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람페두사의 난민이었다”

왜 카다피 독재 아래에서보다 여기의 삶이 더 열악한가?

나는 람페두사 난민이었다. 이 글은 리비아에서 탈출해 생존한 내 이야기다.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목숨을 걸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밀항선을 타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서 육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위험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내 옆의 한 소년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그가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후에야 그 소년이 저 파도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 임신한 여성은 구토하며 절규했다. 갑판 아래 있던 사람들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외치자 ‘승무원’들은 아래로 내려가 그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 배가 250명의 승객을 태우고 리비아를 떠난 이틀 뒤에야 구조 헬리콥터가 나타났고, 그때에는 이미 몇몇 사람이 파도에 의해 바다로 휩쓸려갔거나 어두운 아래층에서 질식사한 후였다. 내가 리비아를 빠져나오기 위해 밀입국 브로커에게 돈을 낸 뒤로 거의 4년이 흘렀고, 이제 와서 다시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고, 왜 그래야 했는지 사람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출처: 가디언 화면캡처]

나는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에 도착한 수십만 명 중 한 명이다. 지중해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살인적인 국경이다. 우리 모두에겐 그러한 바다를 건너와야 했던 각각의 이유가 있다. 일부는 유럽에서 보다 나은 삶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전쟁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한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는 것은 밀항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나이지리아 출신이다. 리비아에서 산 지 5년째가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다. 내 삶은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재단사였고,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돈을 부칠 만큼의 충분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뒤, 나와 같은 -흑인-들은 매우 위험해졌다. 모든 청년이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집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리를 약탈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무언가를 위해 밖으로 나가면 패거리들은 그를 세우고 자신들을 지지하는지 묻곤 했다. 그들은 반란군일 수도, 정부 측일 수도 있었다. 알 방도가 없었다.

나는 나이지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부는 봉쇄됐고, 이탈리아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내게 말해준 몇몇 사람을 트리폴리에서 만났다. 그들은 나를 한 해변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수백 명이 천막에 살면서 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는 시리아, 알제리 또는 이집트에서 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프리카 서부나 동부 출신이었다. 남자들이 많았지만, 아이가 있는 가족들과 여자들도 있었다. 가격은 정해지지 않았다. 가격은 브로커가 누구이고, 자신이 얼마나 필사적인지에 달려 있었다. 나는 400디나르(약 40만 원)를 냈다. 이 돈은 내가 받던 일주일치 급료 수준이다. 밀입국업자들은 도저히 쓸 수도 없을 만큼 낡은 고기잡이배를 구해와서 새 엔진을 달아 아는 사람들에게 넘겼다. 배의 '선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길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선장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배가 출발했을 때, 우리는 엔진이 고장날까봐 걱정했다. 하지만 곧 가장 큰 문제는 파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트는 항해용이 아니었고, 큰 파도가 칠 때마다 솟구쳐 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마지막 기도를 외우는 것뿐이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고 느꼈다. 그때가 2011년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리비아 해안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다.

영국 정치인들이 지중해에서 구조 조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극우정당의 정치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은 정부의 정책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끔찍한 결정이다. 유럽은 사람들이 더 이상 물에 빠져 죽지 않도록 하는 데 책임이 있다. 어떤 면에선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프리카에서 그들이 수행한 조치들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난민들을 구조하는 데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지원이 필요하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와 독일과 같은 나라들은 거리도 멀고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프리카 식민정책에 가담했었다. 나토는 리비아 전쟁에 참가했다. 이들 모두가 현재 문제의 일부다.

왜 카다피 독재 아래에서보다 여기의 삶이 더 열악한가?

우리의 여정이 땅에 도착했을 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헬리콥터가 우리 보트를 발견한 뒤 우리는 이탈리아 선박에 의해 람페두사로 보내졌고, 감옥처럼 보이는 수용시설에 갇혔다. 그 뒤로 나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로 보내졌고, 다행히도 천막을 꿰매는 일을 얻었다. 하지만 이 일로는 먹고살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 경제는 위기 속에 빠져 있고, 수백만의 시민이 일자리를 찾으러 북유럽으로 떠나고 있어서 나 역시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베를린으로 갔다. 일자리가 제공되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증빙서류가 없어서 취직을 할 수 없었다. (난민에 관한 유럽연합의) 더블린 조약1은 난민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나라에 머물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돈은 떨어져 갔고, 결국 난민들이 살면서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거리의 한 농성장에서 살게 됐다. 이곳은 정치적인 공간이었고, 그것은 내게 동기를 부여했다. 어째서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자 아래에서보다 여기에서의 내 삶이 더 열악한가? 나는 민주주의를 믿는다. 하지만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일부를 위한 것이지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그룹을 베를린의 람페두사라고 불렀다.

나는 운이 좋았다. 베를린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고, 지금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이제 세 달이 됐다.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내 아이가 보다 나은 세상에 살기를 원한다. 또, 내가 겪은 일들이 아이에게 닥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리폴리에서의 여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이 행로가 얼마나 위험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못했다. 내 평생에 보트를 타본 것은 이전에 단 한번 뿐이었다. 사실 나는 수영도 못한다.


*주
1. 난민 보호를 위해 유럽연합이 1990년에 제정. 이 조약은 “유럽으로 피난 온 난민은 도착한 첫 번째 국가에서 망명을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해 사실상 독일에서는 난민지위를 신청하지 못하도록 한다.

[원문]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5/apr/20/lampedusa-refugee-fleeing-libya-boats-italy
[번역]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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