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조선일보가 정론지였다는 어리석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낡은책 22]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 조선투위 18년 자료집, 1975~1993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위원회, 두레출판사, 1993.6.10, 548쪽)

노무현이 2003년 1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최초로 방문한 일간신문은 한겨레였다. 노무현은 “김선주 선생 글이라고 하면, 한 번도 감동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며 “김선주 논설위원 얼굴 한번 봅시다”고 했다. 그런 김선주는 1969년 조선일보에 기자로 들어가 75년 3월 쫓겨난 이력을 지녔다.

사람들은 한국 언론민주화 투쟁하면 으레 ‘동아투위’를 떠올리지만 그 옆에는 ‘조선투위’도 있었다. 지금은 추억으로 남은 ‘조선투위’의 속살을 드러낸 이 책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은 조선투위 18년사를 고스란히 담은 자료집이다. 1975년부터 1993년까지 조선투위의 흔적을 실었다. 책을 낸 출판사 사장 역시 조선투위 기자 출신이다. 30, 40년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한계를 지녔는지 이 책에 속속들이 드러난다.

이 책이 나온 93년을 기준으로 32명의 조선투위 구성원들의 행적은 대충 아래와 같다. 기업으로 간 사람이 12명(37.5%)으로 가장 많았다. 12명 가운데 절반인 6명은 재벌기업에 들어갔다. 다음으론 다른 언론사로 옮긴 사람이 9명이었다. 한겨레가 3명, 한경 2명, 문화일보 2명으로 모두들 그저 그런 보수언론에 몸담고 있었다. 매우 특별한 직업으로 옮긴이는 집권 민자당 국회의원과 유흥업중앙회 사무총장이 있었다. 평론가 등 비교적 자유직을 택한 이는 5명이었다. 학계로는 단 한 명만 옮겼다.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32인

조선투위는 1993년 5월 이 책을 내면서 “3.6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누구도 지울 수 없는 한국 언론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아래의 낡은 흑백 사진은 75년 3월 11일 6일간의 농성투쟁을 끝낸 조선일보 기자 30여명이 회사에서 쫓겨나자 전체 기자들이 회사 앞에 모여 조선일보 규탄집회를 여는 장면이다. 이들은 한자로 ‘정론직필’이란 머리띠를 매고 촌스럽게 들고 선 플래카드엔 삐뚤삐뚤하게 “신문은 경영주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박았다. 옆에는 조선일보 회사 깃발에 최장학 등 각자의 이름을 앞뒤로 각인했다. 머리띠를 매지 않고 옆줄에 비스듬히 선 경계인들도 보인다.

얼마 뒤 투쟁에 동참했던 70여명의 기자들은 30여명의 쫓겨난 동료들을 뒤로 하고 굴욕적인 각서를 쓰고 회사로 복귀했다.
(이것이 먹물들의 투쟁이다.)



제1장. 유신독재의 언론탄압과 조선투위의 탄생

언론이 기업형 언론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언론사가 기업으로서의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 획기적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언론이 독립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사의 코리아나 호텔 건립에서 보듯이 언론사에 대한 상업차관의 제공 역시 권력이 언론기관을 회유하는 데 이용되었다. 1960년대 10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10%인데 비해 언론의 양적 성장률은 20%였다. 발행부수는 61년 97만부에서 69년 280만부로 늘었다.

3.6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역사적 배경

언론이 사실보도를 외면하고 기업으로서의 이윤추구에 급급할 뿐만 아니라 언론인 자신들이 부패의 대열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되자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날카로워져 갔다.
(그런데 32인의 조선투위 사람들은 이후 기업으로, 특히 재벌기업으로 옮긴이가 가장 많았다. 사실 같은 언론사로 옮겼다지만 한국경제신문과 문화일보로 옮긴 4명 역시 재벌기업으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 아이러니하다.)


70년대 언론에 대해 커다란 질문을 던진 사건이 전태일 분신 자결사건이었다. 71년 3월 26일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 50여명이 세종로의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 언론의 무기력과 타락을 규탄하고 언론화형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이날 아래과 같은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과 ‘언론화형선언문’을 발표했다.


(2년 전 촛불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코리아나호텔 앞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보수신문에 대한 분노는 이때도 있었다. 어쩌면 71년이 더 격렬했다. 광화문 대로에서 화형식을 열었으니. 그런데도 두 신문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른척하고 2008년의 난동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침소봉대했다. 언론을 향한 민중의 분노는 일제 때부터 수시로 표출돼 왔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

“사이비 언론인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 선배에게 속죄하라. 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뒤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제를 일삼는 자들이여 나오라 ! (중략) 사자의 위용은 어디가고 도적 앞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후략)”

1971년 4월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시발로 조선일보 기자들은 71년 4월17일 언론자유수호선언문을 발표했다.
(늘 조선일보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뒤를 따라가는 2등이었다.)


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74년 1월 긴급조치 1, 2호에 이어 4월 초 다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다. 민청학련으로 학생과 지식인들이 투옥됐다. 74년 3월 6일 동아일보는 언론사 최초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74년 12월10일엔 한국일보가 노조를 결성했다.

기업언론, 상업주의 언론을 추구하는 조선일보사 사주의 반언론적 작태는 마침내 74년 12월 18일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의 해고로 표면화됐다. 이후 75년 3월 언론자유를 부르짖는 조선일보 기자 30여명에 대한 무참한 언론학살을 자행했다.


