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값 치르고 세상에 눈뜨다, 부당해고자 백승철 조합원 인터뷰

[오늘,우리의 투쟁]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2)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한국쓰리엠에서 8년간 일했던 백승철 조합원의 사원증 [출처: 백승철]

한국쓰리엠에서 일하게 된 계기, 일할 때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2002년 12월 나주공장에 입사했다. 처음에는 SCP라고 연마제 만드는 부서에서 일했는데, 고무장갑 끼고 방독면 쓰고 하는 일이었고 무척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1년쯤 후에 수세미 만드는 S/B Maker 부서로 옮겼다. 쓰리엠은 안전 보건 관련해서는 엄청 법을 잘 지켜서 작업 현장이 상당히 깨끗한 편이었는데, 내가 일했던 부서는 수세미 만들 때 돌가루랑 약품 같은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냄새도 나고 그런 면은 있었다. 복지나 임금은 비슷한 규모의 다른 데보다는 괜찮았다. 수당은 없었지만 기본급이 좀 높은 편이었고 상여금이 600%였다.

2006년에 화성공장이 생기면서, LCD랑 마스크 부서가 이전을 했다. 원래는 나주공장 옆 부지로 확장을 할 계획이었다가 장안공단이 외투기업에 대한 혜택이 많으니까 이쪽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그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싹 올라와야 됐고 회사에서 전세자금 대출이랑 지원을 해줬다. 나는 해당이 없었는데 당시에 결혼까지 생각하며 만나고 있던 지금의 아내가 갑자기 인천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올라오게 됐다.

처음엔 LCD가 한참 잘 돼서 상품권도 두 달에 한 번씩 이십만 원씩 나오고 부서 회식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까 LCD하고 마스크하고 공장장이 좀 하는 게 달랐다. LCD는 그래도 공장장이 직원들이 얘기하고 그러면 좀 들어주는데, 마스크 공장장은 자기 출세 때문에 파트장들을 쪼고 작업복이나 소모품 같은 것도 마음대로 못 쓰게 하고. 여름에도 겨울작업복 입고 일하는 동생들도 있었다.

그리고 GB프로젝트라고 생산성 향상 운동을 하면서, 마스크가 원래는 한 사람이 기계 한 대를 맡아서 보는 시스템이었는데 한 사람이 기계 두 대를 보게 만들었다. 라인 작업도 아닌데 점심시간, 휴식시간에도 한 명이 두 대씩 보고, 세 명이 네 대씩 보고 그랬었다. 그렇게 하니까 진짜 힘들었다. 밥 얼른 먹고 빨리 들어가야 되고, 다음 교대해줘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미안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그래서 불만사항을 얘기했는데,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마스크 공장에는 나주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별로 없고 신규 사원들이 많아서 얘기를 잘 못하고, 고참들도 근무평가 나쁘게 나올까봐 몇 번 얘기하다가 포기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주에서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하냐 내가 그런 얘기들을 계속 했는데, 파트장들이 시킨 거니까, 자기들도 위에서 지시받은 거라서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버리니까. 나도 막 얘기를 하다가 나만 바보 되겠구나 하고 좀 힘이 빠지기도 하고 그랬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노동조합 뭔지도 잘 몰랐다. 일하는데 노동 강도는 자꾸 올라가고 얘기해도 안 들어주니까 힘이 빠져있을 때쯤에 나주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고 형들이 가입원서를 들고 밤에 올라왔다. 나주에서 지회장님이랑 몰래 해가지고 두세 달 준비했다고. 그때 원서를 받아서 나도 가입을 했지만 조합 활동을 어떻게 하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마스크에서 일하는 동생이 나랑 일하면서 내가 불만사항 얘기를 하고 그러니까 추천을 했는지 대의원을 하라고 해서, 그래서 대의원 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오게 된 거다. 노조 그런 거 정말 몰랐었는데, 형들이 하자고 하니까. 나도 뭐하는 건지도 좀 찾아보면서, 기아니 뭐 그런 거만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다 보니 노조하면 이런 거 얘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노동조합이 생긴 후에 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가 있었는가.

