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과 싸우는 비정규직 전화 상담 노동자 이야기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공기업 비정규직 계약해지 문제 취재기(1)

들어가는 글

내겐 뭐든 잘 믿지 않고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정말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정말 나 자신인지조차 믿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든지 송두리째 뒤집어질 수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버릇은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어김없이 도진다.

그러나 나의 버릇에는 예외가 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도 온몸으로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은 일단 믿는다. 아무리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병든 사람이 아니면 입에 풀칠은 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일자리 구하는 일은 몇 달씩 몇 년씩 기업과 싸우는 일보다 훨씬 더 쉽고 편하다. 일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동조합이고 투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새 일을 구하면 된다. 떠돌이 품팔이가 되든 밥집 부엌데기가 되든 굶어 죽지 않을 길은 있다. 그럼에도 뙤약볕 아래서 1인 시위를 하거나 눈바람 부는 데서 한뎃잠 자며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면 그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다. 더 쉽고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버리면서까지 싸워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노동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무턱대고 귀담아듣는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즐거움들을 제쳐두고 남들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것도 보통 상대가 아닌 등짝 떡 벌어진 깡패 같은 기업과 굳이 힘들게 싸워야 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하지만 기업은 다르다. 기업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들을 잔뜩 부둥켜안고 있다. 해고해 버린 노동자 한 명을 다시 불러들인다면 해고 자체가 옳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을 기업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노동자들을 다시는 멋대로 해고할 수 없게 된다. 부당한 일을 저지른 기업이라는 인상이 돌이킬 수 없이 널리 퍼져 파리만 날리게 될 수도 있고, 눈물을 머금고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들로 사무실을 가득 채워야 할 수도 있다. 더구나 기업은 개처럼 주인에게 꼬리 흔드는 ‘근로자’를 바라지 자신의 권리를 부르짖는 ‘노동자’를 바라지 않는다. 노동자를 어떻게든 근로자로 만들기 위해 기업은 늘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네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그렇지 않은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국 비정규 노동 센터(http://www.workingvoice.net)가 꾸려 가고 있는 글쓰기 모임 ‘쉼표 하나’에서 처음 신혜정(가명)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때도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신혜정 씨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머리 써 가며 구차하게 거짓말을 할 바에야 더럽고 치사한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혜정 씨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취재 약속을 잡았다. 그 기록이 신혜정 씨의 힘겨운 싸움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거짓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있었다.

물론 세상 일이 언제나 거짓과 진실로 나뉘지는 않겠지만 거짓이 아랫도리까지 벗고 난리를 피우며 돌아다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거짓을 거짓이라 판가름하기가 뜻밖에도 쉽다.

2013년 6월 4일 화요일 늦은 7시 30분
한국 비정규 노동 센터와 신혜정 씨의 이야기


‘쉼표 하나’ 식구들은 요즈음 영화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신혜정 씨가 그동안 겪어 온 일들을 짤막한 영화에 담아 보려는 것이다. 첫 모임은 6월 4일 한국 비정규 노동 센터 사무실에서 있었다.

영화 줄거리를 짜려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나를 비롯한 영화 모임 사람들은 신혜정 씨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캐물어 보았다.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신혜정 씨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탁자를 두 주먹으로 우지끈 내리치기도 했다.

이야기는 모임 뒤풀이 자리에 가서도 이어졌다. 신혜정 씨가 들려준 놀라운 이야기들을 읽기 좋게 뭉뚱그려 엮어 보았다.

저는 식품 기술사 자격증이 있고 생물 공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어요.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새롭게 식품 산업 육성 업무를 시작하면서 농수산식품기업지원센터(기업지원센터)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일할 식품 전문가를 뽑는다며 먼저 제게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저를 스카우트하고 싶다고 전화로 먼저 연락을 했어요. AT 쪽에서는 저처럼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고 전문 지식도 갖춘 경력직을 원했거든요. 면접 보고 합격을 해서 2011년 9월에 AT에 입사를 했어요. 근데 처음에는 전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합격과 동시에 파견 업체 IPC(인터프로셀)를 통해 파견직 노동자로 근무하게 된 거였어요. 파견직이 뭔지 궁금하다고, 혹시 용역 같은 거 아니냐고, 파견직으로 고용될 거면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쪽에서는 제가 일반적인 용역이 아니라 전문적 기술직이라 정규직과 다를 것이 없다고 꼬드겼죠. 그러면서 딱 6개월만 비정규직으로 일하면 그때 가서 정규직으로 바꿔 주겠다고 했어요.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들어있던 건 아니고 사장님 지시 사항이라 하면서 그냥 부서장이 입으로만 한 약속이었죠. 파견 계약 기간은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6개월 동안이었어요.

