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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 자체를 반대하는 정치적 전망 열어야
[한미FTA 저지 운동, 진단과 과제](6) - 한미FTA 저지, 목표를 분명히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다.

한미FTA 협상에 대한 반대 의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각종 보도에 의하면 반대 여론이 드디어 찬성 의견을 앞지르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오히려 협상이 진행되면서 또한 노무현 정부가 ‘홍보’를 강화하고 있는 와중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 이와 동시에 한미FTA 저지투쟁도 확산, 강화되고 있다. 투쟁의 파고를 조금만 더 끌어올린다면, 협상 진행 자체를 당장 저지 또는 중단시키는 정도는 아니라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열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해볼 수 있다.

반대 여론이 힘을 얻고 있고 저지투쟁이 확산, 강화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필요성(불가피성)’, ‘시급성’,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졸속추진’, ‘준비부족’, ‘부정적 측면 > 긍정적 측면’ 등이 더 큰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설득력이 아직은 한미FTA 협상 중단, 나아가 FTA 자체에 대한 반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도로까지 진전된 것은 아니다. 또한 반대 진영 내부에도 논리적 근거와 현실 인식에서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대중적 차원에서 저지투쟁의 정치적 목표와 전망이 아직은 확실치 않아 언제든지 분위기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또한 살아 있다.

어쨌든 한미FTA 협상을 둘러싼 찬반 공방이 갈수록 치열해 질 것이 확실히 예견되는 현실에서 지금부터의 대응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번의 2차 협상 기간에, 늦어도 9월에 있을 3차 협상 및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시기 전까지 국면을 전환시켜야 하는 과제가 투쟁 주체에게 주어져 있다. 비로소 한미FTA를 둘러싼 진짜 승부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노동자 대중투쟁과 좌파운동의 현주소

진짜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대중투쟁과 좌파운동이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해 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자 대중투쟁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전선에서 세계 노동자 대중투쟁 한 부분을 담당해왔으며 그것도 매우 활기차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 노동자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사이에 노동자 대중투쟁의 활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정치적 활로를 뚫는 데 자신감을 잃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한미FTA 저지투쟁이 아직은 여론전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노동자 대중투쟁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좌파운동 역시 노동자 대중투쟁이 활발히 일었던 시기 이후 이렇다할 정치적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투쟁의 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동자 대중과의 접점을 형성하기 위한 활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계속해서 약화되어 왔다. 노동자 대중투쟁의 활력이 떨어지고, 노동자대중이 투쟁의 정치적 전망을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한미FTA 저지투쟁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 전선에서 좌파가 ‘반자본’을 대중화하는데 힘겨워 하고 있는 것도 좌파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대중과 좌파 정치세력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지구적 차원에서 전면화 된 이후로 집중된 정치적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 반제, 반전 대중투쟁이 지난 19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맞춰 국제적으로 거대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세계사회포럼을 대표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부르주아의 선언에 맞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국제원정투쟁이나 일국 내 계급투쟁이 지배계급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지 못하며, 다른 세계는 어떤 세계이며 그것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좌파운동은 일국 내에서나 국제적 차원에서 유력한 대안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있거나, 새로운 모색을 하고는 있지만 대중의 관심과 긴장을 불러일으킬만한 유의미한 정치 실험은 아직 나오고 있지 않으며, 제도정치(부르주아 정치)와 혁명정치 사이에서 정확한 분별점을 긋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늘날 ‘좌파’는 ‘반자본’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정치세력을 표현하는 의미보다는,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를 ‘좌파신자유주의’ 정부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부르주아정치의 장식물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길게는 87년 전국노동자대투쟁 이후, 짧게는 96~97 노동자총파업투쟁과 IMF 이후 구조조정 저지투쟁 과정에서 한국의 노동자대중과 좌파운동은 투쟁전선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 투쟁전선의 물리력(전투성)을 정치적(계급적) 차원의 ‘반자본’ 동력으로 진전시켜 내는 데 있어서는 실패를 거듭해 왔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수준의 주, 객관적 원인과 조건이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하나는 정치(전망)을 투쟁으로 대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알다시피 투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투쟁은 과정이자 수단이다. 물론 투쟁을 통하지 않고 노동자대중의 상태를 개선하거나 좌파운동을 진전시켜 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하고 투쟁 자체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자대중과 좌파운동은 적어도 96~97 투쟁을 경유하면서 반신자유주의 문제를 대중화 또는 의제화 해냈다. 구조조정 저지투쟁 속에서는 노동유연화가 위기에 처한 초국적독점자본과 부르주아 국가가, 그들이 처한 위기를 노동자대중에게 전가하기 위해 저지르는 반동적 행위임을 폭로해 냈다. WTO가 성립되면서 초국적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맞서 반세계화 운동이 불가피하다는 자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목격하면서 전쟁(침략)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구성 부분이며 반전투쟁과 반세계화 투쟁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집과 국제연대투쟁이 필수불가결 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 과정이 분명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운동이 이 과정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노동자 대중투쟁과 좌파운동이 처한 상태는 위에서 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렇다. 좌파운동은 딱 거기에서 멈춰 있다. 현실의 노동자대중은 이미 일상적으로 반자본 전선에서 보내고 있는 데도 좌파운동은 반자본 투쟁전선 형성을 먼 미래의 것으로 유예시키고, 반자본 투쟁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을 현실의 투쟁 속에서 구체화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오직 투쟁 조직화에만 매달려 마치 시간과의 싸움을 하는 구도자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투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투쟁이 어려움에 처할수록 투쟁을 더 힘차게 해야 한다는 동의어를 반복하거나 또는 동문서답을 하고 말았다. 전망을 세우지 못한 채 진행된 투쟁은 갈수록 형식화(관료화) 되어갔으며 그에 비례해 투쟁동력은 점차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좌파운동은 약화되고 있는 투쟁동력의 끝을 붙잡고 힘겨운 일상을 보내야 했다.

