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적 좌파의 새로운 실험

[기고] LCR 해산과 NPA 창립

2009년 2월 5일부터 8일까지 프랑스 파리 교외 생드니의 유로사이트 컨벤션센터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의 해산총회와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창립 총회가 열렸다. 이는 1968년 5월 투쟁의 성과물로 건설된 LCR이 40여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자리이자, NPA 건설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정치적/문화적/세대적 확장의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는 자리였다.

  LCR의 NPA로의 전환은 양적, 내용적으로 더 확장을 이루었다

  NPA 창립총회에 참가한 대표단

LCR의 NPA로의 전환과 좌파정치운동의 지각변동은 프랑스 내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 좌파진영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번 LCR 해산총회와 NPA 창립총회에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준비모임과 진보신당이 초청을 받아 참여했고, 그 외에 21세기코리아연구소 등이 참여했다.

LCR의 역사적 해산: 두 개의 경향, 두 개의 동의안

2월 5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LCR 해산총회는 450여명의 대의원과 100여명의 해외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총회에는 두 개의 안(A안과 B안)이 제출되어 찬반토론의 형태로 오전과 오후에 걸쳐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두 개안은 LCR의 해산과 NPA의 조직적 결합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지만, 결합 이후 제4인터내셔널(트로츠키주의 국제조직)과의 관계설정 문제를 둘러싸고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알랭 크리빈이 설명한 A안은 다수파의 견해로 LCR 해산 이후에 NPA 내부에 별도의 LCR 그룹/경향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LCR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던 제4인터내셔널 문제 역시 NPA안에서 열어놓고 논의하고 결정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 B안의 제안자인 크리스티앙 피케는 소수파의 입장을 대변하여 LCR의 해산과정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에 가입된 구LCR 회원의 조직으로서 ‘제4인터 협회’(association)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다수파는 협회의 설립이 NPA가 조직적으로 공고화되어야 하는 시점에 불필요한 안팎의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으므로 소수파의 견해에 반대했다.

오전과 오후의 공개회의를 이후에 진행된 저녁의 비공개 회의에서 두 개안과 재정문제 등에 관한 표결이 이루어졌는데, A안이 참석 대의원 87.1%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B안은 11.5%의 표를 얻었고, 1.4%는 기권했다. 이와 같은 LCR 총회의 최종적 결정은 일체의 기득권을 넘어 NPA를 아래로부터 건설하겠다는 LCR 노장투사들의 단호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NPA 창립: 새롭고 젊어진 반자본주의운동

NPA 창립총회는 프랑스 전국에서 모인 630여명의 대의원들 참여한 가운데 2월 6일부터 2박3일의 일정으로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총회는 2월 6일 오전의 전체회의를 통해 개막되었는데, 오전 회의에는 회의진행 설명, 투쟁보고(최근 구 프랑스 식민지 과달루페에서 일어난 총파업 사례), NPA 건설 경과보고의 순서로 이어졌다. 간략한 경과보고를 통해 NPA가 당의 기본단위인 467개의 위원회와 9,123명의 당원으로 결성되는 성과가 확인되었다. 회원 중에서 여성비율이 36%이며, 새로 발간된 주간지 구독자가 11,000명을 넘었다는 보고도 이뤄졌다.

경과보고를 증명하듯이, 전날의 LCR 총회보다 많은 참석자들로 회의장은 가득 찼다. 또 LCR 총회장이 노장들의 진중한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면, NPA 총회의 분위기는 젊은 당원들의 활기찬 생동감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경과보고에 이어 총괄 정치보고는 지난 2002년과 2007년 대선에서 LCR의 ‘붉은 우편배달부’ 후보로서 대중적 스타로 부상한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나섰다.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환경/공해문제까지도 포함해서 자본가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노동자 총파업 밖에 없다”며 “공적자금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이 아니라 투쟁으로 맞서자”고 주장했다. 또한 “NPA가 경제위기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반자본주의 투쟁의 정치적 도구”로서 전투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붉은 우편배달부'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연설을 하고 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언론의 지극한 관심이었다. 회의장을 움직이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NPA 당원들은 그러한 언론의 선정주의에 대해 소리를 내며 야유를 보냈다. NPA에 당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올리비에 브장스노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30여국 해외 대표단들, NPA 창립 축하