(최초는 무슨 최초란 말인가. 1946년 전평의 9월 총파업 때도 버젓이 언론사 노동조합이 건재해 파업 대오를 함께 형성했는데. 아무튼 먹물들의 집단적 기억상실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투쟁의 도화선이 된 백기범 기자는 해방 전 평북 박천 출신으로 조선일보에 들어와 리영희 외신부장 밑에서 지냈다.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74년 12월 이후 83년엔 현대건설 이사를 지내다가 89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94년 문화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97년엔 정치에도 발을 들여놔 민주당 총괄 특보를 맡았다. 장남 백강녕은 지금 조선일보 산업부에서 열심히 조선일보틱한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언론자유선언문’ (조선일보 기자들 71년 4월17일)

“취재기자가 학생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을 만큼 언론이 극단적 불신의 대상이 되어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물리적 폭력보다는 조롱과 멸시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볼 뿐이다.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이들의 한심한 취재 행태는 더 가관이다.)

조선일보 동료기자들에게 드리는 편지 (신홍범 백기범의 해임경위서, 74년 12월18일)

저희들은 조선일보가 지금처럼 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에 오늘 해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74년 12월 17일자 조선일보 4면 ‘허점을 보이지 말자’란 (유신체제를 일방 옹호하는 유정회 국회의원 전재구가 쓴) 외부기고에 대해 편집국장에게 우리의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전재구는 김종필과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로 정보 계통의 장교로 복무했다. 5·16 쿠데타 직후 김종필이 주도한 중앙정보부 창설 작업에 관여하고 정치 사건을 많이 수사했다. 유신 때인 1973~1979년까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징계를 당해야 할 사람들은 한국 언론사에, 조선일보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고도 조금의 뉘우침도 없이 신문을 계속 망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조선일보사에서 10년 가까이 몸담아 일하면서, 젊음을 바쳐 일하면서 언론이 어떻게 위축당해 왔으며, 조선일보가 어떻게 변질되어 왔으며, 진실이 어떻게 왜곡돼 왔으며, 올바른 주장을 하던 우리의 선배들이 어떻게 희생되어 왔는가를 보아왔습니다. (중략) 우리는 다시 만날 것입니다. 1974년 12월 18일 백기범, 신홍범

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 소식 (창간호 75년 2월1일)

우리들의 ‘명예로운 민족지, 조선일보’를 되 만들어 내겠다는 지고의 목적을 위한 기자들의 가장 높은 이성의 정수(精髓)를 모은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 ‘소식’의 약속입니다. - 분회장 정태기(경제부), 부분회장 김유원(외신부), 보도자유부장 성한표(정치부, 현재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등

회사의 약속 배신과 제작거부 농성

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는 방우영 사장의 75년 2월 중순 ‘정론지 복귀’ 발언을 믿고 활동을 자진 중단했다. 김윤환 편집부국장(민자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낸 빈배 허주虛舟 김윤환,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 대리까지 지내다가 유신 말기인 1979년 유정회 국회의원을 정계에 들어왔다)을 통해 창간기념일인 75년 3월5일까지 신홍범 백기범 두 기자의 복직을 약속한 조선일보가 약속을 어기자 기자협회 조선일보 분회는 즉각 활동을 재개했다. 이렇게 나온 게 75년 3월6일 낮에 조선일보 편집국에 뿌려진 조일분회 소식 제3호다.

과연 우리가 정론지를 만들고 있는가? 75년 2월 15일부터 사흘에 걸쳐 조선일보는 민청학련 관련 구속학생들의 고문 폭로에 관한 사실보도를 완벽하게 외면했다. 74년 연말 유신의 필요성을 역설한 여당인사의 글이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것을 본 우리의 동료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가 조선일보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해 편집국장에게 고언을 했다가 그 때문에 해직 당했을 때 편집국장단은 창간기념일까지 두 기자를 복직시키겠다고 철석같은 공약을 했다.

1975년 2월 18일자 7면 <옥중에서 고문 받은 자 없다>는 김지하 시인의 회견기사는 외신부에서 넘기지 않았으나 5판이 나온 뒤 제출할 것을 지시받아 실렸다. 이는 다음날 <나는 고문 받은 바가 없다>는 정정기사를 내게한 문제의 기사다. (김지하는 이때부터 조선일보의 현란한 유혹에 자주 빠졌다.)

1975년 2월 25일 안양에서 송고된 특종 <수도권 그린벨트안 절대농지 13만평, 기아산업에 공장부지로 허가>기사는 국장선에서 보류해 26일자 동아 7면 톱, 중앙 7면 2단, 27일자 한국 7면이 나온 뒤인 28일자에야 2면에 실렸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이렇게 자사 신문보도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75년 3월6일부터 제작을 거부하면서 편집국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이틀째인 3월 7일 조선일보는 조일분회의 집행부 정태기(분회장) 김유원, 성한표, 심채진, 최병선 등 5명의 기자를 파면했다. 기자들은 즉시 준비해둔 5명의 2선 지도부를 구성해 농성을 이어갔다. 2차 지도부는 김명규 기자가 분회장을 맡았다.

당시 조일분회가 발표한 농성일지엔 이런 것도 있다. 3월 6일 낮 2시30분, ‘언론자유쟁취’ 표어를 편집국장이 뜯어냄. 3월 7일 낮 1시10분 농성중인 기자들의 점심도시락이 총무국장의 지시로 현관에서 수위에 의해 방해 받음.

방우영 사장이 붙인 경고문 (75년 3월 7일)

만약 끝까지 혁명적인 수법으로 55주년의 기나긴 전통을 미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먹칠과 분열을 일삼는 사원이 만의 하나라도 잔재한다면 조선일보의 앞날을 위하여 분명히 그리고 가차없이 처단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 3월 7일 (방우영) 사장

(레드 컴플렉스에 걸린 방우영 사장의 불안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시설 파괴와 같은 폭력이 전혀 없는 매우 조선일보틱한 유순한 농성을 ‘혁명적 수법’이라고 재단하는 것도 그렇고, ‘가차없이 처단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꼴은 우습기까지 하다.)

