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발'을 보장하라"

경기도 저상 버스 도입은 생존권

"우리의 '발'을 보장하라"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 물리적인 시간은 어떤 이동 수단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다가온다. 이형숙 경기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경기420공투단) 상임 대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형숙 상임 대표는 13일 경기도청이 자리한 수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경기도청 북부청사로 이동했다. 경기도청에서 휠체어로 1호선 수원역으로 향했다. 수원역에서 청량리행 지하철을 탔다. 청량리에서 의정부행으로 갈아타 회룡역에 도착한 다음 의정부 경전철을 이용해 경기도청 북부청사역에 도착했다. 새벽 6시 경기도청에서 출발해 오전 9시가 넘어서야 경기도청북부청사에 도착했다. 수원에서 의정부행 버스를 타면 갈아탈 필요 없이 늦어도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이 위원장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지하철에 한정돼 있다. 수원에서 의정부로 넘어가는 저상 버스가 없기 때문이다. 저상 버스는 계단이 없고 휠체어가 탈 수 있는 리프트가 장착된 버스다.

  사진/정운


“이동권은 장애인의 삶”
13일 경기420공투단이 경기도청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단식 농성을 하는 이유는 ‘발’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는 권리, 이들의 발을 대신해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이동권이 중요한 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직장을 구하고 친구를 만나며 삶을 이어 가는 모든 과정이 이동에 따라 좁아지기도 넓어지기도 한다. 경기도에 사는 장애인들은 ‘시’라는 자기가 속한 행정 구역에서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동네, ‘시’로 이동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권달주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 휠체어를 이용했다. 스물다섯, 그가 직장을 구할 때 확인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앉아서 할 수 있고 숙식이 가능한 곳. 휠체어에 앉아서 하는 작업이어야 했고, 휠체어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우니 숙식이 제공되는 곳이어야 했다. 일터의 선택 폭은 그 두 가지로 좁혀졌다. 그렇게 15년을 나전 칠기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나전 칠기가 사양 사업으로 접어들자 그도 새로운 일터를 구해야 했다.

1980년대만 해도 서울 내에 숙식이 가능한 공장이 여럿 있었지만, 1995년 그가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는 전과 같지 않았다. 출퇴근하며 직장 생활도 해 봤다. 저상 버스가 도입되지 않은 시절, 그는 택시와 이웃의 차를 빌려 타며 출퇴근길을 오갔다. ‘취업시켜 준 게 어디냐’, ‘나 아니면 누가 너를 써 주냐’, ‘여기서 조금이라도 벌어먹는 게 어디냐’는 회사에 교통비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일에 매달렸지만 결국 3년 만에 일을 그만뒀다. “매일 택시나 차를 빌려 출퇴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버티고 버틴 게 3년이다. 장애인 이동권은 장애인의 삶이다. 이동은 사회생활의 기본 아닌가. 이동이 불가능해질수록 장애인의 삶은 고립되고 구속된다.” 권 회장이 32일째 경기도청 내 농성장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약속했잖아요!”… “지킬 줄 알았니?”
경기도가 처음부터 장애인 이동권을 나 몰라라 한 것은 아니다. 경기420공투단의 핵심 요구안인 저상 버스 도입 확대와 특별 교통수단 운영 지원은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공약 사업이다(특별 교통수단은 장애인 콜택시, 휠체어 리프트 탑승 설비가 설치된 무료 셔틀 버스, 시각 장애인 심부름 센터 차량 등 이동에 심한 불편을 느끼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이동 수단을 말한다).

지난해 1월 경기도는 민선 6기 공약으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장애인 콜택시(특별 교통수단)와 저상 버스 연간 100대 증차 등을 포함한 109개 사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앞으로 ‘특별 교통수단 도입 확대와 시군 운영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운영비 도비 지원 비율을 10%에서 30% 이상으로 증액하고 2018년까지 시군 특별 교통수단이 200% 이상 도입되도록 시군 지원 정책 시행’을 약속한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경기도지사의 직인이 찍힌 공문이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특별 교통수단 운영비 확대와 저상 버스 300대 도입 등 이동권 보장에 대한 약속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경기도는 저상 버스 구입과 특별 교통수단 운영비 지원 등의 요구 사항이 국비와 시군비가 함께 투입되는 사업이라 도가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며 말을 바꿨다. 5월 13일, 담당자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예산 담당관실을 찾았지만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농성이 시작됐다. 경기420공투단은 남경필 도지사에게 면담을 요구했다. 남 도지사는 만나 주지 않았다. 농성 12일 차인 5월 24일에야 겨우 만남이 성사됐다. 대화 없이 일방적인 통보만 있는 만남이었다.

당시 농성장에 있던 관계자는 “남 도지사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30분 농성장을 훑어보고는 불법 점거를 하면 대화할 수 없다. 농성을 풀라며 제 말만 하고 갔다. 그리고는 페이스북에 우리와 대화했다고 사진을 올렸더라. 기가 찼다”고 말했다. 경기도지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사과나 해명 없이 불법 농성을 지적하는 동안 그들은 수원역 육교에 매달려 고공 농성을 하고 단식을 했다. 그들의 투쟁과 농성에는 늘 목숨이 걸려 있다.

경기420공투단 관계자는 “처음부터 경기도청 예산실을 점거하고 육교에 매달리고 단식을 한 게 아니다. 면담을 요청하고 협의하고 약속을 해도 지키지 않는다.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늘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요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겨우 돌아봐 준다”고 말했다. 경기도청 내 일부 사무실을 점거한 지 32일째가 된 6월 13일, 경기도와 경기420공투단은 장애인 특별 교통수단 운영비 증액, 저상 버스 증차 등을 포함한 단기 과제를 논의하는 TF팀 구성에 합의했다. TF 총괄은 이기우 사회통합 부지사가 맡는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합의한 사항에 대해선 다음 달 추가 경정 예산과 내년도 본예산에 반영한다고 전했다. 경기420공투단은 이날 경기도청 내 점거 농성을 종료했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TF 구성은 끝이 아니라 출발이다. 경기420공투단은 점거 농성을 끝냈지만, 이도건 경기420공투단 공동집행위원장이 단식을 이어 가는 이유다. 14일 이 위원장은 이룸센터 2층 유리 처마 위에서 단식 농성을 이어갔다. 8일 차 단식이다.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 버스가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경기도의 저상 버스 비율은 이제 10%다. 지난해 경기도는 10년 안에 모든 버스를 100% 저상 버스화하겠다고 했지만 올해 고작 57대를 새로 도입했다. 그마저도 기존에 도입된 저상 버스 54대가 폐차됐으니 새로 늘어난 것은 딱 3대인 셈이다. 제자리걸음이다. TF가 구성됐다고 해도 단기 과제에 대해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구체적인 협약문이 완성되기 전에 단식을 풀지 않을 것이다.” 이 위원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장애인 이동권은 비장애인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누구나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들의 움직임과 이동, 노선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2005년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에 따라 저상 버스가 처음 도입됐다.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장애인들은 다시 곡기를 끊고 육교에 매달리며 저상 버스 도입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걸음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다시 경기도를 본다. (워커스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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