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희망

진정한 교권은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아는 데서 시작

[5월에 생각나는 사람들 (3)] 존경스런 나의 후배 선생님

누군가 나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굳이 이 선생님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짧은 후배 교사다. 처음부터 내가 이 후배 교사를 '존경'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2007년부터 몇 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과목을 담당하며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경력이 얼마 안 된 이 젊은 남자 선생님은 때때로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점심시간 내내 아이들과 축구공을 차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방과 후에 아이들과 온라인상에서 만나 게임을 하고 채팅을 하는 것도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한 학생이 그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고사 기간.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나는 "시험기간에 뭐 하는 거야! 당장 독서실로 안 가!"라고 소리치며 달려갔는데... 세상에나, 눈썹 휘날리게 도망가는 아이들 속에 그가 있던 것이 아닌가.

이쯤되면 그는 '선생님'이 아닌 '형'이었다. 엄격한 지도를 해야 할 교사가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걱정을 넘어 못마땅하곤 했다.

"진짜 안 되겠어요...애들한테 미안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시무룩했다. 늘 쾌활한 사람이 한숨까지 내쉬는 모양이 심상치 않아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저 선생 그만둬야겠어요. 자격 미달인 거 같아요"라고 입을 열었다.

"방금 경제 수업을 했는데 애들 얼굴이 온통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인 거예요. 사실 제가 어제 친구들 만나느라고 수업 준비를 대충했거든요. 그런데 애들이 단박에 알더라고요. 더 끔찍한 게 뭔지 아세요? 대충 얼버무린 부분을 한 아이가 질문을 던졌는데 대답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아, 진짜 수업하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릴 뻔했어요."

나는 그가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수업 중 창 밖으로 뛰어내릴 뻔했다"고 할 때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정말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재미가 있었다. 신규 교사라면 누구든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기 마련. 나는 별일 아니라고 위로하며 웃어넘겼다.

그날 나는 업무 때문에 늦도록 퇴근하지 못했다. 그런데 교무실 빈 책상들 너머 저편에서 누군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후배 교사였다. 대체 뭘 저리 열심히 하나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그는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앞으론 망신 안 당하려고 수업 준비 하는 건가요?"

"진짜 안 되겠어요. 애들한테 미안해서..."

그가 만들고 있는 수업자료는 다음 진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 가르친 내용을 다시 가르치기 위한 수업자료였다.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내던 게 마음에 걸린 이 교사는 일종의 '애프터서비스(A/S)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수업자료 제목은 '미안하다, 다시 한다'였다.

'미안하다'고 고백한 후배... 잊었던 게 떠올랐다

'아...'하고 감탄이 나왔다. 제대로 설명 못 한 부분을 다시 수업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제목의 수업 자료를 만들며 늦게까지 책을 뒤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은 평소 아이들과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그의 모습과 함께 나에게 있었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내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나의 모습이었다.

초임 시절 나는 학교의 곳곳이 이상하기만 했다. 학생으로서의 학교와 교사로서의 학교는 조금 달라 보였다. 그 중 하나가 '교무실 청소'였다. 학교 청소를 담당하는 분들이 계셨지만 반별로 돌아가며 두세 명의 아이들이 교무실로 와 청소를 했다. 아이들이 자기 학급 청소를 하는 것까지야 당연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들의 공간을 왜 아이들이 청소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새까만 신참 주제에 '교사들의 공간은 교사들이 청소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내 개인컵을 들고 나가는 아이에게 그건 내가 닦겠다며 내주지 않았던 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며칠 뒤 나는 선배 선생님들께 "내가 마신 물컵을 아이들이 닦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엄마들이 선생님 컵 닦으라고 애들을 학교에 보내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그러자 나의 선배들은 "그것도 공부"라고 답했다. 하지만 나는 왜 그게 공부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작성 등 '교사 업무'까지 아이들에게 시키는 몇몇 선생님들 모습은 초임 시절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무조건 옳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나의 문제의식은 무뎌졌다. 그런 고민을 한 일이 있었나 싶게 나는 변해 이제는 배정된 아이들이 교무실 청소를 빼먹으면 혼을 내고 내 컵을 닦아오라고 닦달하는 교사가 됐다 그런 나에게 그 후배 선생님은 오래전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선생님은 무조건 옳은 존재' '선생님은 무조건 시키는 존재'라는 절대 명제에 어느덧 갇혀 버린 내게 후배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도 잘못하면 사과해야 한다'고. 또 '교사가 학생에게 자신의 일을 마음대로 시켜서는 안 된다'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남편에게 그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남편 역시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선생님들과 다른 유형의 선생님이라고 신기해하며 자신의 경험을 얘기해줬다.

