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세상을 움직이는 힘

[느껴봐~인권영화제]③ 울림과 떨림의 현장

세상을 바꾸는 힘, 울림과 떨림

사회운동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사회를 바꾸는 것이자 동시에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제도와 정책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고는, 또한 사람들의 열망이 모여 바꾸어 낸 것이 아니고서는 오래가기 힘들다. 사람들의 열망이 모여 바뀌어도 그것이 내면화되고 문화화되어 그 사회의 전통이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사회의 비주류 시민들의 열망으로 이뤄낸 참여정부, 그러나 열망으로 이어가기엔 기존질서에 젖은 사회적 풍토가 녹록치 않아서(물론 이것 외에도 많은 이유야 있지만!) 결국은 많은 실망을 남긴 채 끝나버렸다. 뒤이은 정부는 민주화의 역사를 뒤로 돌리며 사람들에게 독재시대의 순응적 자세를 요구하고 그동안 확장시켜온 민주주의적 전통을 초전박살의 자세로 물리치고 있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권위주의에 반대하고 지역주의와 시장주의로 국민을 교묘히 편가르기 하는데 저항할 디딤돌을 우리의 내면까지, 일상의 문화까지 단단히 다져준 것 같지는 않다. 90년대 중후반에서야 사람들이 “인권이란 말이 뭐야?”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그 이전에 인권이란 말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세월도 좋아지고 사람들도 변했다.

노력과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겠지. 제도야 “으쌰, 으쌰” 싸워서라도 바꾼다지만 사람이 쉬 바뀌는감! 그래도 사람들은 시대의 물을 먹고 문화의 영향 하에 조금씩 변하잖아? 이럴 때 더욱 필요한 건 뭘까? 구호, 집회, 시위? 그렇지. 이런 것들은 늘 필요한 민주주의의 산소같은 것들이지. 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더 직접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경험하거나, 변화를 위해 꿈틀거리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거나, 작지만 소중한 승리를 이뤄가는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떨림을 얻는 것이 아닐까!

  3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인권영화제는 바로 이런 울림과 떨림을 주는 자리다. 13번째가 되는 동안 탄압과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영화를 보며 인권을 느끼고, 마시고, 자신들의 일상으로 챙겨갔다. 어떤 구호보다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사람들이 몸속부터 인권의식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니까. 인권영화제는 바로 사람들의 피부 속, 심장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문화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서서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활의 패턴을 바꾸고 다른 패러다임을 삶 속에 옮겨 심어주는 것.

그동안 여러 편의 인권영화를 보았고, 영화 속 인권해설이라는 글도 몇 편 썼지만, 특히 두 편의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3회 때 보았던 ‘전투지대(War Zone)’과 9회 때 보았던 ‘예스맨’. 이 두 영화는 내게 저항운동의 새로운 상상력과 일상적 실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여성, 일상의 폭력에 저항하다

"몇 년 전 여름, 이 중고 카메라를 샀을 때만 해도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내게 무기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잃었던 힘을 되찾아 줄 무기."라는 감독의 멘트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여성을 향한 남성들의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인가를 보여준다. 여성이면 누구나 경험해봄직한 남성들의 시선 훑기. 우리는 마네킹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눈요기를 위해 준비된 듯 여성의 몸을 느글거리는 욕망의 시선으로 훑어보는가. 감독은 이제 그 남자들에게 자신의 무기, 카메라를 들이댄다. 시가전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 남성들의 반응이 재밌다. 어떤 이들은 왜 여자들이 분노하는지 의아해하고, 어떤 이들은 불쾌해하고, 어떤 이들은 정말 화를 낸다.