처음에는 현장 직원들도 파트장들 빼고 거의 다 가입했다. 조합 생기고 하루는, “점심시간에 우리가 왜 일을 해줘야 되냐? 나가버리자.” 그래서 다들 기계 세워놓고 밥 먹으러 가고 쉬는 시간에도 기계 세워놓고 쉬고 그랬다. 그래도 회사가 뭐라고 얘기를 못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 못 바꾸는 거다, 이걸. 전처럼 생산성을 높여야 되는데 노조 탈퇴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조가 있으니까. 회사도 눈치가 보이는 거다, 다시 또 가입할까봐.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하고 불이익 주면 다시 가입할까봐 엄두를 못 내는 거다. 그때는, 초창기 때는 진짜 공장 안에서 다 같이 노동가요 부르고 파업할 때도 다 모여서 공장 순회도 하고 막 그랬었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LCD쪽에서 보조하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메인으로 작업해서 필름 나오면 검사하는 작업 주로 했던 분들. 나도 몰랐는데 딱 노조 생기고 공장별로 모여서 얘기를 듣다 보니 이분들은 이년 일해도 십년 일해도 기본급이 그때 백만 원이 안 됐다, 상여금도 없이 88만원인가 90만원인가. 노조에서도 처음에 얘기했던 게 여성노동자 처우 개선하고 근무평가 폐지하자는 거였다. 근무평가도 관리자들 마음대로 지들 내키는 대로 입맛에 맞는 애들만 챙기고 쓴 소리하고 하면 평점 낮게 주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처음에 600명 넘게 가입하고 하니까 회사에서도 당황해서 우리 얘기를 들어주겠다고 했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기본급 올리고 상여금도 600% 책정하고 정규직으로 똑같이 해달라고 했는데, 회사에서 그건 안 된다고 하면서 직군만 바꿔서 정규직이지만 다른 직군을 만들었다. 그때 상여금까지 하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이 50-60만원씩 올랐다. 그리고 근무평가도 원래 기본급으로 하던 걸 우리가 아예 폐지하라고 하니까 상여금에서 퍼센트 매겨서 주는 걸로, 상여금이 기본급 절반이라서 갭이 줄어드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싸인을 한 번 했었다.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잘 몰랐었는데, 시작하고 나서 이전에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다쳤는데도 산재 처리도 안 해주고 니들 그냥 개인휴가 써서 병원 가라고 하고, 병가도 잘 안 내주고 그랬었다. 그리고 공장이 크니까 노동조합 생기기 전에는 서로 알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자주 모이고 하니까 서로를 잘 알게 됐다.

  한국쓰리엠 사측이 사주한 컨택터스의 용역폭력 [출처: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

노동조합 결성 직후부터 탄압이 극심했던 걸로 알고 있다. 어떻게 싸워왔는가.

노동조합 생기고 현장에서 거의 다 가입을 하니까 회사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가 박원용이라는, 발레오랑 외투기업 몇 군데 노조를 깬 사람을 영입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사람이 들어오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노조파괴 작업을 시작한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합 생기고 2010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파업을 했고 여름인가부터는 회사가 용역을 투입했다. 처음에는 나주에, 그리고 화성에서도 용역과의 충돌들이 자주 있었다. 화성에는 2010년 여름부터 해서 거의 1년 안 되게, 많은 때는 100명 이상씩도 오고 거의 50-60명씩 있었다. 공장 식당 옆에 복지동이 있는데 거기서 먹고 자고 했다. 내내 있는 건 아니고 몇 개월 있다가 빼고 또 늘리고 하는 식이었다. 그때 파업하고 할 때, 공장 벽에다가 라카칠하고 그러니까 시설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고용했다는데 실상은 조합원 도발하고 시비 걸어서 엮으려는 거였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노조파괴 시나리오대로 그렇게 한 거다. 회사는 용역 덕을 완전 많이 봤다. 조합원들이랑 충돌시켜서 해고시키고 하려고 했는데 탈퇴자까지 많이 늘어났으니까.

근무평가 때문에도 탈퇴를 엄청 많이 했다. 비조합원들은 매년 임금 인상 시켜주는데 조합원들은 교섭하니까 교섭 중이라고 인상을 안 해주니까 탈퇴를 하고. 회사에서 시켰는지 탈퇴하면서 이유는 하나같이 가족 때문이라고 하고. 초창기에는 조합원이 탈퇴하면 일주일씩 쉬고 1박2일, 2박3일씩 연구소, 본사 이렇게 교육 받으러 다니고 공장장이랑 제조업 본부장 면담하고 그랬다.

