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금속노조의 반란 새로운 노동자정당 건설 가능한가?

남아공 금속노조는 2004년 말 ANC 정권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자본과 야합했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선언했다. 남아공의 대표적 노동운동 연구자이자 비트바터스란트 대학의 사회학과 석좌교수인 에드워드 웹스터(Edward Webster)가 이 예민한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다음은 AfricaFiles At Issue Ezine, Vol. 17 (2015 7~12월)에 실린 그의 논문 을 요약한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금속노조(Numsa)는 지난해 3월 9일 잘못된 정부 정책에 맞서 청년 일자리를 위한 총파업을 벌였다. [출처: Numsa]

2012년 8월 16일 마리카나 학살은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파업의 물결을 촉발했고, 서 케이프 농촌지역에서 일어난 유례없는 봉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경제자유전선(Economic Freedom Front: EEF)의 극적인 의회진입은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2013년 12월 금속노조(NUMSA: National Union of Metal Workers in South Africa)가 ANC 지지를 철회하기로 한 역사적 결정과 통일전선(United Front)과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Movement for Socialism)을 결성하기로 한 금속노조 지도부의 결정은 보다 장기적으로 중요할 것인가? 그 당시 좌파의 대중적 견해는 그러했다. 금속노조의 시대(Numsa Moment)는 ANC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호함의 종식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014년 11월 금속노조가 남아공노총(COSATU)에서 축출되고, 이어 2015년 3월 장기간 사무총장이었던 즈웰리지마 바비(Zwelinzima Vavi)가 축출됐지만, Numsa Moment에 대한 열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7월 코사투 특별총회에서 위원장 시두모 들라미니(Sidumo Dlamini)가 조심스럽게 선발한 대의원들에게서 지지를 얻는 것처럼 보이자, 보다 성찰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금속노조에 대항하는 친ANC 노조인 리무사(남아공 해방금속노조: Liberated Metalworkers Union of South Africa - LIMUSA)가 결성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통일전선의 전국적 출범이 지연되고 전략을 둘러싼 차이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Numsa Moment에 대한 좀 더 신중한 평가가 우세해졌다.

노동운동의 전환점?

마리카나와 Numsa Moment는 다음 단계 해방투쟁의 시작인가 아니면 한 때 강력했던 노동운동의 해체를 상징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남아공 노동운동의 격동적 역사와 Numsa 정치의 대립적 성격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남아공 역사에서 대중파업은 힘의 시험으로서 정치와 사회계급 간의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정치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세 번의 파업을 전환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로, 1922년 백인 광산노동자들이 3개월 동안 파업에 들어갔고, 남아공은 내전상태에 이르렀다. 이 파업의 결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운동과 백인 노동자들 간의 계급동맹이 형성됐고, 이는 현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노동체제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두 번째로, 1946년 흑인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이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이 파업은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지속적 도시화의 결과였다.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위협을 이용해 백인지배의 강령으로 선거에 나서 1948년 총선에 승리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흑인 노동자들과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동맹이 공고화됐다는 사실이며, 1955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최근 결성된 남아프리카 노동조합회의(SACTU)의 회의동맹(Congress Alliance)으로 구체화됐다.

세 번째로, 1973년 더반 흑인노동자들의 대중파업도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이 파업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정점에서 일어났고, 이 때는 남아공에서 파업은 불가능하다고 널리 믿어지던 시기였다. 파업은 현대적 노동운동의 토대가 됐고, 거의 모든 주요 도시 지역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1973년 파업이 노사관계의 재편과 사상 최초로 독립적인 노동운동의 출현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새로운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노동정치 질서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2012년 8월 15일 마리카나에서 파업중인 광산노동자 34명의 학살이었다.

노동계급 정치?

