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UN 총장, 아이티의 인권부터 보호해 주세요”

빼빼 마른 여성이 맨손으로 진흙을 치댄다. 손바닥 크기로 납작하게 빚어진 진흙덩이는 햇볕에 가지런히 널린다. 기왓장인가? 아니다. 아이티 빈민이 먹는 진흙 쿠키다. 진흙에는 소금과 물, 버터가 약간 들어간다. 케이티 카란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이 2014년 발표한 <혁명을 녹색으로>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요. 하지만 먹을 게 없어요. 그래서 진흙 쿠키를 먹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게 구할 수 있는 전부예요. 진흙 쿠키를 먹고 물을 마시면 훨씬 낫죠. 일이 끝나면 시장에 이걸 내다 팔아요. 물론 진흙 쿠키를 사 먹는 건 불법이에요. 건강에 해로우니까요. 하지만 진실을 말해 볼까요? 사람들은 체포되더라도 먹을 겁니다. 진흙 쿠키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왔어요. 마지막 수단이죠. 나는 다시 농사일을 하고 싶어요. 쌀농사도 짓고 채소도 키웠죠. 계속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돈이 부족했습니다. 시골은 훨씬 힘들어요. 누구의 책임일까요? 오직 신만이 아실 거예요.”

아이티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서 나눠 말했다. 아이티에선 지난해 10월 열린 대통령 선거 부정 시비 논란으로 현재 2개월 가까이 권력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200년 이상 계속된 미국의 압제와 개입의 결과다. 여기에는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 이끄는 UN도 중요한 책임이 있다. 특히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퍼진 콜레라에 대한 그의 책임이 막중하다. <뉴욕타임스>도 6일 사설로 반기문 사무총장에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출처: 다큐멘터리 '혁명을 녹색으로' 화면캡처]

200년 이상 계속된 미국의 압제와 개입

중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는 1804년 노예 스스로 독립한 첫 번째 나라다. 프랑스 식민지 중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나라였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식량 자급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 아이티 빈민은 진흙 쿠키로 허기를 달랜다. 아이티가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데는 식민 제국 프랑스와 아이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온 미국의 책임이 크다. 프랑스가 아이티에 요구한 배상금은 독립 정부의 연간 수입보다 10배나 많아 1922년까지 아이티 재정을 고갈시켰다. 미국은 흑인 노예의 반란이 확산할 것을 우려해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유럽과 함께 봉쇄 정책을 폈다. 1862년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아이티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그 뒤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외교전과 군사적 개입이었다.

미국은 결국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하고 점령했다. 그리고 점령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티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아이티인들은 미국 점령에 맞서 총파업과 거리 시위에 나섰고, 1934년 미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도미니카공화국과 니카라과에서 그랬듯이 아이티에서도 대리 세력을 남겨 놓았다. 현대 아이티군의 모태가 된 이 군사 세력은 민중 운동 세력이 1956년 육군 대령 출신 폴 마글루아르 독재 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20년 이상 자유자재로 정권을 세우거나 축출했다. 미국은 1956년 선거에서도 독재자 뒤발리에를 후원했고 이때부터 30년 동안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가 지속했다. 이 기간에 아이티 부채는 17.5배가 증가했고 주요 산업인 농업은 무너졌으며 1986년에는 쌀 시장도 개방됐다. 결국 그해 2월 7일, 아이티 민중은 다시 봉기해 뒤발리에 독재 정권을 무너트렸다.

아이티 민중의 투쟁으로 1990년 2월 아이티 역사상 첫 번째 자유선거가 시행됐다. 반제국주의 투쟁에 앞장섰던 해방 신학자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신부가 이 선거에서 67%를 얻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의 정부는 외세에 맞서고 정치 부패와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 7개월 만에 미국이 후원한 쿠데타로 축출됐다.