정치적 전망은 객관적 현실 속에 있다.

지금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방식(내용)과 일정(형식)대로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다면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예상한 바대로 한국의 국가 주권과 국민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지난 IMF 당시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대량 실업이 발생하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자 민중의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미치는 공공부문의 시장화가 가속됨으로써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될 비용 증대는 물론 농업과 농민이 받아야 할 피해는 이루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태의 한 측면이다. 이와는 정 반대로 노무현 정부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결과가 있다. 그 것들은 모두 정말 주관적 희망에 불과하거나 거짓일 뿐인가? 결코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당연히 한미FTA를 통해 한국자본주의가 처한 위기가 극복될 수 없을뿐더러 더 큰 위기를 불러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최소한 지금 처해 있거나 앞으로 닥칠 위기를 모면하는 데 상대적으로 적합한 처방이 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한미FTA를 통해 한국자본주의가 일시적으로 활로를 찾더라도 그것이 노동자 민중의 희생과 고통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한국자본주의가 만약 활로를 찾지 못할 경우 그 때 노동자 민중이 감수해야 할 희생과 고통이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후자에 근거해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 논리를 앞세워 노동자 민중을 협박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는 한미FTA를 저지하는 것도 저지하는 것이지만, 저지에서‘만’ 그친다면 그 뒤에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랬을 때 저지가 곧 대안이라는 주장은 잘해도 반만 맞는 말이다.

초국적자본화된 한국의 독점자본은 ‘천민자본’도 ‘매판자본’도 아니다. 이를 판단하는데 도덕적 잣대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한국의 독점자본이 초국적자본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한국자본주의는 이미, 비록 해외 초국적자본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있지만, 독자적 축적구조를 갖추고 있거나 또는 스스로 이윤창출을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한국자본주의에서 해외 초국적자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현재도 높고 앞으로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는 한국자본주의의 종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방화의 정도를 말해주는 참고 지표로 봐줘야 한다. 개방화의 정도가 곧 종속성의 정도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둘 사이에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여지가 충분히 담겨 있다. 오히려 개방화의 정도는 곧 세계화의 한 지표일 수도 있으며, 세계화의 지표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적응력이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나 유럽에서의 제 3의 길이 난관에 부딪친 것도 신자유주의 세계화 열차에 과감히(?) 올라타지 못한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으로 모순되게도 한국자본주의 입장에서는 IMF를 통한 강제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의 강을 건너온 측면이 없지 않다. 지금 또 다시 한국자본주의는 한미FTA를 통해 이미 부딪치고 있고 새롭게 부딪칠 위기를 건너고자 하고 있다. 한미FTA 저지투쟁은 이와 같은 객관적 사실을 전제로 해서 진행돼야 한다. 좌파운동의 출발선도 여기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한미FTA 저지투쟁의 본질은 미국자본주의로의 종속화를 막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이미 한국의 노동자 대중투쟁이 몸소 실천해왔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며, 반자본 투쟁으로 진전되어야 하는 투쟁이다. 만약 전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면 한미FTA 저지투쟁의 중심은 불가피하게 주권 또는 국민경제 방어(강화)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미FTA 저지투쟁은 단지 한미FTA만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어서도 안 된다. 그럴 경우 한미FTA가 아니라 시간표의 순서만 바꿔 한일FTA 또는 한중FTA를 먼저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빠지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 나아가 반자본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한 주장은 자본분파 또는 지배세력 내부의 이해관계의 차이를 마치 노동자계급의 것인 양 사태를 왜곡하는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민중무역협정도 하나의 참고 자료 이상의 무게를 가질 수 없다. 남미의 경우와 처한 조건이 달라서 만도, 동시에 무역 자체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민중무역협정과 반자본 사이에는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미FTA 저지투쟁만이 아니라 FTA 일반 또는 FTA 자체를 거부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입장도, 그것이 비록 가장 원칙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이라는 긍정성을 담고 있긴 하지만, 반자본의 입장에 설 때에만 타당하다.