어쨌든 그렇게 AT의 기업지원센터에 들어가 기업 자문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요식업체나 식품 기업이 어떤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는 해결하기 힘들거든요. 업체나 기업에서 문의가 들어오면 자문을 해 주면 되는 일종의 기업 애로사항 상담이었죠. 파견직이고 비정규직이었지만 제가 맡은 일은 그런 전문적 업무여서 다른 직원들도 저를 무시하지 않고 ‘선생님’이라 불렀어요. 실적도 무척 좋아서 6개월이 지나고 나서는 저랑 같은 업무를 맡은 다른 한 명이랑 (같이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저랑 똑같은 업무를 하게 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도 지금 퇴직하고 없어요) 저 이렇게 둘을 중심으로 새 팀이 조직될 정도였어요.

근데 그렇게 새 팀이 조직되면서부터 분위기가 차츰 달라져 갔죠. ‘선생님’이던 호칭이 ‘씨’로 바뀌더니 갑자기 잡일들이 제게 몰리기 시작했고 상담이든 아니든 전화 업무는 몽땅 저한테로 왔어요. 주변에서는 저를 아예 ‘전화만 받는 애’로 여기고 무시하기 시작했구요. 바뀐 팀장은 저를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했어요. 바뀌기 전 팀장님은 안 그랬죠. 그분은 제가 회의에도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고, 저를 단순한 비정규직이 아닌 전문직 노동자로도 인정해 줬어요.

아마 2012년 1월에 있었던 인사이동 때문이었을 거예요. 제 주변의 정규직 직원들이 그때 싹 물갈이가 되었거든요. 원래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른 부서로 옮기고 다른 정규직 직원들이 오면서부터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알고 보니 인사이동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던 거예요. 그 사람들은 저를 비정규직이라 낮잡아 보지 않았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나니 딱 1년만 더 하면 정규직으로 해 주겠다고 팀장이 또 저를 꼬드겼어요. 결국 저는 2012년 3월에 1년 계약 연장에 합의를 했고, 6개월 뒤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겠다는 처음 약속은 그렇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저를 그저 전화나 받는 비정규직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는데도 굳이 계약을 연장한 이유는, 그런 분위기가 새로 바뀐 팀장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어차피 팀장 한 명 때문이라면 앞으로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죠. 더구나 1년만 더 있으면 정규직 시켜 주겠다고 제안을 하기도 해서 조금만 더 있어 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2012년 6월 27일에 그 사건이 터진 거예요. 어떤 민원인이 전화를 걸더니 농어촌 입지 지원 사업인가 뭔가 하는, 제가 알기로 한국에 없는 이상한 것을 물어봤어요. 그래서 한번 알아봐 주겠다고 하니 제게 험한 말과 욕설을 퍼부었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었는데 그 사람이 제가 불친절하게 굴었다며 AT 감사실에 신고를 했대요. 나이 많은 아저씨 같았는데, 한 40대에서 50대? 저한테 다짜고짜 반말부터 했으니 아마 젊지는 않았을 거예요. AT에서는 일단 들어온 민원은 처리해야 한다며 제게 경위서 쓰고 교육을 받으라 했어요. 저는 억울하다고 말씀드리고 지시에 따랐어요. 그러고 나서 한동안 별 말이 없기에 어차피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으니까 민원이 잘 처리된 줄만 알았죠.

사건이 터진 다음주에 IPC에서 부장이 왔어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자기가 관리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AT에 들어간 뒤로 이름도 들어 본 적 없고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불친절하게 굴어서 민원이 들어왔다느니 곧 해고될 거라느니 하는 말을 그 부장한테서 듣고 저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열심히 해명을 했어요. 욕설 들으면서도 친절하게 상담을 한 것뿐인데 그 때문에 해고되어 버린다면 저로선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러자 부장이 하는 말이, AT가 갑이고 자기네(IPC)가 을이기 때문에 AT에서 해고를 원하면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내 부하 직원이 해고되면 당연히 내게도 마이너스가 되니 해고는 안 되게 해주겠다, 이러더라구요. 그러고 나서 얼마 뒤 IPC에서 AT로 ‘신혜정을 해고하는 건 부당하다’는 문서를 보냈고 그 문서를 본 팀장은 벌컥 화를 냈죠. 결국 AT 기업지원센터랑 인사팀, 법무팀, IPC가 모여서 7월 중순에 4자 회의를 했고, 그 회의에서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으니 제가 사죄 시말서를 쓰고 징계성 교육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나왔어요. 제가 참석하지도 못한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되어 버린 거예요.

