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의 원천으로서 잉여가치 생산

[연속기고](10) 겨울 대중강좌 - 맑스로 보는 경제, 맑스로 읽는 경제학 3강

지난 시간에 강의 했던 화폐의 발생에 관한 내용은 이해하기가 다소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옷이라는 상품이 예컨대 한 벌에 100원에 팔린다면 옷의 가격인 100원은 화폐로 표현된 가치입니다. 즉, 이 100원은 옷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표현하는 가치형태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가치는 옷에 들어간 일정한 노동이 응고된 것으로, 따라서 가치의 실체는 상품생산에 투하된 노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제봉사가 옷 한 벌을 만드는데 2시간이 걸렸다면 노동과정을 통해서 사용가치로서의 옷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옷 속에 2시간의 노동이 응고됩니다. 이 응고된 노동이 옷이 가진 가치의 실체이며 이 가치가 화폐로 표현되면 가격이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난시간에는 상품과 화폐에 대해 살펴본 셈인데, 오늘 이 시간에는 자본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요.

자본에 대한 설명은 첫 시간에 주류 경제학의 이윤 논의를 비판하면서 언급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주류경제학은 우리가 공부하는 맑스 경제학과 달리 가치론이 없이 가격론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수요공급 법칙으로는 가격을 설명하는 것이 불완전합니다. 이 법칙은 가격의 변화를 설명할 뿐이기 때문에, 가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가치론이 필요합니다. 이런 곤란함은 이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어느 한 상품의 가격=원가+이윤”에서 가격의 구성부분인 이윤 역시 화폐량으로 나타나는 가치의 일부분인데, 가치론이 없기 때문에 이윤이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윤은 경제활동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요. 여기에서 경제활동이란 합리적인 경제 주체(자본가)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생산활동을 말합니다.

자본가는 노동과 자본을 사용하여 산출물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노동 고용에 임금, 자본 고용(대부)에 이자라는 비용이 수반됩니다. 이윤이 극대화되기 위한 조건으로 주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가격×자본의 한계생산물=이자, 가격×노동의 한계생산물=임금” 이라는 등식을 말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노동과 자본의 한계생산물(marginal product: MP)이란 노동, 자본을 한 단위씩 더 투입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산출물의 양을 말합니다. 즉 이윤을 극대화 한다면 자본을 한 단위 더 투입해서 얻은 추가적인 판매수익은 자본을 대부할 때 들어간 이자와 동일해야 하고, 노동의 경우에도 그것을 한 단위 더 투입해서 얻은 추가적인 판매 수익이 노동을 고용할 때 들어간 임금과 동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식에서 볼 수 있듯이 가격이 일정하게 주어질 때 이자는 자본의 한계생산물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 식은 자본이 생산에 기여하는 부분을 말하고 있는 듯 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하면 생산자의 수익인 이윤이 아니라 그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서 이자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이야기 한 것 뿐 입니다. 즉 상품 가격에 일정한 이윤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닌 것이죠.

