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INTERNATIONAL3]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방문 중 이란을 UAE의 최대 적으로 간주한 발언이 아직까지 수습되지 않고 있다. 이란은 이란주재 한국대사를 초치하고 한국과의 관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서고 있다.

1. 대통령의 발언

이란과 UAE는 분쟁 공간인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긴장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적대적 관계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고립된 이란에 UAE는 최대의 교역 파트너이며, UAE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이란 출신은 가장 많은 60여만 명으로 ‘적’이라는 호전적인 표현을 적용할만한 관계에 있지 않다. 그래서 국제관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 이들은 윤 대통령의 발언과 의식수준에 우려를 표하며 타국에 대한 발언에서 보다 신중한 태도를 주문했다.

1979년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를 보면,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변국과의 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러면서도 실용주의 노선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면 수니파 국가들과도 범이슬람세계 차원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중동지역에 시아파 대 수니파 대결구도가 형성되면서 수니파 국가들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는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란은 또 다른 사안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체제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저항운동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한목소리로 시대착오적인 신정체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전만 해도 이란은 여성을 억압하고 국민들의 목소리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비민주적인 나라로 비난받고 있었다. 이란에 대한 다소 상반되는 이 두 가지 반응은 이미 오래된 이란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란을 북한과 함께 ‘악의 축’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미국적 사고가 깊이 뿌리박혀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중동의 제국주의 세력 미국과 ‘맞짱뜨는’ 존중할만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와 직접적으로 지정학적인 문제가 없는 ‘제3국’을 바라보는 다소 객관적인 시각도 덧붙여진다.

2. 고립된 이란

아래에서는 이란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선들을 살펴보고 조금은 새로운 시각을 덧붙여본다. 먼저 현재의 이란에 대해 외부세계가 갖게 되는 주된 이미지는 고립되고 폐쇄된 국가의 이미지다.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경제제재 조치가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으며, 이란을 둘러싼 빽빽한 미군기지는 미군이 주둔한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은 밀도를 자랑한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이란혁명 이후 수립된 신정체제에 의한 내부의 압박과 쌍을 이루고 있다. 북한을 떠올리게 하지만 지리적으로도 고립된 북한과 달리 이란은 사통팔달의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으며 매우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돼 있고 다양한 문화와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원적인 사회와 이란 체제의 경직성,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먼저 개방적인 지리적 조건이나 다원적인 종족적, 사회문화적 특성은 이 지역에 경직된 이데올로기가 뿌리내리기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로 양분될 때도 페르시아라는 제3의 이름을 고대사에 아로새겼다. 이슬람제국 시대에는 유목민 출신의 아랍인이나 변방의 투르크족이 정치·군사적 지배자였지만, 지적으로는 이란인들이 고대 지중해 지역의 지적 자산을 바탕으로 이슬람 사상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그리스 사상을 보존해, 후에 유럽이 자신들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게 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 시대에도 인근 국가들과 달리 영국, 프랑스 중 어느 한 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이 포지션은 냉전 시대에도 이어진다. 이란은 유럽 제국의 뒤를 이은 미국이나 새로운 체제의 리더였던 소련 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 크게 기울지 않은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게다가 이란은 러시아,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간섭을 받았던 경험은 있었지만 직접적인 식민지배를 겪지 않은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다. 국제뉴스 코너의 단골메뉴인 이란에 대한 서구의 집요한 관심과 경계에는 이 나라가 보유한 석유 자원이나 지정학적 가치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장악하지 못한 지역에 대해 느끼는 특별한 정서가 반영돼 있기도 하다. 이란에 대한 서구의 이 집요한 관심과 개입에서 극도로 경직된 이념으로 무장한 체제가 등장한 배경을 짐작해볼 수 있다. 1979년 이란혁명은 반서구, 반제국주의를 표방했고 혁명 이후에는 반미 구호가 경직된 체제를 정당화해주는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지배당한 적 없는 이란에 대한 제국주의적 열망은 인권, 자유, 민주화 담론으로 이어졌으며, 히잡 문제가 초래한 최근 사태를 빌미로 소위 ‘국제사회’의 개입에 대한 호소가 나오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개입과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를 덧붙이자면 개입의 효과는 미지수다. 1990년대 구 유고연방에서의 분쟁에 대한 나토의 개입이 보여주었듯이 무력 개입은 사태를 더 악화하고 인종청소를 유발하는 등 표방한 목표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미 이란 체제를 압박한다는 명분으로 강화한 경제제재는 이란의 국민들이 국가에 더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서방의 의도와 달리 체제는 더욱 굳건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3. 혁명의 나라, 이란