7월 말에 IPC에서 징계 위원회가 열렸어요. 거기서 IPC는 ‘AT가 갑이고 자기네가 을이며 신혜정은 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시말서를 쓰라고 제게 거듭 요구했죠. 저는 이미 경위서를 쓰기도 했으니 양심상 시말서는 쓸 수 없고, 징계성 교육이 아닌 일반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 만족) 교육이라면 받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정말 민원이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시말서를 써야 하는 규정이 AT에 있느냐고, 혹시라도 있으면 규정을 확인한 뒤 시말서 쓰겠다고 말했죠. IPC는 제게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3개월 감봉 징계처분 통지서를 AT로 보냈죠.


팀장은 감봉으로 끝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이번에도 노발대발 화를 냈고 결국 IPC 쪽과 회의를 다시 소집하더니 제가 시말서 대신 사실 관계 확인서를 쓰고 징계성 교육 대신 IPC의 정기 교육인 CS 교육을 받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어요. 근데 사실 관계 확인서는 제가 써야 하는 건데 IPC 부장이 자기가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저한테 가져와 여기다 서명하라고 했어요. 모든 게 제 잘못이라 쓰여 있었으니 당연히 서명 안 했죠. CS 교육도 아무 일 없이 잘 받았는데 나중에 경고장이 날아왔어요. 제가 성실하지 못한 태도로 교육에 임했다는 거예요!

교육 장소가 농심이었는데 경고장에 보면 ‘타사 담당자가 있는 자리에서’라는 대목이 있어요. IPC에서 하는 교육이 아니라 농심이 하는 CS 교육에 제가 곁다리로 들어간 거죠. 더구나 가운데 자리는 정규직 직원의 자리라고 해서 저한테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어요. 강사님이 그냥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면 정말 구석으로 옮겨 앉았을 거예요. 그렇게 두 시간 동안 교육을 받은 뒤 수료증을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고 IPC에서 AT에 따로 보고서를 보낸다고 했어요. 농심에서 하는 교육이었을 테니 IPC에서 만든 수료증이 없었겠죠. AT로 돌아가니 저한테 CS 교육 보고서를 팀에 제출하라고 했어요. 어차피 IPC에서 AT로 보고서를 보낼 테니 그걸 받아서 팀에 제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온 건 경고장이었던 거예요. 제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중에 보니 인사팀에는 제가 교육 잘 받았다는 보고서를 보냈더라구요.


경고장을 받은 게 그해 9월이었고 제가 서울 지노위(지방 노동 위원회)에 AT와 IPC를 부당 노동 행위로 고발한 게 10월이었어요. AT는 비정규직 차별 시정 건으로, IPC는 부당 징계(감봉과 경고) 구제 건으로 진정을 넣었어요. 비정규직 차별 건은 AT 내부에 비교 대상, 즉 같은 업무를 하는 정규직 직원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고, 부당 징계 건은 AT로 민원이 들어온 건 사실이니 징계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죠.

지노위에 갈 때 관련 서류들이든 징계 통보서든 이메일이든 뭐든 온갖 자료들을 다 들고 갔어요. 근데 판결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저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노동부랑 지노위는 당연히 치우침 없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AT 같은 공기업이 부당한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모든 걸 없었던 일로 덮어 버리려 하는 것도 문제지만 어쨌든 기업은 기업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쳐도 지노위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서 작년 12월에 노조에 가입했어요. (신혜정 씨는 현재 희망연대노동조합 더불어사는지부 조합원이다.)