위 식에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자본, 노동의 한계생산물에 곱해져 있는 가격에 있습니다. 이 가격은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이 되는데, 첫 시간에도 얘기했듯이 이런 설명은 순환론이라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즉 가격 결정의 문제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이자의 결정을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주류 경제학에서 이윤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주류경제학에서 이윤은 총수입에서 총비용을 공제한 것인데, 이것은 이윤의 정의일 뿐 이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주류 경제학, 즉 경제학의 역사에서 보면 신고전학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위와 같은 자본에 대한 설명은 1960-70년대에 네오 리카디안 혹은 스라피안이라 불리는 학파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네오 리카디안 혹은 스라피안은 맑스주의 경제학과 더불어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비주류 경제학의 한 분파인데, (맑스주의와는 다르지만) 스미스, 리카도로 이어지는 노동가치론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자본 논쟁 혹은 캠브리지 논쟁(미국의 캠브리지에 있는 MIT 대학과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불리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논쟁에서 신고전학파의 미국 캠브리지는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세에 처하게 되는데요, 스라피안들이 속해있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제기한 비판은 이런 것입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생산함수에서 투입요소로 들어가 있는 자본은 기계와 같은 물적 요소를 상정하는 것인데, 이렇게 물리적 요소로서의 자본을 어떻게 계측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합니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신고전학파의 대표격인 폴 사뮤엘슨(노벨상 수상, 경제학 교과서로 유명함. 얼마 전 타개)은 신고전학파의 자본 개념이 문제가 많다고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설명력이 있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이론에 어떠한 수정도 가하지 않습니다. 이 논쟁 이후로는 어떠한 이론적 문제제기에도 무시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맑스의 관점에서 자본, 이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오늘 강의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자본을 물적 자본으로 파악하는 주류경제학과는 달리 맑스에게 자본은 물적 수단이 아니라 가치, 그것도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를 말합니다. 따라서 자본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가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가 그것의 실체가 노동인 가치에 대해 살펴보았던 것이죠. 자본주의에서 가치로서의 자본은 화폐로 나타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본이라고 하면 화폐자본을 생각하지 않나요? 즉 지난시간에 화폐가 가치형태라고 했듯이, 자본도 가치이므로, 이 화폐는 자본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본이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우선 가치 혹은 자본이 취하는 화폐의 유통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화폐의 유통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화폐가 단순한 화폐로서 유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화폐유통이라고 하며, 기호를 사용하여 C-M-C (C: 상품commodity, M: 화폐money)라고 합니다. 가령 사과를 팔아 화폐를 얻고 이 화폐로 옷을 구입하는 경우가 되겠지요. 이때 화폐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 화폐 유통의 목적은 상품(사과)의 판매자 자신이 원하는 사용가치로서 또 다른 상품(옷)의 획득입니다.

그런데 화폐가 유통수단이 아니라 자본으로 유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과정을 기호로 나타내면 M-C-M인데, 예컨대 화폐로 사과를 구매한 뒤에 그것을 다시 팔아 화폐를 획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화폐가 사과 구매자의 수중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인데, 100원짜리 사과를 사서 그것을 100원에 판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행위일 것입니다.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서 유통한다는 것은 마지막에 되돌아오는 화폐가 처음 구매에 들인 화폐액보다 커야 합니다. 그렇다면 M-C-M이란 식은 보다 정확히 나타낸다면 M-C-M'라고 할 수 있어요. 즉 100원이 내 주머니로 다시 돌아올 때는 110원이 되는 것이죠. 이 때 110원이 M'인데, 다시 기호를 사용하면 M'=M+m으로 쓸 수 있습니다. m에 해당하는 것이 10원일 텐데, 이것이 이윤이며 뒤에 설명하게 될 잉여가치입니다. 따라서 자본으로서 화폐유통의 목적은 추가적인 화폐 또는 잉여가치입니다. 즉 이러한 순환의 목적은 가치의 증식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순환은 가치증식을 위한 또 다른 순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본은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가 됩니다.

그렇다면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과정에서 어떻게 100원이 110원이 되는 것일까요? 즉 10원이란 이윤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맑스 이전에도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경제학의 역사에서 보면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윤은 속임수, 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중세시기에 상업 혹은 상인계급이 천대받은 근거이기도 해요. 즉 이윤은 상인들의 거래에서 구매자를 속임으로서 나온다는 것이어서 당시 지배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이윤은 제거되어야 할 사회적 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제빵업자가 빵을 하나 만드는데 100원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이 사람이 사기를 쳐서 110원에 팔아서 10원의 이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뭔가가 필요해서 소비를 할 텐데, 가령 옷을 산다고 합시다. 만약 옷의 가격도 100원인데, 옷 생산자도 제빵업자처럼 사기를 쳐서 팔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빵업자는 자신이 얻은 이윤 10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옷 생산자도 마찬가지로 다른 생산자에게 사기를 당하겠지요. 그래서 이런 일이 사회 전체적으로 일어난다면 이윤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이렇게 서로 사기를 치는 상황은 제로섬(zero-sum) 게임과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이윤이라는 것은 포지티브 섬(positive sum) 게임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죠.

