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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로 본 한미FTA
[한미FTA저지 연구자의편지](3) - 한면희가 환경활동가들에게
요즈음 한미FTA 사안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농민은 농업시장 개방에 따른 파고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영화 산업계는 스크린쿼터제의 약화 내지 폐지에 따른 할리우드 영화의 범람으로 인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우리나라 영화예술의 위축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미국이라면 무조건 쌍심지를 지피고 나서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이 보인 행태, 특히 2001년 9.11테러에 대한 반격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등에서 보여준 미국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미국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길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일반 국민 다수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6.25 이후 우리의 은인이자 우방이고 또 자유의 본산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한 무조건 반대에 대해서도 일정한 정서적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화에 따라 시장 개방이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미FTA도 전반적 대세 흐름에 비추어 어느 시점에서든 결국 타결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겠느냐고 전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운동은 기본적으로 시민운동입니다. 그래서 현장서 뛰는 환경활동가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다수 시민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운동의 방법과 내용을 검토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수 환경단체들은 한미FTA 사안을 보는 시민의 눈을 다소 우호적인 것으로 해석하여 명료하게 한미FTA 체결 반대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환경활동가들은 성숙하고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해서도 그러리라고 봅니다. 이에 생태주의의 눈으로 한미FTA 사안을 바라보는 견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생태주의를 환경주의와 편의상 구분하겠습니다. 보수적 환경(관리)주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행복추구를 위해 대상으로서 자연을 오직 수단으로만 여깁니다. 다만 환경문제를 최소화하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다수에게 이익을 주는 효용성 정책을 채택하고, 시장제도의 비용-이익 분석에 의한 효율화 체계를 구축하여 자원 사용의 최적화를 도모합니다.

물론 돈이 될 경우이지만 과학기술에 의해 오염을 줄이는 데도 적극적입니다. 이와 같은 환경(관리)주의 시각에서 보면, 한미FTA는 한편으로 농업분야에 부정적으로 나타나지만 자동차 및 전자산업 분야에 긍정적으로 나타나는데, 전체의 효용성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시장 개방이 환경 과학기술의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고 볼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적 환경주의는 명확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WTO, FTA의 본질 속에 담긴 자연수탈의 구조적 요인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더불어 UN이 출범했고, 이어서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가 독립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원 수탈을 당했던 신생독립국가의 요청에 의해 1960년대부터 UN의 후진국 경제지원 프로그램이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20세기 말 평가에 따르면, UN의 후진국 지원 프로그램은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실패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4마리 용의 성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후진국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빌린 돈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외채상환 위기에 빠집니다. 둘째, 선진국의 입맛에 맞는 돈벌이 산업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국의 전통농업은 붕괴되고, 이에 따라 빈곤층은 더욱 생존이 어렵게 됩니다. 셋째 다국적기업의 공해산업 진출에 따른 환경문제와 심각한 수준의 토양침식 등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1960년대와 70년대부터 선진국의 대기업은 자국에서 환경재난을 극심하게 초래하여 저항을 받게 된 공해다발성 설비를 후진국으로 수출하거나 이전함으로써 다국적기업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후 환경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전 세계적으로 드리워지게 됩니다.

환경 제국주의는 자연을 한껏 이용하여 누리게 되는 사회적 혜택을 선진국 지배계급이 주로 향유하고, 그런 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상의 부담을 후진국 일반 민중에게 전가하는 양태를 뜻합니다. 환경 부정의의 대표적 양상입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와 무역시장 개방은 신자유주의 이념을 등에 업은 야수적 자본주의의 다국적기업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GATT의 뒤를 이어 1995년에 출범한 WTO가 세계 단일 시장화를 도모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그 틈새를 이용하여 각 나라별로 FTA(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세계 단일 시장화는 기본적으로 환경재앙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WTO를 통하든 FTA를 경유하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어떤 나라도 그리고 어떤 다국적기업도 환경문제를 해결하면서 다가가겠다고 외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몇 가지 이유만 들겠습니다. 첫째, 자본의 이윤추구 성격상 경제성장을 끊임없이 도모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결국 희생시킬 것입니다. 둘째, 자연환경도 시장체계에 편입시켜서 자연 이용이나 보존 여부를 비용지불의사에 의해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이 자본의 손아귀에서 남아날 수 없습니다. 새만금갯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농촌공사와 관련 대기업들은 수조원의 비용을 들일 의사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 삼보일배를 한 네 분 성직자와 환경단체는 개발업체와 경합할 만큼의 비용지불의사를 표명할 수 없습니다. 전자 집단은 더 큰 이익을 보고자 달려들 것인 반면, 후자 집단은 이익보자고 자연 보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환경 관리주의에 따르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듯이 자본에게 자연을 맡기게 될 것입니다. 셋째, 현재의 강압적 과학기술의 발전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환경문제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넷째, 자본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곳에서는 환경 부정의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화와 한미FTA를 다른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주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태주의도 급진적 견해와 온건한 견해로 나뉠 수 있습니다. 급진적 생태주의는 심층 생태주의와 사회 생태주의 그리고 생태 여성주의의 트로이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 입장은 지역 자율성과 자연에 대한 책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구상의 민족을 생물권 문화인과 생태계 문화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급진적 생태주의는 생태계 문화를 선호합니다.