지금 보면 10년차 조합원이 5년차 비조합원보다 월급이 더 적다. 5년차가 몇 십만 원이 더 많다. 지금 남아있는 조합원들이 거의 다 그렇다. 진급이 안 되고 하니까. 근무평가 매기는 항목들이 있다. 생산성, 회사 내 화합, 상사지시 이행 등 몇 프로씩 매겨서 하는데, 회사에서 조합원 비조합원 차별해라 이렇게 말은 못 하지만 말 잘 들으면 진급이 완전 초고속이다. 원래 반장을 1-2년 후에 달 수 있는데 노조 탈퇴하고 바로 반장 단 사람도 있고, 초창기 때. 지금까지 조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거의 진급이 늦게 됐고, 중간에 하나씩 끼워 넣는 거는 봐라, 조합원들도 이렇게 근무평가 높게 준 사람도 있다 보여주기 식으로. 그렇게 부당노동행위 피해가는 거다.

그렇게 해도 탈퇴 안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부서 전환 배치도 엄청 많이 했다. 품질관리부에서 일하던 사람을 몸이 약해서 할 수 없는 일로 억지로 이동시키고 못 가겠다고 하면 징계 주고, 메인트 부서라고 기계 고장 나면 수리하고 하는 데서 능력도 탁월하고 성실한 사람도 다른 부서로 막 바꿔버리고. 징계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도 조합에 열심인 사람들은 일 잘 하던 사람들도 TPM 부서라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풀 베고 잡일하는 부서를 새로 만들어서 보내버리고 그랬다.

이런 식으로 해서 조합원들 많이 탈퇴하고 이제는 조합의 힘도 많이 빠졌다고 판단을 했는지 요새는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우리는 우리대로 갈란다 이런 것 같다. 작년 10월에 압수수색 당하고 대표가 국정감사 불려가고 그런 다음에 2011-2012년 체불임금만 지급하고, 말로는 노사관계 풀어보겠다고 하지만 별로 기대할 게 없다. 회사가 손배랑 차별, 조합원 임금이랑 진급 엄청 안 되고 그런 것들까지 다 묶어서 해결하겠다고 얘기를 했는데, 이미지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투자가 안 되니까 풀어보려고 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해고자 문제는 원칙적으로 법원 판결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자기들 손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해고 생활이 길어지고 있다. 부당해고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2010년 여름, 용역들이 대여섯 명씩 공장 안을 카메라 들고 왔다 갔다 하고 휴게실에도 열댓 명씩 앉아 있고 그랬다. 조합원들 중에 용역한테 맞거나 다구리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지회장도 용역한테 질질 끌려 나와 버리고. 그러다가 식당에서 한 번 시비가 있고 다음 날인가 앞에서 집회하는데, 원래 우리가 임시사무실로 쓰던 공장 안 복지동 집기들을 용역들이 들어와서 다 빼버렸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 계속 집회를 했었는데, 집회 하려고 스피커 갖고 들어가려는데 용역들이 막은 거다, 허가 받고 해야 된다고. 그래서 뭔 소리 하냐고 원래 우리는 이렇게 했었는데 그러면서 싸움이 일어났다.

주요인물 리스트가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경비실에 적어놓고서, 애들이 이름이랑 얼굴을 다 알고 있었다. 눈 마주치면 막 욕하고 시비 걸고, 그러면 우리도 마냥 참을 수는 없다. 그렇게 당하고 하다가 시비가 붙은 거다. 그런 게 쌓여 있다가 조합원들도 폭발해버린 거다. 처음에는 회사에서 30명쯤 살인미수로 고소했는데, 경찰들도 어처구니가 없으니까 추려서 폭행으로 넣으라고 했다. 그 건으로 구속되고 해고됐다.

2010년 11월에 구치소에 들어가서 5개월쯤 있었다. 구치소에 있을 때 회사가 상벌위원회 열어서 해고가 됐는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절차에 문제가 있어서 부당하다는 판결을 냈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에 복직됐다가 바로 다음 날 다시 해고시켰다. 7월엔가 한 번 들어가서 회의실에 짱 박혀 있다가 나왔다. 구치소에 있을 때 동생들이 면회 한 번 왔는데 그 뒤에 보니까 다 탈퇴를 했더라. 그때 치고 박고 할 때 같이 있었던 동생들은 다 탈퇴하고, 용역 사건 있은 뒤로 이게 형사적인 문제로 가니까 위축되고 하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투쟁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이 컸을 것 같다. 힘든 점은 없었는가.

