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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애틀에서 신라호텔까지, 반FTA 물결을
[한미FTA 저지 운동, 진단과 과제](2) - 씨애틀의 기억과 세계의 반FTA 운동
한미FTA 2차 본협상이 7월 10-14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다. 한미FTA 협상을 선언한 지 4개월째, 그동안 정부는 협상 추진에 속도를 붙여왔고, 민중운동은 범국본을 중심으로 협상 저지를 위한 다양한 실천을 벌여왔다. 한미FTA 2차본협상에서 통합협정문 작성이 마무리되고 9월로 예정된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를 계기로 전체 그림이 그려진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민중언론 참세상은 2차 본협상을 앞둔 시점, 지금까지의 한미FTA 저지 투쟁 과정을 진단하고, 한미FTA 저지 운동이 갖는 의미와 운동과제를 정리하기 위해 연속기획을 준비했다.
[연속기획① - 한미FTA 저지 운동, 진단과 과제]는 모두 일곱 차례에 나누어 게재하고, 7월 말 [연속기획②]에서는 '한미FTA와 개성공단'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 편집자 주


1999년 씨애틀 2차각료회의 봉쇄 투쟁의 기억

1999년 11월말 어렵사리 얻은 미국비자를 갖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애틀에 도착했다. 당시 KoPA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밀레니엄 라운드’를 출범시킬 예정인 시애틀 각료회담에 맞선 투쟁에 동참하는 역사적 순간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처음 밟은 미국 땅에서, WTO라는 괴물에 맞서 싸운다는 책임감으로 나섰지만, 미국땅은 낯설기만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쌀쌀한 초겨울 바람에 을씨년스런 날씨로 '시애틀의 잠못이루는 밤'을 보내고 11월 30일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섰다.

한국의 전투경찰을 초청하여 진압전술 교육을 받았다는 미국 전투경찰과 기동부대, 기마경찰은 시위 전부터 위압적 모습으로 시내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애틀의 워싱턴 주립대에 모여있던 청년대오들이 새벽부터 시내로 진입하면서 어디서부터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오가 각료회담이 열리는 컨벤션센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의 충돌이 있었고, 각료회담은 시작부터 시내의 소란 때문에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부 대표단은 시위대에 눈에 띄여 야유를 받으면서 회담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봉쇄전술은 마침내 희소식을 가져왔다. 시위로 인한 교통마비 등으로 WTO의 개막식이 취소되었다. 각료회의는 개막식도 없이 막바로 본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이 소식에 고무된 시위대는 저녁 늦게까지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결국 당황한 시애틀 경찰은 저녁 7시를 경계로 통금(curfew)을 실시했다. 민주당계 시장과 경찰서장이 TV에 출연해서 시위대의 ‘민주적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립서비스를 했음에도 시애틀의 경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고무탄과 최루탄을 남발했다.

11월 30일 WTO 각료회담은 시애틀 시내의 가두시위, 경찰폭력과 난무한 최루탄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어야 했고, 이런 외부의 압박은 결국 회담이 무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몇해 전 OECD 국가들 간에 은밀하게 논의되었던 MAI(다자간 투자협정)이 인터넷에서 폭로되면서 유산되었던 데 이어, 시애틀전투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공세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요한 승리였다.

시애틀 각료회담을 통해 1995년에 거대한 공룡으로 다시 태어난 세계무역기구(WTO)는 첫 번째 아기괴물을 사산했다. 아기의 이름을 밀레니엄 라운드로 할지, 아니면 시애틀 라운드로 할지를 둘러싼 고민은 가뿐하게 해결(?)되었다.

