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대안사회 전략이 될 수 없는 이유

[기고] 기본소득론 비판

기본소득론은 사회(복지)정책의 핵심 이슈중 하나로 등장하였다. 하나의 담론수준에서 제기되던 것이 구체적인 운동을 발전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성남시는 청년배당을 전격 도입하였는데, 이는 기본소득의 아이디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일부 좌파그룹에서는 코뮌사회(communist community)에 도달하기 위한 이행기 전략으로서 기본소득론을 제출하였다. 노동당과 녹색당 등이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사회복지 확충과 대안사회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공약으로 설정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기본소득 계획은 확산되는 추세다. 스위스는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으며, 핀란드, 네덜란드 등에서도 복지개혁을 위한 시도로서 기본소득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일부 보수진영도 기본소득이 근로유인(work incentive)을 제고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지지를 표하고 있다. 바야흐로 기본소득론이 소득보장제도의 개혁을 위한 주요 아젠다로 부상한 것이다.

이 글은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기 위한 기본소득론1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기본소득론이 인간의 욕구(needs)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체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라는 점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해방을 위한 기획은 기본소득이 아닌 전통적 소득보장제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기본소득은 사회적급여가 아니다

기본소득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는 것이다.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는 연금, 실업급여, 산재급여, 공공부조 등으로, 자본주의체제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위험을 예방하고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사회(복지)정책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련된 국가의 현물과 현금지원 등을 사회적급여(Social Benefit)라 부른다. 그러므로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고자 기획된 기본소득론이 사회(복지)정책에서 말하는 사회적급여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는 ‘기본소득이 개인의 욕구에 기초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욕구는 인간의 생존과 존엄과 직결되는 것으로, 의식주 및 건강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욕구’(social needs)를 뜻한다. 오랫동안 사회정책 학자들은 인간의 욕구(needs)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것이‘사회적 성격’을 지니는지 탐구하였다. 이는 욕구를 단순히 선호(preference)와 만족으로 치환하는 주류경제학의 전통과 구별된다. 대표적으로 도얄과 고프(Doyal & Gough)는 인간은 어떠한 공통된 인간본성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의 욕구는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의 집합적 개입을 통한 사회(복지)정책의 필요성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사회(복지)정책에서 인간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급여를 설계할 때, 2가지 대별되는 정책원리를 고려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보편주의: 인간의 욕구만을 식별하여 급여를 실시하는 방식
- 선별주의: 인간의 욕구를 자산조사(means-tested/or needs-tested)를 통해 판별하여 급여를 실시하는 방식


