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정치적 지체에 대하여

―다시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이하며―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 지체(遲滯), 정치적 불구(不具)가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비록 매우 느린 걸음으로일지라도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단결이 확대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대개 합법주의적․조합주의적 틀 속에 묶여 있는 것들이고, 또 비록 크게 위력적이지는 못할지라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멈추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 투쟁의 대부분은 목전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 매어 있는 것들이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이 새롭게, 그것도 폭발적으로 대두․발전하던 지난 1980년대 중․후반이나 90년대 초반의 운동에 비하면 그 변혁 지향성을 사실상 완전히 거세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치적으로 크게 후퇴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운동에서의 정치적 변혁 지향성의 상실과 부재, 그것은 물론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만의 특수 문제는 아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자본주의 세계 노동자계급운동의 일반적 상황, 특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의 그것은, 오히려 지난 1980년대 중․후반이나 90년대 초반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그것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이미 그 변혁 지향성을 잃고 있었고, 그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이렇게 그 변혁 지향성을 상실하게 된 데에는 물론 여러 가지 객관적 및 주체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리고 시대적․전통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어떤 것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와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 요인 가운데 사실은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우선 그 차이에 관해서 말하자면, 예컨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발생한,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사상적 충격․혼란이 변혁 지향성 상실의 직접적이고도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대표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시대적 특수성에 속할 것이다.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일본과 같은 국가들에서는 이미 변혁 지향성을 상실한 상태여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는, 그 변혁 지향성이 재생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는 작용했겠지만, 그것을 상실하게 한 요인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동운동이 그 변혁성을 상실하게 되는 데에는 서유럽 등 선진 자본주의에서 작용한 요인들이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1. 독점자본의 매수와 이데올로기 조작


가장 대표적․기본적인 것은 독점자본주의의 성숙에 따른 독점자본의 지배력의 강력화이다.

전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우선 독점자본은 그들이 획득하는 독점이윤의 일부를 할애하여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를 매수, 무력화시켰고, 시키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하자면, 예컨대 현대중공업노조나 KT(한국통신)노조와 같이 사실상 아예 드러내놓고 어용노선을 추구함으로써 널리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아직 '전투성'을 견지하고 있는 경우조차 대기업 노조, 나아가 대기업 노동운동은, 임금이나 고용 등 단지 목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와 관련하여 그러할 뿐, 대부분 정치적 변혁 지향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인 형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상 바로 오늘날의 민주노총의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민주노총은 전통적인 어용 한국노총 체제를 거부․극복한 자주적인 노동자계급운동의 중심으로서 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의 법제화․현실화를 반대하는 등의 '정치투쟁들'을 조직․선도하고 있지만, 그러한 '정치투쟁들' 역시, 변혁 지향적인 것이긴커녕, 경제주의적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투쟁들은, 이미 비정규직으로 '전락'해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공세적인 투쟁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정규직의 더 이상의 확산과 노동조건의 더 이상의 악화를 저지하려는 것, 즉 수세적인 것들이다. 물론,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가 악화되는 속도가 그나마 늦춰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투쟁의 의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튼 투쟁의 성격은 그렇게 경제주의적이고, 수세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자계급 상층부, 특히 대기업 노동자들의 노동귀족화가 상당히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러한 '노동귀족화'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조․중․동 등과 같은 파쇼언론, 그리고 이른바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을 규탄하는 '사회원로들'의 '비판'과 같은 방식, 사실은 그 적대와 같은 방식으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저들이 이미 19세기 30년대에 그 이론적 파탄이 공공연해진 '노동기금설'과 같은 엉터리 주장, 엉터리 선전에 기초하여 마치 대기업 노동자들의 '고임금'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임금의 원인인 것처럼 떠벌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고임금'을 위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과 그에 의한 임금 수준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그나마의 임금 수준을 떠받치는 주요한 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하는 '노동귀족화'는 그 정치적 변혁 지향성의 상실이고, 체제안주(體制安住)이다.