노동자정당은 1973년 이후 남아공 노동운동에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처음으로 정식화한 것은 Cosatu의 전신인 남아프리카 노동조합연맹(African Trade Unions: Fosatu)의 총서기 조 포스터(Jo Foster)가 1882년 행한 연설이었다. 그는 Fosatu의 과제가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기 위해 민중투쟁 내에 노동계급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아공 공산당(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SACP)은 포스터의 연설을 노동자들의 역사적인 정치적 대표로서 SACP의 전위적 역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 SACP는 Fosatu가 생디칼리즘을 추구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은 정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남아공 금속노동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현장위원운동(shop steward movement)이 등장했고, 이는 노동자통제 개념에 뿌리를 뒀다. 이 운동은 1981~82년에 시작돼, 현장의 문제를 넘어 노동력 재생산과 관련된 보다 광범한 이슈로 넘어갔다. 이들의 투쟁은 카틀레홍의 판자촌 해체에 대한 저항에서 연금에 대한 노동자통제의 요구까지 다양했다. 이는 1984년 11월 가우텡에서 노조, 학생, 주민들의 주도로 일어난 대중 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노동조합은 공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의 부문들까지 확장했고,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중요하게 그들은 조합원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답을 추구하면서 전국적 수준의 정치적 대응을 모색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은 노동조직을 민족주의운동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그 당시 필자는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모순이 노동계급정치를 낳았고, 이제 조직 노동계급이 직면한 핵심적 이슈는 이 정치의 형식과 내용”이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노동계급정치에 관한 논쟁은 1980년대 중반 민족해방투쟁과 ANC가 주도하는 민주화 이행에 밀렸다. 사실 1984년 남아공 공산당은 민주적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바꿔, 노동조합원들을 당에 가입시키기 시작했다.

1985년 12월 두 가지 지배적인 정치적 전통, 즉 자유헌장(Freedom Charter) 중심으로 동원되는 민족민주적 전통과 강력한 현장구조 건설을 강조하는 Fosatu의 노동자주의적 전통의 ‘역사적 타협’으로서 Cosatu가 출범했다. 두 가지 전통의 이런 결합으로 Cosatu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연합정치에 반대하는 진영은 새로운 정치적 방향이 잘못된 것이고 이런 연합정치을 성급하게 추진하다가 수년간 수고한 조직사업이 유실되고 노동자들은 다시 민주적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Numsa의 전략

연합정치와 1994년 남아공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서 ANC 연합의 승리 이후 Cosatu의 초점은 현장이슈에서 벗어나 경제 및 산업정책에 집중했다. Numsa 지도부는 전략적 조합주의를 수용했고, 이는 국가경제발전-노동협의회(Nedlac)와 같은 노사정 구조, 즉 최고위 수준의 사회적 대화포럼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진보적 경쟁력이란 개념도 수용했다. 이 개념은 노동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전지구적 경쟁에 적응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한 보다 전략적인 개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저항의 문화를 생산성의 문화로 대체하면서 Numsa에서 조직적 위기가 발생했다. 이 전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전략을 채택한 과정, 그 복잡성과 노동조합 내 역량의 부재, 내적 일관성에 대한 의구심, 노동강도 강화와 실업의 가능성 등이 이유로 제시됐다.

Numsa의 새로운 전략은 본질적으로 조합주의적 의제(corporatist agenda)였다. 그 목표는 새 정부와의 ‘재건협정’과 노사정 삼자구조 참여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독자적 정당 개념은 죽지 않았다. 1993년 7월 Numsa 3차 총회는 새 정부로부터 독립성의 필요성을 다시 주장했고, 노동계급이 사회주의를 향해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에 관한 새로운 강령을 개발할 것을 촉구했다. 이 시도는 노동계급 정당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총회는 선포했다.

ANC가 1996년 성장고용분배(GEAR) 전략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수용하자, Cosatu와 SCAP 일부와 직접 대립하게 됐다. 이로 인해 좌파는 ANC에서 점차 주변화됐고, 긴장이 높아졌다. Cosatu 총서기 즈웰리지마 바비는 ANC 지도부를 “약탈적 엘리트”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ANC에 대한 환멸로 Numsa 내에서 노동자당에 관한 구상이 다시 등장했다.

광범한 대중 사이에서 노동자당에 대한지지 정도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2014년 2~3월에 전국적인 성인대상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놀랍게도, 남아공 성인의 1/3이 새로운 정당, 노동자당 또는 노동당이 현재 남아공이 직면한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응답했다. (반면 아마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입장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입장은 각각 15%와 13%였다.)

