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뇌성마비 아이에게 달리라는 선생님... 감동입니다.

[5월에 생각나는 사람들2] 아프리카의 최낙성 교장선생님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또 교단에 선 날부터는 교실에서 만나온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런데 올해 스승의 날엔 또 다른 이들 생각도 많이 났다. 교직 10년 만의 휴직 상태에서 맞이한 스승의 날이기 때문일까. 학부모님과 선배의 아버님, 영화 속 주인공 등 언뜻 보기에 '스승'과 무관한 이들이 떠올랐다. 그들로 하여금 '교사'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이 지난 지 벌써 며칠 됐지만, 5월이 가기 전에 그들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 기자말

고등학교 시절 서클 '선배'들은 내게 수업을 해준 적은 없지만 선생님만큼, 때로는 선생님보다 더 힘이 돼주곤 했다. 특히 두 선배가 그랬다. 한 학년 차이지만 어른스럽고 씩씩한 선배 언니는 고민이 있다고 찾아가면 같이 야자를 빼 먹고 상담을 해줬고, 졸업생인 선배 오빠는 자신이 창단한 서클에 애정이 지극해 서클 연습 때면 과자를 한 아름 사오기도 하고, 뒤풀이 땐 자장면도 사줬다.

후배들을 아낀다는 공통점이 있던 두 사람은 몇 년 뒤 결혼했다. 두 사람이 한 가정을 꾸리고, 또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들을 비롯한 고등학교 서클 사람들과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소셜네트워크 덕에 고등학교 서클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게 되면서 이들과 다시 소통하게 됐다.

연락이 끊긴 동안 나는 가끔 궁금했다. 성격 좋고 발 넓기로 유명했던 선배 언니는 외교관이나 기자 같은 학창 시절의 꿈을 이뤘을지,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살겠다던 선배 오빠는 정말 슈바이처가 돼 있을지 등이 말이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들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선배 언니는 두 아이에게 온 시간을 내주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서울의 대학병원 전문의인 선배 오빠는 슈바이처와는 멀어도 너무 먼 의사가 됐다. 너무 뜻밖이라 그 모습들이 슬쩍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온오프라인으로 이들의 삶에 한 발짝 한 발짝 들어서면서 나는 이들의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삶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뭔지 알려준 선배 오빠

내가 처음 놀란 것은 의사로서의 선배 오빠에 대한 평을 봤을 때였다. 임신·출산에 관련한 인터넷 카페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추천에 관한 검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그 선배 오빠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이는 "권위적인 자세로 몇 분 상담해주지 않는 대부분의 의사들과 달리 너무 자세하고 친절하게 상담해줘 임신 기간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새벽에도 달려 나오는 모습에 감동받았다"고도 했다. 명문대 출신에 실력이 출중하다는 평보다 훨씬 코끝이 찡한 내용들이었다.

선배 오빠를 통해 아이 엄마가 된 이들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며 '아프리카가 아닌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라는 이유로 생겼던 내 선입견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 부끄러움은 산부인과 간호사인 친구를 통해 선배 오빠가 쓴 책 한 권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더 커졌다.

선배 오빠는 몇 년 전 산부인과 관련 전문 서적을 쓴 일이 있었다. 이 책은 의사, 간호사들의 컨퍼런스용으로 상당히 유명한 책인 듯했다. 당연히 책의 수익금도 상당할 터, 그런데 선배 오빠는 이 책 수익금을 심장재단과 소속 병원 태아통합진료클리닉에 기부해 선천성 기형 치료를 위해 사용했다. 말로만 듣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자체였다.

환자와 진심으로 교감하고, 언제든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병원으로 달려가는 환자 제일주의 의사. 어떻게든 기형 아이를 방지하기 위해 의술과 연구로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도 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내줄 아는 의사. 그런 의사로서의 선배 오빠는 아프리카에서 의술을 펼치며 평생을 살겠다는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 진정한 의료인이 돼 있었다.

명품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선배 언니

그런 선배 오빠의 아내인 선배 언니는 여느 의사 부인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뭣보다 언니는 명품백은 고사하고 늘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한 번은 언니가 L사의 머플러를 두르고 나와 웬일인가 했다. 선배 언니는 역시나 "이거 짝퉁인데 누가 줬어"라며 씨익 웃었다.

