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밀어내지 않는 삶

[워커스 인권의 장소] 기찻길 옆 작은 학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다

  기찻길 옆 작은학교 옛 공부방 [출처: 김용욱]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인천 송현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서울의 큰 건물과 대형쇼핑몰에 익숙해진 눈에는 초등학교 주변에 있는 작은 이불가게와 동네 아이스크림 집이 포근하다. 수도권에도 아직 이런 게 남아있구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공부방 ‘기찻길옆 작은 학교’의 김수연 선생님이 와서 손을 흔든다. 그늘이라곤 하나 없는 쨍쨍한 아침, 가을바람을 조금 느끼며 ‘문화예술창작공간 도르리’로 향했다.

‘문화예술창작공간 도르리’는 ‘기찻길 옆 작은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만든 창작집단의 이름으로 최근에 마련한 공간이다. 공부방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창작 활동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곳이다. 공부방 ‘목공수업’ 시간에 만든 작품으로 ‘꼬마 목수전’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는 정수연 선생님이다. 그는 아이들과 그림수업, 미술치료 등을 하고 있다. 도르리는 여러 사람이 돌려 음식을 내는 일, 똑같이 나누어주거나 고루 나누어 준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출처: 김용욱]

가난을 밀어내지 않는 공부방

‘기찻길 옆 작은학교’는 공부방이다. 학교라는 이름 때문에 대안학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안학교는 아니다. 학생들 모두가 정규학교를 다니고 학교를 파한 후에 모이는 곳이다. 그렇다고 흔하게 있는 과외교실인 공부방도 아니고 지역아동센터도 아니다. 기찻길 옆 작은 학교의 역사에 대해 물었다. 대학생 때 이곳과 인연을 맺은 김수연 선생님은 30년 경력의 초창기 멤버다. 사실 선생님이란 호칭은 공부방에서 쓰는 호칭이 아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이모, 삼촌이라고 부른다. 공부방의 공동체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호칭이다.

“제가 대학생일 때부터 인연을 맺었어요. 0기인 셈이죠. 김중미 선생님과 남편분이 만석동에 처음 87년도에 빈민운동을 하려고 왔어요. 선생님이 탁아소만 하다가 공부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제가 왔어요. 공부방을 만들려니 교사가 필요하잖아요. 90년에 인하대와 교대에 공부방 동아리를 만들어서 자원교사를 모집했어요. 제 남편도 공부방 자원교사였어요. 저는 그냥 아이들이 좋아서 왔어요. 동아리 회원을 모집할 때도 아이들 얼굴 그려놓고 아이들 좋아하는 사람 모이라고 홍보했어요. 거창하게 세상을 바꾸자, 빈민운동을 하자 그런 게 아니었어요. 만석동이라는 동네가 워낙 가난한 동네이고 함께 한 이모, 삼촌들도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사회모순을 알아갔어요. 왜 아이들이 상처받는지 들여다보면서 세상을 깨달아 간 거지요.”

만석동은 김중미 선생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인 동네다. 소설에도 소개됐듯 괭이부리마을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지역으로 땅보다 갯벌이 많은 바닷가다. 포구와 기찻길에 가까이 있던 마을은 일제 때부터 사람들이 갯벌을 메우고 땅을 파 토막집을 지어 주거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에 밀가루공장, 목재공장, 조선소가 세워진 후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전쟁 후에는 황해도 사람들이, 개발독재시기에는 이농민들이 올라와 살았다. 사람들은 돈을 벌면 시멘트 등을 사서 토막집을 손수 개량했다. 반듯하지 않아도 삶이 묻어나고 집주인의 손길이 배인 집이다.

다행히 개발 붐을 겨우 빗겨나 집이 헐리는 것은 피했지만 주변에 공장이 옮겨가고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빈부격차와 공동화라는 다른 어려움에 처했다. 목재공장 터에 세워진 아파트가 작은 집들 위로 한없이 높이 치솟았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공부방 아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파트 생길 때 아이들과 매일 시를 썼어요. 저 아파트가 생기면 우리 마을이 없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어떤 아이는 나도 저렇게 좋은 집에 살고 싶다고 쓰기도 하고. 만약에 아파트 만든다고 동네를 철거한다면 싸울 거라는 말도 쓰고.”

[출처: 김용욱]

[출처: 김용욱]

가난을 선택하다, 이야기를 만들다

우리는 도르리가 있는 화수동을 통과해 ‘기찻길 옆 작은학교’가 있는 만석동으로 향했다. 화수동에 문화공간을 마련한 이유도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만석동 공부방을 찾아와서다. 기찻길 옆 작은학교가 있는 동네는 오랜 이웃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시면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한편 화수동처럼 만석동 주변의 동네의 아이들이 공부방으로 점점 모여들고 있다. 공부방에 있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곳을 품어야 했다. 어쩌면 공동체가 있는 동네가 더 확장된 셈이다.