고립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도 있다. 이란은 혁명을 수출하는 거점으로도 간주된다. 과거 볼셰비키혁명 이후의 소련이 세계 피억압 민중의 사상적 조국이자 이들의 혁명을 지원하는 존재였듯이, 이란혁명 이후의 이란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혁명의 나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란 역시 이 지역과의 관계에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투쟁을 이끌었다면 현 이란 체제가 전파하는 혁명의 타도 대상은 서구, 미국, 제국주의, 근대성과 같은 것들이다. 혁명 이후 이란이 채택한 경제 노선이나 사회정책은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 반자본주의 투쟁과는 거리가 있다. 한편 이란 지배세력이 주창하는 반미, 반제, 반서구는 민중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는 측면도 있다. 히잡 문제가 발단이 된 이번 사태에서도 이란 지배세력은 미국, 이스라엘 등 제국주의 세력이 반정부운동을 자극했다는 식의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다.

반제혁명의 기수가 되기 이전에도 다수의 혁명과 쿠데타가 이란 현대사를 장식했다. 1921년 쿠데타를 통해 탄생한 팔레비 왕조는 1979년 이란혁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1953년 모사데그 총리가 시도한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성격의 개혁은 미국과 영국이 개입한 쿠데타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1951년 수상으로 임명된 그는 동시대에 이집트에서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듯이 이란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단행한다. 모사데그 총리 역시 나세르처럼 반제국주의의 기수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역시 나세르를 축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개입한 것처럼 모사데그를 축출하는 데에도 외세가 개입했고, 이는 미국이 냉전 기간 다른 나라에서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개입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이후 ‘백색 혁명(1963-1978)’이라 불리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국왕 모하메드 레자 팔라비가 시도한 개혁 프로그램은 전통적인 이란의 사회체제와 지배계급을 약화하고 사회를 서구화하려는 것이었다. 토지개혁, 여성해방, 산림과 목초지 국유화, 대중교육체제, 노동자들에게 기업의 이윤을 배분하는 제도 등이 당시 시도된 주요 정책들이었다. 결국 이 왕조는 1979년 민주주의 혁명으로 무너지게 된다. 혁명 세력 내부에는 친서구 노선을 걸었던 왕정을 비판하는 반서구화·반제국주의·이슬람주의, 물질주의와 대중문화, 빈곤과 불평등의 현실을 비판하는 반자본주의·사회주의 운동, 권위주의적인 체제와 문화를 비판하는 학생운동·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경향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신정체제가 수립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 세대가 지난 21세기 이란은 2009년 대선 결과에 불복해 전개됐던 ‘녹색운동’, 그리고 2017년과 2019년에 전개된 투쟁 등 주기적인 민중봉기를 마주하게 된다. 2017년 개혁·개방 노선을 표방한 대통령 로하니의 재선 이후 전개된 투쟁은 선거와 개혁을 정당성 기제로 활용해온 이란 체제에 대한 국민의 이반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체제 내부에 있는 개혁 세력에 의한 타협적인 길을 기대했지만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를 이기기 어렵다는 실망감이 국민들을 다시 거리에 나서게 했다.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을 닮았던 2019년 ‘빵 폭동’은 높은 물가 등 민중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배경이었지만, 체제 전반에 대한 거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2022년 다시 민중 봉기가 재현됐는데, 이 3년의 기간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운동이 불가능했던 때이기도 했다. 즉, 이 기간을 괄호로 묶는다면 이란 사회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항구적인 반체제운동의 국면에 돌입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체제 변화가 없이는 저항운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4. 예외적인 이란 대 보편적인 이란