한편,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 변혁 지향성을 제거하고 무력화시키는 독점자본의 강력한 지배력은 거대한 대중매체를 통한 그 이데올로기 조작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조작은 다양한 방법과 수법을 동원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스포츠나 부르주아 대중음악, 연예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노동자 대중을 탈정치화시킴으로써이다.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함으로써 노동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과 그것들을 규정하는 사회적․정치적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씨름하는 대신에, 월드컵 축구대회나 야구경기, 유명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갖 신경을 쏟으면서 열광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월드컵 축구대회 등과 같은 국가 대항의 스포츠 행사와 대중매체를 통한, 그에 대한 대중의 포로화는 특히 대중의 탈정치화를 넘어 그들을 국가주의적․애국주의적으로, 즉 독점자본의 정치적 포로로 '정치화'시키는 작용까지도 강력하게 해내고 있다. (그리고 2002년 '한겨레신문'의 '월드컵 기획단'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내로라 하는 언필칭 진보적 지식인들도 그렇게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독점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앞장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에 의한 이데올로기 조작은 탈정치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다. 이러한 탈정치화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이어서 무언가 적극적인 방법으로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은 물론, 노동자계급의 변혁 지향성을 자극할 사상이나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나아가 침묵하도록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강제하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해서 온갖 비방과 모략을 퍼부으면서, 독점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을 반복함으로써 대중을 적극적으로 세뇌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강도의 세뇌 작업은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독점자본의 지배가 상대적으로 안정화되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 보다 세련된 세뇌 작업이 동원된다. 다름 아니라, 우리 사회의 대표적 예를 들면, TV의 '심야토론'이니 '100분 토론'이니 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심층적이고 비판적인, 그러나 실제로는 토론의 모든 당사자들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전제, 즉 독점자본의 지배를 당연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전제 위에서 있는 토론 프로그램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는 특히 '비판적 토론자'로 참가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당연히 누구보다도 효과적으로 대중조작을 담당하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실상 모든 토론 프로그램의 목적과 역할은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물론 여러 기회에 지적한 것이지만, 재벌(체제)의 폐해를 둘러싼 토론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토론에서, 재벌, 즉 독점자본의 단순무식한 대변인들은, 예컨대 조․중․동 등의 파쇼언론이 늘상 그러한 것처럼, 수많은 대중의 분노를 살 것이 뻔한 파렴치한 주장들을 펼치는데, 그 이유가 없지 않다. 첫째로는 그러한 파렴치한 주장도 이미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적 포로인 상당히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인 세뇌 작용을 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에 분노를 느끼는 '비판적인' 대중에게는 그에 반대 토론자로 나선 '비판적 지식인들'의 발언의 설득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재벌의 단순무식한 대변인들이 재벌의 행태를 당연시하면서 재벌체제를 옹호함에 반해서 그러한 토론에 참가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 행태를 비판하면서 '재벌 개혁'을 외치고, 개중에 용감한 투사는 '재벌 해체'를 외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재벌 개혁'이나 '재벌 해체'와 같은 '비판적', '개혁적' 주장들은 저들 재벌의 직접적 하수인들의 파렴치한 주장들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데, 저들의 그러한 '재벌 개혁'이나 '재벌 해체'와 같은 주장들, 즉 그러한 '비판적', '개혁적' 주장들은 사실은, 조금도 노동자․민중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하나 같이 경쟁력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그것을 강화하는 것이고, 따라서 철저히 독점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독점자본의 합리화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리고, 저들 재벌 하수인의 극우적 발언 때문에 그러한 독점자본 합리화 프로젝트가 마치 노동자․민중의 이익을 위한 것인 양하는 설득력을 강화하면서 노동자․민중의 희생과 비용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2. 합법주의의 만연


노동자계급운동에 복무하고 있는 활동가,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만연한 정치적 합법주의 또한 노동자계급운동이 변혁 지향성을 크게 상실하고 있는 주요 원인의 하나다.

이들의 합법주의는 사실은, 한편에서는 기본적으로 그 노동귀족화에 의해서 배태․배양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말로는 '변혁'을 얘기하면서도 ―요즈음엔 아예 말로도 '변혁'을 얘기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대한 짙은 공포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된 이후 특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소부르주아적 제반 조류와 함께 더욱 강화되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1987년 말 경부터 일부 지식인 출신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주장․추진되기 시작한 '합법정당' 운동은 당시 광범한 비판과 반대에 부딪혔었고, 그리하여 일부 활동가들은 그러한 합법정당을 마치 '지하의 전위정당'을 보완하는 위성정당이라도 되는 듯이 부정직하게 주장하기도 했었는데, 오늘날에는 물론이요 이미 오래 전부터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합법정당 노선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행세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민노당에 대한 조․중․동 등의 파쇼언론의 공격이 민노당의 '좌파 대표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민노당(강령)의 소부르주아성에 대해서는 이미 󰡔진보평론󰡕 제3호에서 간단히 지적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민노당 측의 주요 이데올로그의 한 사람(장석준)이 󰡔진보평론󰡕 제5호에서, 내가 '아직 생성․발전 중인 강령을 부당하게도 마치 최종적인 것인 것처럼 간주하고 비판했다'는 '반비판'으로 그 소부르주아성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자신들이 강령이랍시고 공표해놓고는 그런 식의 발언을 '반비판'이랍시고 내뱉는 어이없는 사고방식과 뻔뻔함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발표한 지 5년이 훨씬 지나도록 겨우 한 문장을 수정했을까말까 한 그 생성․발전도 참으로 흥미롭다 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에 정치적 합법주의를 불어넣고 있는 자들은, 어떤 방식, 어느 정도든지 간에, 노동자계급운동에 간여․복무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노동운동의 활동가요 선진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정확하고 과학적인 비판이 치열하게 가해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주장이 그대로 노동자 대중에게 아주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합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혁 지향성을 거부하는 그러한 기회주의, 출세주의 노선에 불과하다.