그 뒤로 중노위(중앙 노동 위원회)와 인권위(국가 인권 위원회)에도 가 봤고 국회의원들한테 찾아가기도 했어요. 인권위 쪽에는 지노위에 고발하면서 같이 진정을 넣었는데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고, 중노위 쪽은 지노위 판결에 불복해서 다시 제소했지만 판결은 지노위와 비슷하게 나왔어요. 비정규직 차별 건은 비교 대상이 없으니 각하. 부당 징계 건은 IPC가 제게 시말서도 쓰라 하고 징계성 교육도 시키려 하는 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유로 기각. 행정소송은 중노위 판결 불복으로 지난 3월에 걸었죠.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지난 5월에는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님의 주선으로 AT와 노조의 면담이 있었어요. AT에서는 경영관리처장과 인사팀장, 기업지원팀 팀장이 나왔고 노조 쪽에서는 저와 사무국장, 정책국장이 나갔어요. 제가 소속되어 있던 기업지원팀 팀장에게 이야기 좀 듣고 싶다고 했는데 자기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죠. 그럼 여기 왜 앉아 있느냐고, 나가시라고 했더니 그냥 일어나서 나가 버리더라구요. 우리도 황당했지만 경영관리처장과 인사팀장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어요. 면담 자체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느라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 끝나 버렸죠. 민원이 있었으니 처리했을 뿐 우리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파견 근로자의 해고는 전적으로 파견 업체의 책임이다, 이게 AT의 입장이에요.

제가 AT한테 바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에요. 제가 불친절했다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대체 뭐가 불친절했다는 건지, 그 민원인은 저의 무엇이 그렇게 불쾌했던 건지, 징계는 어떤 과정을 거쳐 그리 여러 번 내려졌는지 제발 좀 진실을 밝혀 줬으면 하는 거예요. 민원인이 AT 감사실에 신고한 녹취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민원인의 신상 정보는 분명 AT가 가지고 있을 거잖아요. 근데 그 민원인에 대해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AT는 제가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만 해요.

그리고 이 일을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든 AT에게 사과를 받고 싶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조치를 하도록 AT 측에 요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수 있냐구요? 간단해요. 쓸데없이 비정규직 파견 노동자를 쓰지 말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화 상담 업무를 맡은 직원을 위해 상담 시스템을 개선하는 거죠. 욕설을 들었을 때 전화를 끊을 권리를 보장해 준다든지, 악성 민원을 겪은 상담원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을 준다든지, 모든 상담 내용을 녹음한다든지 하는 상담원 보호 시스템이 필요해요. 하지만 AT는 뒤늦게 설치한 녹취 시스템이랑 직원들 모아놓고 벌이는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죠. 충분하지 않을 때는 징계 먹이거나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고.

지노위도 문제가 많아요. 지노위 판결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세요? 심판위원들이라고 판결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지노위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선가 와서 일당 받고 판결 내리는 사람들이에요. 판결 끝나면 집에 가는 거죠. 날마다 심판위원들이 갈리는 판국인데 지노위 소속 공무원들인 조사관들이 사건을 정성껏 조사해서 심판위원들에게 제출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조사관들이 제대로 조사를 안 하는 거예요. 제가 고발한 사안을 위해 지노위 조사관들이 한 일이라고는 ‘서류 내세요’, ‘이유서 내세요’, ‘판결은 언제 나와요’ 이렇게 사무 보조처럼 말해 준 것밖에 없어요. 조사관이라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죠. 물론 조사관이든 일용직이나 다름없는 심판위원들이든 날마다 적잖은 사건들을 처리해야 할 테니 바쁘고 정신없기도 하겠죠.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판결에 문제가 있어도 조사관이든 심판위원이든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아요.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조사관은 공무원이니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자기 일이 아니라 하고, 심판위원들은 어차피 일용직이니 그날만 때우려고 나와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아마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겠죠.

게다가 저를 담당한 심판위원이 따로 저를 지노위 화해실에 불러다 놓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고객에게 욕 들어 먹을 만하네. 공사(AT)랑 싸우지 마라. 네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건 네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다.” 그게 지노위 심판위원이 할 말이에요?

어쨌든 AT가 지금이라도 제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하면 깨끗이 끝나는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일이 커져 버렸는지 모르겠어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지난 1월부터는 양재동 AT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어요. 희망연대노조 더불어사는지부에서 돌아가면서 한 분씩 시위 때마다 함께 해 주시고 있어요. AT 경비 아저씨들이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라고 할 때도 있지만 제게 폭력을 쓴 적은 없어요. 누가 신고를 하는지 경찰들이 올 때가 있는데 엄연히 집회 신고를 하고 벌이는 1인 시위니까 별 말 없이 그냥 가죠.