생물권 문화인의 사례로 미국 뉴욕 월가의 샐러리맨 존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멕시코산 욕조에서 샤워를 하고 브라질산 모닝커피를 한잔 마신 뒤에, 중국산 프라이팬에 그리스산 올리브유를 두르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세네갈산 땅콩버터를 바른 샌드위치에 넣어 먹는데, 칠레와 필리핀산 포도와 파인애플을 독일산 냉장고에서 꺼내어 먹습니다. 출근하면서 일본산 자동차를 타고, 중간에 사우디아라비아산 휘발유를 넣으며, 한국산 핸드폰으로 업무연락 전화를 받습니다. 출근해서는 이탈리아산 대리석의 사무실서 일을 하다가 점심때는 아르헨티나산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에 프랑스산 와인을 곁들입니다.

반면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외친 바 있는데, 그 연유는 미얀마(버마)에서 근무한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버마의 경제력은 영국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나라였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영국인에 비해 지극히 초라한 행복만 누리고 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나라였기에 국민 다수는 작은 것을 바라고 그것의 충족만으로도 무척 행복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행복이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버마의 생활상이나 과거 우리의 생활상이나 엇비슷했을 겁니다.

전통농가 한 가족의 생활상은 생태계 문화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 부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스스로 농사를 지은 쌀과 인근 강에서 잡힌 어제 사온 생선, 엊그제 산에서 직접 캐온 나물로 주식과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합니다. 아주머니는 식사를 마친 후 걸어서 시장에 나가 쌀을 내다 판 뒤 아이 신을 신발과 생활필수품 몇 가지를 사 가지고 돌아옵니다. 아저씨는 쟁기류를 챙겨서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해질 무렵이면 들에 핀 꽃향기를 맡으며 다시 집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생태계 문화의 사람은 스스로의 생활을 거의 대부분 자신이 살아가는 기초 단위 생태계에서 해결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신발이나 쟁기류가 자체 생태계 내에서 생산이 안 될 경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인근의 다른 생태계 문화로부터 공급을 받기도 합니다. 생태계 문화의 사람은 생존에 필요한 것을 직접적인 생태계에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초래할 생태적 결과를 이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따라서 생태계 문화의 경제는 생태계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취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면 생물권 문화의 사람은 산업 자본주의가 고도로 진행된 상태에서 생활을 영위합니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산업 물품의 생산과 소비, 유통 그리고 폐기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책임을 거의 동반하지 않습니다. 생물권 문화의 사람은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의 생태계에서 자원이 채취되거나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오염과 공해가 발생하거나 자원이 고갈되는 것은 자신의 생활과 무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곳의 생태계를 보호할 필요를 훨씬 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생물권 문화의 경제는 자연에 대해 책임을 지기보다는 약탈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미FTA 체결은 생물권 문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 보다 더 무책임한 단계로 진입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급진적 생태주의는 선명하게 세계화 반대를 천명할 것입니다. 저는 생태주의를 꿈꾸는 환경운동가라면 원칙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현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도 동의합니다. 산업 자본주의를 동반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것이지 민족과 나라 간의 교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임스 러브록이 가이아 가설에서 드러낸 것처럼 자연의 생명부양 여력을 지나치게 낮춰볼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필요한 산물을 서로 호혜적으로 교환하되, 정신적 문화 산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수용할 만하고 또 바람직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환경과 평화를 사랑하고 사회적 약자(노동자, 농민, 여성, 아동, 후진국 등)를 대변하는 이념은 폭넓게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로부터 고립될 수 없는 상태에서 어쨌든 세계화가 밀려들기 때문에 이에 대한 현실적 대처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이런 경우 온건한 생태주의 시각에서 문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방도가 닫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 환경정의 접근이 대표적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1970년대 후반에 러브커넬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뉴욕주 북부 두 호수를 잇는 운하가 건설되다가 경제여건 변화로 사업이 중단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한 기업이 파헤쳐진 땅을 매입하여 1940년부터 12년간 다이옥신이 함유된 유해 폐기물을 매립하고 복토를 한 후, 나이아가라 시교육위원회에 기증(1달러 판매)을 했습니다. 영문 모르는 교육위원회는 학교를 짓고 마을을 건설하여 주택이 들어섰습니다. 세월이 수십년 흘러 드럼통이 부식되고 유독가스가 지면으로 올라오면서 변고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산하는 임산부, 암에 걸린 아동, 그리고 간질환 등 각종 질병을 앓는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연방 환경청의 조사 결과 사건 전모가 1978년에 알려졌습니다. 