구치소 들어가고 한 게... 2011년도 봄에 나왔는데, 그때 집에서 난리가 났다. 아들이, 학교 집 학교 집만 했던 놈인데 어째 이러냐고. 재판도 엄청 길어졌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올라 오셨었다. 그러면서 신경 많이 써서 대상포진에 걸려서 한 번 쓰러지시고, 그때 검사하면서 대장암 3기인 걸 발견하고 다행히 수술이 잘 됐다.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내도 그렇고. 아내가 바가지 긁고 그랬으면 못했을 건데, 장인 장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고 뭐라 하니까 자기도 부담이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해해주는 편이다. 계속 주말부부로 살고 아이도 없고 하니까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는데, 그래도 자존심이 세서 뭐라고 따로 말은 안 한다.

생계는 조합원들이 조금씩 걷어서 나랑 지회장님은 맞춰주고 있다. 경기지부에서도 작년인가, 해고자들에게 지원을 해주시는 게 있다. 전에 여의도 본사 투쟁하고 그럴 때, 희망지킴이에서 투쟁기금도 주시고 도움 엄청 많이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재정사업해서 해고자들 지원해 준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많이 챙겨주고 있다. 나는 아내도 버니까, 사실 진짜 어려운 건 아니다.

포레시아 형님들 보면, 진짜 난 아무 것도 아니다. 보면 진짜, 그렇다. 그런데도 그렇게 버티시고 있으니까. 한 번씩 어디서 투쟁기금 준다고 하면 포레시아 얘기 많이 했었다, 거기는 막 전세에서 월세로 옮기고 하면서도 5년 동안 재정사업도 안 하고 버티고 있다고. 우리끼리 그런 얘기한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쓰리엠은 양반이라고. 쌍차, 포레시아, 발레오, KEC, 유성 그런 데에 비하면 우리 힘든 건 새발의 피다.

  국회앞 1인시위 [출처: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

후회한 적은 없는지. 투쟁을 하면서 새롭게 느끼는 것들이나 변화한 지점들이 있는지.

나주에 계속 있으면서 일을 했으면 아마 안 잘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그런데 밖에 유성이나 쌍차나 골든브릿지, 재능교육 그런 상황 같은 건 알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일했으면 해고가 안 됐을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억울하니까 싸우는 거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해고되고 나서 밖의 좋으신 분들 만나고 트위터 보고 조언해주시는 분들도 알게 되고 그랬다. 쌍차 동지들, 골든브릿지 동지들, 코오롱 최일배 동지, 포레시아 동지들, 투쟁하는 동지들 만나고 그런 거, 그러면서 얻은 게 많다. 해고되고 아.. 이러신 분들도 있구나, 이렇게도 싸우시는 구나, 하면서 내가 또 힘을 많이 받았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더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런 것들 몰랐으면 나 혼자만 그렇게 된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있었을 텐데. 공동투쟁단 활동하면서 힘 많이 받고 그랬다. 고립감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있었고.

해고 돼서 일은 못 해도 그런 쪽으로 많이 알게 된 건 있다. 나는 뉴스도 안 보고 그랬었다. 노조 생기고서야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거다. 삶의 관심사가 아예 바뀌어버렸다. 그 전에는 게임하고 드라마만 보고 그랬었는데... 사회의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근데 해고되고 나서 뉴스도 막 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되고 알게 됐다.

투쟁이 무척 길게 이어지고 있다.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조합원들하고 비조합원들하고 안 좋고 그런 건 없다. 지금 현장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파트장들도 몇 명 가입을 했었지만, 여성노동자들도 처음엔 다 조끼 입었던 사람들이다. 처음에 탈퇴할 때는 뭐, 얘기도 안 하고 고개 숙이고 다니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다, 하도 시간이 지나버리니까. 속으로야 미안하게 생각은 하겠지만, 지금은 내색은 안 하고. 한참 막 탈퇴할 때는 얘기도 안 하고 그런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건 많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속으로 삭이는 거다. 우리는 또 조직을 계속 해야 되는데 그런 것들을 하면 좀 반감이 생기니까 자제 좀 하자 그런 얘기도 나와 가지고, 속으로 울화통이 터져도 삭이고 있는 거다.

