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성장시킬 것인가?

[서평] Matthias Schmelzer·Aaron Vansintjan·Andrea Vetter, 《The Future Is Degrowth: A Guide to a World Beyond Capitalism》, Verso Books, 2022.

미국의 기대수명은 2014년에 78.9세로 정점을 찍었다. 2021년에는 76.1세로 3.5%나 감소했다(물론 인종과 계급에 따라 기대수명의 불평등이 크다). 기대수명이 폭락한 것은 지난 2년 동안의 팬데믹 상황에서 공중 보건보다 기업 이익을 우선시한 코로나 대응 정책 때문이다. 현재 경제 건전성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지표인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같은 기간 동안 약 15% 성장했다. 동시에 물과 용수가 고갈되고 생태계 파괴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폭염, 산불, 홍수 등의 재난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성장을 사회 발전의 바로미터로 삼는 경제학자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경제 성장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하지만 GDP는 주어진 기간 동안, 주어진 장소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금전적 가치일 뿐이다. GDP는 사회적으로 유해한 재화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GDP 추산 방식으로 측정되지 않거나 측정할 수 없는 종류의 가치 있는 것들도 있다. 노동계급의 삶이 시장의 변덕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현존하는 경기 침체가 노동자의 생활적 비참함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The Future Is Degrowth: A Guide to a World Beyond Capitalism》)은 성장(경제적이든 아니든)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와 다양한 체제 위기의 주요 기본 동인으로 진단하며, 탈성장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저자들은 탈성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구적, 생태적 정의를 가능케 하기 위해 에너지와 자원을 훨씬 적게 사용하는 것에 기반을 둔 사회,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모두를 위해 복지와 사회 정의를 보장하는 사회, 지속적인 (경제적) 확장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로의 민주적 전환.”

(에너지와 원재료) 사용량, 처리량의 감소와 경제적 팽창(확장)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주장은 (좌우의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진정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탈성장에 대한 주요 불만 중 하나는 탈성장이 남반구(Global North)의 생활 수준을 낮춘다는 것이며, 그래서 탈성장은 옳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필자가 만난 모든 탈성장 이론가와 마찬가지로, 남반구 주민의 생활 수준 저하가 목적이 아니며, 그것이 탈성장 사회의 결과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슈멜처(Schmelzer) 등 저자들은 생물물리학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전제에서 출발해 거기에서 거꾸로 고찰한다. 그들은 에너지와 재료 사용을 전반적으로 줄이는 것이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의 질을 만드는 것과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성장은 무엇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기존 사회 통념의 눈가리개를 깨고자 하는 의도적이며 도발적인 용어다. 성장이라는 용어는 (선의든 악의든) 오독하거나 오해하기 쉽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용어다. 씨앗을 성장시켜 음식을 만들고, 아이가 성장하며, 역도로 근육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성장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위한) 탈성장의 기본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더라도, 특히 운동의 형성(movement-building)과 관련해 이러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유용하거나 명확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결국, 정치적 이론화의 요점은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들은 반자본주의적 탈성장에 대한 그들의 비전이 많은 해답 중 단지 하나의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래는 탈성장이다(The Future is Degrowth)’는 선언문이라기보다는 참고 자료에 가깝고, 급진적인 관점에서 탈성장과 다양한 변종 및 경향에 대한 구체적인 개요를 제공한다.

탈성장의 핵심은 성장이 지구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특히 특정 개발 시점 이후에는 삶의 질에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1인당 GDP가 7만6,000달러로 세계 8위이지만, 2021년 기대수명은 76세로 75위에 불과하다. 일본(3만9,000달러, 85세), 이탈리아(3만5,000달러, 82세), 스페인(3만 달러, 82세), 코스타리카(1만2,000달러, 80세) 등 미국에 비해 물질적으로 가난한 나라들보다도 기대수명이 훨씬 뒤떨어져 있다. 미국이 금수 조치를 통해 수십 년 동안 죽도록 목을 졸라왔던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1인당 GDP가 9,000달러로 미국보다 88% 낮지만, 기대수명은 79세로 미국보다 높다.

건강과 행복은 양질의 음식, 주거지, 물, 환경, 공동체, 삶의 목적 등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나온다. 성장을 목표로 삼으면 일부 사람들은 이런 필요한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수준에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성장에 따른 필요 충족은 부정확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와 생태적 재생산을 약화시켜 필요의 원인이 되거나 관련된 모든 과정을 약화시킨다. 미사일을 만들고, 열대우림을 벌채하고, 값싼 플라스틱 쓰레기를 팔아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지만 그런 것은 폭력적인 낭비일 뿐이다. (성장을 통해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택이 필요하면 주택을 짓고, 식량이 필요하면 식량을 재배하면 된다.