‘보편주의’는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과 달리, 급여의 지급대상은 ‘욕구가 있는 사람’에게 한정된다. 예를 들면 건강보험의 경우 아픈 사람(욕구가 있는 대상)에게만 급여를 주지, 아프지 않는 사람(욕구가 없는 대상)에게 실시하진 않는다. 이는 개인의 소득 및 자산과 관계없이 욕구의 존재만을 식별할 뿐 자산조사를 실시하지 않으므로 보편주의 원칙에 부합한다. 기본소득과 가장 가까운 형태로 거론되는 아동수당도 마찬가지다. 아동수당도 아동이 있는 부모에게만 급여를 준다. 개인의 소득과 부(富)가 급여자격을 판별하는 기준이 아니므로 아동수당도 보편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보편주의적 제도라고 칭송받는 기본소득은 어떠한가? 기본소득은 개인의 욕구를 식별하여 소득지원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급여라고 보기 어렵다. 이를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기본소득이 욕구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기본생활을 위한 욕구’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그 욕구의 정도는 개인이 국가로부터 할당 받는 금액과 등가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부와 소득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급여를 실시하는 기본소득의 대상은 전통적 사회적 급여와 달리 ‘기본생활의 욕구가 없는 자’(기본소득금액 보다 더 많은 노동수입을 가진 자)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급여지급 대상에서 ‘욕구가 있는 자’만을 식별하고 ‘욕구가 없는 자’를 배제하는 보편주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사회적 급여’가 아니다. 오히려 알레스카의 경우처럼 국가가 거둔 사회적 부(富)를 일정한 기준하에 시민에게 할당해 주는 개념에 더 가깝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시민배당’이라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인간의 욕구에 기초하지 않은 기본소득이 재분배정책일순 있어도 사회(복지)정책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욕구가 없는 자’에 대한 소득지원, 과연 정당한가?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개인의 소득과 자산, 그리고 노동유무와 관계없이 실시하는 기본소득이 보편적 시민권에 완전히 부합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이들은 전통적 소득보장제도가 탈산업화 국면에서 한계에 직면하였다고 비판한다. 사회보험의 경우 보험료를 정기적으로 납입해야 급여자격이 발생하기 때문에 불안정노동이 확산된 국면에서 급여에서 배제되는 계층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부조도 마찬가지다. 자산조사에 기초하는 까닭에 빈곤층에게 사회적 낙인감(stigma)을 준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제공하는 까닭에 기존 사회적 급여보다 우월한 형태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물론 기본소득은 소득의 많고 적음과 노동유무와 관련이 없고 자산조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론에 공감하는 것도 이런 장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욕구가 없는 자’에게도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전통적 사회적 급여는 욕구가 있는 자를 식별(또는 판별)하여 지원함으로써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욕구는 개인의 생존과 존엄과 관련된 것으로, 해당 사회에서 승인된 시민생활의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소득과 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회에서 승인된 보편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시민은 국가에게 사회적 급여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사회권 차원에서 보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빈곤층, 실업자, 노령인구, 산업재해노동자, 장애인 등은 해당 사회에서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 욕구의 결핍 상태로 보았음으로, 국가의 사회지출은 사회적 정의에 부합하였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사회적 위험이나 욕구와 무관한 형태여서 사회적 정당성의 획득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는 2010년 ‘무상급식’의 보편주의/선별주의 논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무상급식 논쟁의 경우 학생의 점심식사를 해당 사회가 해결해야 할 보편적 욕구로 인정할 것이냐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면, 기본소득론의 경우 애초부터 인간의 특정한 욕구와는 무관하게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재분배 시스템 차원에서도 기본소득은 상당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기존 사회적 급여의 경우 사회적 자원이 국가를 통해 ‘욕구가 없는 자’에게서 ‘욕구가 있는 자’로 재분배된다. 주로 ‘욕구가 없는 자’에게서 조성된 재원을 ‘욕구가 있는 자’에게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전통적 사회적 급여는 사회적 정의에 부합한다. 예를 들면, 소득비례연금의 경우 사회적 자원이 노동인구에서 노인인구로 이전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욕구가 없는 자에게도 소득을 지원함으로써 이와 같은 재분배 시스템을 왜곡시킨다. 국가의 한정된 재원에서 ‘욕구가 없는 자’에게 사회적 지출을 실시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고 볼 수 있다. 기본소득론이 사회적 정당성을 갖추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인 셈이다.

기본소득론에서 제시하는 탈상품화와 근로유인은 상충되는 개념이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을 개인에게 소득과 자산, 그리고 노동유무에 관계없이 기본소득을 보장함으로써 개인의 노동 시간 및 직업 선택에서 자유를 부여하고 유급노동(paid work)이 아닌 무급노동(unpaid work)을 선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일부 좌파그룹은 기본소득계획을 대안사회를 위한 이행전략으로 제출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탈상품화(de-commodication)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코뮌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주요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탈상품화를 얘기하면서도, 기본소득이 근로유인을 저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는 주장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강남훈은 ‘기본소득 도입 모델과 경제적 효과’라는 논문에서 기본소득이 무조건적으로 급여를 지급하기 때문에 노동력의 탈상품화 기능이 존재한다면서도, 공공부조보다 근로유인이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동시에 피력하였다.

근로유인(work incentive)은 실업급여나 공공부조 수급자가 저임금 취업보다 복지급여를 선택하는 현상을 비난하기 위해 신고전파 경제학자와 빈곤문화론자들이 선호하는 개념이다. 저임금 노동과 복지급여간에 실업의 덫(unemployment trap)이 존재한다는 건데, 그 비판의 초점은 빈곤층과 장기실업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와 관대한 소득보장제도에 맞춰졌다. 관대한 소득보장제도가 빈곤층과 장기실업자의 노동시장 진입을 단념시키고 복지급여에 안주하게 만드는 유인구조(work disincentive)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공부조 수급자중 상당수가 자녀를 양육해야할 한부모이거나 근로능력이 떨어지는 계층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나 양질의 일자리가 공급되지 않는 노동시장의 구조 따위는 애초에 이들의 관심사 밖이다. 따라서 관대한 복지시스템은 철폐되어야 마땅하고 복지급여 수급자에 대한 구직관련 의무는 보다 강화되어야 했다. 명백히 노동력의 (재)상품화(re-commodication)를 의도하기 위한 것으로, 근로유인은 탈상품화와 상충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적극 주장하면서 동시에 근로유인을 어필하는 것은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다.