학창시절 남편은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다 정답이 두 개인 문제를 발견해 교무실에 찾아갔다고 한다. 그 문제를 낸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남편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어떠한 해명도 없이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고, 그 뒤 남편은 그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듣고보니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여럿 있었다. 선생님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듯해도 학생이 그 잘못을 말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그런 행동을 하려는 학생들은 "예의가 없다"며 크게 혼이 나곤 했다.

물론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학교에서 중간·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면 바로 '이의신청 기간'을 둬 시험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건의를 수렴하고, 이에 대해 해당 교사들이 해명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교사는 지시, 학생은 복종'이란 학교 문화는 아직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그동안 나는 이의신청 기간에 찾아온 학생들을 향해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자꾸 와서 따지는 거야? 정답 안 바뀌니까 다시는 교무실에 오지 마!"라며 소리를 지르는 동료 교사의 모습을 본 일도 있다. 심지어는 오답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경위서를 쓰기 싫어 아이들에게 정답 카드를 다시 작성하도록 한 교사를 본 적도 있다.

'무릎 꿇은 교사' 사건... 이게 교권 침해라고?

지난 5월 17일 충북 음성의 한 여중에서 이른바 '무릎 꿇은 교사'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과학 시간에 한 교사가 '중력의 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덩치가 큰 학생과 왜소한 학생을 앞으로 나오게 해 서로의 손을 당기도록 했다. 이때 덩치가 큰 학생이 자존심이 상해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에 아이들이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교사가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했단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두고 '교권 실추' '교권 붕괴'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왜 교권 실추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충북 음성교육지원청이 지난 21일 브리핑을 통해 밝힌 교사의 설명 때문이었다.

브리핑에 따르면 해당 교사는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울음을 터트린 학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혀 앉은 것"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우는 어린 여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교사가 허리 굽혀 낮은 자세를 취한 것은 되레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어린 마음에 상처를 줬다면 어쨌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고, 그건 '선생님'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권'은 '교사의 권력'이 아닌 '교사의 권위'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정치학에서 '권력'과 대비되는 '권위'의 특성은 '강제력 없는 자발적인 따름'에 있다. 이에 비춰 본다면 진정한 교권이란 몽둥이를 들고 윽박질러 아이들이 복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고 아이들을 존중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음성의 한 여중에서 무릎을 꿇은 여교사의 행동이 아이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굴욕적 행위인지, 아니면 상처받은 어린 마음을 달래기 위한 진정성 있는 사과인지는 당사자만 알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스물여덟의 젊은 교사란 점을 생각해 볼 때, 나는 그녀의 모습이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권 실추가 아니라 '진정한 교사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녀는 '미안하다'며 수업을 다시 준비한 후배 교사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그동안 오랫동안 내가 잊고 살아온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이다. 잘못했을 땐 교사도 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사실, 나이가 어려도 아이들이 '존중받아야 할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우리 교사들. 학생이 내 책상을 닦고 내 물컵을 닦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했던 우리 교사들. 아이들이 잘못하면 '맞을 짓'을 했다며 손찌검을 당연시했던 우리 교사들. '교권이 땅에 떨어졌네'라는 탄식이 나오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잊어온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 그게 아닐까.

지금까지 교권은 교사의 권위를 넘어 '교사의 권력'으로서 학생들 위에 군림해온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가슴이 아프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말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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