해외 30여국에서 참가한 좌파정당들의 대표단은 다양한 비공식 접촉과 지역별 모임 등을 통해 각국의 투쟁상황을 공유하고 NPA 창립과정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한국에서 참가한 대표단 역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참가단들과 최근의 각 단위에 대한 소개와 좌파정당운동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2월 6일에는 예정에 없던 해외참가단 전체 모임도 즉석에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경제위기와 반자본주의 투쟁에 대한 각국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1월 30일 브라질 벨렝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진행된 국제급진좌파회의에 대한 보고도 있었다. 이후 해외대표단들은 NPA에서 준비한 공식만찬에 참여해 창립을 축하했다.

반자본주의 신당(NAP) 당명 채택
반자본주의 동의하는 세력과 유럽의회선거 대응


NPA 창립총회는 2월 6일 오후부터 2월 7일 오전까지 NPA의 창립원칙, 임시규약, 정치결의안, 유럽의회선거 대응 결의안 등의 핵심주제에 대하여 분과토론을 진행했다. 이 분과토론을 통해 각 위원회에서 문건으로 제출된 세부 수정안에 대해 심의하였고, 2월 7일 오후부터 2월 8일 오후까지 전체회의를 통해 각 수정안에 대한 찬반토론과 표결을 진행했다.

창립원칙에 대한 심의에서는 사회주의의 표현과 관련해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 사회주의가 제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21세기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채택되었다. 규약에서는 당명과 관련해 반자본주의신당, 혁명적 반자본주의당, 혁명적 좌파국제주의 동맹, 반자본주의 좌파당 등 5개 안이 제출되었다. 논의 끝에 결선에서 반자본주의신당(NPA)이 혁명적 반자본주의당(PAR)을 316대 270표로 누르고 공식 당명으로 채택되었다.

LCR 해산 총회에서도 쟁점으로 논의되었던 2009년 유럽의회 선거와 관련한 방침에서 두 개의 안이 제출되었다. 다수안은 사회당과의 연합을 배제하되, 반자본주의에 동의하는 세력의 연합을 통해 선거를 대응한다는 것이다. 소수안(크리스티앙 피케 제안)은 공산당(PCF) 및 좌파당(PG) 이 주도하는 <좌파전선> 가입을 통한 선거연합을 제안하는 안이다. 결론은 76%의 지지로 다수안이 가결되었다. 소수파는 16.7%의 지지를 받았다.

NPA 총회는 3가지의 주요 안건을 채택한 다음, 새로운 당의 정치적 지도부인 192인 전국정치평의회(CPN)를 개별투표로 선출했다. 올리비에 브장스노도 78% 득표로 지도부에 선출되었고, 그 가운데 45%가 LCR 출신이었다. 반면 소수파 동의안을 제출했던 크리스티앙 피케가 선출되지 못했고, 대회 의결에서 16%를 획득한 소수파가 13명 밖에 선출되지 않자 소수파측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도 대회는 임시집행위원회(20명인 규모)를 표결없이 추천하여, 3월 7~8일에 열릴 전국정치평의회 1차회의까지 당의 운영을 책임지도록 했다. 3월의 전국정치평의회에서 정식으로 집행위원회가 선출될 예정이며, 대외적으로 당을 대표할 대변인 문제도 논의할 예정이다.

2박3일 간의 열띤 토론과 정치적 결정을 마무리한 총회는 마지막으로 “1월 29일 총파업의 정신을 이어 투쟁하자!”의 제목아래,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의 투쟁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총파업투쟁!”이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다! 투쟁을 계속하자”는 구호가 스크린에 떠 있는 가운데,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며 총회를 마무리했다.