기본소득은 복지시장화와 노동력의 (재)상품화를 초래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탈상품화 기능을 갖추고 있는지 아니면 (재)상품화를 의미하는 근로유인 효과가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탈상품화에 대해 짚어볼 것이다.

일단, 급여의 자격기준 만으로 탈상품화 기능을 갖추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오히려 복지급여 개편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의도와 복지급여 시스템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특정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수당은 특정 비용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지 임금소득의 상실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동수당과 같은 사회수당은 ‘탈상품화’ 기능과 무관하다. 기본소득과 유사한 형태로 거론되고 있는 부의 소득세([ Negative Income Tax)나 미국의 EITC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빈곤층의 근로유인(work incentive) 제고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노동력의 재상품화를 위한 조세지출(tax expenditures)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처럼 자격조건이 관대하다는 이유만으로 탈상품화 기능을 갖추고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는 강력한 탈상품화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에스핑 앤더슨(Esping-Anderson)은 탈상품화를 개인의 노동력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 사회적 위험(실업, 노령, 산업재해 등) 발생시 개인이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정도로 정의하였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사회보험과 같은 소득대체(income replacement)의 성격을 가진 사회적급여다. 소득대체는 사회적 위험이 발생했을 때 개인의 임금상실을 국가가 보전해 주는 것으로 정의된다. 일반적으로 소득대체율이 높을수록 개인의 시장에 대한 의존도는 축소된다. 예를 들면 완전 납입을 가정했을 때 소득대체율이 40%로 설계된 국민연금제도 하에서 최종 소득이 250만원인 고령노동자가 은퇴한다면 월 100만원이 제공된다. 만약에 소득대체율이 더욱 개선된다면 국민연금의 탈상품화 효과는 더욱 배가된다. 국민연금의 급여가 후할수록 수급자는 은퇴 후에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동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관대해질수록 노후보장영역에서 민간연금을 위축시키는 효과(crowding-out effect)가 발생하고, 고령자들이 노동시장에서 퇴출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공공부조나 실업급여도 마찬가지다. 소득보장을 실시함으로써 빈곤층이나 실업자가 시장의 압력에 노출되는 것을 예방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공공부조나 실업급여는 수급자를 무직(jobless) 상태로 가정하여 설계된 급여(‘out-of-work’ benefit)라는 점이다. 이는 수급지위 자체가 노동력이 탈상품화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런 까닭에 실업급여나 공공부조에는 자본주의체제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탈상품화 기능을 억제하고자 수급자에게 구직활동 의무나 자활·고용서비스 참여를 강제하는 재상품화 시스템이 이식되어 있다. 따라서 급여수준이 높아지거나 구직관련의무를 비롯한 조건부레짐(conditionality regime)이 해체된다면 탈상품화 효과는 더욱 배가될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의 구조와 그 행위자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실업급여나 공공부조가 관대할수록 한계노동집단은 열악한 저임금 일자리 대신에 복지급여를 선택할 여지가 주어지는 것이다. 노동시장 유연화에 명백히 역행하는 것으로, 복지급여의 근로유인 저하(work disincentive)가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는 배경인 셈이다.

기본소득의 경우 전통적 소득보장제도와 달리 ‘탈상품화 기능’과 관련이 없다. 개인의 욕구에 관계없이 정액으로 지급되고, 소득대체기능과 무관하며, 무직에 기초한 급여(‘out-of-work’ benefit)도 아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개인의 노동력에 대한 ‘탈상품화 기능’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부수적인 차원에서 노동력의 탈상품화와 (재)상품화 효과가 모두 파생될 수 있다. 우선 탈상품화 효과는 기본소득에 절대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개인의 욕구와 취향에 따라 무급노동을 택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선택을 하는 일부 집단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기본소득은 정액(flat rate)형이며 유급노동 종사자에게도 지급되므로 일부 집단에서 근로유인(work incentive)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기존의 복지급여 수급자나 비경제활동인구도 기본소득을 발판으로 유급 노동시장으로 진출하거나 근로시간을 확대할 수 있는 셈이다.

