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핸 래전이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21주기 동생 추모제에 참석 못한 박래군 용산범대위 집행위원장

1988년 6월 4일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이틀 뒤인 6월 6일 숨을 거둔 고 박래전 열사의 스물한 번째 추모식이 지난 6일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열렸다.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고 박래전 열사는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분신 후 투신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60여 명의 선후배들과 인권단체 활동가 들이 함께 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박래전 열사의 형 박래군 씨가 참가하지 못했다.

박래군 씨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로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활동으로 말미암아 수배상태다. 그는 용산철거민들의 시신이 있는 순천향 병원 범대위 상황실에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수배생활을 하고 있다.

매년 추모식을 기념사업회와 함께 준비하고 찾아온 이들을 맞았던 박래군 집행위원장은 이번엔 편지로 감사를 대신했다.


박래군 집행위원장은 “가지 못하는 저를 대신해 추모제를 잘 치러 달라”는 부탁으로 편지 글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희생된 용산 철거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추모제와 추모대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수배가 되었다”고 근황을 전했다.

박래군 집행위원장은 “소수의 부자들과 재벌만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을 약탈하고 억압하는 정권을 그대로 두고는 죽음의 행렬을 막지 못 한다”면서 “올해 6월에는 지난해 한 목소리로 외쳤던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한 목소리로 외치자“고 제안했다.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래전이의 묘소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기에 이 힘겨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다“며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저와 동생의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추모사를 대신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박래군 집행위원장의 어머니는 “래군이를 못 본지 5개월이나 됐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나경원 박래전 기념사업회장은 “민주주의가 살아 꽃피는 세상에 다시 온다하던 박래전 열사가 웃으면서 올 날이 먼 것 같다”고 추모사를 했다. 나경원 회장은 “용산학살은 백색테러였는데 책임도 지지 않고, 쌍용자동차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며 농성자들이 좌익세력이라는 삐라를 뿌렸다. 박종태 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특수고용직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세상”이라며 “21년째 여기에 오지만 다시 이를 악물고 MB정부의 민주주의 후퇴를 막고 민중의 새 세상을 위해 정신을 가다듬을 때”라고 말했다.

올해는 추모제에 참석하지 못합니다[편지 전문]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참 죄송한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제 동생 래전이 추모제에 참석하지를 못합니다. 숭실대학교에서 열리는 4월 4일 추모식에도, 6월 6일 마석 모란공원의 추모식에도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제가 가지 못하더라도 저를 대신해서 제 동생의 스물한 번째 추모제를 잘 치러주십시오. 저는 이번 추모제에는 같이 하지 못하지만, 정말 20년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추모제인데, 가지 못하는 제 심정을 헤아려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수배자의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1월 20일 용산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희생된 용산철거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서 일하던 중에 추모제를 매일 열고, 주말마다 추모대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수배가 되어 철거민 열사들의 시신이 모셔진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혀 있습니다. 장례식장이 제가 갇혀서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장례식장 밖으로는 경찰들이 물샐 틈 없는 경계를 펼치고 있어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나갔다가는 곧바로 잡혀가야 하는데 아직은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으므로 당분간 더 이곳에서 갇혀 생활해야 합니다. 수배는 창살 없는 감옥살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실감나는 하루하루입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그날 이후에도 많은 죽음들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실 때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추모객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수백만명의 인파가 그의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용산의 5명 철거민 열사들은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종태 노동열사의 죽을도 마찬가지입니다. 잊혀만 가는 것 같은 이들 열사들의 죽음과 앞은 두 분의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들의 애도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기보다는 그의 인간적인 소탈한 모습, 그리고 그가 이루려 했던 탈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그에 대비된 현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같이 어우러져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국민과 소통하려 하던 그의 소탈한 인간적인 모습과 대비되는, 법과 원칙만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는 현 정권에 대한 분노가 많을 이들을 분향소와 장례로 이끌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전직 대통령마저도 죽음을 결심하고 자살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런 힘이 없는 서민들이나 민중들은 더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겠지요. 언론보도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자살 소식들을 우울하게 보아야만 하는 게 요즘입니다. 자살률 세계 1위의 세상은 분명 정상아닌 비정상의 사회, 병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인간다운 행복을 포기당한 채 살다보니 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같이 공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제 노무현 그를 보내던 눈물을 거두고 이 끝없는 죽음의 행렬을 끝내는 일을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소수의 부자들과 재벌만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을 약탈하고 억압하는 그런 정권을 그대로 두고는 죽음의 행렬은 막지 못합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직 채 꽃도 피지 못한 학생들, 실업에 우는 청년들, 비정규직 노동자로 밀려났다가 어느 날 실업자가 되는 노동자들, 경제위기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담할 것을 강요당하는 민중들이 그 죽음의 대열 속에 있고, 그들의 죽음은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예우를 거부한 이 정권에 대한 분노는 다시 그만큼도 예우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서도 모독까지 당해야하는 민중들의 죽음까지 포함되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 마지막 선택한 망루에서 경찰 특공대에 매맞아죽고, 불타 죽은 철거민들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일 수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경찰특공대의 강제진압으로 대응하는 정권이 있고, 그런 죽음조차도 철거민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사과 한 마디 없는 그런 권력이 지배하는 나라가 어디 나라입니까. 노동자들의 노동을 하찮게 여기면서 해고와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가 이 나라임을 우리는 그들의 죽음 속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나라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와 우리의 행복을 바란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분노의 심정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그래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실감나게 표현할 때만이 그 권력을 바꿀 수 이습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의 저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정의한 것에 대한 저항, 억압에대한 저항, 착취에 대한 저항, 차별에 대한 저항, 그 길위에서 연대하여 전진할 때만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세상의 세상은 다가올 것입니다.

올해 다시 뜨겁게 6월을 맞이합시다. 21년 전 제 동생 래전이가 죽던 그 날도 무척이나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국에서 백만이 모여 촛불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립시다. 올해 6월에 지난해에 모두가 한 목소릴로 외쳤던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더욱 목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 검찰, 정치경찰의 억압을 뚫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용산 철거민 열사들과 박종태 열사들을 명예롭게 장례 치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그 억울한 죽음조차 모독하지 않도록, 그들이 이제 평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 제 심경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함께 해야 하는데,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저는 이렇게 글로서나 제 얘기를 전할 뿐입니다. 제 동생 래전이가 바라던 세상이 제가 가는 인권운동의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 길이 종종 힘들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만이라도 같이이 하는 많이 이들이 있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래전이 묘소를 찾아줄 이들이 있기에, 이 힘겨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을 수 있습니다. 제 대신 동생의 영전에 소주 한잔 올려주시고, 담배 한 개비 태워주십시오. 그리고 죽은 동생 생각에 더해, 만날 수 없는 처지의 저 때문에 더욱 서럽게 우실 어머니를 꼭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 동생 아직도 스물여섯의 얼굴로 여러분을 맞지만 그가 살았다면 벌써 마흔 일곱 장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제 동생과 소주 한잔진하게 하면서 밀린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 대신 동생의 말벗이 되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숭실대에도, 모란공원에도 같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리의 시위 현장에도 같이 하겠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그 투쟁에 저와 동생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십시오. 여러분이 있어 행복합니다. 내년에는 모두 뵐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저의 추모 글을 가름합니다. 고맙습니다.

2009년 6월
래전이 둘째 형 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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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전 , 박래군 , 용산범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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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래군 동지의 동생분이 열사라니 ㅠ_ㅠ
    몰랐어요..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