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륵, 야권 연대

미디어 정치에 갇힌 정당 정치의 붕괴

진흙탕 공천 싸움과 실종된 정당 정치

“죽여 버려!” 영화 속 대사보다 더 실감 나는 이 통화 내용의 주인공은 결국 공천에서 탈락했다. 대통령을 ‘누님’이라고 부를 정도라는 실세 중의 실세인 그도 선거의 벽을 넘을 순 없었는가 보다. 피부가 거칠면 화장발도 안 받는 법. 새로운 분칠을 하기엔 그의 말이 남긴 흉터가 너무 컸다.

이제 총선이 불과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그러나 모든 매체를 눈 씻고 뒤져 봐도 새로운 국가 비전이나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진흙탕 계파 싸움만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정책이 별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어차피 선거 이후 장롱으로 들어갈 것을 그들도 알고 국민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새로운 사람’만이 그 차이를 나타내는 구분점이 된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진실한 사람” 이야기가 모든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진박 마케팅, 살생부 사태, 공천관리심의위원회의 파행, 비박 공천 탈락 등등은 모두 누구를 끌어내리고 누구를 새로 앉힐 것인가를 두고 벌인 ‘전쟁’이었다. 더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다만 새 인물을 앉히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박힌 돌을 어떻게 판을 깨지 않고 빼낼 것인가가 문제였다. 바로 ‘친노 솎아 내기’다. 모든 매체가 몇몇 인물을 골라 그 기준을 설정했고, 실권을 쥔 김종인 위원장은 그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쳐 냈다.

돌이켜 보면 인물 중심의 ‘판갈이’ 담론은 매번 선거 때마다 유행했다. 이런 선거 담론의 한계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새 인물에 대한 희망을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자주 회자하는 ‘논개 작전’, ‘자객 공천’, ‘공천 학살’, ‘컷오프’ 등의 자극적인 말들은 미래 지향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쳐 낼 적을 만들고 그것을 희생양 삼는다.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정당 정치 붕괴의 뒷자리

그런데 이런 말은 정치인들이 먼저 만들어 낸 게 아니다. 최근 유행하는 정치 미디어들이 만든 것이다. 종일 반복되는 종편 정치 평론가들의 자극적인 주장엔 객관적 분석과 주관적 희망이 구분 없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들과 반대 진영에서 야당지를 표방하는 몇몇 팟캐스트들과 SNS의 누리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과거 미디어는 ‘땡전 뉴스’처럼 일방적으로 권력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였다. 그런데 지금의 미디어 정치는 일방적이지 않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이 평론가들의 입을 거쳐 실시간 전파된다. 정치인들이 SNS에서 내뱉은 한마디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통은 진일보했다. 이제 심각한 인신공격만 아니면 권력자와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것쯤은 통용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소통의 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편견에 가득 찬 억측과 서로에 대한 비아냥이 난무한다. ‘디스한다’라는 신조어는 이런 사회 현상을 반영한다. 정치가 의존한 미디어는 부메랑이 되어 정치를 옥죈다.

그럼 정당 정치가 사라진 문제의 원인은 미디어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다. 정책 실패를 책임지지 않는 정치가 정당 정치의 붕괴를 낳고, 그 빈자리를 ‘동네 정치’와 포퓰리즘적 정치 미디어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이 계속된 경제 실패에도 노골적인 진박 마케팅을 할 수 있었던 건 지지층을 동원하는 이런 ‘동네 정치’와 미디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기형적인 정치 행태들이 외부 인사로 채워진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위원들을 당원에 의해 선출된 당 대표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는 계파 갈등과 기득권 싸움으로 정당 정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져 있음을 보여 주는 징표이다.

우리의 정치는 항상 이런 책임 회피와 ‘동네 정치’만 반복할 수밖에 없을까? 무너진 정당 정치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싹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10년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에는 잘 나오진 않았지만, ‘거리의 정치’ 혹은 ‘현장 정치’라 부를 만한 다른 방식의 정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목소리는 들어 보기 힘들다. 총선 대선 때마다 반복된 야권 연대라는 또 다른 미디어 정치가 이들의 자리마저 잠식했기 때문이다.