기본소득 지지자의 바람처럼 기본소득이 전통적 사회보장제도를 모두 대체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탈상품화 효과는 약화되고 재상품화 효과는 강화될 공산이 크다. 이 경우 기본소득 이외엔 기타 나머지 욕구를 해결할 사회적 급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개인은 시장에서 서비스를 직접 구입하거나 가족에게 의존해야 한다. 기본소득의 금액이 낮아져도 (재)상품화 효과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개인은 낮은 기본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유급노동에 참여하거나 근로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만큼 초과노동에 직면하거나 원치 않은 노동을 강요받을 수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소망과는 다르게 기본소득 계획은 노동력의 (재)상품화와 복지시장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진영이 기본소득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의도와 무관치 않다. 따라서 노동시장 유연화와 복지시장화를 초래할 수 있는 기본소득론은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기본소득 계획보다 기존 소득보장제도의 재편이 필요하다.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와 축소는 복지시장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달성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철저한 기획 속에서 집행되고 있다. 사회보장의 민영화를 통해 개인의 시장 의존도를 높이고, 비경제활동인구 등 노동력의 재상품화를 통해 노동시장에서 저임금노동의 인력풀(pool)을 확대하여 서비스경제하에서 자본축적을 원활하게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 만큼 시민들은 사회적 위험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생존과 같은 1차적인 욕구를 해결해야할 처지에 내몰려 있다.

기본소득론은 이런 사회보장제도의 잔여화를 추구하는 흐름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등장했다. 하지만 자산과 부, 그리고 노동유무와 관계없이 시민에게 정액 소득을 보장한다는 그 참신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한계점을 노정하고 있다. 인간의 사회적위험과 욕구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갖추기 어렵고 전통적 사회적 급여의 재분배 시스템을 왜곡시킨다. 또한 기본소득은 탈상품화 기능과 무관하며, 오히려 근로유인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 점에서 해방을 위한 기획으로서 기본소득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해방을 위한 기획을 기본소득이 아닌 전통적 소득보장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소득보장제도는 기본소득과 달리 인간의 욕구와 사회적 위험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노동소외가 소멸된 코뮌사회에서 분배를 위한 철칙은 인간의 욕구(needs)다. 코뮌사회가 인간의 욕구에 비례하여 사회적 자원이 재분배된다는 점에서 소득보장제도의 운영원리는 일정 부분 이에 부합한다. 자본주의체제에서도 인간의 욕구는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므로 해당 사회가 해결해야 할 목표로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자에 의해 제기되는 근로유인과 시장화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소득보장제도에는 ‘탈상품화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탈상품화는 사회보장 부문의 시장화 및 노동시장 유연화와 상충되는 개념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소득보장제도의 확충은 일반시장 및 노동시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실업급여나 공공부조가 관대해지면 노동시장에서 저임금 노동력 풀(pool)을 복지급여로 흡수할 수 있다. 탈산업화 국면에서 저임금에 의존하는 자본축적 과정에 상당한 장애조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체제의 철직인 공공부조의 열등처우 원칙(principle the less eligibility)2을 허물기 위해 기초생활보장급여의 현실화 운동을 전개한다거나, 실업급여나 공공부조에 이식된 재상품화 시스템을 해체하기 위한 운동을 구상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 소득보장제도가 가지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이 직면하는 사회적 위험을 규명하고, 인간의 생존과 존엄과 관련된 욕구를 보편화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적 위기가 특정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필수적인 욕구의 목록을 사회화하기 위한 노력이며, 사회권 차원에서 시민의 복지권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다. 이를 통해 소득보장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사회·경제적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주

1.물론 현재 노동당이나 녹색당에서 제출한 기본소득 계획은 명시적으로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 제안된 취지가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는 것이며, 현재 서구 복지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본소득 도입 계획도 이런 제안에 기초해 있다. 또한 기본소득 자체가 전통적 소득보장제도와는 운영원리와 상반됨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은 전통적 소득보장제도의 위축을 가져올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통적 소득보장제도를 대체하는 것으로 간주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공공부조 수급자의 처우는 노동시장의 최하위 노동자의 생활보다 더 높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