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슈] 애도를 위한 공론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태원 참사 이후 첫 주말인 지난 11월 5일, 청년들이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국가에 묻기 위해 서울 용산 이태원 및 대통령실 인근에서 추모 행진을 벌였다.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애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10.29 이태원 참사를 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참사를 어떻게 부를지부터 논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루아침에 벌어진 이 끔찍한 참사를 제대로 곱씹는 일이야말로 애도의 첫 번째 순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는 이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시 참사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참사를 경험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피해의 양상과 범주의 카테고리를 추가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애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때 국가의 역할은 애도를 애도답게 만들기 위한 사회적 공론장을 만들 조건을 형성하는 것일 테지만, 윤석열 정부는 애도의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았다. 정부는 참사 직후부터 11월 5일까지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했으나, 오히려 이것은 국가적 애도의 실패로 귀결됐다. 애도하는 이들의 말하기를 금지하고, 침묵으로 애도하길 강요했기 때문이다. 애도는 분향소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듯, 모든 행사와 공연을 취소하고, 애도의 공론장을 만들 조건을 형성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진정성 있는 애도와도 거리가 멀었다.

애도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국가의 의도를 의심해야 한다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두고 모순적 행보를 반복하고 있다.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며 애도의 주체로 나서는 한편, 장관과 총리는 참사의 책임이 국가로 향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책임 회피성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은 참사를 해석하고, 참사를 말할 주체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지난 11월 22일 유족의 기자회견을 통해 드러났듯, 정부는 유족에게 참사의 경위를 설명하지도, 유족이 한 곳에 모일 공간도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이태원 참사와 연관된 관공서와 기관들의 자료를 비공개 처리하고 있다. 국가 애도기간이 국가적 애도가 아닌, 오직 국가만이 애도할 수 있다는 애도의 독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서울 6호선 이태원역 1번 출구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추모 공간이 있다. 가득 쌓인 국화꽃 등 추모 기록물들.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는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 정당한 애도와 정당하지 않은 애도를 구분해왔다. 정치적 요구를 수반하는 애도의 순수성을 의심해왔다. 그러나 순수한 애도는 국가가 만든 창작물에 불과하다. 애도는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스스로 참사의 원인과 그에 대한 책임을 사유하고, 나아가 참사의 당사자로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요구를 수반하는 애도의 주체로 나서는 시민의 의도를 의심하기보다, 그것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국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 그 이후

왜 윤석열 정부는 형식적 애도 뒤편에서 애도하는 존재를 지우려 했던 것일까. 10월 31일 경찰이 작성한 비공개 문건이 밝혀지며 정부가 “이태원 참사를 통해서 정권을 성토하려는 시민사회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와 같이 이태원 참사를 통해 정권이 얻을 정치적 타격을 우려했던 것이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닮은 점이 많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청년세대고, 국가의 책임 부재로 인한 국가적 안전 참사이다. 게다가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들이 직접 구조요청을 보냈음에도 미흡한 초동대처로 인해 피해 규모를 키웠는데,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로 사태가 심각해진 뒤에야 안전 당국의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즉, 사전안전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구조요청이 묵살됐다는 점에서 흡사 세월호 참사가 다시 반복된 것 같은 인상마저 주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첫 주말인 지난 11월 5일, 청년들이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국가에 묻기 위해 서울 용산 이태원 및 대통령실 인근에서 추모 행진을 벌였다.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사실 이태원 참사를 다루는 문법과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문법은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로 10.29 이태원 참사를 풀어가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국가의 부재를 지적하며 국가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세월호 참사가 남긴 사회적 트라우마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의 무능과 진실을 둘러싼 지난한 싸움, 그것의 왜곡이라는 질곡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의지의 발현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10.29 이태원 참사 어떻게 애도의 공론장을 만들어 낼 것인가

유가족은 기자회견을 통해 6개 사항을 정부에게 요구했다.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비롯해 피해자들의 참여가 보장된 진상조사기구 설치, 피해자들에 대한 2차 피해 방지 대책 등이었다. 기자회견의 형식이 유족의 대정부 요구안 발표였기에, 정부가 이를 수용할지에 눈길이 쏠린다. 그러나 유족을 포함한 생존자, 희생자와 생존자의 가족과 동료, 더 나아가 참사를 지켜본 시민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피해자들의 경험으로 이 참사를 재구성하려는 작업이 본격화되는 계기라고 인식해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애도에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애도의 민주주의가 부재했을 때뿐만 아니라, 애도의 주체들이 전면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애도의 민주주의가 부재했다는 것은 애도를 위한 피해 서사가 다양하지 않았다는 지적까지 수반한다. 즉, 애도가 사회적인 것이 되기 위해선 더 많은 서사와 담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성과 같은 오래된 서사가 지배적이고, 또 반복되는 것을 보며, 과연 피해자의 말하기를 폭넓게 해석하고 들을 자세가 돼 있는지 의문이 든다. 또한 희생자 중심의 애도와 추모는 생존자를 비롯해 죽음의 당사자가 아니면서도 참사의 당사자인 이들의 존재를 지울 수도 있다. 어떻게 참사가 안긴 슬픔과 상처를 공유할 수 있을지, 만남의 경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서울 용산구 해밀톤호텔 옆 골목길. [출처: 워커스 자료사진]

이는 결국 민주주의 그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적 공론장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이미 이태원 참사 이전부터 사회적 공론장은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특히 최근 거대양당의 정치적 공방은 이념과 담론의 대립이 아닌 개개인의 의혹과 비리에 천착해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제기한 국정조사와 특검의 칼날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의 최고 책임자를 겨누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을 처벌하거나 경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애도의 민주주의, 민주적 애도가 만들어낼 결과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어디에서 어떻게 국가가 부재했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국가가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이다. 동시에 그 부재 속에서 겪는 피해는 무엇이고,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범위로 퍼져 있는지 확인하며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가 사회 구성원들의 필요를 확인하는 절차라고 했을 때, 애도의 민주주의는 애도하는 이들의 필요를 확인하고 보장하는 것일 테다. 그렇기에 오늘날 민주주의가 배제하고 있는 계급, 인종, 성적 지향, 지역과 같은 카테고리가 애도의 카테고리로 추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이라는 곳부터가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이고 이방인들의 이색적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 속의 사회라는 점에서 이는 더욱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가 안전과 재난 참사를 대하는 사회적 문법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면, 이태원 참사는 피해의 서사를 확장하는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