1993년 미국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군사적 압력보다는 UN,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등 국제기구를 통한 압박과 경제 봉쇄를 우선했다. 미국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소말리아, 북한 등에서 냉전 뒤 새로운 국제적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아이티에서는 아리스티드 축출 뒤 더욱 심각한 반란과 폭력 등 소요 사태가 전개됐고 미국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대신 아리스티드는 1995년 복귀 조건으로 미국, IMF, WB와 ‘파리 계획’에 서명해야 했다. 이 계획은 공기업 민영화와 쌀, 설탕, 닭 등 농축산물에 대한 관세 인하 등을 규정했다. 이에 따라 아이티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는 최저 0%에서 15%까지 낮아졌다. 이 관세율은 당시 중남미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특히 아이티 최대 농산물이었던 수입 쌀 관세는 35%에서 3%로 급감했다. 미국 대기업이 아이티 시장을 장악하며 아이티 농민들은 줄도산했다. 1996년 3월 대선에서 아리스티드 대통령과 미국과의 타협 속에 르네 프레발이 선출됐다. 그는 1996년 3월 모든 국영 기업과 공공 서비스 민영화 계획을 밝혔고 이는 아이티 민중의 총파업과 시위를 촉발했다.

계속된 정치적 소요 끝에 2000년 11월 아리스티드가 재출마하여 92%의 지지로 재선했다. 그는 이전에 미국을 마지못해 따랐지만 아이티 민중은 그를 계속 지지했다. 아리스티드는 집권 뒤 국영 기업 민영화를 거부하고 교육과 보건, 임금 등 서민을 위한 개혁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다시 대농장 소유주 등 아이티 지배층은 이에 맞서 폭동 등 소요를 확대했고, 부시 미국 정부는 다시 그를 몰아내기 위해 정치적 고립, 경제 제재, 외교적 압력과 준군사적 게릴라 공격의 종합적인 작전을 감행했다. 결국 2004년 아이티 지배층이 지원하는 폭동 속에서 미 해군은 아리스티드 대통령을 국외로 납치하고 그가 자진 사퇴했다고 밝혔다. 당시 중남미 정세는 핑크타이드 정권(사회주의/사민주의를 표방하는 중도 좌파 노선)의 부상으로 미국의 위기감이 고조된 시점이었다. 2002년 4월 베네수엘라에선 우고 차베스가 볼리바리안 혁명 과정에서 민중 운동의 힘으로 쿠데타 세력을 몰아내고 3일 만에 복귀하고, 브라질에서는 2003년 룰라 노동자당이 집권했다. 같은 해 아르헨티나에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페론주의 정권이 출범했다.

미국이 아리스티드 축출 뒤 아이티에선 다시 쿠데타와 살육, 빈곤과 농민의 이주가 잇따랐다.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군은 2004년 안정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아이티를 점령했고 그 뒤에는 유엔군이 이를 대체했다. 이후 아이티 민중 운동은 아리스티드 지지 여부를 중심으로 2개 세력으로 분열되면서 약화됐다. 더구나 2010년에는 최악의 지진이 일어나 3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3000만 명의 이재민이 나왔다. 미국은 이를 기회로 군대 2만 명을 급파했고 이러한 아이티에선 최근에 대통령 선거가 다시 부정 선거로 얼룩지면서 정치 공백 상태가 지속하고 있다.

다시 일어선 아이티 민중 운동

아이티 민중 운동 세력은 미국이 후원하는 집권 정당에 맞서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고 있다. 애초 아이티는 지난해 10월 대선 1차 투표, 올해 1월 결선 투표를 하기로 예정됐다. 대선 1차 투표에는 54명의 후보가 출마한 가운데 마르텔리 대통령이 지지하는 집권 여당의 쥐브넬 모이즈 후보가 32.8%, 야권 후보인 주드 셀레스틴이 25.3%를 득표해 결선에 진출했다. 그러나 주드 셀레스틴 야권 후보는 집권 여당이 1차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정 선거를 자행했다는 혐의를 제기하고 보이콧했다. 애초 선거관리위원회는 야권 후보의 의견을 무시하고 1월 24일 결선을 강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결국 선거를 다시 연기했다. 당시 시위대는 1주일 이상의 폭력 시위에 나서 선거 사무소를 습격해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시위는 차량 방화나 상점 약탈도 동시에 일어나 소요 사태로 번졌다.

