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화하고 있는가

[새책]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개벽>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임경석 차혜영 등, 모시는 사람들, 2007.8.20, 522쪽)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리며’ ‘볼세비키의 사상’ ‘노동운동과 공동단결의 방법’ ‘세계 사회주의의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이 하나의 잡지에 실렸다. 잡지의 이름은 <개벽>이다. 1920년 6월부터 1926년 8월까지 6년간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사랑받았던 월간지 <개벽>.

<개벽>은 일제때 6년간 결호 없이 평균 8천부 판매와 최대 1만부의 발행을 자랑하던 대중적 종합지였다. 천도교라는 종교세력의 든든한 재정지원을 받았지만 현실을 치열하게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담았다. 독립과 혁명의 미래를 전망하는 사상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매호마다 식민통치의 냉혹함과 근대화의 세례 속에 역동적 삶을 꾸려내던 식민지 조선 지식인을 만날 수 있다.

볼세비키 사상을 논했던 잡지 <개벽>의 여유

천도교청년회는 개벽사 경비로 예산의 60%를 지출했다. 검열로 출발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개벽> 허가신청은 1920년 1월18일 제출했지만 창간호는 5개월 뒤인 1920년 6월25일에야 나왔다. 창간호부터 검열을 맞았다. 호랑이라 그려진 표지와 몇몇 기사 때문에 곧바로 압수됐다. 1922년 11월호부터 시사문제를 다루어도 좋다는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 <개벽>은 민중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을 것을 다짐한다. 사회운동 농촌계몽운동을 정면으로 다루고 신사회 건설의 모든 책임을 부당하겠다는 뜻이었다. <개벽>은 1923년부터 민중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내며 사회주의 계열의 논설과 기사를 대거 싣기 시작했다.

<개벽>의 압수 삭제된 사회주의 관련 주요기사는 다음과 같다. 16호 볼세비키의 사상, 25호 조선노동자 문제(이영희), 25호 적색 러시아(노서아)의 기견진문(연경과객), 39호 적색공포와 백색공포(성태), 44호 무산계급의 해방(BSL), 44호 왼편을 밟고서(이성태), 46호 세계 사회주의의 현세, 적색조합과 황색조합, 러시아의 공산당,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함, 노동운동과 공동단결 방법, 53호 계급자유교육의 신조료, 54호 조선청년운동의 1년(정백), 55호 붕괴의 원리 건설의 원리(팔봉), 노농러시아의 교육제도(김경재), 71호 근세 식민정책의 종막(박형병) 등이다.

  <개벽> 1924년 4월호 81-87쪽까지 실린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리며’에 나온 두 사람의 삽화

개벽 편집진은 좌파 사회주의 계열의 노선과 실천방식을 비판하면서도 사회주의를 시대의 추이이자 대안운동으로 인정하거나 동조하는 이행기적 태도를 유지했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다양한 현실문제에 적극 발언했다. 박달성이 쓴 <시급히 해결할 조선의 2대 문제>는 교육(학교증설)과 농촌문제(소작료 3할로 인하)였다. 새롭게 부상하던 노동문제에는 원론적 주장이 먼저 등장했다. 신문화 건설을 위해 제시한 대안들은 사상투쟁과 좌우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 구체화되지 못했다. <개벽>도 새로운 입지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1922년 5월호에는 민족개량적 성향의 이광수의 <민족개로론>을 실었다. 이광수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다음호엔 <유식 유산자 측으로부터 반성하라>(김기전), <이해합시다, 용서합시다 그리하여 같이 삽시다>(임규)라는 논설을 실어 다소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1922년 하반기에 가면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성장과 우세를 의식한 논설 <직접운동의 위력>(26호, 1922.8)이 <개벽>에 등장한다. 하지만 <개벽>은 아직 우파 민족주의 노선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민족적 중심세력의 작성>(34호, 1923.4)를 제안한다. 그것은 우파 민족주의의 결집을 촉구하는 호소문이기도 했다.

친일파, 지식인의 이중성에 신랄한 비평

<개벽>은 좌우 모두를 비판하면서 좌파의 분열주의를 우려하는 <현하 사회운동에 대한 일국의 고언>(45, 1924.3)을 싣는 동시에 좌파의 득세를 인정하면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현세>(46호, 김기전, 1924.4) 등을 통해 계급론과 사회주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한다. 이렇게 지면을 점차 좌파에게 넘겨주고 있다.