AT 본사 앞에는 지금도 노조가 걸어 놓은 현수막들이 있어요. 떳떳하게 허가 받고 걸어 놓은 것들인데 AT가 그 현수막들을 어떻게든 내리고 싶었는지 제 전화번호를 멋대로 다른 사람한테 알려줬더라구요. 그 사람이 저한테 전화 걸어서 현수막 떼어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황당했죠. 험한 말이나 퍼붓는 민원인의 개인 정보는 철저하게 보호하면서 한때 직원이었던 제 개인 정보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AT가 공기업이 아니라 일반 회사였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싸우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물론 옳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 회사에서는 직원이 말 안 듣는다고 해고해 버리는 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근데 AT는 공기업이에요. 국가가 관리한다구요. 지노위는 또 어떻죠? 노동부가 관리하잖아요. 노동부 역시 공공기관이에요. 공기업과 공공기관이 이래서는 안 되죠. 아니, 백 보 양보해서 공기업도 기업이니까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쳐요. 근데 노동부만큼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가장 큰 배신감을 느낀 건 AT도 아니고 IPC도 아니고 바로 지노위 때문이었어요. 그곳에 제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지금까지 국가를 믿고 있던 마음이 거기서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노조도 그래서 가입했어요.

저는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내 형편이 안 좋은 건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거다, 공부 열심히 해서 나 자신을 바꾸고 성공하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죠. 근데 이번 일을 당하고 나니 나 혼자서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엔 AT와 지노위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전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품게 됐죠. 한국 사회에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구나, 내 문제는 전체적인 부분의 일부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는데요. 저는 지금까지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적이 별로 없어요. 길거리에 붙어 있는 ‘미아를 찾습니다’ 포스터를 봐도 저 아이들은 나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내가 나중에 엄마가 되면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죠. 근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아주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거든요. 전에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빨리 해결하든가 다른 직장 찾아가든가 하지 왜 저렇게 난리를 피울까’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저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힘든 사연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돼요.

제가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유는 그거예요. 고쳐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공기업과 한쪽 편만 드는 노동부에 대한 분노. 제가 싸우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면 공기업과 노동부에서는 ‘어라? 이렇게 해고해도 찍소리도 못하네?’ 하면서 이런 일을 앞으로도 되풀이할 게 뻔해요. 저는 그렇게 불의가 용납되는 세상이 되는 게 싫어요. 그런 잘못된 것들이 뜯어고쳐져야 이 나라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려준 신혜정 씨는 다음날 6월 5일 점심 때 AT 본사 앞에서 집회가 있다고 알려 주었고 나는 시간 맞춰 나가 보기로 했다. 알고 보니 양재동에 있는 AT 본사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가 싸우고 있는 곳에서 무척 가까웠다.

집회를 여는 옆에서 사진도 찍고 희망연대노조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면 좋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AT 본사 안으로 파고들어가 팀장이든 차장이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신혜정 씨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신혜정 씨의 말이 거짓말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5일 낮 12시 양재동 AT 본사 앞
신혜정 씨와 희망연대노조 조합원들의 집회



AT 본사 건물은 부자 동네에 걸맞게 으리으리했다. 봄이 언제였나 싶게 뜨거운 날씨에 바람도 불지 않았다.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거리를 바쁠 것 없는 걸음으로 걷는 이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나는 신혜정 씨와 희망연대노조 조합원들을 기다리며 그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목이 말라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시원했다. 아무리 눈을 돌려 보아도 물 마실 만한 곳이 없었다. 사람 소리로 왁자한 곳이 있어 가 보니 ‘2013 해외 취업 박람회’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이 많으니 물 먹는 곳도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들어갔다. 나라 바깥에 나가서라도 일자리를 구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득실거리는 사이로 정수기가 보였다. 물을 마시고 얼른 그곳을 나오는데 문득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팔아 고향을 등지고 떠난 심청이 생각이 났다. 저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는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은 효자 효녀들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다시 본사 밖으로 나와 현수막이 걸려 있는 곳으로 갔다. AT에서 자꾸만 손을 대는 통에 일부러 높은 곳에 매달았다는 현수막은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손이 닿을 만큼 높이 있었다.

‘사건 은폐! 책임 전가! AT 공사 규탄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대화에 나서라!’


12시가 되자 신혜정 씨와 조합원들이 와서 집회에 필요한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웬 트럭이 오더니 높직이 매달려 있는 현수막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가기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 신혜정 씨에게 물어보니 AT가 현수막에 적힌 내용으로 명예 훼손 소송을 건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현수막을 걸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새롭게 걸린 현수막에는 희망연대노조의 전화번호와 함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억울한 일 당하기 전에 전화하세요!’