그후 반전·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반FTA 운동

시애틀이 아직도 기억되는 것은 새로운 대중적 반세계화운동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애틀 이후 별다른 투쟁이 없었다면, 시애틀은 그저 불만을 가진 일부 시위대와 무정부주의자들의 방해로 중요한 국제적 다자간회담이 방해받은 에피소드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1999년 11월 시애틀전투의 승리는 다음 2000년 4월 워싱턴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반대투쟁, 9월 프라하투쟁, 2001년 4월 캐나다 퀘벡의 미주정상회담-FTAA 반대투쟁, 2002년 이탈리아 제노바의 G8반대투쟁 등으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투쟁의 흐름을 형성했다. WTO와 IMF, 세계은행 등의 국제금융기구, 더 나아가 G8 등 제국주의 정치기구들에 맞선 반세계화운동은 전지구상으로 전역으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이후 선진 제국주의 진영의 모든 회담은 투쟁하는 시위대의 목표가 되었다. 그 결과 WTO는 2001년 11월 9.11테러의 국제공안정국 하에서 중동 카타르 도하에서 그들만의 협통을 통해 새로운 협상인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를 출범시켰다. 공산품과 농산물,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 사실상 개발과 무관한 자유무역의 의제를 다루면서 기만적인 이름을 가진 괴물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시애틀에서 시작된 거대한 반세계화투쟁의 물결은 세계사회포럼이란 또다른 공간을 통해 운동의 의제와 영역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반전운동과 결합하였다. 2003년 2월 15일 전세계 300여개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 국제반전공동행동에 무려 1,500~3,000만 명이 참여하는 국제연대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국제반전운동이 9.11테러로 조성된 국제공안정국을 일정하게 무력화시킴에 따라,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다시 한번 WTO를 강력히 압박하여, 그 내부에서 G20이라는 반대세력이 형성됨으로써 의제 합의에 실패했다. 멕시코의 휴양도시 칸쿤에서 시애틀이 다시 한 번 재현된 것이다.

반세계화운동의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자, 신자유주의 세력은 WTO DDA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대륙별 또는 지역별 협정, 또 양국간의 투자협정과 자유무역협정을 동시 병행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과 국가들만이 아니라 협상력이 취약한 국가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WTO아 IMF, G8 등에 대한 반세계화투쟁과는 달리, 개별적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투쟁은 상대적으로 일국운동의 역량에 의존하는 만큼, 제대로 된 투쟁을 조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거의 유일한 예외가 바로 라틴 아메리카였다.

NAFTA 반대에서 FTAA 반대로

유럽연합의 출범을 의식하여 추진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1994년 발효됨으로써 미국-캐나다-멕시코를 잇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냈다. 이 시기 약 7~8년에 걸친 협상기간 동안 NAFTA에 대해 일부 무역관련 NGO들과 미국노총이 문제제기를 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NAFTA 협정문에 환경 및 노동관련 조항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NAFTA의 집행이후 환경, 노동 등 이른바 사회적 조항(socail clause)의 한계가 드러났다. 3국의 노동자들은 NAFTA로부터 임금과 노동조건을 보호받을 수 없었다. 더불어, 환경문제의 경우 미국의 악질자본들은 이른바 국가제소권을 이용하여 멕시코 정부나 캐나다 정부로부터 피해배상금을 받아냈다.

바로 NAFTA의 폐해는 미국의 주도로 진행되는 FTAA(전미자유무역협정) 저지투쟁에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운동은 이제 NAFTA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 반세계화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의 폭발적 발전은 FTAA 저지투쟁의 전대륙적 확장을 가져왔다.

2001년 4월의 캐나다 퀘벡투쟁, 2003년 10월 미국 마이애미 투쟁 등을 통해 FTAA에 대해 저항했고, 2005년 11월 아르헨티나 마르델 플라타 투쟁을 통해 사실상 사망상태에 이른 FTAA를 되살리려는 부시의 의도를 분쇄했다. 더불어 2001년부터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을 매개로 FTAA 저지투쟁은 핵심적 의제가 되었고, 그 결과 아메리카사회포럼이나 각국가별 포럼을 통해 광범한 FTAA 저지투쟁전선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적 수준에서 형성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NAFTA 남하전략의 저지의 성과 위에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에보 모랄레스의 볼리비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를 잇는 ALBA(아메리카 볼리바리안 대안)과 민중무역협정(TCP)이 FTAA에 대한 민중적 대안으로서 힘을 얻고 있다.

반세계화운동 영역의 확장으로 FTA 반대투쟁

WTO DDA와 FTAA에서 난관에 부딪히자, 미국은 양국간 자유무역협정(FTA) 또는 소규모 다자간협정, 예를 들어 중미의 소국들과 카리브해의 도미니카를 엮는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를 각국 민중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속전속결로 처리하였다.

