주의자들이 그토록 자주 왜곡한 명제, 즉 “종교는 사적인 문제다”라는 명제의 올바른 의미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수르코프 동지는 이 일은 하지 못했다. 이 문제에서 두마 그룹 활동 초에 벨로우소프 동지가 저질렀고, 그 당시 [프롤레타리]가 지적한 바 있는 오류 때문에 더 더욱 유감스럽다. 두마 그룹의 토론에서 무신론에 관한 논쟁 때문에, 종교는 사적인 문제로 선언해야 한다는 유명한 요구에 대한 적합한 해석이라는 문제가 가려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두마 그룹 전체의 이 오류를 수르코프 동지에게만 전가하지는 않겠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문제를 충분히 명료하게 하지 않은 점에서 또 독일 기회주의자들에게 겨냥했던 엥겔스의 언명을 이해하도록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충실히 준비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 전체에게 책임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할 것이다. 우리는 두마 그룹의 토론에서는 사실상 그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혼란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맑스의 가르침을 무시하려는 요구는 결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 진행될 그룹의 연설에서 그러한 오류는 정정될 것임을 확신한다.

반복하건대, 수르코프 동지의 연설은 탁월했으며, 모든 조직은 그것을 유포해야 한다. 두마 그룹은 이 연설에 관해 토론할 당시 사회민주주의적 의무를 성심껏 수행하고 있음을 예증했다. 이제는, 두마 그룹 내부토론에 관한 보고서가 당 신문에 더 자주 게재되어 그 그룹과 당이 더 밀접해지고 당이 그 그룹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잘 알게 되어, 그래서 당과 두마 그룹의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적 통일이 확립되기를 바랄 뿐이다. <노사과연>


1) K.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the Hegelian Philosophy of Right)의 서문을 보라. (K. Marx and F. Engels, On religion, Moscow, 1957년, p. 42.)


2) F. 엥겔스, [망명문학. Ⅱ. 블랑키주의의 강령](Flüchtlings-Literatur. Ⅱ. Das Programme der Blanquisten)을 보라.


3) F. 엥겔스, [반듀링론], 모스크바, 1959, pp. 434~37(Anti-Dühring, Moscow, 1959, pp. 434-37)을 보라.


4) 이것은 K. 맑스의 팜플렛 [프랑스 내전]에 부치는 F. 엥겔스의 서문 (The Civil War in France, K. Marx and F. Engels, Selected Works, VoI. I, Moscow, 1958, p. 479을 보라)을 말한다.


5) 역주: 아나톨리 바시예비치 루나차르스키 (Lunacharskii, Anatorii Vasil'evich, 1875.11.23~1933.12.26) 1890년부터 혁명운동에 참가하였고 러시아 사회민주혁명당 2차대회부터 볼세비키에 가입하였다. 혁명 이후 에스파냐 대사와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6) 역주 : the Black Hundreds. 흑백인단(黑百人團)으로 번역하도 한다. 1905년 혁명 이후 제정러시아에서 결성되었으며 짜르 첩자들이 이끈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극우테러조직. ‘자유는 오직 죽은 자에게만, 산 자에겐 오로지 체포가 있을 뿐’이라는 말로 유명하다.


7) [베히](Vekhi: 이정표) ― N. 베르다예프, S. 불가코프, P. 스트루베, M. 헤르쉔조흔 및 그밖의 반혁명적 자유부르주아지의 대표자들이 쓴 카데트 논문모음집. 1909년 모스크바에서 출판되었다. 러시아 인텔리겐챠에 관한 논문들에서 이 필자들은 벨린스키와 체르니세프스키를 포함한 러시아 인민의 최고 대표자들의 혁명적 민주주의 전통을 실추시키려 했으며; 1905년 혁명운동을 비방하고, “총검과 감옥으로” “대중의 분노”로부터 부르주아지를 구해주었다고 짜르 정부에 고마워했다. 필자들인 인텔리겐챠에게 전제에 봉사하도록 호소했다. 레닌은 논문집 [베히]의 강령과 검은 백인단 신문 [모스코프스키예 베도모스티]의 강령을 철학과 저널리즘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비교하면서, 그 논문집을 “자유주의적 배신의 백과사전”, “민주주의에 퍼부어진 홍수같은 반동적 진흙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