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네트워크를 넘어서는 정치 플랫폼을 기다리며

[워커스 26호] 기술문화비평

[출처: 홍진훤]

지난 11월 12일 민중총궐기 집회 참가 중 사직동 한 편의점 앞에서 어떤 중국인이 어색한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영어를 대충 알아듣기는 했지만,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내가 영어로 답하면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에 있는 중-한 번역앱으로 질문하는 식이었다. 요컨대 사직동 사거리에서 신설동 호텔로 어떻게 가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내 스마트폰 지도앱을 열어 길을 보여주면서 거기로 가기 위해선 시위대를 뚫고 걸어가거나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녀가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함께 고민했지만 나로서는 택시를 타고 아주 멀리 돌아가는 방법밖에는 가르쳐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해결책에도 만족하지 못한 듯 한숨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나는 다시 광화문 광장의 사람 물결을 헤치고 힘겹게 종로로 향하면서 둘 사이의 기묘했던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했다. 두 사람이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하면서 스마트폰 앱(애플리케이션)의 도움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소통했다는 점은 신기한 경험이기는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적어도 두 사람의 전화기가 인터넷에 연결되었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광화문 광장 일대에 들어서자 스마트폰의 인터넷은 그저 먹통이었다. 120만 명이나 나선 집회에서도 나는 스마트폰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무력하게 느꼈다. 마치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그 중국인처럼.

촛불 광장의 스마트폰

그날 모인 사람들은 다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박근혜 퇴진’ 손팻말이나 촛불을 들고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촛불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하고, 팻말을 손에 든 가족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촛불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집회 참여자가 얼마나 모였는지 온라인 뉴스로 확인하고, 다른 곳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집회 현장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진과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친구들이 올린 정보를 확인하기도 했다. 흩어지고 모이면서 행진하고 외치면서, 각자 혹은 함께 그 순간을 기록했고, 그 속에 함께 있음을, 함께 분노하고 있음을, 혹은 함께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직도 강력하게 기억하는 2008년 촛불 이후 8년 만에 다시 한국 사회가 촛불로 울컥거리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사이 보수 권력이 서로 바통을 주고받으며 온갖 욕심과 비리와 무능으로 국민을 삶의 피폐함과 불안정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동안에도 크고 작은 촛불이 곳곳에서 타오르기도 했다. 그 촛불들은 힘차게 타올랐으나 체제를 바꿔내는 역량으로 집결하지 못한 아쉬운 외침에 그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국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국가를 잃은 난민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국가를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면서 이것이 국가인가를 되물어 왔다. 8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국가 권력이 짓밟았던 국민 주권을 외치면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자 광장에 나서고 있다. 촛불은 국가와 사회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구성을 요청하고 있다.

촛불 네트워크의 진화

2008년의 촛불과 지금의 촛불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차이를 느끼는 것일까? 그사이 많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인구학적 변화가 일어났겠지만, 앞서 보았던 것과 같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경험하는 촛불을 둘러싼 감각적, 감정적, 혹은 신체적 변화를 즉각적으로 가져왔다. 지금의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기술적인 진보와 감각적 진보, 나아가 정치적 진보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2008년 촛불은 여중고생들이 촉발하고 다음 아고라, 인터넷 커뮤니티, 개인 블로그와 같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 조직되고 확장되었다. 촛불의 주체들은 하나로 뭉친 군중이 아니라 각자 자율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다중’(multitude)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의 촛불 시민들은 광장에도, 컴퓨터 앞에도 있었다. 다음 아고라, 오마이뉴스, 아프리카 인터넷 생중계가 광장의 촛불과 모든 곳의 촛불을 이어주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촛불 시위대는 노트북을 들고 동분서주 움직이며 실시간 중계를 하는 촛불 시위대에게 어느 지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주문을 하고, 시위대는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어디에서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현장 중계했다. 개인들은 자신의 블로그와 커뮤니티에 촛불 배너를 달고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여러 저항의 방법을 공유했다. 직접 촛불 집회를 실시간 중계했던 어떤 이는 그 경험을 마치 자신이 게임의 한 캐릭터처럼 움직였노라고 묘사한다. 집에서 촛불 시위 중계를 지켜보던 이들은 게이머가 되어 카메라를 단 중계자를 게임 캐릭터로 활용, 시위에 참여했던 셈이다.

