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계기수업 선언참가자, 김미경-강성규 선생님을 만나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 이야기

‘세월호를 기억하는 대구사람들’ 6번째는 세월호 참사 2주기와 광주항쟁 36주년 중간인 지난 5월 12일, 세월호 계기수업 교사선언에 참가한 김미경(경남 거창중, 59세) 선생님, 강성규(대구 호산고, 41세) 선생님과 만났다. 이때는 마침 전교조에서 발행한 416교과서로 세월호 계기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대구시교육청이 해당 교사를 조사하고, 그것도 모자라 장학사 십여 명을 학교로 보내는 등 전교조와 세월호 계기수업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2016년 5월 12일, 인터뷰 장소에서 김미경 선생님과 강성규 선생님. [사진=김선우 세월호대구시민대책위 상황실장]

김미경 선생님은 달서구 세월호 촛불들 사이에서 ‘왕언니’로 불리며,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앞으로 내 남은 생은 세월호 싸움에 건다”라는 말로 후배들을 감동, 긴장시킨 분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미경 선생님은 자신이 사는 동네 인근 달서구 수목원에서 서명을 받고 볼펜과 노란 배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때를 돌아보는 김미경 선생님의 말을 옮겨본다.

“나는 슬픈 일이 있으면 그냥 마음이 힘든 게 아니라 가슴이 정말로 뻐근하게 아픕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기사를 찾아서 읽고, 단원고 아이들 하나하나 올라오는 걸 지켜보면서 정말 여기, 가슴이 빠개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사회교사이자 세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대자보를 쓰고 상자를 들고 수목원에 가서 처음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혼자 시작하고 보니, 혼자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서명용지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해서 김선우 상황실장을 소개받고, 여러분들을 만나면서 지금까지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성규 선생님은 이번에 세월호 계기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대구시교육청으로부터 조사와 탄압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부터 아픔을 함께 나누며 성서 이마트 앞에서 서명을 진행하고, 전교조 대구지부 중등성서지회장과 세월호특별위원회(위원장 김익배/계성중) 위원을 맡아 가족간담회를 비롯한 여러 활동과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대구백화점 앞에서 전교조가 주최한 집회가 있었어요. 그날 사회를 보기도 했었는데, 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저도 참가한 교사들도 무대 아래에 옹기종기 앉아 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그 자리가 마치 팽목항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주변 분들, 아이들과 함께 성서 이마트 앞에서 서명을 받고 촛불을 들었지요. 세월호 참사를 차마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가 불가능했고, 정신없이 거리에 나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게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수업과 체육대회를 마치고 서둘러 인터뷰 자리에 도착한 두 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마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월호 계기수업에 대한 교육청의 탄압 이야기를 먼저 나누었다.

“교육부에서 전교조가 만든 416교과서를 금지한다는 발표 이후, 전국 132명의 교사가 세월호 계기수업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세월호 수업을 늘 해오던 저로서는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마침 전교조 법외노조 탄압으로 손호만 지부장이 직권면직 당하고, 이웃인 박영수 선생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교사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하고 있던 차라 함께 비를 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선언 이후 <한겨레>에 세월호 계기수업이 정당하다는 기고를 했는데, 지면 발표 하루 전인 4월 18일 교육청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5월 11일 수요일 아침, 대구교육청 장학사 13명이 호산고를 찾아왔다. 강성규 선생님 수업을 들은 11개 반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수업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총 11개 문항으로 구성된 설문지는 ▲세월호와 관련하여 수업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수업 전 동의를 구했나요? ▲세월호와 관련한 수업에 동의를 했나요? ▲세월호 관련 수업 중에 했던 활동은 어떤 것이 있나요? ▲세월호 관련 수업으로 어떤 생각 또는 느낌을 가졌는지 써 보세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교육청은 작성자의 정보와 응답 내용을 보호하겠다면서도 설문지 끝에 수업 당시 자신이 속한 모둠 이름과 인원 등을 모두 적게 했고, 당사자인 강성규 선생님에게는 열람만 가능하다며 설문지를 주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설문하겠다고 교육청이 학교에 요청했는데, 2학년 학년부장과 담임선생님 모두 거부하자, 교육청 장학사들이 직접 설문을 하러 왔다고 합니다. 설문을 마치고 아이들을 만났는데, 퉁퉁대면서 난리인 거예요. ‘선생님, 문제가 이상해요. 선생님이 수업하는데 왜 학생들 동의를 구하느냐고 물어요?, 고등학생을 뭐로 보고 이런 걸 묻나 몰라요’, ‘무섭고 긴장됐다’는 말도 했구요. 어떤 녀석들은 쪼르르 달려와서 ‘선생님, 파이팅’ 이러고 가기도 했지요.”