제2선언문 (75년 3월 8일 조선일보 기자일동)

농성하던 조선일보 기자들은 방 사장의 지도부 5명 파면과 경고문을 보고 이날로 정론지 조선일보의 지령이 정지되었음을 제2선언문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반일, 반공, 반독재로 55년 동안 점철된 정론지 조선일보의 지령이 1975년 3월 8일자로 정지되었음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농성은 철저하게 ‘반공’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동시에 이들은 그때까지 조선일보가 정론지였다는 매우 어리석은 착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재야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지지성명 (75년 3월 7일)

조선일보 기자들의 농성에 회사가 파면으로 응하자 함석헌, 윤보선, 장준하 등 재야 핵심 원로급으로 구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3월 7일자로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조선일보) 경영주가 앞으로도 더 파면조치를 확대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은 자유 언론에 대한 정면도전으로서 이는 한 언론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알권리를 부인하는 처사로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함석헌 윤보선 장준하 지금 생각하면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당시엔 한통속의 재야였다. 양심적 종교인 함석헌과 친일파로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 사상계 발행인으로 제도권 보수야당에 발을 들여놓고 국회의원을 지냈던 장준하.)

농성 3일째인 75년 3월 8일엔 조선일보 부산지사 취재기자 6명도 제작거부에 동참했다. 한국기독교여성연합회 인권위원회는 조선일보 안보기 운동을 공언하는 격려성명을 동아일보의 광고란에 실었다. 같은 날 낮 2시35분 조선일보는 기자들이 농성하는 편집국 통신망을 끊었다. 3월 9일엔 경동, 연동, 새문안, 제일, 창연, 양광, 수도교회 대학생회가 조선일보 정문 앞에서 기도회를 갖고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촬영하던 농성대오의 사진부 유남희 기자가 경비를 맡던 조선일보 직원 안정록에게 카메라를 뺏겼다. 한편 조일분회는 3월 10일 5번째 성명을 냈지만 발표 직후 조선일보는 2선 지도부 5명도 모두 파면했다. 분회는 주돈식 기자를 중심으로 3차 지도부를 구성했다.

농성 마지막날 3월11일자 호소문

“농성 6일째 11일 전화선이 끊기고 정문에는 바리케이드가 싸여지고 수십명으로 늘어난 낯선 경비원들에 의해 폐쇄된 편집국에서 우리들은 싸우고 있습니다. (중략) 먼저 해임된 기자의 부인이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상상도 못했던 눈물겨운 사태가 신문사 바깥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중략) 회사는 이미 기자이기를 포기한 편집국 부차장들만에 의해 제작되는 조선일보의 지면을 총동원, 우리들의 행동을 ‘불순외부세력’ 운운으로 중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 있는 중립지 조선일보를 사익을 위한 광고조각으로 전락시킨 이 신문을 보면서 우리는 한사람 빠짐없이 울었습니다. - 1975년 3월 11일 조선일보 기자 일동”

3월 11일 낮 12시 편집국 부차장 중 최초로 정치부 이종구 차장이 농성에 합류했다. 회사는 이종구 차장과 박범진 최장학 유장홍 등 4명을 추가로 파면시켰다. 조선일보는 3선 지도부 5명까지 모두 37명을 무더기 무기정직 시켰다. 분회는 4선 지도부를 구성했다. 농성 대오는 3월 11일 저녁 7시30분 편집국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조선일보는 3월 14일자 1면에 <우리의 견해 2>라는 제족으로 사회단체의 지원 성명에 대해 폭언과 함께 협박을 했다. 조선일보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몰이성적인 비난과 함께 불매운동과 취재협조 거부운동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3월21일 명동대성당에서 자유언론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여기서 사제단은 “무더기로 해임, 파면, 무기정직된 1백에 가까운 기자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선언했다. (조선일보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쫓겨난 기자들은 3월21일 조선투위를 발족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3월 25일자 결의문에서 “해임된 기자들이 복직될 때까지 동아와 조선의 모든 간행물에 대해 집필을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조선투위의 진상보고서 1 : 파면하면 조용히 걸어나갔다.

쫓겨난 조선일보 기자들은 회사의 왜곡에 맞서 진실을 알리는 진상보고서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외곽 투쟁을 시작했다.

언론인들에 대한 집단매수의 대표적 한 형태는 언론인들의 집단 외유였습니다. 언론인들이 취재 또는 관찰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해외여행을 했지만 회사가 지불하는 여비로 해외여행을 하기는 대통령과 총리를 수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교입시문제 누설사건 관련자 중 재벌의 딸 등 특수층은 국민총화를 해친다는 이유로 당구그이 발표 명단에서 빠졌고 기생관광이 외국 언론에서 대서특필돼도 외화획득이란 미명하에 침묵했습니다.