NPA, 거대한 변혁의 첫 걸음을 내딛는 실험

LCR의 NPA로의 전환은 양적, 내용적으로 더 확장을 이루었다. 지역중심, 다원주의, 연방주의라는 조직원리를 통해 넓혔다. 사업단위로 보면 기존 LCR의 사업단위를 NPA로 이전해서 사업의 연속성을 이어나가면서, 새롭게 빈민/교외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운동을 담당할 사업단위와 제소자인권/인권탄압 대책을 위한 사업위원회가 추가되었다. 이는 지난 교외지역 폭동 이후에 과거에 탈정치화되어 있던 청소년층이 정치적 급진화 되면서 사회운동으로 접근하는 것을 인권적 차원에서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번 NPA 창립은 일단 순조로워 보이고 상당한 탄력을 갖고 프랑스 좌파운동 뿐 아니라 유럽좌파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아직 NPA의 실험은 이제 시작이며, 앞으로 중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현재적 수준에서 NPA의 정체성은 핵심적으로 확고한 반자본주의 투쟁정당이며, 이는 정치적으로 사회당과 연대를 통한 제도적 포섭의 단호한 거부로 모아지고 있지만, 프랑스의 복잡한 정치적 지형 속에서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할 전략과 전술을 구체화해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다.

또한 새롭게 결합된 젊은 활동가들이 기존의 활동가들과 정치적/문화적/세대적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NPA를 건설할 수 있었던 하나의 동력이었던 청년층의 불만과 반란을 어떻게 변혁의 전망 하에 정치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지, 또 그들을 차세대 지도력으로 키워나갈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이를 위해 환경, 차별, 계급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을 어떻게 접합하고 융합할 것인지의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간 헌신적으로 투쟁해온 LCR의 문을 내리고 NPA의 새로운 실험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새로운 당 자체의 정치적 성장만이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 의해 주도된 20세기 프랑스 좌파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21세기 사회주의를 실현한 정치적 도구로서 첫 걸음을 뗀 LCR-NPA의 정치적 실험은 프랑스만의 고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알랭 크리빈(Alain Krivine)과의 인터뷰

알랭 크리빈은 다니엘 콘-벤디트와 더불어 1968년 5월투쟁의 핵심 활동가로서, 1969년과 197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바 있다. 1966년 청년공산주의자동맹(JCR, 1968년 해산), 1974년 LCR 건설을 주도했으며, 프랑스의 대표적 트로츠키주의 활동가들 중의 한명이다.

  알랭 크리빈

LCR 해산과 NPA 창당에 대한 개인적 감회는?

40년 동안 당건설 투쟁을 해 왔다. 우리의 통합제안은 항상 거부당해서 외로웠던 경험이 많다. NPA를 통해 그동안 원했던 것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상황에서 기회를 잡았고, 아래로부터 당을 새롭게 건설했고, 대성공이다. 공산당이나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동지들, Attac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동지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수단이다. 새로운 당은 사회변혁을 위한 효과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당에서 동지의 역할은?

2년전 LCR 정치국에서 은퇴했다. 아마 신당의 전국평의회에 선출되겠지만 집행부는 젊은 동지들이 맡을 것이다. (은퇴하는 것인가?) 천만에. 올해 67살이지만 항상 하던 대로 계속할 것이다. 더 이상 상근자는 아니지만, 연금을 받게 되니까 과거와 똑같이 당건설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덧붙이는 말

안재훈님은 사회주의노동자정당 준비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그

프랑스 , LCR , 올리비에 브장스노 , NPA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 반자본주의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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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웅기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한 가지 오식이 있어 정정을 요청합니다.

    16번째 단락: 소수파측에서는 불만을 목소리를 → 소수파측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를

  • 참세상

    바로 잡았습니다.

  • 독자

    알랭 크리빈! 멋지네요. 역시 참세상에서 읽어야 어떻게 돌아가는줄 알지. 레디앙에서 브장스노 환타지를 보면서 거부감이 일었는데 프랑스 좌파당원들의 선정적인 우파보도행태 야유가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