계륵으로 전락한 야권 연대

한때 야권 연대는 정권 교체를 이뤘던 강력한 무기였다. 1997년 대선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이 그 예이다. 2002년 대선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의 경우 마지막에 파기되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한 시너지 효과로 당시 노무현 후보는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후 2010년 지방 선거, 2012년 총선에서도 야권 연대는 필승 전략처럼 활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효과는 처음 기대했던 것만큼 결정적이진 못했다. 특히 2012년 총선은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분노한 대중의 기운이 강했던 터라 야권 연대의 승리가 예상됐지만,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용인술로 오히려 새누리당이 과반 넘게 승리했다. 이후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를 거치면서 민주당이 ‘원칙 없는 야권 연대’를 비판하면서 야권 연대는 계륵으로 전락하게 됐다.

이번 총선에서도 야권 연대라는 유령은 다시 등장했다. 지난 1월 민주당과 정의당이 먼저 새누리당 압승 저지와 정권 교체를 위한 명분으로 야권 연대를 의제화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야권 연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 각 당 차원의 공식적인 연대는 어렵고, 지역별 후보 간 단일화 정도만이 가능한 상태다. 한때 야권의 필승 전략으로 여겨진 야권 연대는 이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유가 더민주당 지지자들의 생각처럼 독자 생존 노선을 고수하는 안철수의 고집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김종인 더민주당 비대위 대표의 야권 연대 제안은 실제 야권 연대를 만들기에 시간상으로 불가능한 시점에 불쑥 나온 것으로 국민의당을 분열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결과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6:4로 이기든 5:4:1로 이기든 결과는 똑같다. 어차피 연대가 불가능하면 그냥 눌러 버리는 게 선거판 정치 공학 논리에 더 적합할 수도 있다.

이런 논리는 대중의 사표 심리를 흔들어 군소 정당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지난 야권 연대의 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례로 정의당을 만든 정치 그룹 중 일부가 몸담았던 진보신당이 2010년 서울시장 지방 선거에서 독자 노선으로 선거를 완주했다. 선거 결과 근소한 차이로 한나라당 오세훈에게 서울시장 자리가 돌아갔는데, 당시 야권 지지자들은 선거 패배에 대한 분풀이를 진보신당의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에게 퍼부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정치적 곤경을 가장 많이 경험한 정의당이 더민주당과의 야권 연대에 적극적이다. 사실 더민주당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이제 야권 연대 전략은 정당 간 연합 정치의 신뢰를 높이기보다 서로를 이용한 단순한 정치 공학적 수단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대중을 감동시킬 스토리도 없고 새 인물도 없는 상황에서 야권 연대 전략은 권력 싸움에 이용되는 명분이 되어 버렸다. 서로 나눠 먹기엔 부족하지만 숟가락은 얹어 놓고 포즈는 한 번쯤 취해야 하는 것 말이다.

미디어에 종속된 선거 정치, 양당 구조로 형성된 정당 정치의 위기와 붕괴는 헬조선만의 특징은 아니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 미국이나 유럽 선거에서 드러나는 양상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 트럼프와 샌더스의 돌풍은 주류 지배 질서에 철저히 종속된 미국 정치의 양당 구도에 금을 내고 있다. 긴축으로 수년 전부터 민생 파탄을 경험하고 있는 유럽의 일부 국가에선 수십 년간 지배했던 보수당-사민당 양당 체제가 붕괴했다. 정당 정치의 역사가 오래된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런 현상의 바탕엔 오랜 경제 위기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대중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이렇게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다를 뿐, 우리에게도 정치의 위기가 어떤 형태로 드러날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암울한 경제 속에서 추락하는 대중의 삶은 다른 나라 못지않게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라는 식의 ‘세대교체’나 ‘인물 교체’, ‘솎아 내기’ 경쟁은 다시 한 번 그들만의 미디어 정치 게임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미디어 정치나 정치 공학적 이합집산이 아니라 대중의 분노와 희망을 모아 내는 정치적 결기를 더욱 앙망하는 때이다.

[워커스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