개성공단, 남북경협에 도움이 된다면 한미FTA는 괜찮은가?

노무현 정부가 이 시기에 그토록 한미FTA를 추진하고자 하는 하나의 단서는 바로 개성공단에서 찾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정권 초기에 의욕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동북아중심국가론’, ‘동북아 경제허브’ 구상이 사실상 좌초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동북아의 정치군사적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고조되고 있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경제허브’ 구상을 현실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게 당연하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가 우회로로 택한 것이 바로 개성공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미FTA 협상에서 개성공단의 원산지 인정이 받아들여진다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일정한 틈새가 발생할 수 있다. 이랬을 때 남북경협과 한국의 대북 투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으로서도 굳이 나서서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지점이 사실상 노무현 정부와 한나라당과의 ‘경제 연정’을 성립시켜주는 내적 고리가 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많은 부분을 미국에 양보하고라도 개성공단을 살릴 수 있는 길을 택했다고 봐야 한다.

한미FTA 반대 진영 내부에도 최종적으로 한미FTA가 이와 같은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질 경우 겉으로는 몰라도 암묵적 수준에서 이에 동조하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는 한미FTA 반대 진영 내부의 균열이나 힘의 약화를 뛰어 넘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한미FTA는 한미 사이의 무역협상 그 이상의 것이다. 한미FTA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합의, 한미동맹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한미동맹은 9.11 사태 이후, 그리고 미국의 대 중국전략 구체화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기존의 한미동맹이 대북 억지력을 근간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면 최근의 한미동맹은 그것을 훨씬 넘어 대 중국견제를 보다 중요한 측면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주한미군의 활동 반경을 동북아를 벗어난 범위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FTA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세우는 지렛대이자,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한 교두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무현 정부의 입장에서 한미FTA는 중국과의 관계에 일부 손상을 입더라도 한(조선)반도에 대한 주도권 행사를 통해 결국 동북아중심국가로 서 나가기 위한 전략적 선택, 즉 승부수라고 볼 수 있다. 개성공단이 이를 뒷받침하는 현실적 근거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도록 하고자 할 것이다. 한편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입장에서는 한미FTA를 통해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이 이루어진다면 남북관계를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민족주의 정치세력이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한미FTA 저지투쟁이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 나아가 반자본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입장에서 그 동안 보여 온 이중적 태도를 또 다시 드러낼 수밖에 없어 한미FTA 저지투쟁에 심각한 폐해를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물론 좌파의 입장에서도 개성공단에 대한 원칙적 수준에서의 태도를 넘어 보다 구체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미FTA 저지투쟁과는 별개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지 결코 맞바꾸기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한미FTA는 단지 경제적 수준에서의 무역협상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노동자 민중이 감내야 할 고통과 희생은 참담한 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희망’이 그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희망은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그것이 희망이 될 수 있으려면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저 희망을 끄집어내서 현실 세계로 던져야 한다. 현실의 세계와 무관한 희망을 붙잡고 살 수는 없다. 각자의 개인적인 희망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정치적 전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한미FTA 협상은 노동자 민중에게 단지 걱정거리만 던져주고 있지는 않다. 그 뒷면에 노동자 민중이 나아가야 할 정치적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노동자대중과 좌파의 입장에서 한미FTA 저지투쟁의 목표는 한마디로 반자본 투쟁 동력 형성과 반자본 투쟁을 이끌어 나갈 주체를 형성하는 데 맞추어야 한다. 물론 대중적 차원에서 이게 곧바로 현실화되기에는 그 사이에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수없이 가로 놓여 있다. 한미FTA 저지투쟁이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온 노동자 대중투쟁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그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지난 10여 년의 투쟁 과정에서 그토록 찾고자했던 정치적 전망을 새롭게 열어 나가는 출발이 될 것인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동자 민중이 처한 어려움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 자본과 지배계급 역시 심각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WTO, FTA, 침략전쟁도 그러한 위기의 표현일 뿐이다.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은 저들이 위기를 벗어나는 데 필요한 희생양이 될 것인지, 반대로 그들과 묶여져 있는 고리, 즉 자본-노동관계를 끊어 낼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연속기획① : 한미FTA 저지 운동, 진단과 과제]

1회차 - 7월, '거리투쟁'에 나서자
2회차 - 씨애틀의 기억과 세계의 반FTA 운동
3회차 - 한미FTA 정세와 노무현정권
4회차 - 한미FTA 저지 투쟁 어디까지 왔나
5회차 - 한미FTA 저지인가 FTA 저지인가
6회차 - 한미FTA 저지 투쟁, 목표를 분명히
7회차 - 한미FTA 2차본협상, 신라호텔을 봉쇄하라
고민택(논설위원) | 등록일 : 200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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