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워커스 사전]


“자유가 지나쳐 방종이 되어선 안 된다.”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면서 지겹게 들어 온 말이다. 우스운 점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상황이 대개 학생이 자기 헤어스타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거나, 학교에서 양말 색깔이나 외투 착용 등을 단속하지 말라고 주장할 때라는 것이다. 자기 머리카락을 기를지 말지, 파마를 할지 말지, 날이 더워 짧은 소매 티셔츠를 입을지 말지에 학교의 단속과 강제를 받지 않는 것이 방종씩이나 될 일인지 의문이다.

자유와 방종 운운은 내가 싫어하는 상투어 탑5 안에 반드시 들어가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유를 정도의 문제이자 권력자가 허락하는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게 고약한 점이다. 여기서 자유와 방종을 가르는 경계는 그저 ‘얼마나 심하냐’, ‘다른 사람(특히 권력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지역마다, 교육청마다, 학교장마다, 교사마다 달라진다. 가령 머리카락 길이 정도는 자유롭게 해도 되겠지만 알록달록한 색깔로 염색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고 학생답지 못하므로 방종이라는 식이다. 동성애는 ‘(내가 보기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비정상적이라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이는 ‘인권으로서의 자유’의 개념과는 상충하는 관점이다. 자유를 애당초 허락의 대상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마치 자유는 긍정적인 것으로, 방종은 부정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유란 언제든 방종이 될 위험이 있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한다. 초·중·고 학생들 개개인의 두발 자유를 보장하라고 주장해도, 그간 교육부·교육청은 두발 자율화니 학교의 자율성이니 하며 각 학교에서 의견을 수렴해 관련 학칙을 개정하라는 정책을 내놓곤 했다.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결국 학생의 신체와 자기결정의 영역을 개인의 자유가 아닌 기관의 규율과 통제 아래에 두려는 태도다.

그런데 예로부터 한자어로 사용되던 ‘자유’라는 단어는 제멋대로 하거나 함부로 행동한다는 부정적인 의미인 경우가 많았다. 중립적 어감으로 쓰일 때도 ‘내 마음대로 하는’, ‘자기 뜻대로’ 정도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영어 liberty, freedom의 번역어로 ‘自由(じゆう)’가 채택되면서 ‘강제당하지 않을 개인의 권리’를 뜻하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1) 동아시아에서 쓰던 자유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방종’에 가까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학생에게 용의 복장의 자유 하나 보장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에 반감을 가지며 곧장 방종과 연결하는 것은, 자유란 말이 원래부터 부정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석열과 이명박의 자유

그런데도 자유는 분명 한국에서 사랑받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5번이나 말했다. 얼마 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33번 언급했다. 자유는 보편적 가치이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유 시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윤석열 정부가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소수자들이 자유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설까? 예컨대 정치적 표현의 자유도, 사생활의 자유도 억압당하는 청소년의 자유 확대를 위해 ‘학생인권법’을 만들고 선거법을 개정할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도, 국민의힘도, 그리고 윤석열을 찍은 유권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이 말하는 자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추상적인 말들 뒤에 곧바로 나온다. “도약은 혁신에서 나오고 혁신은 자유에서 나옵니다. 민간 부문이 도약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혁신하겠습니다.” 광복절 경축사의 한 대목이다. 인류 보편의 가치이자 지향해야 할 목표였던 자유가 어느새 도약(경제성장)의 수단으로 내려앉았다. 윤석열 정부가 검토, 추진하고 있는 노동자 해고 사유 확대, 기간제·파견 노동 범위 확대, 부당노동행위 형사 처벌 조항 삭제 등의 정책은 대통령이 말한 자유가 자본주의를 꾸미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준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 규제 완화를 자유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규제 완화·폐지에 아주 적극적이었던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자율화’ 간판과 함께 추진된 정책은 학생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한 각종 지침을 재검토하고 없애는 내용이었고, 학교 규칙을 학교장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 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등 학생의 자유에는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았다. 노동이나 산업에 관한 영역에서도 각종 기준과 안전장치들이 약화하며 인명사고로 이어지곤 했다. 윤석열 정부나 이명박 정부의 자유는 학교와 기업, 돈과 권력이 간섭이나 규제받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자유는 평등을 포함한다

자유를 불간섭과 동의어로 이해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는 인식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는 간섭이나 규제가 없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이다. 본래 자유(liberty) 개념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노예와 대비되는 자유민에 있다. 노예로 종속되지 않고 해방돼 자기 자신 외에 따로 ‘주인’이 없는 것, 다른 사람에게 지배받지 않는 것이 자유민이다. 자유가 노예 아닌 자의 특권이 아닌 보편적인 권리가 되려면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평등이 동반돼야 한다.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에 누가 다른 이를 지배할 수 없고 그렇기에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 학생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교는 학생을 통제하고 지배해야 하는 미성숙하고 열등한 위치에 놓기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기업이나 권력기관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현 상황에서 자본이나 권력에 대한 규제를 없애는 건 오히려 누군가를 노예로 삼고 지배하도록 방임하고 조장하는 것에 가깝다. 학교의 자율성을 늘린다는 정책이 학생의 삶이 지배당하고 종속되게 만들듯이 말이다. 차별과 불평등을 방치하고 강화하는 정책 역시 자유를 저해한다. 차별은 억압당하고 지배당하는 소수자 집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를 간섭이나 규제의 반대라고 생각하다 보면 타자의 존재를 자유에 대한 방해물처럼 느끼기 십상이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표현할 자유’를 고수하겠다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이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그 예다. ‘저들이 없다면(혹은 조용히 있다면)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자유가 보장된 상태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당신의 주먹을 휘두를 자유는 다른 사람의 코끝에서 끝난다”라는 올리버 웬델 홈즈 미국 연방대법관의 말은 일견 틀린 점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유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그럼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내가 마음대로 주먹을 휘둘러도 되겠다’라는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 자유는 불간섭의 상태가 아니라 평등한 존재들 사이의 상호간섭, 상호작용의 상태다. 간섭이 강제와 억압이 되지 않기 위해 더욱 평등이 중요하다.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먹을 왜 휘두르는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짓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손을 뻗는 것은 때리거나 위협하기 위해서든, 혹은 쓰다듬거나 만지기 위해서든 다른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혼잣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말을 들어 주고 영향을 받을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외모를 꾸미고 옷에 신경 쓰는 것은 자기가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자는 자유를 제한하는 경계선이 아니라 자유의 전제이자 더 풍부하고 폭넓은 자유를 위한 조건이다. 자유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자기 자신(自)으로부터 비롯된다(由)는 의미인데 애초에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니 당연하다. 평등한 타자를 부정하는 차별과 혐오는 ‘자유의 남용’이 아니라 자유 자체의 토대를 허무는 일, 자유에 반대하는 일로 봐야 한다.

자유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 자칭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정치 세력이 정작 ‘자유가 방종이 되어선 안 된다’라며, 학생 용의 복장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어이없는 일을 수십 년간 목격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입에 담는 자유가 거짓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보다는 그들이 안타깝게도 자유를 불간섭과 규제 없음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만일 ‘자유’와 ‘방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방종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자유, 평등한 타자를 전제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저 ‘규제 없음’만을 바라니까 말이다.


1) 야나부 아키라 씀, 김옥희 옮김(2020),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