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노란조끼에서 연금 개악 반대로

[INTERNATIONAL]“평생 일만 하다가 무덤으로 가는 삶을 거부한다!”

프랑스에서 마크롱 정부의 연금 개악에 맞선 거대한 파업과 투쟁이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투쟁이 처음 시작된 지난해 12월 5일에는 거의 모든 열차와 지하철이 멈춰 섰고, 학교와 우체국, 병원, 발전소 등이 마비됐다. 그 후 지금까지 열 차례 가까운 ‘집중행동의 날’이 있었고, 그때마다 수십만 명이 주요 대도시에 쏟아져 나와 행진하고 하루 파업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100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만 세 차례 이상 열렸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용수들은 〈백조의 호수〉에 맞춰 춤을 추면서 투쟁 참가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공무원, 교사, 우체부, 소방관, 청소부, 간호사 등이 파업에 함께했다. 조직된 노동자들만이 아닌 ‘노란조끼(Gilets Jaunes)’ 운동, 여성, 학생, 환경 단체 등이 투쟁에 연대했다. 투쟁의 중심에는 지난해 12월 5일부터 시작된 국영철도공사(SNCF)와 파리교통공사(RATP) 노동자들의 역사상 최장기 무기한 파업이 있었다.

  1월 10일 시위 장면 [출처: @mojos55]

투쟁은 마크롱이 연금 개악을 도발하면서 촉발됐다. 개악의 내용은 총체적이었다. 현재 프랑스 노동자들이 받는 퇴직 연금은 직업에 따라 42개 종류로 복잡하지만 대체로 62세에 퇴직해, 자신의 임금이 가장 높았던 시기를 기준으로 안정적인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광산, 철도 등 더 열악한 조건에서 고되게 일하던 노동자들은 50대 후반에 조기 퇴직해도 연금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마크롱은 연금 제도를 하나로 통합하며 이것을 전부 후퇴시키려 했다. 퇴직 연령을 64세 이상으로 올리고, 임금이 가장 높았던 시기가 아닌 전체 기간의 평균으로 연금액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또 ‘포인트 기반 연금제도’를 도입해 더 힘들게 일하도록 강요하고, 일부 노동자들에게 허용됐던 조기퇴직도 없애버리려 했다. 결과적으로 더 늙은 나이까지 더 오래 일하고 더 적은 연금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마크롱은 노동자들의 기대수명이 늘어났고, 이대로 가면 2025년까지 170억 유로의 연금 적자가 발생한다며 개악을 정당화했다. 복잡한 연금을 하나로 통합해 누구는 더 빨리 퇴직해서 똑같이 연금을 받는 ‘불공평’을 없애고, ‘강성노조의 특권적 노동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이나 자영업자, 청년들에게도 ‘공정’한 연금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연금과 복지체계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프랑스에서 진행된 공산당 주도의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투쟁과 급진화 속에서 도입된 역사적 성과다. 1968년 혁명을 거치면서 그런 성과는 더욱 확대됐다. 특히 괜찮은 연금제도 덕분에 프랑스의 노인 빈곤률은 같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비교적 낮은 수준이다. 프랑스 지배계급은 이런 것들을 무너뜨리려고 그동안 많은 시도를 해왔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반혁명’ 속에서 같은 시도가 거듭돼 왔지만, 프랑스 노동자·민중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공격과 반격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중요한 고비들을 맞았다. 1995년에 알랭 쥐페 총리는 현재 마크롱과 비슷한 연금 개악을 시도했지만, 한 달 동안 200만여 명이 참가하는 파업에 밀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에 드빌팽 정부는 청년들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몰아가려는 ‘최초노동계약(CPE)’을 시도했지만, 청년학생과 노동자들의 대대적 저항으로 무산됐다.

이런 지속적 저항과 그 성과들이 오늘날 ‘프랑스 예외주의’(French exception)라고 불리는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냈다. 유럽 대부분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통해 안정된 노동조건과 복지국가를 해체시키는 동안에도 프랑스는 어느 정도 그것을 지켜냈다. 2017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극단적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은 바로 이 ‘프랑스 예외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것이 프랑스 사회의 ‘보수성’을 높이면서 ‘경쟁력’을 떨어뜨려 왔다는 논리였다. 집권 초만 해도 마크롱의 계획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부유세와 법인세를 줄이고, 복지예산을 삭감했다. 의회를 거치지 않고 긴급 행정명령으로 주요 노동개악도 단행했다. 해고를 더 쉽게 만들고 산별노조의 권한을 약화시켰으며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철도‘개혁’이었다. 국영철도공사(SNCF) 노동자들은 프랑스 조직 노동자들의 중핵이기에, 여기서 노동자들의 기를 꺾으면 다른 부문으로의 더 큰 공격이 가능해진다. 마크롱은 철도 노동자들의 종신고용과 복지 혜택 같은 ‘특권’을 공격하면서 경쟁 체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저항했지만 마크롱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고수하며 구조조정을 어느 정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노조 조직률과 파업 일수가 계속 줄어들고, 하루 파업이나 태업 같은 단기적이고 간접적인 형태의 투쟁이 늘어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노동운동의 약화는 지난 2017년 대선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당의 몰락과 의회에서 좌파의 주변화로도 나타났다. 대선 1차 투표에서는 급진좌파인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 LFI)의 장 뤽 멜랑숑이 19%를 득표했지만, 결선 투표는 극우 파시스트인 르펜과 마크롱의 양자대결이 됐다. 지금 프랑스 의회에서 좌파의 의석수는 사회당까지 포함해도 10%밖에 되지 않는다.