마침 스승의 날과 교육민주화선언, 전교조 창립의 역사가 들어 있는 5월은 어느 때보다 선생님을 인터뷰하기에 좋은 달이었다. 그런데 원,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법외노조 탄압에 꾸준히 시달렸으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세월호 문제 등으로 이어져 2016년 5월, 징계 천국의 수모를 겪고 있다. 그런 중에도 이 두 선생님은 참 해맑으시고, 그래서 오히려 지치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든든한 힘을 느끼게 한다.

“설문을 거부하고 응원까지 해 준 선생님들 마음도 너무 고맙고, 지금 제일 뿌듯한 건 학생들에게 떳떳하고, 아이들과 관계가 더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과 세월호 싸움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도 하고 넘나들기도 하고, 학생부장 일로 정신없이 지내기도 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세월호 엄마들 만나면 덥석 손도 잡아드릴 수 있겠다 싶고,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세월호 가족들은 물론, 징계 받고 있는 교사들과 똑같은 입장은 아니더라도, 한 발이라도 걸쳐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교육청 덕분에 같은 입장이 되었다 싶기도 하구요. 주변 사람들한테 연락도 받고 응원도 받으니, 저도 더 씩씩해지고 결의가 높아집니다. 이렇게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실제로 강성규 선생님에 대한 탄압이 알려지자 세월호참사대구시민대책위와 함께 활동한 여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구시교육청 앞을 찾아 항의 시위를 했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징계를 중단하라는 글을 올렸다. 특히,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던 것은 호산고 학생들의 글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런 마음들이 모여 전교조 416교과서로 세월호 계기수업을 진행한 교사에 대해 조사와 징계 등 ‘엄정처벌’하겠다던 교육부와 교육청을 주춤거리게 했을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권과 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이런 무리한 일을 추진한 교육부와 대구교육청에 대한 여러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나를 가장 따뜻하게 동시에 아프게 한 이야기는 김미경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아이들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아마 설문지 쓰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죄 짓는 것 같은 아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마치 부모가 잘못한 데 대한 증거를 찾으려고 아이를 찾아가 꼬치꼬치 캐묻고 답하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속으로는 항의하고 싶으면서 겉으로 대들지 못한 자괴감이 아이들 내면에 있었을 겁니다. 이 아이들 마음을 다독여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강성규 선생님 사정을 듣고 나서 김미경 선생님이 제일 먼저 한 말씀이었다. 아이들 가까이에서 마음을 나누어 본 선생님, 자녀를 키워본 엄마이기도 해서 아이들의 아픈 마음이 제일 먼저 느껴졌던 것일까, 나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성규 선생님도 수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아이들한테 ‘고생했다. 고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떤 일을 하거나 대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두 선생님을 보면서 배운다. 어쩌면 교육청 관료들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위에서 내게 시킨 일이니까, 보수적인 대구라서 어쩔 수 없다고, 또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일과 지시 이전에 그 일을 겪는 사람의 마음, 스스로의 양심과 영혼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미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가 되었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이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도덕을 가르치면서 ‘어릴 때 지나치게 순종적인 자식이 어른이 되어 불효자가 된다’라는 어느 성인의 말을 아이들한테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말 잘 듣는 자식이 효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 주체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갈수록 부모에게 큰 불효를 짓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에 교사로서 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만있으라’는 말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이후에도 언제라도 선생님이 잘못 하는 게 있으면 말하고, 대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배우고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 아이들이 제일 두렵우므로 아이들 앞에서 양심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김미경 선생님은 아이들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만화 동아리 아이들과 부산 행사에 참여했는데, 아이들이 두 군데로 나뉘어 줄을 섰다고 한다. 줄이 하도 길어서 김미경 선생님이 ‘우리는 일행이니까 저 뒤에 있는 형들을 앞으로 오게 하자’고 제안했더니, 아이들 말이 ‘샘, 그건 매너가 아니잖아요’라고 했다는 것. 선생님은 그 말에 ‘그래, 너네들 말이 맞다’라며 아이들한테 배우며 산다는 이야기를 한껏 웃으며 하신다.

