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터전 잃고, 가슴 치는 평택 주민

평택이 소란하다. 부동산 때문이다. 최근 부동산 뉴스는 ‘경기 남부권 교통 요지’인 평택의 신규 아파트 공급을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다. 올해에만 1만 7300가구가 분양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아파트 12개 단지에 달하는 숫자다.

지난해 7월 GS건설이 평택시에 분양한 ‘자이 더 익스프레스’ 1차는 1849가구가 순위 내 청약을 마감했다. 현대건설이 지난해 8월 분양한 ‘힐스테이트 평택’ 1차도 4.01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건설사들이 처음 평택에 주목한 이유는 ‘개발 호재’ 때문이었다. 삼성전자는 2017년까지 평택 고덕 산업 단지에 세계 최대 규모의 395만 제곱미터의 반도체 단지를 건설한다. LG전자 역시 2017년 완공을 목표로 산업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오는 8월에는 KTX 개통을 앞두고 있다. KTX 신평택역은 호남선과 경부선의 환승역이 된다. KTX를 타면 서울 수서역까지 19~20분에 도착할 수 있다.

이러한 장밋빛 전망 뒤에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택 세교동 신흥 마을 주민들이다. 신흥 마을은 현재 건설 중인 KTX 신평택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다. 개발업자들이 눈독 들일 만한 위치다. 이들은 적게는 20년, 많게는 40년 이상 평택에 터를 잡고 살았다. 사우디에서 철근을 나르며 번 돈으로 산 집 한 채, 20년간 건물 청소부터 일용직까지 가리지 않고 일해 번 돈으로 마련한 집 한 채가 전부인 사람들이다. 30여 년을 살며 제2의 고향이 된 평택에서 눈을 감겠거니 생각했던 이들이 집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공동묘지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던 아이가 오십 줄에 들어서 여전히 살고 있는 집. 변변한 슈퍼가 없어 동네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집 한편에 주전부리를 사다 놓고 구멍가게 역할을 했던 동네. 이들은 왜 평택을 떠날 수 없는 것일까. 서둘러 합의하고 마을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데, 왜 여전히 그곳에 머물며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을까. 뜬소문으로만 들었던 개발이 현실화되며, 내몰릴 위기에 처한 이들을 만났다.


“지금까지 여서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여서 사는 게 꿈이유”

“공기 좋고 물 좋고, 그러니까 살기 좋고. 천천히 살기 좋은 동네유. 애들 학교도 가까우니 좋았쥬. 뭐 다른 건 없슈. 사는 데 그거면 된 거 아닌가유.”

김 모(74) 씨가 평택을 찾은 건 30년 전이다. 아이들 학교가 문제였다. 그가 살던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서는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멀었다. 가까운 곳에서 마음 놓고 아이들 학교를 보낼 수 있는 곳. 충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평택시 세교동은 김 씨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건물 청소부터 일용직, 농번기에는 농사일도 했다. 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평택을 “장화 없이는 못 다니는 동네”라고 말했다. 도로가 없어 질퍽한 흙길을 장화로 버텨야 했다. 세교동에서 이사도 여섯 번 다녔다. 옆집에서 또 그 옆집으로. 보증금 50만 원에 월 13만 원이면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을 옮길 때마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중학교에, 중학교에 다니던 딸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평택으로 이사 와 약 20년 만인 2001년에야 방 세 개에 거실이 있는 집을 샀다.

“아이고 웬걸, 방 세 개는 처음 살아 봤쥬. 여기서 살다 여기서 가겠구나 했쥬 뭐. 거실도 있고 마당도 있어 얼마나 좋았던지…. 배추랑 고추 심어 따 먹기도 하고. 텃밭에 조금씩 심어 먹는 재미가 있더만유. 10년 전부터 재개발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슈. 근데 동네 바로 뒤가 공동묘지유. 그래서 묘지도 있는디 설마 여까지 개발되겄냐 했슈.”

설마는 현실이 됐다. 2010년 개발 계획이 구체화되며 김 씨가 사는 동네는 도시 개발 구역으로 지정됐다. 도시 개발 구역 지정 목적은 ‘쾌적한 도시 환경 조성과 다양한 주거 유형 도입을 통한 신 주거 문화 창출’이었다.

“지금도 아들 둘하고 같이 살고 있어유.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생각도 없슈. 그저 공기 좋은 곳에서 심어 놓은 배추 살피고, 가끔 농번기에 소일거리나 하면서 살다 갈 생각이유. 그런데 이렇게 밀고 들어오면 살 수 있나 모르겄슈.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수 있는 곳도 없고. 보상금 그거 몇 푼으로 방 세 개짜리 집을 어디 가서 뭔 수로 구하겄슈.”

조합은 김 씨 소유의 토지 80평을 두고 1억이 조금 넘는 금액을 1차 감정 결과라고 전해 왔다. 이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며 2차 감정을 요구했지만, 300만 원이 올랐을 뿐이다. 현대건설은 현재 세교 도시 개발 지구 2-1 블록에 짓는 ‘힐스테이트 평택 2차’를 분양 중이다. 이 단지는 전용 64~101㎡ 1443가구다. 분양가는 3.3제곱미터당 900만 원대 초반으로 알려졌다. 주민들이 들어가기엔 버거운 가격이다. 결국 김 씨는 합리적 보상을 요구하며 주민 8가구와 세교동 산 48-22번지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조합과 시행사를 상대로 투쟁을 시작했다. 사무실 용도의 컨테이너를 설치한 부지는 주민 소유의 사유지로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 건설 예정지이기도 하다.

