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재-고영복 대한민국 첫 사구체 논쟁

[1단 기사로 본 세상]1965년 신동아와 사상계, 동아일보 지면에서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1세대 여성운동가 이효재 교수가 지난 4일 별세하자 여러 언론이 그를 기리는 기사를 내놨다. 이 교수는 호주제 폐지, 동일노동 동일임금, 비례대표제 도입, 차별호봉 철폐,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에 매진했다. 이 교수는 학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1980년 광주항쟁에 침묵하지 않은 대가로 1958년부터 재직해온 이화여대 교수에서 4년 간 해직되기도 했다. 1987년 여성민우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91년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들어 공동대표를 지냈다.

이 교수는 192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47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앨래바머 대학과 1957년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이화여대 교수로 정년까지 지냈다. 잠시 서울여대 교수도 지냈다.

이 교수는 1996년 고향 인근 진해로 내려갔다. 그곳은 아버지 고 이약신 목사가 해방 직후 세운 고아원이 있었다. 고아원을 확장한 경신사회복지연구소 소장으로 연구를 이어갔다. 김영삼 정부가 1996년 훈장을 줬지만 5공 정권에 부역한 여성과 함께 수상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이 교수의 연구 활동은 1985년 ‘한국 여성노동사 연구서설’과 1990년 ‘한국 가부장제의 확립과 변형’, 1994년 ‘이데올로기와 가족’, 1995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가족’ 등 정년 이후에도 왕성했다. 2006년엔 아버지 고 이약신 목사의 전기도 완성했다. 이 교수가 1979년에 쓴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은 여성운동의 교과서였다. 한국 최초로 여성학과를 개설한 공도 크다.

  경향신문 2020년 10월 6일 30면

이 교수의 학문과 사회 활동은 70년대부터 두드러졌지만 1965년 ‘한국 사회구조’를 놓고 고 고영복 교수와 벌인 논쟁이 출발점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구체(사회구성체) 논쟁이었다.

고영복 당시 이화여대 교수는 신동아 1965년 2월호 ‘한국 사회구조의 분석’이란 논문을 실었다. 고 교수는 “근대화로 이행과정에 있다”는 가설 하에 우리 사회가 과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추적했다.

반년 쯤 지나 당시 이효재 서울여대 교수가 ‘사상계’에 고 교수 논문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 교수는 “접근방식의 잘못 때문에 현실을 잘못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부정과 부패현상’을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해 “우리 사회 모순의 근본 원인인 ‘빈곤과 궁핍’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 교수는 동아일보에 ‘한국사회구조의 분석 재론’을 실어 “자신의 오판을 필자의 실책으로 돌린다는 것은 실례”라며 재반박했다. 두 사람은 서구의 사회과학 방법론을 우리 현실에 적용하고, 우리 사회구조 분석 방법론을 둘러싼 첫 학술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 당시 개혁적 목소리를 내는 학자였다.