또, 지난 세월호 참사 2주기 대구시민문화제 때도 봉사활동을 하러 오겠다는 제자가 있어서 봉사점수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봉사 점수 따려고 일을 돕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으니, 그냥 봉사만 하겠다’고 했단다. 선생님은 그 마음이 대견하고 고마웠다는 말씀, 제자 자랑을 기분 좋게 했다.

자리에 함께한 김선우 상황실장이 이와 연관하여 세월호 생존 학생과 형제자매 이야기를 기록한 도서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대한 소개와 의견을 덧붙였다.

“어른들이 어른으로서 우리 사회를 좋은 사회로 만들지 못했다는 마음을 갖고 이야기하는 게 어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학생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이미 우리 사회의 주체인 것이지요. ‘우리가 너희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게’가 아니라 ‘우리가 나쁜 나라를 함께 바꾸자’고 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어쩌면 학생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고 대하는 것은 이미 세월호 참사 때 ‘가만있으라’던 말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여쭈었다.

“아이들한테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하니, 아이들 중 몇 명이 ‘선생님 우리는 겪지 않아야 할 일을 겪었어요, 그렇지만 앞으로 이런 수업 절대로 접으시면 안 돼요’라고 크게 말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대구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며 정말 가슴이 뭉클했고, 내가 교사로서 잘못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믿을 수 있는 어른이 한 명 생겨서 너무 좋다. 감사하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런 어른으로 살아야지요.” (강성규 선생님)

“세월호는 우리 사회 모든 문제가 다 얽혀 있어 어디든 하나 잡고 당기면 정치, 경제 등 온갖 비리가 줄줄줄 딸려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이 일을 하다가 감옥도 가야 하면 가보자, 가야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정말 우리 세대 사람들은 사회를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교장 선생님이 ‘나이 들어서 힘들게 왜 그러냐’고 하길래, ‘나이 들어서 걸치적거릴 것 없는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변화합니다. 어느 순간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 아이들 미래까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학교 현장에서 내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내가 아이들에게 깨닫고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것, 교직생활 30년이 지나며 뼈저리게 느끼는 진실입니다. 잘못된 아이들은 없습니다. 어른들이 잘못해서 아이들을 잘못에 이르게 합니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꽃다운 아이들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미래요, 희망인 아이들이 결단코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며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자면 내 가족, 내 아이만 챙겨서는 안 됩니다. 공정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참여하고 행동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혹시나 잘못된 일이 생기면 결단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의 근원을 파헤쳐서 책임자에게는 벌을 주고 고쳐나가서 다시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는 결국, 내 아이 생명과 안전도 지켜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멋도 부리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을 아이들이 스무 살도 못 돼보고 참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제부터 남은 내 인생은 덤이라는 마음으로 세월호 참사 이후에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김미경 선생님)

가슴이 아프지만 따뜻하다.

우리 선생님들이 참 좋다. 하늘에 별이 된 단원고 학생들에게도 이런 선생님이 단 한 분이라도 있었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별이 된 단원고 선생님들 이름도 속으로 불러본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아직도 순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김초원, 이지혜 선생님. 지금도 팽목항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고창석, 양승진 선생님,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 무수한 희생자들…

36돌을 맞은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는 80년 광주항쟁 당시 행방불명된 채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분들의 영정이 묘지 옆에 따로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빛바랜 얼굴 사진들, 열사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있다. 팽목에 9명 미수습자의 얼굴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처럼.

87년 6월항쟁을 거치며 나는 5월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광주시민들이 내 건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피로 얼룩진 구호는 나를 전율하게 했고, 이후 내 삶의 방향을 정하고 물러서지 않게 했다. 나는 그로부터 삼십 여년 세월이 흐른 오늘, 그와 똑같은 말을 현수막과 사진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원통한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 절규를 통해 듣는다.

잊을 수도 없고, 묻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우리사회 여러 문제를 겪으며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나쁜 나라를 참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고 나서고 있다. 저 정도 했으면 그만둘 것 같은 시민들이, 여기저기 이슈를 따라다니다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았던 운동권들이, 적당히 보상금 받고 지치면 물러설 줄 알았던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다. 미수습자 수습과 세월호 인양, 진상규명과 처벌, 안전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일에 자신이 낼 수 있는 것들을 내면서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 서로의 손을 잡고.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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