백기범 신홍범 두 기자는 지명도가 낮은 어느 여당 국회의원 이름의 글이 조선일보에 실리자 유신을 일방 옹호하는 그 내용으로 보나 논설위원실의 가필을 거쳐 실린 경위로보나 조선일보가 지녀야 할 공정성과 균형에 어긋난다는 점을 당시 김용원 편집국장에게 지적했습니다. 김용원 국장 시절엔 이락선 당시 상공부장관 등 신흥재벌과 가깝다는 이유로 이 장관과 재벌을 비판하는 기사는 조선일보에 한줄도 쓸 수 없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두 기자가 해고된 바로 다음날 74년 12월 19일 저녁 즉각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습니다. 12월 20일 새벽 3시쯤 당시 김윤환 편집부국장 등 부국장당 3명과 기자대표 4명이 55주년 창간기념일인 75년 3월 5일까지 복직시키기로 합의해 농성을 풀었습니다. 그러나 약속 사흘만인 12월 23일 목사균 총무국장은 “복직약속은 김윤환 부국장의 개인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밝혔습니다. 우리가 약속한 3월 5일이 지난 6일부터 농성투쟁을 시작하자 뻔뻔스럽게도 조선일보 1면에 광고를 내 3개월 내 복직시켜 주기로 약속했으나 약속 시한 전에 기자들이 농성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방우영 사장은 75년 2월 13일 간부회의에서 앞으로도 조선일보에서는 쓰지 못할 금기는 하나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론지로 만들겠다는 뜻을 선언하고 이를 기자들에게도 주지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방 사장의 이런 선언은 곧 휴지화하고 기자들은 농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75년 3월 6일부터 11일까지 6일 동안 신문제작을 거부하고 농성투쟁을 벌이는 동안 신문제작을 실력으로 방해하거나 사회기물을 파괴하거나 촉력충돌을 유발하는 일은 일체 회피했습니다. 농성투쟁 둘째날인 3월7일 분회장 등 농성간부 5명이 파면된 뒤 퇴사를 요구받았을 때 서슴지 않고 회사를 떠났으며 다시 3일째 다른 간부 5명이 파면됐을 때도 조용히 회사를 떠났습니다. 11일 다시 4명이 추가 파면되고 37명이 무기정직되었을 때도 전원 회사의 명령에 순응해 스스로 걸어 나왔습니다. (자랑이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고통을 참기 어려웠던 일부 동료들을 눈물을 머금고 정태기 분회장의 결단으로 회사에 들여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회사 밖에는 끝까지 싸우기로 결단한 파면자 34명과 무기정직자 1명 등 35명이 남아 있습니다. - 1975년 4월1일 조선투위 정태기

당시 파면자는 정치부 이종구, 박범진, 성한표, 경제부 최준명, 김영용, 사회부 김명규, 이주혁, 정준, 박세원, 유장홍, 문창석, 신현국, 문화부 신홍범, 이상현, 외신부 백기범, 김유원, 안성암, 최병선, 지방부 정재우, 황헌식, 마상원, 이창화, 편집부 심채진, 박한식, 교열부 주영우, 최병진, 사진부 임희순, 조사부 정태기, 오성호, 주간조선 김태호, 최장학, 김종원, 김재문, 소년조선 서창모 등 34명이고 무기정직자는 문화부의 김선주 기자가 있었다.

이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유건호 조선일보 편집국장의 사퇴와 35명의 복귀를 요구하며 싸웠다. 조선투위는 75년 4월 4일 이웃의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 기자의 불법 연행 직후 성명을 냈다.

조선투위의 진상보고서 2 : 유건호 편집국장에 대하여

유건호 편집국장은 조선일보 전무로 편집인이자 한국편집인협회(이하 편협) 회장이다. 74년 일선기자들이 10.24 언론자유선언 때 유 국장은 경남 충무관광호텔에서 편협 세미나 중이었다. 편협은 74년이 다 지나도록 침묵만 지켰다. 보다 못한 언론원로 홍종인 선생이 기자협회보에 기고해 “왜 편협은 말이 없느냐”고 역정을 냈다. 그러자 편협은 ‘고통스런 침묵’을 깨고 75년 1월15일에야 기자들의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냈다.

유 국장은 대외적으로는 이런 성명을 내고도 조선일보 안에서는 자유언론실천운동의 구심체인 기협 조일분회 활동을 거침없이 탄압했다. 이번 사태를 논의해 보기 위해 편협 운영위원회 소집을 요구한 어느 운영위원이 회장인 유 국장에게 “간섭 말라”는 호통을 당했다는 소문이다. 75년 3월18일, 22일 기협이 편협에 조선 동아 사태의 공동조사를 제의했을 때도 침묵했다. - 조선투위 1975년 4월 4일 정태기

깡패 동원한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 마구 패

75년 4월 10일 밤 조선일보는 폭력배를 동원해 쫓겨난 조선투위 기자들을 마구 폭행했다. 이때 조선일보가 고용한 깡패에게 집중 두들겨 맞은 이는 조선일보 지방부 소속의 서청원 기자다. (서청원은 최근 한나라당 대표와 친박연대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유명한 인물이 됐다. 이런 사람이 당시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주역이었다.) 다음은 당시 조선투위의 성명내용이다.

조선일보사 경영주는 드디어 폭력배를 동원, 심야에 기자들의 숙소에 침입시키는가 하면 흉기로까지 위협하는 사태를 자행했다. 1975년 4월 10일 밤 11시쯤 조선일보 경비 감독부장으로 고용된 박모(일명 아라이) 등 6명이 조선투위 기자들의 숙소인 ‘경성여관’에 들이닥쳐 구두를 신은 채 방까지 들어왔다. 아라이는 숙직중인 기자 4명에게 “나는 해방 후 사람도 많이 죽였고 테러도 많이 해봤다”며 방안에 있던 가위를 집어 벽을 찍는 등 위협하며 10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아라이 등은 앞서 밤 10시30분쯤엔 조선일보 기자들이 자주 가던 회사 앞 주점 ‘블론디’에 몰려가 지방부의 서청원, 마상원, 한복헌 등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술집 안 전화기, 탁자 등 기물을 모조리 부수는 난동을 부렸다. 서청원 기자는 골목길로 끌려나와 50여 명의 행인이 보는 앞에서 10여 차례 땅바닥에 메다 꽂히는 등 이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당시 서청원 기자는 “내가 길바닥에 고꾸라질 때마다 그들은 발길로 내 배를 찼다”고 증언했다.