방송국에서 나온 듯한 카메라 일꾼이 눈에 띄어 다가가 물어보니 KBS ‘추적 60분’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미 AT 임원들 인터뷰는 끝냈고 집회 모습을 영상에 담으려 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집회가 끝난 뒤 본사 안으로 쳐들어가 누구든 만나 보고 말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밥 때가 되니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회도 시작되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무 두 그루에 현수막을 펼쳐 묶고 신혜정 씨가 그 뒤에 서니 자연스럽게 집회 무대가 되었다. 무대가 AT 본사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 가까이에 있어서 길을 건너려는 이들은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좋든 싫든 집회를 지켜보아야 했다. 손자보(피켓)을 들거나 유인물을 나누어 주는 조합원들이 횡단보도 쪽에 자리를 잡자 신혜정 씨는 마이크를 쥐고 지금껏 AT가 무슨 일을 저질러 왔는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1시가 가까워 오자 집회는 무사히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AT 본사에서 세 사람이 나타나 조합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너무 시끄러우니 소리 당장 줄이라고, 이렇게 시끄러운 건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조합원들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방해하면 집회 안 끝내고 계속하겠다고 대거리했고 어느새 거친 삿대질과 몸싸움이 오가게 되었다.

신기했던 건 그 세 사람이 다가온 것이 정말 집회를 막 정리하려고 하던 때였다는 것이다. 딱 1분만 늦게 나타났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귀신 같이 나타나 싸움을 일으키고는 화풀이만 실컷 하고서 본사 안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신혜정 씨 말로는 셋 다 AT 직원이라고 했다. 해외 취업 박람회 때문에 ‘귀한 손님’들이 많이 와 있어서 다른 때보다 더 날카롭게 구는 거라고도 했다.

현수막과 손자보들이 노조 차 안으로 옮겨지고 신혜정 씨와 조합원들도 차에 올랐다. 어느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로 간다고 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AT 본사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책상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이러저러한 사정을 이야기하니 5층 홍보팀으로 가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2013년 6월 5일 늦은 1시 50분 AT 본사 5층 사무실
AT 경영지원처장이 들려준 이야기


5층으로 올라가 여기저기 둘러보니 홍보팀 사무실이 따로 있지는 않고 커다란 공간을 여러 부서가 나누어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홍보팀인 듯한 방으로 무작정 들어가 신혜정 씨 사건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니 얼마를 기다린 끝에 경영지원처장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물음을 던지는지 받아 적기 위해 직원 한 명이 경영지원처장의 옆에 앉았다.

딱히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서 <말과 활>이라는 잡지의 기자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세상에 없는 잡지였으니 <말과 활>이 무슨 내용으로 채워질지 알 리가 없는 경영지원처장은 내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점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거의 한 시간 동안 경영지원처장이 들려준 이야기를 읽기 편하게 다시 풀어 엮었다.

신혜정 씨가 요구하고 있는 게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은 전화를 걸어 온 고객에게 불친절하게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징계를 받았으니 진상을 규명해 달라, 그리고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해 달라, 아마 이런 것들이겠지요.

신혜정 씨는 자기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기업지원센터의 상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채용되었고 업무 자체는 신혜정 씨 입사 때부터 퇴사 때까지 변한 것이 없어요. 전화 받는 일은 원래 신혜정 씨 업무입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우리는 끝까지 그 업무만 맡겼을 뿐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업무 내용은 신혜정 씨가 벌이는 시위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괜히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신혜정 씨가 억지로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화 상담 업무는 당시 신혜정 씨까지 두 명이었습니다. 파견직 근로자 두 명이 상담 업무를 맡아서 했습니다. 지금은 두 명 다 퇴사했고 우리 정규직 직원들이 나누어서 그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우리도 파견직을 쓰고 싶어서 쓰는 건 아닙니다. 일단 파견직 채용은 공사(AT)의 인사 운영에 관련된 사항인데요. 해야 하는 사업들이 자꾸 늘어나면서 일이 점점 많아져도 기획재정부가 승인을 해 주지 않으면 우리 마음대로 인력을 늘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일은 많이 주면서 정원을 확보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계약직이나 파견직을 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죠.

