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대선, 분홍빛 물결에 다시 몸을 맡긴 에콰도르

[INTERNATIONAL2]

올해 2월 7일 에콰도르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안드레스 아라우스 후보가 득표율 32.72%로 1위를 차지했다. 당선이 확정되려면 과반을 얻거나, 40% 이상 득표이면서 2위와 1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려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아라우스 후보는 득표율 19.74%의 2위 기예르모 라소 후보와 4월 11일 결선 투표를 진행한다. 이변이 없는 한 아라우스가 차기 에콰도르 대통령이 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 보였던 분홍빛 물결(1)이 다시 차오르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 한편에선 보수파 기예르모 라소 후보와 겨우 0.35%p 차이로 3위에 머문 야쿠 페레스 후보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에콰도르가 아라우스를 선택했다는 점만큼이나 2, 3위 후보의 접전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글에서는 2000년대 이후 에콰도르의 정세 변화 속에서 이번 대선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나라, 에콰도르

지난해 12월 19일부터 올해 2월 2일까지,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에콰도르 화가인 오스왈도 과야사민의 전시가 열렸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였고,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방문객의 수를 제한한 예약제 관람이었다. 하지만 전 회차 관람이 매진돼 본래 예정된 전시 기간을 열흘간 연장할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강렬하게 담아낸 ‘분노의 시대’와 ‘애도의 길’ 연작 시리즈 일부가 전시돼 관람객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들은 20세기 전반기 인류의 자화상이지만, 무엇보다 과야사민 자신이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와 에콰도르 민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에콰도르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에 비해 국토와 인구가 작기 때문에 남미의 ‘소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태평양 연안부터 아마존 밀림까지, 대한민국의 2.5배에 이르는 국토는 풍부한 자연 자원을 자랑한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에콰도르는 1970년대까지 군부 독재를 경험했다. 과야사민의 연작 시리즈 ‘분노의 시대’는 이 시기의 고통과 폭력을 주제로 삼고 있다.

  2019년 에콰도르 대중 시위 중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2019_Ecuadorian_protests]

에콰도르는 1980년대 민주주의 이행기를 지나, 1990년대 원유 생산의 증가와 함께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다. 그러나 치솟는 인플레이션과 경제 위기로 급기야 1999년 3월 8일부터 5일간 모든 은행거래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듬해에는 자국의 통화를 미국의 달러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해 희생양이 된 민중의 분노는 결국 군사 쿠데타를 불러왔다. ‘분노의 시대’는 2007년 라파엘 코레아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비로소 잦아들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에콰도르의 정치 지형은 라파엘 코레아의 노선을 계승하는 친 코레아파와 반 코레아파로 양분된다. 이번 대선 결과는 친 코레아파의 승리인 동시에, 양분된 정치 지형의 혁신을 바라는 에콰도르 민중의 바람을 보여준다.

수막 카우사이로 에콰도르를 재건한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는 2000년대 이후 분홍빛 물결을 이끌었던 베네수엘라, 브라질, 볼리비아 등 남미의 ‘대국’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에콰도르 역시 2007년 라파엘 코레아의 대통령 당선으로 분홍빛 물결에 합류했고 2017년까지 그 물결의 일부를 이뤘다. 당선 직후부터 라파엘 코레아는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통합을 주창했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손을 잡았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전방위적인 개혁을 진행하는 동시에 2008년 ‘수막 카우사이’(케추아어로 ‘충만한 삶’을 뜻하며, 스페인어 ‘부엔 비비르(buen vivir)’로도 알려져 있다)를 기조로 헌법을 개정했다. 신자유주의 모델이 추구하는 개발중심의 ‘발전’과 차별화된, 공존과 통합의 공동체적 발전을 추구하는 탈식민지적 국가 개혁이었다.

‘탈식민주의’와 ‘국가 모델 변화’라는 이론과 현실 정치의 접점 위에서, 에콰도르는 괄목할만한 변화를 이뤄냈다. 라파엘 코레아 집권 전후인 2006년과 2016년 사이에 150만 명이 빈곤층에서 벗어났고, 극빈층이 절반가량 감소했다. 불평등 지수도 완화돼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는 36.4배에서 24.3배로 감소했다. 실업률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낮았으며, 200만 명이 사회보장제도에 새로 가입했다.(2)

2017년 대선에서 당선된 레닌 모레노는 라파엘 코레아의 노선을 이어가기로 예정돼 있었다. 레닌 모레노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라파엘 코레아 정부의 부통령이자 그의 후임자로 나선 대선 여당 후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라파엘 코레아의 국가 개혁이 지속하기를 바라는 에콰도르 국민의 선택이었다. 분홍빛 물결은 막힘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에콰도르 국민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느닷없이 신자유주의를 복귀시켰다.

레닌 모레노가 불러낸 신자유주의

레닌 모레노 정부는 에콰도르의 경제 정책을 시장주의로 선회했다. 이는 일부 정부 인사에게 특권을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시장 개혁은 바나나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장관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외국인 투자자와 대기업의 세금 감면 역시 경제 엘리트 계층인 정치인에게 유리했다. 언제나 그렇듯 시장주의는 국제 유가 하락 등으로 수년 전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의 징후를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됐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경제 회복보다는 일부 계층의 부의 증식과 또 다른 계층의 빈곤화로 나타났다.