조선투위의 진상보고서 3 : 적당한 언론민주화도 상술로 이용

조선일보는 71년 5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하자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적어도 2등은 해야 한다’고 은근히 뒤에서 격려했다. 남들이 언론자유를 외칠 때 조선일보가가 침묵하면 소위 ‘사꾸라 신문’이란 오해를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71년 동아의 자유언론선언 때 조선일보 편집 간부들은 은연중 초조한 기색을 보였고 이를 잘 아는 조선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선언을 하는 게 언론인으로서 대의명분에 합달할 뿐 아니라 회사의 이익에도 합치하는 것으로 판단, 솔직히 말해 회사의 암묵적 승인 아래 ‘어용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73년 10월의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궐기대회였다. (어용 짓거리 하면서 이름은 왜 그리도 거칠게 달았는지. ‘궐기대회’가 뭐야)

조선일보 이사 한 명이 문화부 신홍범 기자를 자기 방으로 불러 이를 부추겼다. 그래서 조선일보 기자들은 간신히 두번째로 자유언론수호선언대회를 가질 수 있었다. 2등은 해야 된다고 강조해오던 회사는 75년 1월 들어서는 2등도 못하겠다면서 ‘자주노선’이란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 냈다. - 75년 4월11일 조선투위 정태기

조선투위의 진상보고서 4 : 미행과 감시

유건호 편집국장은 기자들이 자기 집에 전화를 걸어 자기 부인에게 ‘과부될 줄 알라’는 등 협박했다고 했다. 우리 중에는 그런 너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줄줄이 파면당해도 조용히 걸어 나오는 위인들인데 그런 협박을 했을 리 없다.)

조선일보는 정보기관을 방불케 하는 수법으로 총무부와 관리부 직원들에게 기자들을 미행 감시시키고 있다. 기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여관, 기협 사무실 밖에는 조선일보 직원들이 거의 언제나 미행용 승용차를 대기시키고 있다. 매일 기협 사무실에서 총회를 열 땐 건너편 코리아나 호텔 고층 방에서 망원렌즈로 기자들의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편집국 일부 차장들로 정보조직망을 형성 운영해왔다. (후배들 백여명이 농성하다가 수십명이 잘려 나가는데도 조선일보 부차장 등 조무래기 편집간부 중에 이에 동참한 이가 이종구 차장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잘 훈련된 0였다.)

조선일보는 기자들이 농성에 들어가자 3~5백원 밖에 안되는 야근비를 엄청 올려 제작에 참여하는 부차장들에게 일제히 5만원씩 지급하고 매주 토요일엔 1만원씩 주고 있다. 3월 6일 이후엔 부차장 전원을 아침에 회사차로 출근시켰다.

기자들이 존경하는 선배 황승일 지방부장을 편집국에서 축출해 총무부 대기발령 시켰다. 조선일보는 3.6사태가 나자 지난 73년 6월 기자들의 봉급인상 투쟁에 책임을 지고 편집국장을 물러났던 신동호 논설위원을 다시 편집국장 대리로 발령했다. 신동호는 조선일보 지면에 기자들의 투쟁을 비난하는 광고문을 직접 쓰고 새로 기자공모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는 눈부신 탄압활동을 벌였다. - 조선투위 75년 4월 15일 정태기

조선투위의 진상보고서 5 : 진실 외면과 사실왜곡한 조선일보 지면 고발

실질임금이 떨어지거나 제자리걸음이라는 통계보도도 금기였다. 생산성보다 임금상승률이 훨씬 낮아 소득분배가 점점 불공평해지는 통계도 보도하지 못했다. 조선일보는 외국자본의 부패는 물론이고 외자기업과 대재벌의 횡포스런 노사관계도 보도할 수 없었다.

75년 2월15일 구속된 민청학련 학생과 교수들이 풀려나와 심한 고문을 폭로했을 때도 조선일보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만 김지하 시인이 “나는 고문당한 바 없다”고 한 말을 “고문당한 사람이 없다”로 왜곡보도한 통신기사를 크게 실었다가 김씨의 항의로 고치는 소동을 부렸다.

부산의 K 화학에 큰 불이나 여공들이 사망한 기사도 해당 기업주의 공고압력을 곁들인 청탁으로 묵살했다. 같은 부산의 K사가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억압하기 위해 여공들에게 심한 폭행을 한 끝에 여공 한 명이 중태에 빠진 사건기사도 싣지 않았다. - 조선투위 75년 4월 22일

이 와중에 조선일보 파면자 34명 가운데 2명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갔기 때문에 파면자는 32명으로 줄었다. 중앙정보부는 75년 4월 24일 조선투위 안성암 기자를 강제연행하고 기자협회 회장단 4명(동아일보 김병익 회장, 조선일보 백기범 부회장 등)도 강제연행했다.

제2장 민주화운동의 대열에 서서 - 법정투쟁과 고난

기자들이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한 달 뒤 박정희 정권은 75년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다시 선포하고 5월 13일엔 다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조선동아투위 150여 명의 기자들이 해직된 뒤 언론은 급속히 얼어붙어 독재권력이 요구도 하기 전에 알아서 기는 보도태도를 보여주었다.

한편 조선투위는 75년 7월 해고자 정태기, 이종구, 백기범, 신홍범, 박범진, 최장학 기자 등 6명을 대표로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변호는 이돈명 조준희 변호사가 맡았지만 1심에서 대법까지 모조리 패했다. 그 사이 투위는 사무실로 쓰던 종각빌딩을 나와 조선일보 뒤 오리엔탈 빌딩으로 옮겼지만 이마저도 회사의 압박으로 다시 당주동 중앙빌딩으로 옮겼다. 조선일보는 이사회 결의로 ‘쫓겨난 33명의 기자에 대한 거론을 일체 금지’시켰다.

조선투위가 75년 연말에 지인들에게 보낸 연하장에는 33명의 해고자가 생계 때문에 13명으로 줄어 있었다. 투쟁 10개월 만에 35명에서 13명으로 1/3가량만 남고 다들 밥벌이 하러 떠났다. 조선투위는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양 76년 3월 6일 투쟁 1주년을 맞아 직장을 찾아간 22명의 근황을 소개했다. 대개 장사에 뛰어들고 세일즈맨이 되고 기원을 차리고 학원강사로 나섰다.