2016년 촛불에서는 더 이상 그런 중계자가 필요 없어졌다. 아고라와 같은 광장도 이제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다. 지난 8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스마트폰과 SNS라는 전에 없던 혁신적인 도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자 손에 든 스마트폰이 자신을 대표하며 우리 모두를 이어주고 묶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광장과 길거리와 집과 사무실과 학교에서 촛불집회 현장을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누구나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자기 자신만의 집회 중계를 할 수 있게 됐다. 더군다나 집회 현장 소식은 대부분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로 대표되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급속하게 전파된다. 심지어 언론매체의 뉴스가 비추지 못하는 곳곳의 장면과 소식을 모조리 담아낸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SNS의 결합은 촛불을 든 개인들을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 네트워크를 초과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촛불 군중 속의 개인들이 기록하고 축적해내는 각종 시각, 문자, 감각의 데이터는 주체로서 서로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을 넘어선 자기 삶의 기록 과잉으로 네트워크에 넘쳐난다. 정치적 주체로서 가지는 분노와 희망과 열망은 그 과잉된 기록의 효과로 발생할 뿐이다. 스마트폰과 SNS는 그러한 데이터와 주체들의 끓어 넘치는 감정을 모조리 흡수하고 어떤 추상적인 경향의 흐름을 만들어 내면서 구름 너머의 세계로 사라진다. 최근 미국의 대선에서 패배가 확실시됐던 트럼프 후보가 당선되는 데에는 페이스북을 통한 거짓 뉴스의 확산과 그 속에서 거짓 믿음에 대한 공감이 한몫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대신에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우리가 처한 현실 상황을 망각하도록 하는 역설적 무기일지도 모른다.

대안적 정치 참여 플랫폼

2010년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에서 2011년 뉴욕의 월가 점령, 2014년 홍콩의 우산 혁명에 이르기까지, 스마트폰과 SNS의 결합은 독재의 종말과 민주주의의 확산을 가져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유럽으로 줄줄이 이어진 수많은 난민의 손에는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스마트폰이 꽉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촛불 시민의 분노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초과한 열망 속에서 스마트폰과 SNS는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대안적 미디어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최순실의 태블릿 PC, 정호성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데이터는 지금 이 사태의 핵심 증거가 되는 정보를 담고 있다. 그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소통하는 방식은 우리가 저항하고 분노를 기록하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정권은 대선 댓글 알바와 국정원 개입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에야 밝혀지고 있는 청와대의 일베 관리 등을 통해서 ‘만들어진’ 정권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SNS를 통해 우리의 정치적 의견을 나누고 소통하는 방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의 촛불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기술적 도구 사용의 방식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 각국의 대안 정치 세력들은 독자적인 시민 정치 참여 및 의사 결정 플랫폼을 기반으로 정치,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꾀하고 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해적당의 엑스피라타(x.piratar.is), 아르헨티나의 데모크라시OS(democracyos.org), 미국의 체인지닷오알지(change.org), 대만의 0시정부(g0v.tw), 뉴질랜드에서 개발되고 스페인에서 사용되는 루미오(loom.io) 등 많은 플랫폼은 정보투명성, 반부패, 직접민주주의 등의 기치를 건 새로운 정당 운동과 결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음으로써 의회에 진출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대안적 정치-미디어 플랫폼 소식은 우리에게 재빨리 스마트폰과 SNS의 단순한 결합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서라고 요청한다. 만일 우리가 지금 촛불 국면을 타개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를 재구성해 내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시민이 자신의 민주주의를 직접 구성하고 권력을 형성할 수 있는 정치 플랫폼을 아직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워커스 26호)
덧붙이는 말

김상민-문화연구자, 서울대 강사, <문화/과학> 편집위원. 미디어 문화와 기술미학 분야 연구. <속물과 잉여> 공저, <불순한 테크놀로지> 공저, <디지털 자기기록의 문화와 기술> 저자.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김상민(문화연구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