또 다른 설명방식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윤을 설명하는 방식인데, 이윤이 생기는 것은 누군가는 비싸게 팔 수 있거나 혹은 싸게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윤은 부등가 교환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도 제로섬 게임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제빵업자가 원래 100원인 빵을 110원에 팔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이 원래 100원인 사과를 먹고 싶을 경우 사과장수도 110원에 팔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윤은 제로(0)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윤은 등가교환을 전제로 설명되어야 하는데,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해 그 가치대로 판매해야 하는데(등가교환), 그러면서도 과정의 끝에서 자기가 처음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다면, 유통과정 자체만을 가지고 이윤을 설명할 수 없으며 유통 외부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앞에서 본 자본으로서 화폐의 유통과정을 이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최초의 유통과정에서 투입된 화폐보다 마지막에 회수하는 화폐액이 더 커야 합니다. 하지만 등가교환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음 100원으로는 100원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며, 마지막에 110원이 회수된다면 판매하는 상품이 110원이어야 합니다. 맑스에 따르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유통의) 단절과정인 생산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본가가 처음에 생산을 하기 위해서 상품을 구입하는데 생산과정을 통해서 상품의 가치 자체가 100원에서 110원으로 증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산과정 속에 가치증식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산과정에 상품 가치의 실체인 노동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노동이 수행하는 생산과정에서 어떻게 상품의 가치 자체가 증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는 노동(labor)과 노동력(labor power)을 구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노동력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노동력을 가지고 계시죠? 반면 노동은 노동력의 실제적 지출 혹은 지출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노동력은 여러분들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을 실제로 지출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할 때는 여러분들의 노동을 구매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일까요?

맑스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가가 여러분들의 노동력을 일단 구입하면 여러분들에게 몇 시간의 노동을 지출하도록 할지는 여러분들 자신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이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실제로는 노동력에 대한 지불이 됩니다. 따라서 맑스는 여러분들이 판매하는 노동력도 상품이라고 합니다. 임금은 노동력에 대한 지불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결국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들이 일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재생산하거나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먹어야하죠. 그러나 먹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더불어 주거비, 의복비 등에 필요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또 자식을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의 생계비도 필요합니다. 즉 임금에는 이와 같은 사회적 통념들이 반영이 되어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으로 임금이 지불되고 있어요.



그러면 노동자는 왜 자신의 노동력을 팔까요? 여러분은 왜 취직을 하려고 애쓰고 있는거죠? 당연히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인데 왜 누군가의 밑에 고용되어서 살아야 할까요? 바로 여러분들 자신이 자본,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이 모든 구성원들 중 자본가 계급에 의해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여러분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력을 파는 것 밖에는 없어요. 이것을 맑스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어요.

다음으로 노동자가 노동력을 자유롭게 팔 수 있으려면 인격적인 자유를 획득해야 합니다. 과거에 조선사회나 유럽의 봉건사회의 노비나 농노처럼 인격적으로 종속된 상태에서는 노동력의 판매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요약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인격적 예속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은 우리가 오늘 다룰 잉여가치 혹은 이윤의 생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구분은 맑스가 제시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농촌마을에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있는 갑돌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갑돌이 아버지는 10시간 노동을 해서 쌀 20가마를 생산하여 10가마는 자신과 가족들이 먹고 나머지 10가마는 시장에 팔아서 1,000원의 수익을 얻고 있었어요. 그런데 좀 더 크게 농사를 짓고 싶어서 땅을 담보로 농협에 대출을 받았는데 농사를 망쳐서 파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갑돌이 아버지는 자신의 생산수단이었던 땅을 농협에 넘기게 됩니다. 이 때 도시에 살던 부자가 이 땅을 구매하면서 갑돌이 아버지에게 이 땅에서 대신 농사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이제 갑돌이 아버지는 자영농에서 소작농이 되어 버린 것이죠. 즉 앞에서 본 것처럼 갑돌이 아버지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임노동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소작농이 된 갑돌이 아버지는 예전처럼 10시간을 일해서 쌀 20가마를 생산합니다. 땅 주인은 이 중 10가마를 갑돌이 아버지에게 임금으로 주고, 나머지 10가마를 가져갑니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갑돌이 아버지가 자기 땅을 갖고 있던 경우에는 모든 생산물이 자기 소유였기 때문에 이 생산물을 자기 맘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작농(임노동자)이 되어버린 순간 그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갑돌이 아버지가 현재 예전과 동일한 노동으로 동일한 생산물을 만들지만 자유의지대로 이 생산물을 처분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20가마 중 10가마는 임금으로 받고 10가마는 지주에게 바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리고 지주가 받는 10가마가 지주의 이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10시간 들여서 쌀 20가마를 생산하고, 10가마가 시장에서 1,000원에 판매된다고 했으니 이것을 화폐액과 노동시간으로 나타내 보겠습니다.