초등부 아이들과 요즘 하는 수업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직접 찾아가, 동네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을 공부방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수업이다. 어떤 아이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는 쌍우물을 소개하고, 어떤 아이는 반지하 자기 집 앞 골목이 바람이 잘 통한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이사 온 아이가 새 친구를 처음 만난 횡단보도의 의미를 설명하기도 한다. 서로 가난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기에 자랑할 것이 많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수업의 재미는 서사가 아닐까. 이제 아이들은 그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친구를 떠올릴게다. 공부방의 수업은 늘 이렇다. 서로의 삶을 알아가는 것. 그 앎으로 서로에게 묻은 가난의 불편함만이 아니라 가난의 기쁨도 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쌍우물터를 지나 만석초등학교를 통과해 횡단보도를 건너니 만석동이다. 언덕을 조금 올라 가다보니 빌라들이 다닥다닥, 일조권도 없이 붙어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빌라촌이다. 좀 더 가니 깨끗하게 단장한 건물이 보인다. 그 옆에 <괭이부리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안내하던 두 선생님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진다. 인천시에서 원주민 전원 재입주를 선언하며 떠들썩하게 진행한 재개발사업의 결과물이 ‘보여주기 식 건물 짓기’로 끝난 것이 안타까워서다.

요즘은 여러 복지기관에서 나와 밥도 주고 옷도 준다. 인천의 대표적인 가난한 동네인 만석동은 늘 다양한 사회복지기관의 ‘나눠주기 식’ 사업 장소가 되곤 한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속상하다. 최근에는 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개량한 집도 생겨났다. 복지기관에서 주로 연탄을 무료로 나눠주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지 않은 채 편의대로 물품을 나눠주는 복지방식의 한계로 차마 웃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 사시는 분들은 누구의 할머니고 할아버지인 사람인데 사회복지 사업을 벌인 후에는 사업대상자가 된 거에요. 저희들의 이웃이고 이십대인 저희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나눠준 분들이신데…. 그분들이 물품 받으려고 줄 서있는 걸 보면 속상해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김 선생님과 정 선생님이 보기에 사회복지기관들의 행태는 사람을 모욕하는 것만 같다. 정수연 선생님도 이전에는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납득하지 못했다. 공부방 자원교사를 했던 남편을 만나 이곳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 달라졌다. 평소 욕심 없는 삶이 지향인 그와 공부방은 잘 맞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 와서 내려놓고 살다보니까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이 보인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방을 하게 됐다는 김 선생님은 2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공부방 교사가 됐다.

“없어야 나눌 수 있는 것 같아요. 나누고 또 나눠서 모두가 가난해지면 공평해지는 거잖아요. 어쨌든 소유하고 가지려고 하는데서 생기는 문제가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난이 좋아요. 이곳에서 나누는 가난을 몸으로 체험해서 알아요. 물론 가난은 불편하기도 해요. 그러나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를 한번 맛보고 나면 여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조금 더 내려가니 90년대 공부방으로 쓰던 2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낡게 바랜 색깔이 멋지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공부방으로 사용한 곳으로 8평짜리에 30명의 학생들이 함께 한 신기한 집이다. 지금은 물품창고나 하반기 공연연습장으로 쓰고 있다. 88년에 사용했던 건물은 현재 사라졌고 이 건물만이 공부방의 역사다.

“2층은 김중미 선생님의 신혼방이자 살림집이에요. 이곳에서 남편과 아이 둘을 낳고 키웠어요.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해서 옆에 건물을 새로 지었어요. 공부방을 거쳐 간 사람들이 모아둔 결혼자금이나 퇴직금, 그리고 저희의 뜻을 지지하는 분들이 모아준 돈으로 지은 거예요.”

바로 뒤에 ‘기찻길 옆 작은 학교’가 보인다. 주변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손수 시멘트로 지은 작은 집들과 여러 집의 천장을 한꺼번에 덮은 슬레이트지붕이 눈에 띈다. 벌써 18년이나 지나서인지 건물 입구에 그려진 벽화가 흐릿하다. 1층에 들어가니 젊은 김재양 선생님이 웃으며 맞이한다. 그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2002년 이곳에 정착했다. 그는 탁아소 시절부터 공부방에 있었으니, 살아있는 역사다. 옥탑방이 그의 생활공간이기에 사생활이 거의 없어 힘들지 않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소진되는 만큼 재충전되는 걸 많이 느껴서일까요. 사람들이랑 관계 맺으면서 느끼는 위로가 크고 그걸 통해서 성장하는 느낌이 있어요. (서로를) 깊이 알기 때문에 깊이 존중받는 느낌이죠.”

깊이의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답에 눈이 부셨다. 어쩌면 스치듯 지나는 인연이 대부분인 사회, 부의 쓰레기가 넘쳐나는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찻길 옆 작은 학교. 그래서 자발적 가난과 속내를 나누며 관계를 쌓아가는 그곳이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오래됐으나 낡지 않은 가치를 지켜가는 곳이 있어서 우리가 다른 사회를 상상할 힘을 내는 건 아닐까.[워커스 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