게다가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법에 따라 비정규직은 다 쓰고 있습니다. 도로공사나 석유공사, 농어촌공사 같은 곳에 한 번 가 보세요. 우리들보다 비정규직을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파견직을 쓰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신혜정 씨가 입사할 당시에 새로이 기업지원센터가 설립되면서 상담 업무가 시범 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상담 업무는 전부 다 외부에 위탁을 주어 진행했었죠. 아시다시피 시범 사업에 정규직 근로자를 채용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정원 미확보 문제와 시범 사업이라는 문제가 이리저리 얽혀 있었습니다. 우리도 파견직을 쓰고 싶어서 쓰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혜정 씨는 우리가 6개월 뒤에 혹은 1년 뒤에 정규직으로 바꿔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고 있죠? 그런 약속을 정말로 했다면 신혜정 씨가 근무하던 사업 부서의 명백한 월권행위가 됩니다. 인사 부서에서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설사 신혜정 씨 부서에서 정말로 그런 약속을 했더라도 채용에 관한 모든 일은 우리 인사 부서가 하기 때문에 멋대로 누군가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큰일 나죠.

그래서 사람들이 신혜정 씨의 주장만 듣고서 공사를 나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인사 부서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신혜정 씨의 목적은 이 일을 더욱 시끄럽게 만들어 정규직으로 돌아오는 것이지 어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신혜정 씨 부서에서 왜 정규직 운운했는지 저는 들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짐작하건대 정말 정규직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으로 이야기했을 겁니다. 계약서에는 없는 얘기니 당연히 격려나 동기 유발 차원에서 이야기했겠죠. 그걸 약속으로 알아들은 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해고요? 신혜정 씨는 엄밀히 말해 우리 직원이 아니라 파견회사 소속입니다. 우리에게는 신혜정 씨를 해고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권리가 없는데 해고하라는 압박을 가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신혜정 씨는 우리 쪽에서 파견회사에 해고 압력을 넣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민원이 생겼다고 신혜정 씨 사업 부서에 통보하고 재발하지 않게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 조치는 신혜정 씨에게 경위서를 받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교육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파견회사에 그러한 것들을 통보한 것으로 우리 일은 끝났습니다. 나머지는 신혜정 씨가 소속되어 있는 파견회사의 영역입니다.

사건 당시에는 녹취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신혜정 씨는 재발 방지 조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막상 녹취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자 신혜정 씨가 동의를 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녹취 시스템을 설치하는 데에 상담원의 동의가 필요한지 우리가 따로 행정자치부(지금의 안전행정부)에 문의까지 했습니다. 행자부가 상담원 동의 없어도 가능하다고 답변을 줘서 2012년 12월에 녹취 시스템을 설치했죠.

녹취 시스템이 없었으니 사건 당시의 증거 자료도 없습니다. 사업 초기 단계여서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교육을 많이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녹취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사건 당시 민원인이 우리 감사실에 제기한 민원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민원 제기하신 분이 없는 걸 지어내서 신고하셨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민원인이 직접 신혜정 씨와 대화를 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민원을 제기한 것이니 감사실에서도 어떠한 민원이 들어왔다는 내용은 당연히 기록을 해 두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녹취 시스템이 없었으니 녹음된 내용이 남아있는 건 아니고 당시 전화를 받은 감사실 팀장이 민원 내용을 적어둔 것이 있습니다. 신혜정 씨와 민원인이 나눈 대화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감사실에 들어온 민원은 그 내용이 문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민원인의 개인정보는 아시다시피 공개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상담원에게도 인격적인 모욕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 욕설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상사에게 연결해라’, ‘전화를 끊겠다는 예고를 하고 끊어라’ 같은 요령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신혜정 씨의 경우 당시 민원인이 기분이 대단히 나쁜 상태로 감사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민원인은 신혜정 씨가 불친절하게 대했다고 했고 신혜정 씨는 민원인에게 친절하게 대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신혜정 씨는 상담을 잘 했을 겁니다. 하지만 감사실에 실제로 민원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경위서만 신혜정 씨에게서 받았고 파견 업체에 그 사실을 통보해 줬을 뿐 그 뒤의 일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신혜정 씨는 파견 업체 소속이지 공사 소속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파견 업체에 다른 징계나 해고 요청을 한 바는 전혀 없습니다.