조선투위 성명서에 상당히 오랫동안 파면자가 아닌 무기정직자로 올라왔던 김선주 기자는 1976년 3월 30일 투쟁 1년 만에 조선투위 동료인 최병선 기자(이후 두산계열의 광고회사 오리콤의 이사)와 결혼했다. 다시 1년 뒤 김선주 기자는 1977년 3월 4일 저녁 7시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3.2kg의 사내 아이를 낳았다.

편집국장 김용원과 유건호의 법정 증언

기자들의 소송 7차 공판(76년 3월 15일)에서 김용원 당시 편집국장(93년 대우실업 이사)이 법정 증언했다. 김용원은 문제가 된 유정회 국회의원 전재구의 글이 논설실에서 내려왔고 원래 분량을 1/3 이하로 줄이고 가필해서 실었다고 말했다. 두 기자에게 진술기회도 주지 않고 징계위원회를 연 사실도 드러났다.

76년 4월 12일 9차 공판에선 유건호(편집인)가 나왔고, 5월 10일 열린 10차 공판엔 김윤환도 나왔다. 유건호의 법정진술은 사실 왜곡은 물론이고 그가 언론과 신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오늘의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는가를 여지없이 폭로했다.

유건호는 전재구의 글이 조선일보 주필에게 온 것을 주필이 편집국장에게 전달해 실은 것이라고 말했다. 유건호는 이 글의 내용에 대해 “안보를 위해 유신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강변했다. 조선투위는 76년 12월 16일 1심에서 패소했다. 기자들은 77년 1월 10일 서울고법에 항소했다. 반면 동아투위 기자들은 76년 7월 회사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 무효확인 청구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소설가이자 사상계 주간을 지낸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

77년 5월19일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이 회사측 증인으로 항소심 공판에 나왔다. 선우휘는 조선투위 조준희 변호사의 심문에 자신이 편집국장을 지내는 동안 언론에 대한 외부의 간섭은 없었고 74년 10.24 선언 당시엔 논설실에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발뺌하다가 71년 4월 23일자 기자협회보(178호)에 정부의 언론규제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자신의 기고를 제시하자 몹시 당황해 오락가락했다.

선우휘는 73년 11월 신홍범 기자를 자기 방에 불러 조선일보 기자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선우휘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자는 기사 쓰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기자가 누락되든 깎이든 제작에 관여해선 안 되고, 오직 신문사 사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복종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선우휘는 문제의 71년 4월 기자협회보 기고문에서 “결국 권력당국은 언론을 규제하던 끝에 언론을 ‘병신’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데모에 또 하나의 필연성을 부여했으니 통탄할 일”이라고 했다. 선우휘는 73년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언론자유투쟁을 부추긴 이유를 묻는 질문엔 “언론자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동아와 한국일보가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을 뿐이다.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변호사가 선우휘에게 이렇게 물었다. “증인(선우휘)이 기협 회보에 쓴 글대로 언론에 대한 규제로 언론이 병신이 되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있어야 하는가?” 선우휘는 간단하게 “물론이다”라고 답했다.

(이런 놈이 오랫동안 사상계 주간을 지낸 뒤 조선일보에서 두 번이나 편집국장을 지내고 오랫동안 주필을 지냈다. 서울대생은 1978년 5월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우리의 주장’이란 성명에서 “우리는 민족민주교육 방해자의 이름을 공개해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코자 한다. 언론인의 사명을 팽개친 발작적 궤변가 선우휘 등 민족의 반역자는 민족 앞에 엎드려 사죄하라”고 외쳤다. 그럼 선우휘 같은 놈에게 이상문학상을 주고 오랫동안 자기가 만드는 월간지 사상계의 주간을 시켰던 장준하는 어떻게 되나. 우리 문단의 서북파 권력의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기’였다는 비난에서 두 사람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조선투위는 77년 9월 고법에서도 패했다. 투위는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2심에서 패했지만 판결문 내용에선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고법은 조선투위 기자들의 “주관적 동기나 추구하는 목적은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 행동에선 노동쟁의의 형식과 절차를 따리지 않은 집단행동이라 불법이라고 했다.

저문강의 시인 정희성이 1978년 3월 조선투위에 보낸 시

이곳에 살기 위하여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소리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는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내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1978년 3.6 투쟁 2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 조선투위는 투쟁의 차원을 차츰 높이면서 자유언론을 실천궁행하기 위한 자기 온축(蘊蓄)에 살신성인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불편부당의 지식인’에게서보다는 앙샹레짐을 타도한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적 인텔리겐자’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동아조선투위는 78년 4월7일 제22회 신문의 날을 맞아 공동성명에서 ‘제도언론의 타도’를 주창했다. 한 달 뒤 조선투위는 제도언론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민중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중의 아픔의 현장에 나오라”고 명성을 촉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투위가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자의 현장부재를 질타

농민들이 농협의 재배권유와 수매약속을 믿고 심어 거둬들인 고구마를 산더미처럼 썩혀 버린 뒤 더 이상 참을 길 없어 벌인 호남 농민들의 시위와 단식 현장에도 물론 당신(기자)들은 없었습니다. 민중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권력의 소리에만 맞추어진 길들여진 귀로 바뀐 것 아닙니까.

노조선거에 참여하려는 동일방직 어린 여공들에게 똥물을 먹이고 씌운 만행의 현장에마저 당신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서울 평화시장의 봉제 여공들이 경찰의 폭력에 죽음을 마다않고 맞선 노동교실사건은 이미 해를 넘겨 당신들은 기억조차 못할 것입니다. 1978년 3월말 급기야 일단의 방직공장 여공들이 기독교방송국에 들어가 벌인 시위의 전말쯤은 당신들도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업지의 기능공’으로 자처하는 당신들의 소리를, 글을 듣고 있습니다. 민중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민중의 아픔의 현장에 나오십시오. ‘현장을 떠난 기자’가 기자일 수 없다는 데서 오늘 한국 언론의 기사회생의 기적의 첫걸음은 당신들의 현장등장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1978년 3월 10일 멀쩡한 5월1일 메이데이를 놔두고 이승만이 새로 만든 대한노총의 탄생일인 3월10일 근로자의 날로 기리는 장충체육관의 기념식에서 30여 명의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어용적인 한국노총 간부들에게 거세게 항의했지만 국내의 어느 신문도 보도하지 않았다.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한겨레신문 기자들은 오늘날 이 질문에 얼마나 당당하게 답할 수 있을까.)