내 주변 '의사 사모님'들 중 선배 언니 같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인지 몰라도, 나는 그 모습이 마냥 신기할 분이었다. 그래서 "왜 명품가방 하나 없냐"고 묻자 언니는 "명품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걸? 취향의 차이겠지. 난 그 돈 있으면 여행을 한 번 더 가고 싶어."라며 참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결혼 후 바로 아이를 가진 언니는 사회 진출 시기를 놓치고 육아에만 전념했다. 사실 그런 점에서 나는 언니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언니가 아이들을 키워온 방식과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되자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내 주변 '의사 사모님'들은 아이를 위한 '명품 교육'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 아이를 값비싼 영어 유치원에 보냈고, 원정출산을 하는 '사모님'까지 있었다. 발달상 어린 시기에 학원 수업으로 진행되는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면 역효과가 있다고 말해도 듣지 않았다.

이내 '의사 사모님'들은 "네가 한번 낳아봐 그게 되는지. 돈 없어 못 보내는 게 문제지. 요즘은 영어 유치원이 대세야. 그리고 영어유치원 안 나오면 사립초등학교 가서 왕따 돼."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과시욕' 혹은 내 아이가 특정 계층 아이들과만 어울려 자라도록 하겠다는 삐뚤어진 자식 사랑인 듯해 씁쓸해지곤 했다.

그런데 선배 언니는 '공동육아'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두 아이를 키웠다. 공동육아는 아이를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부모가 부모조합을 만들어 교사조합과 끊임없이 의견을 교류하는 육아 방식을 말한다.

공동육아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는 '애들은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흙을 밟고 뛰어다니고, 여러 체험을 하며 땀흘리는 활동들이 주된 프로그램이다. 언니는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실컷 놀리면서' 키웠다. 언니의 아이들은 각각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이 된 뒤에도 여전히 그 흔한 학원 하나 다니고 있지 않았다.

"영어, 수학 배우는 학원을 안 보내요? 옆집, 뒷집 엄마들 보면 불안하지 않아요?"

이런 내 질문에 언니는 "그래서 공동육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했다. 공립초등학교에 보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모두 모여 공동육아에서 만난 엄마들과 함께 만든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유익한 활동들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 언니는 스스로 선생님이 돼 홈스쿨링으로 아이들을 지도했다. 지난해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근 초등학교 방과후학교 수업까지 맡았단다.

나는 중등교사가 되기 전 유치원에서 교생실습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교생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부모님들의 학구열이었다. 만 3~4세인 아이들에게 실컷 뛰어노는 것이 그 시기에 필요한 교육일텐데 부모님들은 '왜 한글을 안 가르치냐' '왜 셈하기를 안 가르치냐'고 묻곤 했다. 요즘 유치원 선생님들은 '왜 영어를 안 가르치냐'는 질문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유아교육마저 '공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나라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아이들을 키워온 언니는 참 닮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부부, 그럴만한 이유 있었네

이렇듯 아름다운 선배 언니, 선배 오빠와 즐거운 소통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선배 오빠를 통해 한 분을 알게 됐다. 머나먼 아프리카에 있는 분이었다. 선배 오빠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긴 그 분의 글을 통해서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달려라 산드라
5년 전, 어떤 어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 베이비반에 입학시키기 위해 왔다. 한 아이는 정상인데 한 아이는 뇌성마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산드라다.

여기서 이런 장애아는 버려진다. 부모가 키우기는 해도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고 가족 속에서도 버려진 상태에서 양육 되는 것이 이곳 아프리카의 문화다. 이날도 성한 아이를 입학 시키려고 왔는데 산드라를 집에 두고 올 수 없어 할 수 없이 데리고 온 모양이다. 학교에 와서도 성한 아이에만 신경을 쓰고 산드라는 강당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누가 산드라를 데리고 왔는지 몰랐다. 교무실에서 나와 있는데 강당 구석에 있는 산드라를 챙기는 것을 보고 그제야 이 아주머니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학교를 나가는 산드라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산드라를 받아 주겠다고 하며 잘 키워 보겠다고 했다. 그러는 나를 보는 산드라 어머니의 표정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산드라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한 번 키워 볼 테니 맡기라고 했다.

지금 산드라는 유치원 3년을 보내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우리학교는 지각에 대해 엄격하다. 누구든 지각하면 돌려보낸다. 걷기가 불편한 산드라라고 예외가 아니다. 조회 시간엔 성경 암송을 한다. 내가 가끔 산드라를 앞으로 나오게 해 학생들 앞에서 성경구절을 외우게 한다. 그럼 산드라는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우외이 우우우워'라고 하면서 성경을 읊는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마구 웃어댔다. 그런데 지금은 웃지 않는다. 산드라는 고비를 극복했다. 지금은 당당하게 앞에 나선다.