갑돌이 아버지는 자신이 생산한 쌀 20가마의 가격 2,000원 중 1,000원을 임금으로 받아갈 뿐입니다. 나머지 1,000원은 지주의 이윤이 됩니다. 갑돌이 아버지는 1,000원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합니다. 즉 10시간 노동 중에서 5시간은 갑돌이 아버지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동을 한 시간이고, 나머지 5시간은 지주를 위해 일을 한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10시간 중에서 5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부르며 지주를 위해 일하는 5시간은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잉여노동시간에 생산된 생산물을 잉여생산물이라고 하며 이것에 응고되어 있는 것이 잉여가치입니다. 그리고 잉여가치가 화폐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이윤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갑돌이 아버지가 자영농인 경우와 임금노동자가 되는 경우에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가 나타납니다. 자영농이었을 경우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생산물이 자기 것이 되지만, 임노동자가 되는 경우에는 자기를 위해서 노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노동을 해줘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지주가 자신의 이윤인 10가마에 만족하지 못할 경우 그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 갑돌이 아버지에게 좀 더 많은 노동시간 동안 농사를 짓도록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노동시간을 10시간에서 15시간으로 연장하도록 요구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노동력의 지출에 대한 결정권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에게(여기에서는 지주) 있습니다. 그렇다면 쌀 생산량이 50% 증가하여 30가마가 된다면 이윤은 다음과 같이 됩니다.



생산량이 30가마(3,000원)로 늘었지만 갑돌이 아버지의 임금은 동일하고 지주에게는 2,000원의 이윤이 생깁니다. 즉 갑돌이 아버지의 필요노동시간은 똑같이 5시간입니다. 그러나 지주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잉여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늘어나게 되어서 이윤이 증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전체 노동시간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분할되어서 노동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에서 잉여생산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일단 여기에서는 편의를 위해 가치=가격이라고 해보죠.



자본가가 화폐를 투입해서 노동력(LP)과 생산수단(MP)을 구매합니다. 그리고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함으로써 상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노동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노동과정은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고 증식시키는 가치 형성 및 가치증식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산과정에서 투입된 것 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상품이 나오고 그것이 판매되어 화폐(M')로 되는데, 바로 여기에 잉여가치=이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처음에 자본가는 예컨대 27원의 자본을 투입했습니다. 27원으로 생산수단을 24원만큼 구입하고 3원으로 노동력을 고용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이 만들어지면서, 상품의 가치가 형성되고 증식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은 서로 다른 점이 있어요.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 가령 제빵 기계나 원료(밀가루) 등은 빵이라는 새로운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으로 전환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 24원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빵으로 이전됩니다. 반면에 노동력의 경우는 3원을 주고 구입했지만, 생산과정에서 그보다 큰 6원만큼의 노동을 지출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즉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는 노동력 지출과정을 통해 생산수단의 가치 24원을 빵에 이전하면서 여기에 자신의 임금(3원)과 이윤(3원)에 해당하는 가치를 추가하게 됩니다. 이처럼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잉여노동을 수행함으로써 상품에 노동력 가치 이상의 가치를 추가하는 과정을 가치증식과정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빵은 30원이 되는데, 그 가치(가격)대로 팔려서 자본가는 30원의 화폐를 획득하게 됩니다. 즉 자본가는 3원의 이윤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위 그림의 가격을 노동시간으로, 즉 가치 단위로 환산해서 나타내 봅시다. 가격 개념을 가치로 환산할 때 주로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 개념은 일정한 가치량은 결국 일정한 화폐량을 통해서 표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화폐는 가치의 표현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정한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 5시간의 노동이 투입되었는데 5시간의 가치가 예컨대 100원의 화폐량으로 표현된다면,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은 20원/1시간(=100원/5시간)이 됩니다. 즉 1시간의 노동은 20원의 화폐로 표현된다는 것이죠. 가령 위의 그림의 경우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이 3원/1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산과정에 투입한 27원은 가치로 환산하면 9시간이 됩니다. 이 중에서 생산수단은 8시간, 노동력은 1시간의 가치량에 해당됩니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이 갖는 8시간의 가치는 생산물에 그대로 이전되고, 1시간의 가치를 임금으로 지불받는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2시간의 노동을 통해 2시간 만큼의 가치를 생산합니다. 이 2시간의 노동은 노동자의 총 노동시간인데, 결국 노동자는 이 2시간의 노동가운데 1시간의 노동에 해당되는 가치를 자신의 임금으로 가져갑니다. 즉 총노동시간 2시간 가운데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지출한 필요노동시간은 1시간입니다. 나머지 한 시간은 자본가를 위한 잉여노동시간이 됩니다.