1978년 5월1일 조선투위의 최준명 기자가 굴욕적으로 조선일보에 재입사했다. 조선투위는 78년 5월 6일 총회를 열어 최준명을 투위에서 제명처분했다. 투위는 “32명의 기자들이 언론현장에 복귀하는 건 민주회복을 위해 싸우는 양심세력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최준명은 1996년 조선일보에서 편집국장을 거쳐 한국경제신문 사장을 지냈다.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자서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에서 “최준명은 몇 달 동안 안 들어왔다가 나중에 복귀했다. 절개가 질겼다. 내가 그의 동생을 불러서 ‘당신이 책임지고 형님 데려오라’고 했다”고 썼다. ‘절개가 질겼다’는 방 씨의 언급이 재밌다.)

제도언론 시대의 종언

써야 할 자유는 물론 쓰지 않을 자유도 없는 너무도 슬픈 이 창부(娼婦)언론의 현실 앞에 우리는 한없는 좌절과 분노를 느끼면서 언론의 처지가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오늘의 언론현실은 첫째 언론기업이 권력에 완벽하게 예속돼 있다. 따라서 언론은 공기(公器)가 아니라 사기(私器)에 불과하다. 둘째 우리는 기자정신이 가장 멸시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째 이제 신문이나 방송은 피곤한 민생의 안식이 아니라 부담이다. 차라리 신문이나 방송이 없는 게 더 낮다고 말한다.

동아조선투위 소식 : 79년 6월 25일

유신 말기 79년 6월 조선일보, 동아방송, 경향신문, 신아일보 등에서 잇따라 농성 제작거부 등이 일어나자 투위는 그 진상을 보도하고 침묵하던 제도언론의 맹성을 촉구했다. 14일 농촌현실 르포기사와 관련 조선일보 기자들이 대거 연행됐다. 18일 경향신문 기자들은 농촌현실의 왜곡보도를 계기로 편집권 회복을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앞서 7일엔 동아방송 기자와 부국장이 동경특파원발 기사 때문에 연행됐다.

79년 6월 14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방황하는 농촌 1 - 새농정 펴야 한다’는 제목의 기사 때문에 같은 날 오후 최준명 경제부 기자(조선투위로부터 제명된 기자), 유정현 정운성 민경원 사회부 기자 등 4명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아이러니 하게도 79년 6월 조선일보에서 농촌현실 르포기사를 주도적으로 작성했던 기자는 조선투위 출신으로 비굴하게 다시 들어가 투위의 제명을 받았던 최준명 기자였다.)

79년 6월16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는 조선일보와는 반대로 “우리 농촌은 이제 또 한 차례의 다이내믹한 성장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 농촌은 새마을 사업을 주축으로 한 의식혁명, 소득배가에 의해 전근대의 낡은 껍질을 벗은 이래 이제 선진국형의 새 농촌상 정립을 향한 도약의 제2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경향신문 경제부장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장기 경제사회 발전’이란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했다. 기자들의 농성에 편집국장단은 5개항의 결의를 발표하고 기자는 농성을 풀었다.

카터대통령에 대한 공개질의서 : 79년 6월29일

동아조선투위와 구속언론인 가족들은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맞아 한국앰네스티 회관에서 농성에 들어가는 한편 카터 대통령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영문으로 배포했다. 당시 동아투위의 안종필 위원장 등 10명의 동아투위 기자가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동아투위가 78년 10월24일 10.24 4주년 기념식을 열고 ‘보도되지 않은 민주민권사건일지’를 배포하는 바람에 동아튀위 기자들이 계속 연행당했다. 78년 11월 3일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홍종민, 김종철, 정연주 기자가 이 민권일지 사건으로 대량 연행됐다.

79년 여름 카터가 왔다갔지만 박정희 정권은 79년 11월 14일 조선투위 정태기 위원장과 동아투위 이병주 위원장대리 등을 연행했다. 79년 11월 25일 YWCA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저지국민대회 사건으로 정태기 위원장을 다시 연행해 12월1일에 석방했다.

80년 봄 다시 모색하는 복직 그러나

한국언론은 구체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민중에 대한 가해자였다. 언론의 자유가 곧 언론기업의 자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언론은 몇몇 소수의 언론기업이 지배하고 있다. 언론자유가 극도로 제약 당해온 지난 10여년 동안 언론기업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언론의 자기회복의 첫발은 조선동아 기자들의 원상회복이다.

80년 서울의 봄은 왔지만 동아조선투위는 복직은커녕 정신적 지주였던 안종필(43) 동아투위 위원장을 잃었다. 안종필 위원장은 80년 2월29일 서울대병원 8210호실에서 간암으로 숨졌다. 78년 11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79년 12월 12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올 땐 이미 병세가 악화됐다. 안 위원장은 투병 중에도 “꼭 복직해서 단 1년이라도 기자생활 한 뒤 교회 청소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안 위원장은 1937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중고와 외대 영문과를 나와 부산일보, 조선일보를 거쳐 65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유족은 이광자 여사와 안민영(14. 중2) 안례림(11. 초등 5)가 있다.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가 장례를 집전했다.