징계위원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 역시 파견 업체 규정에 따르는 거라서 우리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회사 징계위원회에 출석할 이유가 없으므로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혜정 씨는 자꾸만 계약 해지라는 표현을 쓰는 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계약 해지가 아니라 계약 만료입니다. 해지라고 하면서 마치 우리가 쫓아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건 결코 아닙니다. 신혜정 씨는 계약 날짜를 다 채우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신혜정 씨가 하던 일은 남아 있는 정규직 직원들이 나누어 맡고 있죠. 퇴직했으면 그만이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신혜정 씨의 주장은 과장이거나 허위입니다. 공사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수용하겠는데 그런 것이 아니니 지금 공사의 명예만 실추되고 있는 판국입니다. 오늘 본사 앞에서 집회도 열렸고 방송국에서도 왔는데 그런 것들 우리 쪽에서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뿌리고 있는 유인물도, 본사 앞에 내건 현수막들도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하나하나 준비해서 조만간 신혜정 씨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 계획입니다.

신혜정 씨는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 진실 규명은 이미 다 끝났습니다. 신혜정 씨가 지금까지 지노위, 중노위, 인권위에 국회까지 다 돌아다니고 있지만 특별히 신혜정 씨의 편을 들어준 쪽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방송국까지 왔어요. 신혜정 씨의 목적은 오로지 공사에 정규직으로 다시 입사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사과 및 재발 방지 조치를 요구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규직 복직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로 공사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면서 아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발 정확한 사실을 보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송국이나 언론사에서 찾아올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실과 다르게 보도가 된다면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할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편견 없이 보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신혜정 씨,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경영지원처장의 살가운 인사를 뒤로 하고서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내 마음속은 뒤죽박죽 몹시 어수선했다. AT 본사 바깥은 아까보다 더 더웠다. 버스 정류장까지 느릿느릿 걸어가며 생각을 크게 두 가닥으로 나누어 잡았다.

첫째, 경영지원처장의 이야기는 신혜정 씨의 이야기와 많이 달랐다. 서로 부딪치는 부분을 제대로 파고들기 위해선 신혜정 씨를 다시 만나 이것저것 캐물어 봐야 했다.

AT는 신혜정 씨에게 내려진 징계와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갑’인 AT는 ‘을’인 IPC에게 정말 어떠한 압력도 넣지 않았을까?
‘을’인 IPC는 ‘병’인 신혜정 씨에게 왜 그렇게 거듭 징계를 내렸을까?
신혜정 씨는 왜 녹취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에 반대를 했을까?
AT가 전화 상담원에게 실시했다는 교육은 무슨 내용이었을까?
신혜정 씨는 계약 해지일까 만료일까?
신혜정 씨 대신 전화 상담 업무를 나눠 맡고 있는 직원들은 누굴까?

둘째, 신혜정 씨와 AT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는 말들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아마 내 힘으로는 가려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AT 내부를 샅샅이 조사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신혜정 씨가 정녕 참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낼 재주도 없다. 서류든 사진이든 녹취 자료든 증거 자료가 없는 한 나는 그 어떤 글도 쓰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내가 쓰려는 글은 소설이나 동화가 아니라 어느 한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쪽 편을 거침없이 발가벗기는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로지 내 마음 가는 대로 휘갈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사실만을 손에 쥐어야 했고 안타깝게도 내겐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주워 모을 깜냥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한 시간 동안 똑똑히 들었던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경영관리처장의 이야기가 AT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 있다면, AT는 비정규직 또는 파견직이라는 고용 형태로 직원을 뽑는 것에 눈곱만큼도 죄책감이 없었다. 파견직 노동자를 갖다 쓰는 일은 파견법이 보살펴 주고 있다는 이유로, AT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는 이유로 그저 귤 하나 까서 먹는 일처럼 너무나도 쉽게 진행됐고 아무도 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AT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꼬마처럼 가슴 졸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돌덩이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갑’에서 ‘을’을 거쳐 ‘병’으로 내려오는 파견직이라는 굴레가 노동자의 삶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는지, 신혜정 씨가 왜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지금껏 힘겨운 싸움을 해 오고 있는지 AT는 하나도 알지 못했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느냐며,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느냐며, 계약 끝나서 회사 나갔으면 그걸로 끝난 거 아니냐며 내게 되묻고 있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뭔가 좀 다르게 생겨 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었다면 ‘정규직으로 바꿔 주겠다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쪽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자기네들이 어떤 감정을 지닌 사람들인지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되돌아보지 않고 품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파견법이었다. (계속)
덧붙이는 말

[필자주] 나는 이 글을 지난 6월 5일부터 16일까지 열이틀 동안 썼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펴낼 격월간지 『말과 활』에 싣기로 한 글이지만 어찌어찌 하다가 싣지 못하게 되어 이렇게 참세상에 보낸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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