“뭘 해야 할지는 몰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쥬. 마음이 아프고 슬퍼유. 우리 땅에 우리가 계속 살겠다는데,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겄슈. 그나마 있던 컨테이너도 괴한이 부숴 버렸슈. 그때 생각만 하면… 요즘 가슴이 펄럭거려 잠을 못 자유.”

주민들은 2인 1조로 돌아가며 컨테이너를 지켰다.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난 1월 30일 새벽, 복면을 쓴 괴한들이 침입해 컨테이너에서 자고 있던 70세의 김 씨를 들어 내동댕이쳤다.

“모르겄슈,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애들 학교 좀 가까운 데 보내려고 들어온 동네에서 열심히만 살았슈. 욕심 안 내고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내 나이 60에야 겨우 집 한 채 마련한 거유. 내 나이 60에… 이제 70이 넘었슈. 어디로 가라는 거유, 나보고….”

“이게 무슨 민주 국가여, 양아치 국가지”

이 모(50) 씨는 김 씨를 아버지라 부른다. 김 씨의 아들과 이 씨는 친구다. 김 씨와 이 씨의 집은 50미터 거리로 채 1분도 안 걸린다. 40년이 넘게 이웃으로 살며 가족처럼 지냈다. 배고프면 김 씨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명절 때 모여 술 한 잔 걸치면, 그대로 자고 가기도 했다. 시골 동네가 그렇듯 이 집이나 저 집이나 사정은 비슷했다.

“8살 때 처음 이사 왔슈. 충남서 살다 왔슈. 초등학교를 가야 하는데 충남에서는 학교가 멀리 있던 거쥬. 부모님이 형하고 나하고 학교 보낼라 평택으로 왔다고 하드만유.”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동네 어른들이 다 아버지였다. 그땐 그랬다.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설움은 친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삭혔다. 살면서 불만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논, 밭 말고는 없는 동네라 뭐 하나 사려면 1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친구들과 뛰놀며 간 길이라 그마저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이 씨에게는 마냥 공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마을이다.

어린 이 씨는 동네를 커다란 놀이터처럼 생각했다. 당시 동네 초입에는 상엿집이 있고 뒷산은 공동묘지였다. 택시 기사들도 무서워 가기 싫어한 동네에서 이 씨는 묘지를 놀이터 삼아 상엿집을 놀이공원 삼아 뛰어다녔다.

“사람 해골 있쥬. 그게 마을에 그냥 굴러다녔어유. 우리는 뭐 무섭거나 그러지도 않고 해골을 축구공처럼 발로 차며 뛰놀았쥬.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유. 그래서 나는 세상 뭐 어지간하면 무서운 게 별로 없었슈. 내가 태어나 처음 겁난 게 바로 저 컨테이너유.”

김 씨가 괴한들에게 들려 내동댕이쳐질 때 함께 컨테이너에 있던 사람이 이 씨다. 10여 명의 남자들이 이 씨를 들고 나갔다. 이 씨가 안 나가려고 몸을 비틀고 저항하자 이 씨의 바지춤까지 들었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혁대가 끊어질 정도였다.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대가리가 뽀개져유. 나를 개처럼 끌고 나가서 집어던졌다니께유. 끌려간 자리 바로 앞에 3미터 정도 땅을 파놨어유. 나 거기 묻히는 줄 알았쥬. 그게 마지막 기억이유. 지금도 그 공포 때문에 수면 유도제 없이 잠을 못 자유.”

여덟 살, 처음 평택을 찾은 소년이 쉰을 넘었다. 소년의 시간은 대부분 평택에서 흐른다. 평택에서 학교와 공장에 다녔으며, 사업을 했고 그 사이 진한 연애도 했다. 묘지 사이를 뛰어다니던 소년은 무서울 것 없이 살았고 그의 나이 쉰에 처음 공포를 알았다. 결혼한 형이 집을 떠난 후 어머니와 사는 집 한 채를 지키려다 겪은 공포다.

“아니 이게 무슨 민주 국가여 여기가. 양아치 국가지. 그것도 현대건설이라는 대기업에서 이게 뭐유 도대체. 지금도 대가리가 뽀개져요, 그 생각하면. 나는 여기서 늙어 죽을 때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저 염병할 것들이 급살 맞게 너무해, 해도 정말 너무 해유.”

이 씨가 원하는 것은 동네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40년을 살아온 동네다. 친구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살아온 동네. 이들에게 이웃은 도심에서 흔히 말하는 이웃과 무게가 다르다. 동네 전체가 가족이고 마을이 공동체다. 이들의 세월을 돈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돈으로 보상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평택을 핫 플레이스로 선전하며 쾌적한 주거 공간으로 만든다는 광고를 내보내는 현대건설은 알고 있을까.

(워커스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