카멜레온 뺨치는 조선일보

1979년 10월 25일자 조선일보 사설 ‘정치의 대도’는 신민당의 의원직 사퇴에 대해 ‘약자의 공갈’이라고 비난했다. 3주 뒤 11월에 조선일보는 ‘현시국에 대한 공약수’에서 “민주주의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발 빠르게 변신했다. 12월 4일자 ‘긴급조치 9호’라는 사설에선 “헌법 개정 논의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것은 긍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흘 뒤 12월 8일엔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초보적 상식”이라고 날로 변신했다.

조선일보뿐만이 아니다. 중앙일보 80년 3월 28일자는 6면에 ‘취재 채근하는 여공들’이란 제목의 취재수첩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썼다. 기사는 “동일방직노조 첫 공판이 있기 10여일 전 노조는 각 언론기관에 이를 알렸으며 공판당일인 25일 오후 2시쯤에는 여공 50여 명이 기자실로 가 ‘재판이 곧 시작되는데 왜들 법정으로 가지 않느냐’고 취재를 채근했다”고 적고 있다.

동아조선투위는 80년 4월8일자 성명에서 “언론내부에서 언론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조직이 있다면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신문협회”라고 못 박았다. 언론기업의 추악성은 최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보여준 싸움에서도 잘 드러난다며 80년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삼성, 현대 양재벌의 싸움에 끼어든 동아 중앙일보의 작태를 지적했다.

제3부 전두환 정권의 폭력정치와 언론운동

84년 12월 19일 동아조선투위와 일부 80년 해직기자들이 모여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을 창립했다. 이들은 85년 6월15일 ‘말’지를 창간했다. 말지는 불법간행물이라 한 호가 나오면 어김없이 민언협 간부 한 사람이 마포서에 연행돼 5~10일 구류를 살았다. 당시 조선투위 최장학 위원장이 말지 편집인, 신홍범 위원이 민언협 실행위원을 맡아 몇일씩 구류를 받았다.

86년 9월 6일 말지는 특집호를 통해 ‘보도지침’을 터뜨렸다. 이 사건으로 민언협 신홍범 실행위원, 김태홍 사무국장,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국가보안법과 국가모독죄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돼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말지가 보도지침을 보도하자 자신들의 불법행동을 반성하고 시정하기는커녕 적반하장으로 민언협의 간부를 구속시켰다.

중일전쟁, 난징대학살을 다룬 조선일보의 시각

아이리스 창의 ‘난징대학살’을 본 사람이라면 그 소름끼치는 집단학살극에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축제’라고 표현했다.

조선일보는 1937년 12월 12일자 2면 톱기사에서 “황군의 신속한 행동으로 단번에 지나 수도 남경을 무찌르게 되었다는 전선뉴스는 (중략) 전국적으로 국민환호의 대상이 되어 ‘남경함락축제’는 이제 전 조선적으로 집행하니 (후략)”라고 말했다.

조선인 지원병제도 실시에 대해 조선일보는 1938년 6월15일자 사설에서 “조선통치사상 한 에포크 메이킹이요, 나마 총독의 일대 영단의 정책 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케 된다는데 대하여 이미 본란에 누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 있다. 금일은 남 총독의 임장 하에 훈련소 개소식을 거행하니 이 어찌 국가의 생사가 아니며 경행(경사스런 행사)이 아니냐”고 칭송했다.

새 언론의 창설을 제안

85년 3.6 10주년 기념식에서 이후 한겨레의 모태가 될 새 언론의 모형을 발표하고 “새 언론의 창설”을 제안한다는 이름의 선언문을 냈다. 투위는 새 언론의 내용으로 첫째 자유언론, 둘째 민주언론, 셋째 민중언론, 넷째 민생언론, 다섯째 민족언론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민중언론은 민중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움직이는 언론기관이라고 했다.

제5장 원상회복과 언론민주화를 위한 연대투쟁

88년 여소야대 정국의 언론청문회에 방우영 사장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을 피하려고 조선일보가 벌였던 로비 활동은 당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독재정권을 찬양하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거듭 태어나겠다고 사죄하는 글을 재빠르게 실었다. 방우영 사장은 3.6 사태를 묻는 질문에 위증을 서슴지 않았다. 단순히 ‘사내문제’라고 주장했다.

한겨레신문의 탄생과 조선일보 노조의 노력

동아조선투위와 80년 해직언론인이 참여해 새 신문 창간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최초의 국민신문인 한겨레신문을 1988년 5월15일 창간했다.

1989년 5월15일 조선일보 노조는 편집국에서 기자 조합원 총회를 열고 75년 조선일보 기자 32명이 무더기로 해고된 3.6 사태는 자유언론실천운동임을 재확인했다. 이날 함께 발표한 조선일보 노조의 성명은 “3.6 운동의 정당성 인정과 32명의 기자들을 해고한 조선일보사측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선일보는 국민 앞에 공표하고 물질적 배상과 함께 원상회복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조선일보 노조는 이를 위해 “노조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선언과 함께 조선일보 노조는 노조 집행부 등 30여명이 곧바로 철야농성에 들어가 50여 일간 기나긴 노사 대치가 있었다. 농성 51일째인 89년 7월 5일 김대중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노조 김효재 위원장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합의의 주 내용은 “5.15 원칙을 바탕으로 3.6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89년 8월 18일 조선투위의 황헌식 위원장과 김대중 편집국장이 첫 면담을 가졌다. 조선투위와 조선일보 간의 대화는 90년 2월 말까지 이어졌다. 이런 식의 논의는 93년 봄까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끝내 조선일보는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시간만 끌었다.

아무튼 89년 5월 15일 조선일보 노조의 5.15성명은 “지금 이 순간부터 조선일보사사에서 ‘3.6사태’는 ‘3.6자유언론실천운동’임을 선언한다. 3.6운동은 더 이상 하극상이나 위계질서파괴라는 오명으로 더렵혀질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회사의 약속이행이 없자 조선일보 노조는 89년 6월23일 다시 성명으로 “조선노조는 89년 6월 22일 쟁의발생신고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김대중 편집국장의 약속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