따라서 변혁 지향적인 노동자계급운동을 추구하는 활동가나 선진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합법주의, 합법정당 노선,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혁 지향성을 거부하는 그러한 기회주의, 출세주의 노선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3. 신자유주의는 전야(前夜)다!


한편, 많은 노동자들은, 그리고 많은 활동가들과 선진 노동자들도 '신자유주의의 위력'에 압도되어 "변혁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근거 없는 회의와 함께 변혁 지향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회의는, "자본주의는 위기(공황)을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혁신․발전시킴으로서 그러한 위기를 극복해왔다"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이다"라는 식의, 말하자면 경직되지 않고 융통성 있는, 따라서 '사심 없고 진보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인과관계를 정반대로 주장하는 샛빨간 거짓말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생산력의 혁신과 발전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꾸로 경제위기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생산력의 발전이 경제위기를 예방하고 극복하는 수단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니라 개별자본의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경제위기, 즉 공황의 원인이 과잉생산임은 사실상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당연히 사회적으로는 과잉생산을 유발하고, 따라서 경제위기, 즉 공황을 유발한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즉 공황이 산업혁명 이후에, 즉 노동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동생산력은 다만 경쟁하는 다른 자본들보다 우수한 그것을 보유한 자본으로 하여금 그 위기․공황의 파국을 피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이 공황과 침체의 시기에, 특히 쓰러져가는 자본을 인수․합병함으로써, 더욱더 그 자본을 집적․집중하게 한다. 생산력의 혁신․발전이 공황을 극복하게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개별자본의 경쟁 차원의 시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노동생산력의 혁신․발전은, 사회적으로 경제위기를 유발․심화시킬 뿐 아니라, 보다 높은 노동생산력을 보유한 자본의 승리도 한시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다. 한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과 그 불균등 발전의 법칙이, 비근한 예로 과거 최강의 자동차 자본이었던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자동차 자본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그렇게 몰아넣고 있는 것처럼, 어떤 자본의 승리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노동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결국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붕괴․변혁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결국 1930년대의 대공황이나 그를 능가하는 대공황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노동자계급의 체제변혁 투쟁을 유발하여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붕괴․몰락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이 선뜻 믿기지 않는 사람은 독점자본의 주요 대변자인 [조선일보]의 다음과 같은 의기양양한 자랑을 보면서 생각해보자.


현대차 아산공장...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차의 주력 차종 쏘나타와 그랜저가 생산되는 충남 아산공장.

2일 오후 아산공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한적했다. 널찍한 공장에 근로자의 모습을 찾는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57초당 1대 꼴로 차량이 생산된다'는 현대차 관계자들의 사전 설명을 들은 터라 프레스 공장, 차체 공장, 도장 공장, 조립 공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공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 완성되지 않은 앙상한 차체가 이동하는 소리만이 공장 안을 가득 채웠다.

1만평 규모의 프레스 공장에서는 전구를 갈아끼우는 근로자 2명과 다른 근로자 2명 등 총 4명만이, 바로 옆에 위치한 1만평 규모의 차체 공장에서는 불과 10여명의 근로자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렇지만 공장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 내부 한 라인의 모니터가 보여준 가동률은 오후 4시26분 현재 99.6%. 아산공장 설립 이후 100%의 가동률을 기록한 게 2번 뿐이라고 하니 높은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지난 7월 한달간의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을 만회라도 하듯 현대차 아산공장은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그 비결은 근로자들의 '목표 생산량 달성' 의욕과 함께 '자동화'에 있다는 게 현대차의 설명이다.