<개벽>의 가십과 비평 도마 위에 주로 오른 주요 대상은 친일 권세가들이었다. 자작 민영휘의 연수입이 백미 245만석, 윤치호가 누구 말도 쳐다보지 않지만 모친과 형 윤치소의 말에는 거의 순종한다는 소문(수문수견, 1922년 11월호, 69쪽)도 이 난에서 전해졌다. 정정환이 쓴 <은파리>(7-18호, 1921.1-1921.12)와 <서울쥐로부터 시골쥐에게> 시리즈는 유명했다. 은파리는 1923년 7월호 77쪽 <일별>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감 집을 찾아가 대감과 대화를 나눈다. “자본계급만 옹호하는 정치 그런 세상에서 무슨 그리 법률의 절대엄정을 말하며 그 권위의 신성공평을 말할 수 있습니까”

은파리는 <개벽>9호(1921.3)에서 서울의 여학교를 나와 해외까지 다녀온 미모의 신여성으로 청년회나 예배당에서 연설 다니는 김 모양을 찾아간다. 김 양은 뭇 남성을 사귀지만 겉으로는 독신주의를 외친다. 신여성의 이중성을 신랄히 고발한다. 은파리는 <개벽>17호(1921.11)에서 청년웅변가이지 청년 사상가를 자처하며 독실한 종교가로 이름을 날니는 신청년 지식인 고 선생의 뒤를 밟는다. “웃통을 벗고 기생을 끼고 이리뛰고 저리뛰고 토하고 또 먹고 먹고 또 뛰고..... 고 선생이 술자리에서 만든 비밀결사는 재산주식회사(財散酒食會社) !” 이는 기독교를 해서든 현대 서구문명을 접했다는 과도한 자부심으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감히 남을 계몽하고자 했던 신지식인의 위선에 대한 경고다.

<개벽>을 통해 민족담론이 부상한 발단은 1922년 5월호에 실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일단락되면서 <개벽>의 민족담론은 경제 쪽으로 관심을 쏟는다. 경제적 민족담론 역시 물산장려운동의 실패로 설득력을 잃는다.

러시아 혁명은 경제적 인권해방을 도모

<개벽>에서 카프 문학을 주도했던 박영희를 제외하고는 좌파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개벽>은 1922년 5월호 3쪽 <민중이여, 자중하라>에서 우파 입장에서 서서 “최근 첫 3월 버섯(먹지도 못할 것)과 같이 생겨나는 가주의자배(사회주의자)의 횡의와 책론은 점점 민중의 향방을 현혹하고 있으니 민중들은 자중하라”고 제안했다. 좌경적 논설과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 건 1923년부터다. 김기전은 “프랑스 혁명이 정치적 인권해방을 추구했다면 러시아 혁명은 경제적 인권해방을 도모했다”고 평가했다. 천도교 지도자 권동인은 “사회주의가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성태로 추정되는 필자 ‘L생’은 <썼던 탈을 벗어나는 물산장려>라는 글(1923년10월호, 42-59쪽)에서 “민족적이니 뭐니 해도 물건을 좋고 값이 싸야 하므로 물산장려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우며 설사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조선인 자본가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대회사창립기성운동에 불과하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다음호인 11월호에는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한 민족주의자 설태희가 <물산장려를 비난한 L군에게>라는 글로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이념적 가치는 인정하나, 조선인은 유무산을 물론하고 일체의 피착취계급으로서, 무산자가 피치 못해 유산자의 부력 증진을 도울 바에야 자기 민족의 부력을 돕는 것이 낫다”는 반론을 개진했다. 물산장려 논쟁은 계속됐다. 이성태는 거듭 시기상조론을 공박하고 계급투쟁론을 개진했다.

<개벽>에 실린 사회주의 관련 논설들은 점차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세력을 둘러싸고 지식인의 태생적 한계를 비판하면서 노동계급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집약됐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을 역임하고 간도에서 활약 중이던 박진순은 지식계급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급진 인텔리운동인 청년운동이 활발한 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이 박약한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진순, 소위 지식계급의 신운동, 1925년12월호, 45-51쪽) <개벽>은 1926년 8월호(72호)에 실린 박진순의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제농촌학원>이 빌미가 돼 폐간됐다.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 때부터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주도성 강조

<개벽>은 서구 지향적 동경이나 조선민족의 역사에 대한 선양이 섞이긴 했지만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빌미를 감지하긴 어렵다. 오히려 점점 더 투쟁적인 사회주의 계열에 더 많은 지면을 내줬다. 이광수의 <민족적 경론>으로 인해 민족·민중운동 진영의 불매운동에 직면해야 했던 동아일보의 처신과는 거리가 멀다. <개벽>은 1926년 강제폐간으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모순투성이의 현실과 끊임없는 긴장을 유지했다.

70호인 1926년 6월호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진행 중인 격변과 혁명을 다룬다. 70호에는 파란(네덜란드)에 좌(파)당 혁명, 독일에 정변 빈발, 영(국)제국-총파업 등 국제정세를 소개하면서 분석 비평을 내놓는다. <개벽>은 조선 혁명의 기운, 노동운동의 성장에 대한 많은 기사와 논설들로 국내문제만 따로 독립된 시각이 아니라 국제정세와 연계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이 글에서 <개벽>이 가진 보수적 성향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의 우리가 1920년대 초중반 <개벽>만큼이나 입체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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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 , 볼세비키 , 천도교청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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