이란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사회가 지닌 특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신정체제, 최고지도자, 히잡, 도덕경찰 등 이슬람과 연관된 용어나 핵개발, 석유와 같은 용어가 이 나라를 특별한 나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란을 이러한 용어들로 바라보는데 길든 우리와 같은 국외자들은 이 나라를 ‘악의 축’이라는 어린애 장난과 같은 용어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지구상에 가장 독특하고 퇴행적인 나라로 보이는 이 나라를 특징짓는 용어들이 비단 이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정체제까지는 아니어도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고, 교리가 개인의 세계관이나 일상을 규율하며, 종교지도자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아주 가까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복장이나 두발 규제도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핵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서방 국가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석유는 현대사회에서 만인의 관심사다. 이번 이란 사태의 중심에 있는 히잡 착용 문제 역시 ‘히잡’이라는 생경한 용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도덕주의적 경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 복장이나 외모 관련 규범 등을 비중 있는 정치적인 사안으로 만드는 것은 가족이나 섹슈얼리티 같은 사적이고 친밀한 사안을 개인이나 집단을 평가하는 의미 있는 잣대로 삼는 도덕주의와 닮아있다. 한국 사회에서 연예인, 정치인, 정당 등에 적용되는 도덕주의가 이란에서는 모든 국민, 특히 여성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란의 ‘도덕 경찰’은 여성, 동성애자 등 소수자나 정치인 등의 사적 영역을 정치적인 무기나 상업적인 소재로 활용하는 한국 사회 언론이나 검찰과 닮아 있다.

또한 히잡, 이슬람 등에 의해 가려진 이란 사회의 보편적인 흐름을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이란 청년세대는 자국의 기성세대 못지않게 세계 다른 지역의 문화, 그리고 그곳의 동년배들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족이나 이웃의 문화나 그들과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인터넷의 정보와 대화상대들의 생각이다. 세계가 훨씬 더 좁아진 탓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의 준거집단과 함께 이들에게는 남녀분리 체계, 의무적인 종교교육, 엄격한 복장 규정과 같은 현실세계의 규범이 있다. 이 양자 간의 괴리는 이미 수십 년 된 현상이다. 1980년대 위성 안테나를 통해 유럽을 접하면서 생긴 의식과 현실 간의 괴리가 이제 보다 긴밀하고 쌍방향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더 확대된 것이다.

5. 여성이 주도하는 미시권력에 대한 투쟁

이번 이란의 반정부시위는 여러 면에서 기존의 저항운동과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성이 중심이 된 운동이라는 점과 일상이 주된 사안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지금까지 여성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은 다른 투쟁에 묻히기 쉬웠지만, 최근엔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이 보다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고, 이전과 달리 투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여성들은 여성해방운동만이 아니라 체제 전복의 기수가 됐다.

이란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타히리의 사례는 현재의 저항운동이 이란 여성운동의 장구한 역사와 맥이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시인이자 여성운동가였고 이란에서 창설된 바하이교의 초대 18사도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는 1848년에 열린 바하이교 종교회의 자리에서의 감동적인 연설로 성인으로 추앙됐지만, 당시 회의 석상에서 히잡을 벗어던진 일이 빌미가 돼 훗날 이란 왕정에 의해 처형당하게 된다. 처형 직전 그가 한 말이다. “당신들은 원하면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해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히잡 착용 의무화는 혁명의 대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 중 하나였다. 그래서 히잡 착용 거부는 이 운동이 이란혁명이 수립한 체제의 근간을 부정하는 체제 차원의 운동임을 말해준다. 미셸 푸코의 개념을 차용한다면 이 운동은 미시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여성의 복장만이 아니라 남성을 포함해 시민의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의 작용에 반기를 든 것이다. 신정체제가 부과하는 억압적인 규정만이 아니라 이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억압적인 관행도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전 민중봉기에서는 경제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이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면 이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이 갈등과 대결의 장이다. 1979년 이란혁명이 탈물질적 가치와 탈중심적인 실천 등으로 포스트모던 사회운동의 전형으로 각광받았다면, 새로운 이란혁명 역시 다른 측면에서 근대성을 넘어서는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저항은 미학적인 측면을 지니기도 한다. 신정체제가 가린 여성과 그들의 몸은 이제 염색한 머리, 빨간 립스틱, 화려한 의상, 짧게 자른 머리 등을 통해 이제 과감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채색만이 허용되는 학교 문화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색의 해방’은 지금도 여전히 무채색이 점령하고 있는 한국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높은 곳에 올라 히잡을 벗어 막대기에 걸고 흔들거나 히잡을 불태우고, 공공장소에서 머리를 자르거나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식의 ‘사회적 공연’도 혁명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 공연은 이번 시위의 대표적인 구호인 여성, 삶, 자유를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외양의 변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색의 해방과 몸의 자유는 자유의 일부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치적으로 구속된 삶에서 벗어난 또 다른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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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스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의 모든 정치 및 경제관계를 단절하라

    재한이란인협회
    سایت انجمن ایرانیان مقیم کره جنوبی
    https://www.ir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