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몰라, 알려주지 않았거든”

[워커스] 레인보우

“아들이야, 딸이야?” 임신, 혹은 출산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는다. 이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부모가 제 아이의 성별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직 산부인과에서 알려주지 않아서,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아기 본인이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최근 외신을 통해 시어릴 앨티(Searyl Alti)라는 아이가 한국에도 알려졌다. 만 한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성별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료보험 카드에 적힌 ‘U’라는 성별 표시 때문이다. 미확정(undetermined) 혹은 미할당(unassigned)을 뜻하는 이 기호로 공문서가 발급된 것은 알려진 사례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코리 도티와 아이 시어릴 앨티의 모습 [출처] 코리 도티

여전히 출생신고서를 비롯한 여러 공문서들은 남과 여 중 하나의 성별을 적을 것을 요구하지만 (시어릴 앨티에게도 출생신고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성별이 그리 쉽게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젠 비밀이 아니다. (남성 혹은 여성 어느 한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염색체나 성기를 가진 사람들은 물론) 성별을 정정한 사람들이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시대이니 말이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타고난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데에 흔히 쓰이는 단어다. 그러나 이 정의는 조금 고칠 필요가 있다. 태어날 때 주어진 성별, 대개 성기를 기준으로 할당된 성별과는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 이라고 말이다. 특정한 형태의 염색체나 성기를 타고 났다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기준으로 할당된 성별 자체를 타고 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트랜스젠더들은 탄생과 동시에 하나의 폭력을 겪는다.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출생신고서에 성별이 기록되는 폭력을 겪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자신이 원하는 젠더 표현을 생각할 수 있게 될 즈음이면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성별 정정을 위한 의학적 개입이나 법적 절차는 그 투쟁의 한 국면일 뿐이다. 자신을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틀리게’ 호명하는 모든 이들과 트랜스젠더들은 투쟁해야 한다.

시어릴 앨티의 사례는 그러한 최초의 폭력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을, 개인들에게 불필요한 투쟁을 강요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간단한 일이다. 본인의 의사를 알기 전에 멋대로 타인의 성별을 단정하지 않는 것, 시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이가 자라 성별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기까지 기다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시작일 뿐이다. 몇 년을 기다려도 원하는 답을 구하지 못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코리 도티(Kory Doti)는 자신을 시어릴 앨티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보호자(parent)로 소개한다. 스스로를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규정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nonbinary trans-gender)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고친 트랜스젠더의 정의를 기억하라. 트랜스젠더는 주어진 성별과 ‘반대되는’ 성별이 아니라 ‘다른’ 성별을 제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이다.)

두 개의 범주에 욱여넣는 성별이분법이란 폭력

코리 도티가 시어릴 앨티의 성별을 ‘미확정’이라고 쓴 것은 단순히 남자로 태어난 아이가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할 수 있어서, 혹은 반대로 여자로 태어난 아이가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조금씩 다른 존재인 개개인들을 남과 여라는 단 두 개의 범주 속에 욱여넣는 소위 성별 이분법 체계의 폭력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 체제의 폭력에 당하는 것은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녀라는 이름에 만족하는 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딸려 오는 수많은 행동 규범들까지 만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체제의 희생자는 어쩌면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호명당하는 누구나일지도 모른다.

시스젠더(트랜스젠더의 반댓말로, 지정된 성별과 스스로의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킨다)들은 흔히 자신의 성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내부 성기를 확인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이고, 그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성염색체를 확인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어쩌면 첫 출발은, ‘실은 아직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가 남자 혹은 여자라고 너무 쉽게 믿는 것은 어쩌면, 진짜 자신에 대해 알기를 포기하는 일일지 모른다.

“아들이야, 딸이야?”라는 질문에 “아직 몰라, 알려주지 않았거든”이라고 답하는 연습을 해 보자. “아들이야, 딸이야?”라고 당사자가 아닌 이, 그러니까 부모에게 묻지 않는 연습을 해보자. “남자야, 여자야?”라고 누가 묻거든 “아직 몰라, 생각중이야”라고 답하는 연습을 해보자. “남자야, 여자야?”라고, 당연히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듯이 묻지 않는 연습을 해보자.

이것은 체제에 대한 불복종을 연습하는 일이다. 노동자에게 저임금으로 쉼 없이 일할 것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불복종하듯, 개개인에게 어느 한 성별(과 그에 따른 규범들)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성별 이분법 체제에 불복종하는 일이다. 불복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성별 규범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따를 자유를, 성별에 따라 지위가 갈리지 않을 평등을, 이 불복종은 제공할 것이다. “아직 몰라, 알려주지 않았거든”은,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워커스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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