저자들이 논의한 것처럼 경제 성장은 일반적으로 재료와 에너지 처리량 증가와 관련이 있다. 이런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GDP라는 지표는 형편없는 지표이므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성장(growth)이라는 것은 “연결되고 자기 강화하는 문화적, 사회적, 물질적 과정으로서 경제 영역을 넘어서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구조”이기 때문에 탈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경제(The Economy)라는 개념 자체는 생산을 피의 희생으로 달래야 하는 신비하고 전능한 신과 동질적 추상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생산과 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우연성-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은 인간의 결정과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결과다. 따라서 (신과 같이 결정론적 생산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도록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핵심은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풍요로움이지, 줄을 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를 우선시하는 생산은 국가 계획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들이 마지막 장에서 다루듯, 계획 경제에 대한 요구와 탈성장론자들이 선호하는 수평적이고 분권화된 정치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국가 권력의 위계와 배를 조종하는 관료주의 없이 지속 가능한 사회, 특히 더 적은 자원을 사용하는 사회로의 정의로운 전환과 같은 복잡한 것을 어떻게 계획할 수 있을까? 위계질서(hierarchy)가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는 생물권, 탈성장 등을 복원하고 구원하는 데 필요해 보이는 효율적인 의사 결정과 권력 행사는 위계를 통해 할 수 있다. “지역화한(localized)” 솔루션은 긴급성과 요구되는 변화의 규모를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은 “중앙집중적(centralized)” 솔루션은 비민주적일 수 있으며 현재 상황에서 지름길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양한 전략과 전술로 모든 전선에서 싸우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지역화에 중점을 두지만) 제안하는 것이다.

더 지역화한 식량 생산, 더 감소한 자동차 의존도, 더 많은 툴 라이브러리(tool library, 공작기계나 각종 생활용품 대여소),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더 적지만 더 고품질의, 더 내구성 있는 제품의 생산과 같은 탈성장 정책이 생활 수준의 감소를 야기하는지 여부는 궁극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 소비주의(consumerism)는 지구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과 복지에도 확실히 해롭다. 그러나 소비주의야말로 대중적인 정치 교육 용어로서 탈성장이 받는 도전 중 하나이다. 사회의 전반적인 에너지와 재료 처리량 감소가 반드시 생활 수준의 감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더 즐겁고, 적은 에너지로 온도를 조절하는 패시브 하우징은 에어컨과 가스 난방만큼 집을 편안하게 유지할 수 있으며, 탱크와 전투기를 없애도 내 삶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capitalism)는 거대한 낭비다. 판매되지 않은 모든 음식과 상품을 기업이 내다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남게 된 상품을 다른 데 (무료로) 나눠주면 이윤 시스템 전체 운영이 약화하기 때문에 일부는 재고로 떨이 처리를 하고 그래도 남는 상품은 모두 버리거나 폐기한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덜 소비한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질적으로 다른 소비가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명확하고 유용할 수 있다.

소비와 생산은 기술을 통해 중개된다. 르귄(Le Guin)이 말했듯이 “기술은 인간이 물질세계와 능동적으로 접하는 인터페이스”이다. 저자들도 (이런 측면에서) 기술 민주화를 옹호한다.

“기술의 전체 수명 주기 동안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거나, 모든 커뮤니티에 수리 센터를 개설하는 것과 같은 정책.”

기술이 이윤 동기에 의해 결정되거나, 지적재산권에 의해 제한돼서는 안 되며, 기술을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면 실제 한계와 비용이 가려진다. 다시 르귄으로 돌아가면:

“[기술]이라는 단어는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의 막대한 착취에 의해 뒷받침되는 지난 수십 년간의 엄청나게 복잡하고 전문화된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계속해서 오용되고 있다.”

현대 기술의 일부 측면이 유용하기 때문에 현대성의 모든 측면이 필요하거나 선호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발은 보편적으로 하이테크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현대의 복잡한 기술이 유지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모든 현대 첨단 기술(특히 대규모)이 유지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MRI 기계와 풍력 터빈에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F-35(최신전투기)가 필요하지 않다. 농업은 저기술 농생태학적 방법과 전자 도구를 혼합할 수 있다. 건축은 저기술, 에너지 효율적인 디자인을 태양열 패널과 혼합할 수 있다. 교통수단은 도보와 자전거를 고속철도와 전기 버스와 혼합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입증되지 않은 첨단 기술의 미래 배치를 기대하는 것과 무엇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공공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마법이 현실이 되는 일은 오지 않고, 기술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도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고, 함께해야만 가능하다.

“인류의 해방은 비인간 자연과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돼야 하는 집합적 프로젝트다.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과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최선인 것은 궁극적으로 같다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전제이자 약속이다.”

탈성장은 생태사회주의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부여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양가적이다. 슬로건으로서 탈성장은 뭔가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자본주의 한계에 대한 강조와 경제적 도그마,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는 확실히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적, 협동적 소유권을 통해 가능한 모든 곳에서 이윤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 (탈성장의)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

거시적 수준(GDP)과 미시적 수준(기업) 모두에서 자본주의의 만족할 줄 모르는 성장 욕구는 자본주의가 항상 확장을 위해 새로운 영역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정복하고 역사는 종말을 고하며 더 이상 갈 곳을 남기지 않는다.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한 성장과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망상으로 시간을 끄는 것처럼 우주 식민지에 대한 환상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환이 다가오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이를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무엇이 성장하고 쇠퇴하는지, 전환이 어떤 모습일지는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불평등한 생태학적 붕괴와 심화하는 기후위기에 직면해, 삶의 신격화로서 특유의 소비주의를 다룸으로써 권력을 놓고 경쟁할 수 있는 운동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엄격한 한계와 내부 모순에 부딪힐 것이다. 내 친구가 말했듯, “파시스트만이 지킬 수 있는 약속은 하지 말라.” 끝까지 신기루와 쓴 열매를 향해 애쓰는 대신, 더 나은 세상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국제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나?


원문 출처. https://terrain.substack.com/p/what-is-to-be-grown
원제. What Is to Be Grown?
번역. 홍석만
원문 발행일. 2022.09.08.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매튜 J. 호겐(MATTHEW J. HAUGEN)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