이윤이 창조되는 전체 과정은 등가교환과정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본가는 애초에 27원을 투입해서 27원의 상품을 구입하고 생산과정을 거쳐서 가치대로 생산물을 판매하여 3원의 이윤을 얻은 것입니다. 이윤 즉 잉여가치는 유통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 이상으로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비판한 것처럼, 유통과정을 통해서는 이윤의 원천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 즉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추가로 지출한 노동시간이며 지불되지 않은 노동입니다. 즉 잉여노동은 부불노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맑스는 이윤이 창출되는 과정을 착취의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착취라는 말을 들으면 살벌하게 느끼시는 것 같은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불노동을 표현하기 위한 경제학적 개념입니다.

이와 같이 생산과정에서 이윤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상인 등 유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익을 얻고 있는데, 이윤이 꼭 생산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상인들도 이윤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관심은 이윤의 원천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통에서는 이윤의 원천이 설명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상인들의 이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맑스에 따르면 상인들의 이윤은 생산에서 창조된 이윤 혹은 잉여가치에서 분배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유통마진이라고 하는 상인들의 이윤은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에서 27원을 투입해서 30원에 팔아 3원의 잉여가치를 낳고 있는데, 유통과정에 도매상인이 있다면 생산자가 그에게 29원에 팔면 상인은 30원에 팔아서 1원의 유통마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생산자가 처음 생산과정에 투입한 27원을 금융업자로부터 대부했다면 원금과 더불어 이자를 지불해야 합니다. 가령 이자가 1원이라면 생산자는 금융업자에게 28원을 상환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생산자는 1원의 이윤을 얻고, 상인과 금융업자는 상업이윤과 이자의 형태로 1원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수익은 유통과정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서 창조된 잉여가치가 분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윤의 원천은 생산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생산과정에 투하된 자본이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는데 사용된다고 했습니다. 이 중 생산수단의 구매를 위해 지출된 자본을 불변자본(constant capital: C)이라고 부르며 노동력의 구매를 위해 지출된 자본을 가변자본(variable capital: V)이라고 합니다. 불변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변하지 않고 생산물에 그대로 이전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노동자는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을 지출하는데, 이 과정에서 임금으로 지불되는 노동력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창조합니다. 즉 생산과정에서 지불된 가치이상의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가변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surplus value: S)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자를 사용하면 C+V+S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식에서 V+S를 가치생산물이라고 합니다. 주류 경제학의 개념으로는 부가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즉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부가된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 가치생산물은 순생산물을 대표하게 됩니다. 상품의 가치가 총생산물에 대응된다고 한다면, 가치생산물은 총생산물에서 투입요소 혹은 생산수단을 공제한 순생산물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V+S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총노동시간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총노동시간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분할됩니다. 여기에서 이 분할 비율, 즉 s/v를 잉여가치율 혹은 착취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예에서 노동자는 2시간 노동하는데, 1시간은 필요노동시간이며 나머지 1시간은 잉여노동시간입니다. 따라서 잉여가치율은 100%가 됩니다.

이 잉여가치율 혹은 착취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화하게 되는데, 잉여가치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