고 교수는 신동아 1965년 2월호에 쓴 ‘한국사회구조의 분석’에서 “한국의 사회구조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모순의 사회구조를 꿰뚫어 보고 개선의 전망이 없이는 건전한 사회란 백일몽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특히 정책 입안자들에게 충고하고 싶다”며 “한국의 사회구조가 외국인이나 상류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바라고 환영하는 사회구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도 상호간에 불신이 없는 일치점을 찾도록 하고 그 원리가 민중에게 뿌리박아서 호응을 받도록 체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1965년 ‘사상계’ 8월호에 ‘한국사회학의 과제 – 고영복씨의 한국사회구조의 분석을 비판함’이란 제목으로 반박 논문을 썼다. 이 교수는 “(고씨는) 근대화로 이행과정에 있다는 가정 하에 ‘개인’이 지닌 전근대적 또는 근대적 ‘태도’를 고찰하는 자료로 발표했다. 고 씨는 후진성에서 조속히 탈피하지 못하고 쓰라린 고통 속에 있는 원인을 개인의 태도적 측면에서 추궁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우리의 현실을 오히려 잘못 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씨의 불행은 접근방법의 실책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소학(초등학교) 졸업자와 그 이하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전근대적 태도는 전체 응답자의 80%였다. 이 때문에 고 씨는 대다수의 인구가 ‘전근대적 심성 하에 있다’고 추정했다”며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성질의 여러 문제를 이렇게 무식대중의 보수성에만 결부시켜 설명한다면 다음의 여러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고 씨에게 묻고 싶다. 각 기관 및 조직체를 휩쓸고 있는 정실주의와 권위주의에서 생기는 ‘부정부패’가 사실상 무식자층의 보수성에 연유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사회구조의 전근대성을 ‘개인이 지닌 태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피상적 구조분석”이라며 “과도기의 개인들은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함께 지닌다. ‘태도’를 사회구조의 성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삼은 것은 적절치 못했다. 태도에 대한 질문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행동’을 물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구조의 성격을 가장 적절히 대표하는 것은 부정과 부패다. 부정과 부패의 현상은 ‘인간관계의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정과 부패를 흔히 우리의 민족성에다 결부시켜 통탄해 한다. 이는 사회구조의 원인을 ‘민족성이란 심리적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는 지나친 단정”이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된 ‘빈곤’이 근본원인”이라며 “빽과 연줄을 따라 소수만이 행운의 기회와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비민주적 부정부패’는 사회 제 부문에 걸쳐 빈곤상태를 면하기까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지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빈곤’을 우리 사회구조를 설명할 선행요소로 본다. 따라서 우리 한국의 사회학을 ‘빈곤의 사회학’이라고 부르고 싶다”며 자신의 사회분석론을 제시했다.

이에 고 교수는 1965년 8월5일자 동아일보에 ‘한국사회구조의 분석 재론 - 이효재씨의 반론에 답함’이란 기고에서 재반박에 나섰다. 고 교수는 “이 씨의 논점은 내가 한국사회의 구조를 분석하는데서 ‘태도’ 변수만을 중심에 둔 접근방법이 ‘실책’이라고 나를 꾸짖었다. 나는 이 씨가 부정부패를 낳은 원인이라고 지목한 ‘빈곤’을, 구조 외적 요인이 아니고 구조 내적 요인이라고 본다. 이씨는 ‘인간관계의 구조’만을 사회구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씨가 말한 인간관계적 사회구조는 계층적 구조 속의, 제도적 구조 속의 집단관계에서 일어나는 하위적 개념”이라며 빈곤이 모두가 아님을 강조했다. 고 교수는 “이씨는 ‘빈곤이 있는 한 부정부패는 불가피하다’는 논조를 끌고 가는데 이것은 위험한 현실 타협”이라며 “아무리 빈곤해도 정치력만 건실하면 부정부패는 막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논쟁에서 이 교수는 고 교수의 첫 논문이 ‘개인의 태도’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개인의 행동’을 놓친 지점을 잘 파고들었다. 이 교수는 고 교수가 “사회구조의 원인을 민족성이라는 심리적 차원”에서 분석해 한계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교수는 “(고 교수가) 한국 사회가 지닌 전근대적 성질의 여러 문제를 학력이 낮은 사람들의 보수성에만 결부시켜 설명”하려는 오류를 범했다고 짚었다. 이 교수는 사회과학을 국민 정서에 의존하려는 듯한 고 교수의 방법론을 비판했다. 하지만 ‘빈곤’을 앞세운 이 교수의 반박도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교수가 재재반박하지 않으면서 논쟁은 끝났다. 재재반박했더라면 ‘빈곤’을 둘러싼 과학적 근거도 나왔으리라.

다만 ‘북어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식의 봉건주의에 절어 있던 1960년대에 벌어진 논쟁 치고는 상당한 수준의 진검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