2012년 Cosatu의 표본 현장위원들에게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만약 Cosatu가 노동당을 결성해 총선에 나선다면 그런 당에 투표하겠는가? 65%가 그러겠다고 응답했다. 2014년 조사에서 정규직의 69%가 동의를 표했다(30%는 확실히, 29%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응답했다).

노동자정당?

Numsa는 조심스럽게 노동자 정당 문제에 접근했다. 독립 이후 포스트 식민 아프리카의 노동조합들은 처음에 민족해방을 주도한 집권정당에 복종했다. 그러나 점차 주변화되자 잠비아와 짐바브웨 같은 나라의 노동조합들은 정부에 반대해 독자적 정당을 결성했다. 잠비아의 다당제 민주주의운동(Movement for Multiparty Democracy)은 선거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포스트 식민주의 아프리카는 정치적 반대의 용인 수준이 낮았다. 선진 민주주의와는 달리, 새 정부들은 국가 건설의 복잡한 과제를 담당했다. 그 결과 우리와 그들이란 적대적 문화가 형성되고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야당들은 흔히 “반혁명적” 또는 “제국주의적”이란 비난을 받았다. 노동조합이 지지한 민주변화운동(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도 짐바브웨 국가가 가한 조직적 폭력의 집중적 대상이 됐다.

남아공은 포스트 식민 아프리카에서 특별한 사례일까? 상대적으로 커다란 산업적 노동계급, 강력한 시민사회조직, 그리고 현장 민주주주의 정치적 문화를 가진 독립적 노동조합운동의 존재로 노동자당의 생존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사실이다. 월 8000란트 이하의 수입 계층, 초중등 교육, 주로 18~49세의 연령에서 지지율이 가장 높았다. 반면 백인, 인도인, 유색인종 사이에서 지지도는 가장 낮았고, 월 8000란트 이상 수입 계층과 고등교육, 노년층에서 지지가 낮았다.

이런 여론조사는 잠재적 지지 기반의 규모를 보여주며, 개괄적으로 계급적 특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남아공에서 노동계급정치의 형태와 내용은 어떠할까? 노동계급 지역공동체, 지식인, 소농민과 연계한 브라질 노동자당(PT)처럼 광범한 노동자당일까? 아니면 조직노동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영국 노동당 유형의 보다 전통적인 노동당일까? SACP와 같은 부활한 맑스-레닌주의 정당일까? 통일전선 결성 과정에서 뭔가 다른 형태의 정당으로 등장할 것인가?

2014년 12월 노동조합과 지역공동체 투쟁을 연결시킬 구상으로 통일전선 전국사업위원회가 수립됐다. 비록 전국적으로 공식 출범하지 않았지만, 250여개 조직들이 느슨한 형태로 조직됐다. 이들은 특히 기후변화와 생태사회주의 요구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표했다. 그러나 정치적 방향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1980년대 통합민주전선(UDF)처럼 광범한 전선체일까? 노동자정당을 향한 한 단계인가 아니면 광범한 지역기반 조직들을 연결하는 자주적 단체인가? 선거정치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

지난 10여년간 등장한 지역 수준 전투성의 다층적 표현은 파편적 전투성이며, 1980년대 초중반의 사회운동 조합주의와는 다르다. 현재 지역투쟁과 Numsa의 연계는 취약하다. 80%에 이르는 이 지역공동체의 높은 실업률 때문에 파업에서 집단적 연대를 유지하려는 고용 노동자와 일하려는 실업자 간의 갈등이 생긴다. 이런 현상은 루스텐버그의 플래티늄 광산의 파업 시에 아주 극적으로 나타났다.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강제적 전술(혹자는 폭력적 연대라고 묘사했다)은 노동자들의 민주적 전통과 충돌한다.

조직노동의 주변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조직형태와 권력자원이 등장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리카나 파업은 노동조합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의 결과였다.

노동자들의 주체성, 보다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의 독자적 위원회가 마리카나 학살을 둘러싼 특징이다. 마리카나 위원회는 이런 독립적 조직들이 등장한 루스텐버그 플래티늄 벨트의 파업 물결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다. 산업사회학은 일반적으로 공식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조사에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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