산드라는 이어 달리기를 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자기 편이 본인 때문에 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반 바퀴는 격차가 벌어진다. 그런데도 산드라는 애를 쓰고 달린다. 자기 편 아이들은 '산드라, 산드라' 고함을 지르며 응원한다. 아무도 산드라가 잃은 것을 탓하지 않는다. 자기 편 아이들이 산드라가 잃은 것을 만회하려 죽을 힘을 다해 달려 이기기도 한다.

산드라는 달린다.
산드라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다.
산드라는 그 장애를 극복한 나의 스승이다.
나와 우리 아이들은 산드라와 같이 미래를 달려 갈 것이다.
예배를 드리며 산드라 생각이 났다
산드라야, 사랑해!


소로티에 세워진 교회와 유치원, 초등학교 전경


글을 쓴 사람은 선배 오빠의 아버지였다. 그제야 나는 오래전 선배 언니로부터 "시부모님 두 분이 아프리카에 계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기억났다. 퇴직 후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자 2006년 두 분은 모든 재산을 정리해 아프리카 소로티로 떠나셨다고 한다. 신앙이 두터운 노부부는 당신들의 노후를 선교 활동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막상 도착하니 생각보다 소로티의 상황이 심각했던 것이다. 생각 보다 환경은 낙후했고, 생각 보다 사람들은 더 굶주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교육 시설이 없어 이대로라면 몇 년, 몇십 년 뒤에도 이들은 비슷한 수준으로 살고 있을 듯했다. 그래서 두 분은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이곳엔 신앙뿐 아니라 교육도 중요하다!"

두 분은 교회뿐 아니라 교육시설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규모 보육시설이었고, 다음에는 유치원이었다. 이후 초등학교를 지으려 했지만 돈이 부족했단다. 그래서 자녀와 친구들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이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012 유치원 졸업식.


미술수업 중인 아이들.


그렇게 해서 소로티에는 교회 뿐 아니라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아버님은 일꾼들과 직접 땅을 파고 벽돌을 나르며 건물을 올리고 학교의 큰 틀을 잡았고 어머님은 교복을 디자인하고 교사들을 교육시키는 등 학교의 살림을 맡으셨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두 분이 땀흘려 세운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학비가 전액 무료라는 사실이다. 소로티에서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들 중 무료인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부모님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와 교육 활동을 하고 계셔"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종교에 별 관심 없는 나로서는 '두 분의 삶이 꽤나 신앙적이구나'라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님의 글을 읽는 순간 이분들이 새롭게 보였다.

이런 식이라면 단순한 선교나 봉사가 아니다. '불쌍한 아이들, 도와줘야 할 아이들, 그러니 이 돈으로 조금이라도 굶지 않기를'이라며 마음의 기부를 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아버님의 글에는 선교자, 봉사자, 그리고 기부자를 넘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장애가 있다고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해서는 안 돼'라고. '장애가 있어도 규칙을 준수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또 '장애가 있어도 성경암송 할 수 있어, 달리기도 할 수 있어'라는 엄격하지만 따뜻하게 격려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말이다.

아버님의 글 중 이어 달리기에 관련한 내용이 나오는 대목에선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교육도 놓치지 않고 있구나'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산드라는 장애를 극복한 나의 스승'이란 말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얼마나 넘치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거 옮겼어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젊은 시절을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보내신 두 분. 그래서 한국은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교사 자격증이 없으실 분들. 하지만 두 분은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모습은 아들과 며느리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는 듯했다.

환자와 교감하며 기부를 실천하는 아들과, 일반적인 '의사 사모님'과는 먼, 소신 있는 며느리의 뒤엔 두 분이 계셨던 것이다.

아버님. 또 어머님. 나는 이 분들께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나를 가르친 적은 없지만, 한국의 교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두 분은 누구보다 훌륭한 '진짜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학교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들. '그랜파더(할아버지)'라 불리는 최낙성 교장선생님은 "저 끝에 이 아이들이 다닐 중고등학교가 설립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덧붙이는 말

소로티 유치원장과 초등학교 교장이신 두 분은 현재 한국에 잠시 나와 계신다. 병원치료를 받기 위해서인데 소로티로 돌아가시는 대로 중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시란다. 또 두 분은 중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대학, 그리고 병원 설립까지 계획하고 계신다.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소로티 학교와 관련한 홈페이지 (http://sungpo.net/iboard.cgi) 에는 산드라에 대한 얘기 외에도 소로티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 가득한 얘기들이 참 많다. 한번쯤 방문해 그 아름다운 실천을 직접 느껴보길 바란다.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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