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여자들>, 싸우는 여성들

[워커스 레인보우] “이 투쟁은 우리가 끝낸다” HIV/AIDS에 맞선 이야기

[출처: WOMAN MAKE MOVIES / www.wmm.com]

“에이즈는 항문성교하는 동성애자들의 병이다.”

이 오랜 왜곡과 낙인이 여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올해 한국퀴어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감염된 여자들>은 HIV/AIDS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낙인에 맞서 싸우며 직접 길을 내 온 여성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약회사의 횡포, 정부의 편향된 연구와 지원, 여성들에게 놓인 복합적 폭력과 차별에 맞선 투쟁을 말이다. 영화의 원제인 <Nothing Without Us: The Women Who Will End AIDS>는 영화의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AIDS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병으로 알려져 그에 대한 싸움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이 투쟁을 끝내는 것은 그 동안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여성들이 될 것이라고.

에이즈는 처음부터 ‘남성 동성애자들의 병’으로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연구와 진단 기준 역시 백인 남성 동성애자들을 중심으로 맞춰졌다. 때문에 에이즈의 진단에서 여성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염과 같은 증상들은 빠져 있었다. 영화는 여성 감염인들이 이러한 진단 기준을 바꾸기 위해 ACT-UP 등 감염인 행동그룹과 함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를 찾아가 투쟁하는 장면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투쟁 끝에 1992년이 돼서야 미 연방 보건 당국은 에이즈에 대한 정의와 진단 기준을 여성까지 포함하는 내용으로 바꾸게 된다. 그 사이 수많은 여성 감염인들은 사회와 정부, 의료기관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갔다. 감옥에서부터 HIV/AIDS 감염인 여성들을 조직하고 이 투쟁에 앞장섰던 흑인 여성 카트리나 하스립 Katrina Haslip도 연방 보건당국의 발표를 한 달 앞두고 사망했다. 하지만 이들의 투쟁은 HIV/AIDS에 대한 기준을 바꾸고 수많은 여성들을 더 이상 방치되지 않게 하는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한편 브룬디와 나이지리아의 여성들은 치료제조차 구할 수 없는 열악한 현실에 맞서 싸운다. 이들은 약이 있는 인근 국가에 가기 위해 반군이 점령한 지역의 경계를 목숨을 걸고 넘어가 약을 구해온다. 또 직접 의료지원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조직하는 한편, 모든 감염인들에게 무상의 치료지원을 제공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며 투쟁해 왔다. 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없는 지역의 여성들과 주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된 자료를 만들어 설명하고 직접 지역사회의 역량을 만들어 왔다.

여성 감염인들의 현실은 성, 인종, 계급 등 모든 현실과 연결돼 있다.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문화, 의료연구와 지원 체계에 놓인 사각지대는 여성 감염인들의 상황을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노숙인 여성, 빈곤 계층의 여성들은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질뿐더러 공적 지원에 대한 기대를 갖기가 더욱 어렵다. 일상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또한 남성과의 성관계에서 협상력을 가지기가 어렵고 경제적 자원도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않아 사실을 알리거나 병원에 찾아가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임신을 해서 병원에 찾아간 감염인 여성들에게 의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인공유산을 권고한다. 여성들의 이러한 복합적 현실에 무지한 사회가 여성 감염인과 수직감염이 된 아이들의 삶과 생명을 사실상 방치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직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이 있어, 적절한 의료 조치를 받기만 하면 HIV 바이러스를 보유하지 않은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됐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감염인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워크숍 장면이 나온다. 청소년들은 직접 성관계와 성건강, HIV/AIDS의 예방과 관리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며, 낙인에 맞설 수 있는 지지 그룹을 만들고, 스스로의 역량으로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갈 활동가이자 교육자가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차별과 낙인에 맞서는 것을 넘어 낙인의 현실을 바꾼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처럼 그 현실을 끝낼 것이다. 뉴올리언즈 감염인 여성 네트워크의 지나 브라운은 HIV/AIDS 감염 예방에서 흔히 강조되는 “‘위험한 섹스’를 하지 말라”는 경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러시아워에 교차로 한복판에서 섹스를 하는 행위 정도라야 ‘위험한 섹스’일 것”이라고. HIV/AIDS가 ‘위험한 섹스’의 결과라는 인식은 HIV/AIDS 감염을 특정한 ‘위험 그룹’에게만 벌어지는 일로 상상하게 하고 감염인 대한 낙인을 강화한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성관계나 주사기의 사용 등으로도 감염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 HIV/AIDS 감염은 특별히 더 위험한 섹스의 결과가 아니라 감염을 예방할 수 없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HIV/AIDS를 예방하고 감염을 줄여나가는 일은 개인의 몫이 아니다. HIV/AIDS의 현실에 맞서 싸워온 여성들의 행동과 그들이 변화시킨 현실이 증명하듯 모든 이들의 성적 권리, 건강할 권리, 재생산의 권리가 보장될 때 HIV/AIDS의 확산과 낙인의 현실은 끝날 것이다.[워커스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