실제로 프레스 공장은 가장 많은 330여대의 로봇이 투입돼 96%의 자동화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도장 공장에는 62대의 로봇이 쉴새없이 움직이며 70%의 자동화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차체 공장내 한 부분인 용접 공정의 경우에는 100% 자동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작업 특성상 대부분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의장 공장의 경우에도 30여대의 로봇이 투입돼 앞좌석 투입, 스페어 타이어 투입, 워셔액 주입 등의 작업 과정에서 근로자들을 돕고 있었다.

엔진공장을 제외한 이들 4개의 공장에 투입된 전체 로봇은 450대 가량. 특히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이곳 공장에서 가동되고 있는 로봇의 90% 이상은 현대중공업의 로봇사업부가 제작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AGV(Auto Guided Vehicle), LGV(Laser Guided Vehicle) 등이 각각 철심 및 레이저를 통해 무인으로 이동하며 무거운 자재를 실어나르고 있었으며, 각 차의 지붕에 붙어있는 RFID(무선인식)는 다양한 옵션에 따라 만들어지는 차량들의 생산 흐름을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줬다.

동시에 작업자들의 편의를 위해 작업자의 위치, 키에 따라 조립을 기다리고 있는 차체의 높이가 조절되는 라인, 50%에 달하는 모듈화 등도 현대차 아산공장이 ’57초당 1대’의 차를 생산하는 힘이었다. (이상,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611/200611020407.html)


이 기사가 자랑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고 단정할 만큼 고도화된 자동화, 즉 극도로 발전한 노동생산력이다. 즉, "만평 규모의 프레스 공장에서는 전구를 갈아끼우는 근로자 2명과 다른 근로자 2명 등 총 4명만이, 바로 옆에 위치한 1만평 규모의 차체 공장에서는 불과 10여명의 근로자만이 눈에 띌 뿐"이지만, 바로 그 10여 명의 노동자가 "57초당 1대"씩 생산하는 자동차의 모든 프레스 작업과 차체 생산을 해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게다가 "용접 공정의 경우에는 100% 자동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니, 아예 무인(無人)이라는 뜻이다. 한편에서는 "만평 규모의 프레스 공장에서는 전구를 갈아끼우는 근로자 2명과 다른 근로자 2명 등 총 4명만이 눈에 띌 뿐"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레스 공장은 가장 많은 330여대의 로봇이 투입돼 96%의 자동화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필시 과거에는 100명이 하던 프레스 작업을 이제는 눈에 띄는 그 4명이 해내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96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반적인 자동화 속에서 자동화가 후퇴한 공정이 있을 리 없으니, 필시 해고되었을 것이다. "도장 공장에는 62대의 로봇이 쉴새없이 움직이며 70%의 자동화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인원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도장 공장에서도 언젠가 애초 인원의 70%가 해고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식이다.

자동화에 투입된 "로봇의 90% 이상은 현대중공업의 로봇사업부가 제작한 것"이라니, 현대중공업에서는 고용이 증대하지 않았겠는가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근래에 현대중공업의 고용이 의미 있게 증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현대중공업 역시 유사하게 자동화, 로봇화를 추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자동화는 현대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을 크게 제고시킬 것이고, 만일 그것이 세계적으로 여느 자동차 자본에 앞선 것이라면, 어쨌든 당장은 현대자동차를 승승장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대자동차와 󰡔조선일보󰡕의 자랑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영향은 어떨까?