2004년에 시작되어 2005년 졸속으로 체결된 CAFTA는 현재 미국과 니카라과, 온두라스, 파나마, 코스타리카 등에서 차례로 국회비준을 강제한 상태이지만, 절차상의 문제점과 정당성 문제로 각국 정부들은 민중의 저항에 시달리고 있다.

더불어, 그 동안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양국간 FTA에 대한 민중들의 투쟁이 터져나오고 있다. 중미의 CAFTA 국가들 외에도, 미국이 안데스국가들과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에콰도르와 페루 등에서 도로봉쇄와 파업, 점거농성, 대중집회 등을 통한 반FTA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5년 상반기의 반세계화투쟁은 국제적 동원투쟁보다는 이런 개별적 FTA 저지/반대투쟁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에 말레이시아와 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FTA반대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1999년 시애틀전투를 매개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반세계화운동은 국제금융기구들에 대한 국제연대투쟁을 넘어, 일국적 수준의 투쟁과 결합하는 FTA저지운동을 반세계화 운동의 새로운 영역으로 열었다. 미국과 초국적 자본이 WTO와 지역무역협정(RTA)을 우회 또는 보완하는 기제로서 FTA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기조를 전환한 이상 FTA 저지 투쟁은 반세계화운동의 주요한 기제이자 계기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반제·반자본으로서의 반FTA 투쟁의 국제적 의미

1999년 시애틀 이후 아주 짧은 기간임에도 반세계화운동은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었다. 1999년 시애틀과 2003년 칸쿤, 2005년 마르델 플라타와 홍콩 등에서 자유무역과 신자유주의를 강제하는 국제금융기구들과 제국주의, 초국적자본 등에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가했다. 반세계화운동이 국경과 부문을 넘어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공세를 일정하게 제어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승리는 제국주의와 초국적자본이 노리는 세계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재편프로젝트는 저지했다는 의미에서,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더불어, 반세계화 운동주체들의 다양한 편차로 인해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단지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인 한에서,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현재 FTA 저지투쟁은 초동단계에 있지만, 해당 국가들에서 광범한 FTA 저지투쟁 전선이 구축된다면,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WTO/RTA 우회전략은 다시 한 번 대중적 반대에 부딪혀 좌초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본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공세에 결정적 타격이 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 대세론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킬 것이다.

일각에서 FTA를 저지하더라도 원래 그대로 아닌가라는 반문이 있지만, FTA 체결을 통해 초국적자본에게 법적․제도적 장치를 통해 무한착취의 자유가 보장되는 상태와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만큼, FTA는 단지 양국간 경제협정이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며 자본과 노동․민중세력 간의 물러설 수 없는 계급투쟁의 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세계화운동은 전체적으로 수세적 투쟁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주체적 역량과 계급적 역관계를 고려하면 당연하고 불가피하다. 그러면 대안을 말하면 곧바로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자본의 다단계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한편에서 주체역량을 강화․축적하고, 다른 한편으로 정세 및 역관계 반전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더 나아가, FTA저지운동은 제국과 초국적자본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저지․무력화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환기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넘는 민중적 대안세계의 전망을 대중 자신의 투쟁을 통해 창출해야 한다.

특히 한미FTA 저지투쟁은 반세계화운동 영역와 확장과 심화 과정에서 중핵적 고리를 담보하고 있다. 시애틀전투 이래 한국의 민중운동은 칸쿤과 홍콩에서 국제원정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고, 반세계화운동의 물결을 주도해 온 주체들 중의 하나이다. 현재 그 다음 단계인 한미FTA 저지 투쟁을 매개로, 반세계화운동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적 차원을 대중적으로 확장하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변혁적 대안세계를 위한 투쟁의 토대를 닦아야 한다.

[한미FTA 저지 운동, 진단과 과제](2) - 씨애틀의 기억과 세계의 반FTA 운동

1회차 - 7월, '거리투쟁'에 나서자
2회차 - 씨애틀의 기억과 세계의 반FTA 운동
3회차 - 한미FTA 정세와 노무현정권
4회차 - 한미FTA 저지 투쟁 어디까지 왔나
5회차 - 한미FTA 저지인가 FTA 저지인가
6회차 - 한미FTA 저지 투쟁, 목표를 분명히
7회차 - 한미FTA 2차본협상, 신라호텔을 봉쇄하라
원영수(노동자의힘) | 등록일 : 200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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