철도‘개혁’ 이후 마크롱은 연금 개악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의 힘을 더 약화시키고, 사적연금을 활성화시키며, 나이 든 노동자들이 더 오래 노동시장에 남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조로울 것 같던 마크롱의 정책 추진은 집권 1년 반 만에 예기치 못한 강력한 걸림돌에 직면했다. 그것은 바로 ‘노란 조끼’ 투쟁이었다. 마크롱이 2018년 11월에 유류세 인상을 단행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마크롱은 보통 사람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이런 정책을 ‘친환경’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변두리 지역에서 소외와 차별, 가난과 실업에 고통받던 사람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그야말로 활화산과 같은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기존의 전통적 좌파나 노동조합, 사회단체들이 조직하거나 지도한 투쟁이 아니었지만, 그만큼 마크롱 정부에게는 심각한 정치적 도전이 됐다. 좌우가 뒤섞인 대중들의 참여 속에 진행된 이 ‘지도부 없는 운동’ 앞에서, 마크롱 정부는 유류세 인상을 철회하고 몇 가지 복지 확대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투쟁이 정치적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연금 개악 반대 투쟁은 바로 이렇게 바뀐 유리한 지형 위에서 시작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철도 노동자 등은 자신감을 갖고 파업에 돌입할 수 있었고, 여론조사에서도 10명 중 6명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파업을 지지하는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은 200만 유로를 훨씬 넘어섰다. 결국 마크롱은 한발 물러서며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시작했다. 연금 수령 연령을 높이는 것은 일시적으로 철회됐고, 1975년생 이후부터 바뀐 연금제도를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최소 연금액을 인상해 기본적 노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연금개편추진위원장 장 폴 델르부아는 사퇴했고, 마크롱은 자신부터 대통령 연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개악의 본질적 핵심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정부는 올해 1월 24일에 연금 개악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고, 2월 17일에는 하원에 제출해 심의를 시작했다. 3월 15일 지방선거 전까지는 개악을 완료하겠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야당들은 개악안에 대한 수정 요구를 수만 개까지 제출하며 입법 지연 전술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과연 마크롱의 뜻대로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상황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주요 노조연맹 중에서 프랑스노동총동맹(CGT)과 달리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은 처음부터 투쟁에 소극적이었다. 진정한 총파업이라기보다는 많은 노동자들이 공공부문 파업을 지원하는 데 머무는 소위 ‘대리 파업(strike by proxy)’의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임금을 못 받게 되면서 동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파업의 핵심 두 축 중 하나였던 파리교통공사(RATP)의 파업은 1월말에 중단됐고, 남아있던 국영철도공사(SNCF)의 파업도 참가율이 줄어들고 있다. 파업에 우호적이던 여론도 일상의 불편함이 계속되고, 마크롱의 부분적인 양보와 이간질 속에서 다소 줄어든 게 사실이다.

아직 이 연금 개악을 둘러싼 전투의 승패는 단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노동자들이 연금 개악을 완전히 막아내며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결국 마크롱이 부분적인 후퇴 속에서도 연금 개악의 핵심을 유지하며 다음 개악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을 놓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든 항상 그렇듯이 단순하게 ‘아래로부터의 힘과 자신감은 충분했는데 그것을 배신한 노조 관료들 때문’이라거나, ‘혁명적 당이 있었다면 승리했을 것’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노란조끼 투쟁처럼 이 투쟁도 마크롱에 맞서는 민중저항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되고 자양분과 교훈을 남길 것이다.

당장은 그동안 분열과 약화를 지속하던 좌파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3월 지방선거에서 사회당, 공산당, 녹색당, LFI까지 포함하는 선거연합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르펜의 국민연합(RN)이 마크롱에 대한 불만을 인종주의와 극우정치로 흡수해 가는 상황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특히 다음 대선에서 르펜의 집권을 막아내는 것은 프랑스 민중에게 중대한 역사적 과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번 투쟁에서 드러난 우리 편의 부족함을 메우면서, 이후의 성공적인 투쟁을 준비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대리파업이나 하루 파업을 넘어서서 모두가 함께하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런 투쟁을 위한 우리 모두의 요구는 무엇이 될 것인가. 노란조끼, 조직 노동자,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청년학생들, 젠더 정의를 요구하는 소수자들이 모두 함께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참고 자료]
https://www.rs21.org.uk/2020/01/15/france-on-the-march-macron-vs-the-unions/
https://www.jacobinmag.com/2019/12/france-strike-pension-plan-emmanuelmacron
https://www.jacobinmag.com/2019/12/france-strike-welfare-state-pensionsemmanuel-macron
https://www.jacobinmag.com/2020/01/france-strikes-trade-unions-gilets-jau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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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시위 , 마크롱 , 노란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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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한국은 극소수의 정규직화와 거대한 양극화가 맞물려서 가네요.

  • 아저씨

    러시아가 아주 어두운 길로 가는 것만 같습니다. 푸틴의 종신제로 간다는 뉴스도 있는 것을 볼 때. 중세의 암흑기 초입을 연상할 수도. 그동안 유럽이 경제력이었다면 러시아는 군사력과 함께 세계사의 몇 장을 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 미국과 중국의 흐름을 더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