여성운동의 출발은 80년대부터 긴 여정을 달려왔지만, 90년대 초중반까지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고작 강간이라는 아주 극단적 형태만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다. 이전에 강간마저도 여성들이 자기 관리를 못한 책임으로 비난받았으니 이것도 어찌보면 여성들의 투쟁의 성과였다. 강간죄에 대한 여성단체의 입장은 ‘여성인권’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법제화된 것은 가부장적 질서에서 한 남성에게 소유된 여성의 정절을 보호하는 관념이 내재된 것이다. 이토록 척박한 한국 사회 여성인권인식은 90년대 여성운동의 확산과 이를 통한 여성의 자의식, 자존감 회복으로 많이 변화되어왔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은 구체적 ‘성(sex)'에 대한 폭력 혹은 구타가 중심이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으로 여성인권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현실에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 중 일부도 이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질 만큼, 우리사회는 여성과 남성의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는 문화가 너무도 강했다. 그래서 일상적 적대감과 전쟁선포를 통해 넘어서야 하는 일상적 폭력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일부 여성들의 외침일 뿐 공론화되지 못했다.

90년대 후반 접하게 된 전투지대는 ‘시선 정도야...뭐.. 일상적인 것이어서 불쾌해도 뭐 어쩌겠냐’는 일종의 패배의식에 기반한 체념을 일순간에 날려주는 영화였다. 당시 여성단체에서 일했던 나는 이 영화로서 일상적 폭력이 보다 더 광범위하게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것을 이 영화로서 교육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여성인권학교에서 이것을 상영하였다. 반응은 대단했다. 참여자 모두 너무나 많이 경험한 일이나 이보다 심한 것이 많아 일일이 문제 삼지 않고 넘겨왔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더구나 강한 폭력은 법으로 해결되지만 이것은 문화현상으로 널려있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저평가에 기여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늘 욕망의 시선으로 여성을 보는 사람들이 법이 아무리 규제한들 얼마나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전투지대’는 서서히 제도적 투쟁만으로 여성이 인간이 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가며 일상에서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 되어가던 때 단비 같은 영화로 다가왔다. 일상적 저항의 상상력을 열어주었고,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주눅들거나, 눌변으로 저항하는 남성들을 보며 쾌감마저 느끼게 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이후 나와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여성들의 실천운동의 변화에 강한 파장을 던져주었다.

신자유주의를 조롱하다

  9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그로부터 한 참 후 보았던 ‘예스맨’. 우선 이 영화는 재미없고 진지한 게 다큐영화라는 고정관점을 여지없이 날려준 유쾌한 영화였다. 신자유주의를 움직이는 무역 질서(WTO체제)를 조롱하는 주인공들의 '퍼포먼스'는 포복절도하게 웃음을 주었고, 단순히 제도의 비판을 넘어, 제도의 꿀맛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가치로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보통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하는데, 이 영화에서 실감했다. 세 개의 이어지는 퍼포먼스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 탐욕에 따라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본다. 재밌는 것은 첫째와 셋째 퍼포먼스의 인물들인데, 이들은 같은 신자유주의 신봉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태도를 보인다. 첫 편에서는 탐욕으로 가득한 눈으로 인간을 보기보다는 인간이 돈이 되는 것만을 본다면, 마지막에서는 자신들의 탐욕이 세상을 망쳐왔음을 인정한다.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가렸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것을 지향할 것인가가 왜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그렇다고 세계적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한 그들의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순 없지!!)

결국 삶의 권리를 위한, 인권을 위한 투쟁은 제도와 맞서는 동시에 끊임없는 성찰을 요구하는 것,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누구의 편에 있는지 돌아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임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인권영화제의 날이 다가왔다. 터무니없는 규제들을 양산하는 정부가 인권영화제를 거리를 내몰았다. 하지만 세상은 뜻대로만 되진 않는다. 정부의 의도는 영화제를 못하게 괴롭히는 것이었겠지만, 인권영화제는 덕분에 성큼 인권의 주체들 바로 시민들의 거리로 더욱 가까이 가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봐, 너희가 한 짓을! 들풀은 밟을수록 더 처연히 일어선다는 것을!!”이라는 외침을 검열로 막으려는 저들에게 일갈해주는 일일뿐.(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