복수노조 얘기가 잠깐 나왔다가 들어간 적도 있는 걸로 안다. 회사도 관리하려면 부담이 되는 거니까. 원래 기존의 사원협의회가 있었는데, 노조 생기기 전에는 거의 활동도 안 하고 그냥 법적으로 책임 모면하려고 둔 건데 노조 생기고 그걸 좀 더 많이 부각을 시키고 있다. 노조 없어도 사원협의회에서 이렇게 해주고 있다, 비조합원 대상 보여주기 식으로.

이후 투쟁 계획이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회사 압수수색이랑 국정감사 이후에, 이번이 기횐데 계속 밀어붙이자 그런 분들도 있지만, 어쨌든 조합원들이 임금이나 이런 거 차별 받으면서도 단협보다 해고자 문제를 우선시하는 게 있다. 조합원들이 지금도 해고자 문제가 먼저라고 생각하는 게 고마운 점이고, 단체협약은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그래서 지회장님은 고민이 많은 것 같다. 안에서 조합원들이 큰 싸움을 하려면 함께 좀 움직여줘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는데 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있다. 탄압을 당해 봤으니까. 그리고 파업을 골든브릿지처럼 그렇게 계속 할 수 있겠냐, 몇 개월씩 돈도 안 들어오는데 할 수 있겠냐 하는 부분. 싸우기는 싸워야 하는데... 더 큰 판을 만들어야 되는데, 지금 그 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조합원들이 어떻게 잘 따라오겠는지, 그런 게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더라.

현장의 힘을 더 붙이는 방향으로 싸워야 하는데, 판을 좀 만들어서 이슈화를 좀 시키면 그래도 회사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고민들이 있다. 어쨌든 회사를 바꿀 수 있는 투쟁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도 좀 모르겠고, 여력이 없는 게 크다. 해고자들 중에 지회장님이랑 나만 움직이고 있으니까. 쌍차는 해고자들이 다 같이 움직이고 연대도 많이 가고 해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고 그런 게 많은데, 우리는 그런 여력도 이제 안 되고. 막 움직여서 해야 되는데, 솔직히 내가 그렇게 하고 하면 좋은데... 좀 능력 밖인 것도 같고, 지금은 좀 많이 지친 것도 없잖아 있는 것도 같고 그렇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게, 개인적으로 억울한 것도 있지만, 안에 지금 남아 있는 조합원들도 해고자들이 빠져버리면 또 싸울 의미가 없어져 버리니까. 다시 싸움을 만들 수 있게 함께 고민하고 있다.

[출처: 금속노조 한국쓰리엠지회]

3M_Lonelylabor, 화성공장 부당해고자 백승철 조합원의 트위터 아이디다. 그는 첫 직장이었던 한국쓰리엠에서 8년을 일했고,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1년 남짓 활동을 하던 중 사측이 사주한 용역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수감생활을 반 년 가까이 하고 해고됐다. 2011년 봄,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세상에서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해고자 혹은 부당해고자, 생각조차 못했던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선명한 타이틀 하나가 추가되었다, 투쟁하는 노동자. 과거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노동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재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해고 생활은 4년차에 접어들었고 투쟁하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느릿하고 어눌하게 이어지던 그의 말이 어느 부분에선가 빨라지고는 했다. 왜 억울함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는 좀처럼 누구를 탓하지 않았고 심지어 회사에 대한 적대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투쟁하며 만난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의 어려움 그리고 해고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쓰리엠지회 조합원들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싸움의 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을 스스로 치유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했던 삶에 몰아닥친 소용돌이를 통해 자신과 타인을 돌아보고, 조금은 늦게 깨닫게 된 부당한 현실을 마주하며 긴 호흡으로 오늘도 투쟁을 이어간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은 3월 13일이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3월 27일, 백승철 동지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정말 힘들게 투쟁하고 있다고 얘기했던 포레시아 동지들이 조합원 19명에 대한 정리해고는 부당하다는 대법원의 전원 승소 판결을 받았다. 2009년 5월 정리해고를 당한 포레시아와 2009년 5월 노조를 결성한 한국쓰리엠 화성공장은 길 하나를 건너 마주하고 있는 사업장이다. 긴 시간 싸우며 지척의 노동자들은 서로를 북돋우며 승리를 향해 걸어왔다. 지금 당장은 조금 막막할지 모르지만 뚜벅뚜벅 걸어온 만큼, 한국쓰리엠지회 동지들의 승리도 가까이 다가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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