  2019년 에콰도르 대중 시위 중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2019_Ecuadorian_protests]

경제 회복을 위해 신자유주의로 귀환한 에콰도르는 IMF 금융지원을 추진한 끝에 2019년 2월 합의에 도달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IMF가 제시한 소위 재정 건전화 프로그램에 따라 긴축재정, 공기업 민영화, 외국인 투자 유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다시 시작했다. 2019년 에콰도르는 그렇게 또다시 신자유주의의 실험 무대에 뛰어들었다. 그해 10월 1일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긴축 재정안을 발표했고, 거기에는 유류 보조금 폐지도 담겨있었다.

신자유주의 실험의 희생양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에콰도르 민중은 거세게 반발했다. 에콰도르 민중의 두 축인 노동자와 원주민은 각각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통행금지령이 발포될 만큼 거센 저항이 열흘 동안 이어졌고, 8명이 사망하고 1천명 이상이 다치거나 체포됐다. 결국 유류 보조금 폐지안은 무효가 됐고 레닌 모레노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궁지에 몰린 레닌 모레노 정부는 재기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의 확산 속에서 에콰도르는 ‘거리에 방치된 시신’(3)을 수습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로 국내외에 각인됐다. 혹자가 말하듯 에콰도르 국민은 레닌 모레로가 물러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라파엘 코레아 노선의 회복

이런 상황에서 에콰도르 대선 판도는 라파엘 코레아의 모델로 복귀하느냐, 레닌 모레노가 귀환시킨 신자유주의 모델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키느냐로 갈라졌다. 2월 7일 선거 결과는 라파엘 코레아의 모델을 계승한 36세의 젊은 경제학자 안드레스 아라우스의 승리였다. 그는 부자 증세, 사회 보장 지출 확대, IMF 금융지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드러내며 기예르모 라소를 오푸스데이(가톨릭교회의 성직자치단으로 상류층 중심의 보수적 정치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속의 금융인으로 몰아세웠다. 보수파 주자로 선거에 나선 기예르모 라소는 외국인 투자 확대와 석유 증산 등을 약속하며, 안드레스 아라우스를 ‘차베스주의자’로 지목했다. 정치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혼란을 에콰도르로 옮겨올 것이라는 경고였다. 에콰도르 국민은 안드레스 아라우스를 선택함으로써 라파엘 코레아의 노선을 희망했다. 2019년의 사회적 혼란과 2020년 코로나19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가져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총 16명의 대선후보 중 87% 이상 득표한 1위부터 4위까지 후보들을 보면, 신자유주의 보수파 후보는 득표율 2위의 기예르모 라소뿐이다. 3위를 차지한 야쿠 페레스와 4위의 하비에르 에르바스에게 던졌던 표가 기예르모 라소에게 몰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를 향해 억지로 돌린 기수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야쿠를 지키는 원주민 운동가, 야쿠 페레스의 등장

뿐만 아니라 라파엘 코레아 노선이 대변하는 분홍빛 물결과 차별화된 새로운 좌파 세력의 등장도 예고하고 있다. 미세한 차이로 결선에 올라가지 못한 득표율 3위의 야쿠 페레스는 2019년 봉기를 정치적 자원으로 삼은 원주민 환경운동가다. 본래 카를로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는 2017년 ‘야쿠’로 개명했다. ‘야쿠’는 에콰도르 원주민어 가운데 비중이 높은 케추아어로 ‘물’을 뜻한다. 에콰도르 원주민은 라파엘 코레아 집권 시기부터 채굴 주의에 반대하며 ‘물’을 지키는 투쟁을 해왔고, 원주민 운동과 환경 운동을 결합하고 있다. 그래서 ‘야쿠는 민중이다’라는 슬로건은 의미심장하다. 이 슬로건은 채굴정책에 반대하며 ‘발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한편, 계급 중심으로 사고하는 전통적 좌파를 향해서도 일침을 놓고 있다. 야쿠 페레스에 대한 19.39%의 지지는 라파엘 코레아의 노선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분홍빛 물결은 석유 등 자연자원 채굴에 의지한 경제 발전을 토대로 정치적 진보주의를 추구해왔다. 2015년을 전후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의 위기가 곳곳에서 목격되는 이유는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이 가져온 경제 위기와 맞물려있다. 좌파 정부는 채굴중심의 경제 발전과 정치적 진보주의가 빚어내는 함수에 갇히고 있다. 에콰도르는 다시 분홍빛 물결에 몸을 맡기는 듯 보이지만, 이제 그 시선은 물결 너머를 향하고 있다.

(1) Pink tide. ‘분홍색 물결’이라는 뜻으로, 1990년대 말부터 중남미 각국에 연달아 좌파 정부가 수립된 흐름을 가리킨다.
(2) Adoración Guamán, Jonathan Báez, El legado de 4 años de gobierno de la coalición reaccionaria en Ecuador, www.rebelion.org.
(3) 2020년 4월 국내 다수의 언론매체에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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