바로 해고․실업의 증대이다. 그리고 그나마의 고용의 비정규직화 등, 그에 따른 노동조건의 전반적 악화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른 자동차 자본들 역시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자동화, 즉 노동생산력의 고도의 증대를 추진해갈 것이니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러한 과정이 갈수록 심화된다.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가, 그 노동조건의 전반적 악화, 해고, 비정규직화, 저임금, 빈곤이 노동자계급에게 가하는 고통과 굴욕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투쟁을 강요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빈번하게 터져 나오는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화 등에 반대하는 격렬한 투쟁은 그렇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변혁 지향성을 상실하고 그것을 회복하고 있지 못한 투쟁이지만, 투쟁은 그렇게 벌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위 기사가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토록 고도의 자동화가 이루어져 있지만, 노동자가 노동하지 않는다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 즉 자본은 그 운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7월 한달간의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을 얘기하고 있고, "공장[이]... 바삐 돌아가고 있[는]... 비결은 근로자들의 '목표 생산량 달성' 의욕"이라고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공장이 바삐 돌아가고 있는 비결을 "근로자들의 '목표 생산량 달성' 의욕과 함께 '자동화'에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단지 부르주아적 무뇌 논리를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경쟁이라는 변수를 도외시한다면, 자동화 없이도 노동자만으로 공장은 "바삐 돌아갈"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 없이 그것이 "바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경쟁은 언제나 전제되어 있는 것이어서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에서는 자동화는 언제나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의 축적과 유지는 노동자에게 달려 있는 데 자본은 그 노동자들에게 투쟁하고 파업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는 물론 이의가 있을 수 있다. 자본이 투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계급 가운데 해고자나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이고, 예컨대 현대자동차와 같은 독점자본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록 지금은 임금인상 등을 위해 파업도 벌이지만, 결국은 예컨대 제국주의 열강의 일부 노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기타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투쟁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사실이나 경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거대한 독점이윤을 획득하고 있는 자본 역시 경쟁의 압력과 탐욕 때문에 높은 비율의 비정규직을, 물론 직접․간접의 여러 형태로, 고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의 비율을 높여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추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정규직의 투쟁을 위력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도 많은 경우 대기업 관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자유주의, 즉 과학기술혁명이 비약적으로 전개되고 그에 따라 자본과 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과잉생산이 일반화되면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의 공세가 가혹해지는 것과 관련하여, 그것이 생산과 소비 간의 모순을 얼마나 심각하게 격화시켜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에서는 생산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켜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의 소비능력을 역시 비약적으로 축소시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이 자동화, 그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자랑하는 바로 그만큼 사회적․경제적 모순은 격화돼가고 있고, 결국 정치적 대폭발을 향해 질주해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혁명의 전야인 것이다!

더구나 사회주의라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혹은 그렇게 비춰보면서 조금은 질주의 속도를 늦출 수 있었던 외적 억지력이 사실상 모두 사라져 있는 것이 오늘날의 자본주의이다.



4. 정치적 변혁 지향성을 의식적으로 건설하자


서두에서 얘기한 것처럼, 지금 노동자계급운동의 정치적 변혁성 부재는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상태에까지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정치적 변혁성을 건설․확립해야 할 주요 책무는, 조합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에게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운동에 복무하는 선진 활동가와 선진 노동자들에게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것이 진보적 지식인들의 유행"이라는 요지의,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의 불평이 있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조 위원장과는 다른 문제의식에서, 민주노총의 오늘날의 불만족스러운 상황도 전적으로 민주노총의 지도부들에게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민주노총의 오늘날의 상황은 변혁적 정치조직, 전위정당이 없는 노동운동의 모습, 합법주의적 정치조직에 의해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주도되는 노동조합운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시 또 일부에서 '자동붕괴론' 운운하는 악의적 규정을 들고 나서겠지만, 변혁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동법칙 그 자체 속에 있다. 따라서 '21세기 사회주의' 운운하는 공론(空論)에 몰두하는 대신에 자본주의의 현상황과 추세, 그 모순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그 필연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대중에게 폭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치적 합법주의가 난무하는 속에서 잊혀져가다시피 하는 노동자 전위정당, 변혁 지향적 정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의식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는 분산성, 종파주의의 극복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정파적 이론과 그 대중적 실천을 통한 노선의 대중적 검증과, 그것에 대한 대중의 동의․지지․참여에 기초한 그 정파의 성장이 전위정당 건설의 기본적 방법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해왔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주관적 사고였으며,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원칙'을 공유하는 여러 정파의 연합이 현실적인 노선일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원칙'! 참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얘기지만, 서로 연합하고 그리하여 건설하려는 노력․투쟁의 과정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논쟁과 비판이다. 교수적 묵인과 침묵, 소부르주아적 점잖음, 그리고 그에 기초한 패거리주의는 철저히 비판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패거리주의는 종파주의적 단결과 분열 외에는 운동에 어떤 단결도, 어떤 정치적 전진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치열한 논쟁과 상호비판, 그것은 노동자계급운동이 정치적 변혁 지향성을 회복하고 건설하는 데에서, 그리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기풍화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무기일 것이다.

아무튼 다시 한번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으면서, 이를 의례적인 연례행사로 치루는 대신에, 노동자계급운동의 변혁 지향성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고 이를 다시 세워나가기 시작하는 계기로 삼자.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체에 대하여

―다시 전국노동자대회를 맞이하며―



채만수 |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