지금 아이티의 사실상 국가수반은 조슬렘 프리베르 아이티 임시 대통령이다. 그는 아이티 상원의장으로 지난 2월 정파 간 합의에 따라 임시 대통령이 됐다. 그의 임기는 지난 5월 14일에 끝나야 했다. 하지만 프리베르 임시 대통령은 부정 선거로 인한 반대 시위로 결선이 봉쇄되자 대선 일정을 연기하면서 계속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야당은 그가 공직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번에도 미국은 아이티 여권 쪽에 힘을 실으며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케네스 멀튼 미국 국무부 특별협력관은 미국 정부는 프리베르를 임시 대통령으로 계속 인정하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미 국무부는 또 1차 선거를 다시 하는 데도 반대했다.

마르텔리 대통령이 지지한 여권 모이즈 후보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고 바나나 생산 업체를 경영해 ‘바나나 맨’이라고 불렸다. 그는 아이티의 대표적인 2대 정치 권력인 대농장주와 농기업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아이티 부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반기문의 유엔군, 현지인에겐 ‘점령군’

미국은 아이티에 직간접적인 군사 개입을 통해 내정에 간섭했지만 이제 이 역할은 반기문 사무총장이 대표하는 유엔군이 맡고 있다. 초국적 금융 기구가 아이티 시장을 미국에 종속시켰다면 유엔은 이를 군사적 힘으로 통제한 셈이다.

UN 아이티 안정화 지원단(MINUSTAH)이라는 이름의 유엔군이 아이티에 파견된 계기는 1995년 3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미군을 철수시키고 대신 UN에 그 사명을 맡기면서였다. 그때부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이티에는 여러 번에 걸쳐 유엔군이 주둔하고 있다. UN은 안정과 질서 회복을 사명으로 강조하지만 아이티 민중 운동 세력은 유엔군을 ‘점령군’이라 부른다. 유엔군은 아이티 민중의 지지를 받던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1994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아이티군을 해산한 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티군은 애초 미국이 1934년 아이티 점령을 철수하며 남긴 친미 우파 세력이었다.

유엔군은 그동안 아이티 지배층에 맞선 민중을 통제해 왔다. 특히 2010년 지진 뒤 다시 파병된 유엔군이 콜레라를 확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엔군에 대한 반대는 더욱 격렬하다. 2010년 10월 콜레라가 유행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1만 명 가까이 숨졌다. 미국 예일대를 비롯한 법의학계는 2010년 아이티 콜레라 병인이 네팔에서 온 유엔군에서 기인했다는 결론을 잇따라 내놨다. 콜레라에 걸린 병사들의 배설물을 위생 시설을 거치지 않고 강에 그대로 방류한 것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콜레라 확산 방지는 약속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고 콜레라 희생자들의 소송에 면책 특권을 내세우고 있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의학 저널 《란세트(Lancet)》 6월호는 아이티에 창궐한 콜레라와 관련해 유엔의 수장으로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지난해 6월에는 유엔군의 성매매 실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UN 감사실(OIOS)에 따르면, 아이티의 경우 2014년 조사에 응한 231명의 여성이 유엔군과 정기적으로 성매매 거래를 했다고 밝혔다. 유엔군은 숙소, 아기 용품, 의료비 등이 부족한 여성에게 돈이나 전화기 등 물품을 건네며 성적인 대가를 요구했다.

이러한 유엔군에 대한 지역 주민의 반발은 강력하다. 2010년 11월에는 유엔군을 규탄하는 시위에 발포해 2명 이상이 숨졌다. 그러나 UN에 대한 지역 민중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반기문 총장에게 “우리 인권을 보호해 주세요!”라는 한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했다.<워커스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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