시장경제와 최소국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국가정책으로는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인도주의 정책을 펼치던 민주당의 카터정부가 자유주의 정신을 초월한 기금, 즉 슈퍼펀드(Super-fund) 법을 만들고 이것으로써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환경 부정의 사례에 대해 다소 정의롭게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자국 내에서 통용하는 법의 잣대와 남의 나라에 들이대는 잣대를 다르게 운영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잘 알려진 것인데, FTA 체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로 이루어진 NAFTA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국은 주로 이익을 보는 반면, 환경상의 덤터기 부담은 주로 멕시코로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 사례 다수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정부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설정하여 한미FTA를 졸속으로 타결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합의문안 하나 잘못 채택되면 그에 따른 후유증은 상당히 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경정의의 접근은 나라간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도록 현실적 접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환경정의는 자연으로부터 누리는 사회적 혜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적 부담이 풀뿌리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공정한 분배로 이어짐으로써 자연과 생태계가 감내 가능한 범위에서 문화를 유지하고, 또 인간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접근입니다. 이런 환경정의 정신을 정책의 지침으로 삼아 한미FTA 사안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다루어야 할 내용으로는 GMO 식품과 광우병이 의심되는 소고기 수입 등 식품안전에 관한 사항, 공해산업의 수입 우려 등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환경운동가는 한미FTA 사안에 대해 좀더 깊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급진적 생태주의 입장에서 원천적 반대를 천명할 수도 있고 또 현실적으로 온건한 생태주의 노선을 견지하여 환경 부정의가 더욱 심화되는 것을 막으면서 최악이 아닌 차선을 위해 노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좋습니다. 진지하게 환경운동을 펼치면서 멀리 미래를 걱정하는 분이라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미FTA 체결에 대해 어떤 목소리라도 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 소리가 하나하나 모여서 큰 흐름을 형성함으로써 내가 사는 작은 지역에서부터 시작해서 전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생명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희망합니다.(2006년 5월 12일)
한면희(녹색대) | 등록일 : 2006.05.15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06.05.16 18:57
평택의 풀과 만오천 군인들의 군화에 짓이겨질때, 서울에선 환경영화제가 열리고 이에 시장이 되고픈 여당의 후보가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참 절망적이었어요.
오늘날, 생태계 파괴의 주범은 '이윤 그자체를 목적으로 한 자본'이며, 이들이 힘없는 사람들과 자연을 착취하려는 기획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며 벌어지고 있는데도 (새만금의 경우도, 그 안에서 지난 수만년 동안 살아왔고 앞으로 그래야할 생명에 대한 고려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은채 막혀버렸고, 앞으로도 그 땅에서 농사지을 일은 만무하고, 한국정부가 미국과의 FTA를 통해 제조업을 거의 포기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결국 홤무지가 되거나 초국적 서비스 기업들을위한 장소, 자유무역지대 , 아니면 군사기지 등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와 같이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태파괴적인 기획에 침묵하는 환경영화제를 보곤 절망스러웠어요.
과학적 접근의 필요성  2006.05.20 20:02
사상을 이용하여 심정적 동조를 쉽게 얻어내서 사람들에게 영합하고, 그럼으로서 어떤 특정한 목표(사상의 순수한 목적과는 다른)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려는 세력이 나타날 때 사상은 타락한다고 봅니다. 생태주의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태주의가 현실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심정적 동조를 이끌어내려는 표현을 사용하여 어떤 선동적 성격을 띄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적 접근, 실제의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또한 그것을 왜곡 없이 해석하여(이것을 위해선 또한 그 해석의 방법론이 필요하겠지요) 체계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미래'와 같은 책들이 일각에서 심각한 비판에 마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들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라다크 생활에 대한 묘사와 상징적인 비유들은 사실 엄밀한 체계로서 현대 경제학과 맞서기에는 굉장한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과학적 방법론 자체를 생태주의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보아서 배격하는 견해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방법론 그 자체는 가치 판단의 기능이 없습니다. 그 방법론은 어떤 가치를 옹호하는 데 쓰이느냐에 대한 생각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글도 이러한 과학적 접근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논거 자체가 일종의 심정적 의혹의 수준에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런 맹점은 많은 생태주의 텍스트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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