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카르텔과 사드,남중국해

[워커스 20호]미국의 달러 패권 지키기, 중국의 달러 중독 벗어나기

7월 8일 한미 양국은 한국 내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중국 외교부는 즉각적으로 “강렬한 불만과 단호한 반대”를 외치면서 반발했다. 중국 언론들은 한국에 대한 제재뿐만 아니라 사드 배치에 상응하는 군사적 조치까지 주문하고 있다.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전략도 ‘재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도 하고 있다.

중국은 사드 배치에 대한 반발만큼이나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도 강렬한 불만을 쏟아 내고 있다. 7월 12일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는 남중국해 영유권의 중국 측 근거인 ‘구단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중국해 문제의 법리적 판단에 애초 응하지 않았던 중국은 이번 판결이 국제 사회를 참칭하는 몇몇 국가의 음모라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빠지라고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만 놓고 보면, 미-중 관계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터질 듯 보인다. 실제로 미국의 주류 국제정치학 시각은 미-중 간 충돌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공세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는 미-중 양국이 안보를 위해 힘의 무한정 추구에 나설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전쟁이 날 것으로 전망한다. 또 ‘세력 전이(power transition)’ 이론은 미-중 간 세력 격차가 소멸할 때쯤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미-중 간 충돌은 기정 사실인가?

  중국 전투기가 남중국해를 순찰하고 있다. [출처: 인민망 한국어판]

강대국 간 카르텔의 민낯

시장에서 카르텔이 형성되는 이유는 기업들에게 상호 간 출혈 경쟁보다 가격 담합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강대국들은 상호 충돌 방지라는 대전제 속에서 자국의 세력권 관리에 매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만약 그 사이에 위치한 약소국이 강대국 간 카르텔을 훼손하려 든다면, 강대국들은 신속히 개입해 그 약소국을 ‘징벌’한다. 한반도 역사도 다르지 않았다. 1882년 임오군란 시기 청군이 개입해 대원군을 신속히 납치해 간 것이라든지, 1970년대 미국이 남한의 핵 개발을 강력히 저지했던 것 모두 강대국 간 카르텔 관계의 부산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강대국 간 충돌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카르텔은 언제든지 일방의 배반으로 인해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협조 체제가 1차 세계 대전으로, 워싱턴 체제가 2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도 2차 대전 이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강대국 간 카르텔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고화되었다. 강대국 간 전쟁은 이제 곧 ‘공멸’이 되었다. 한국 전쟁기 소련이 직접 개입을 극도로 꺼린 사실이나, 미 트루먼 정권이 핵무기 사용을 주장하던 맥아더를 경질한 사실은 모두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미-중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미-중 관계는 미-소 관계보다 훨씬 공고해진 카르텔 관계라 할 수 있다. 미-중 관계는 상호 간 핵 억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미-소 관계와 동일하나, 양국이 모두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핵심 구성국이라는 점에서 훨씬 결착된 관계이다. 1970년대 미-중 화해 및 수교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로 중국이 편승해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 전쟁으로 미-중 관계가 파탄 나자 중국은 소련 자본을 통한 경제 발전(대소 일변도) 전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중-소 관계가 경색되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중국은 농촌의 거대한 노동력을 착취해 경제 건설을 꾀하려는 자력갱생적 경제 발전(대약진)을 추구했으나, 그 비효율성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은 경제 발전 전략의 대전환이었으며, 그것의 본질은 결국 미국 자본의 유입을 통한 경제 건설이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미국과 중국은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거의 ‘한 몸’이 되다시피 했다. 구체적 상황은 이렇다. 미국은 중국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한다. 중국은 투자된 자본과 값싼 노동력을 통해 상품을 대량 생산하고, 그것을 다시 거대한 미국 시장에 수출한다. 중국은 그로부터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를 다시 미국 자산(국채)에 투자한다. 미국 소비자들은 그러한 ‘중국 달러’를 가지고 월마트에 가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산다. 이 과정은 무한 반복된다. 2015년 한해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으로 430조 원을 벌어들였다. 왜 양국이 상호 관계를 ‘이익 상관자 관계’나 ‘신형 대국 관계’라 부르겠는가?

사드와 남중국해:
미국의 달러 패권 지키기, 중국의 달러 중독 벗어나기


공멸을 감수하지 않는 한 강대국 간 전쟁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면, 강대국 간 관계에서 결국 남는 건 경제적 이익밖에 없다. 사드와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미-중 양국의 갈등 이면에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투영되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는 이유다. 미국의 달러 패권 지키기와 달러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중국의 대립이 그것이다.

중국의 막대한 대미 무역 흑자는 달리 보면 중국을 달러 경제권에 그만큼 옭아매려는 미국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이 합리적이라면 이러한 대미 취약성, 달러 중독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시진핑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은 그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수출 시장을 다변화함으로써 대미 시장에 대한 ‘종속성’을 약화하려는 것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위안화 결제를 확대해 달러 중독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미국은 당연히 중국의 ‘경제 독립’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패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군사력이 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군사력은 기축 통화 달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냉전기 미국에 필적하는 군사력을 가졌던 소련이 미국만큼의 패권을 누리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도 허약한 경제력에 있었다.

달러를 이용해 패권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와 맞물리면서 보다 노골화되었다. 핵심은 금융 자본의 무기화였다. 레이건 정권 시기 미국은 임금 상승에 의한 이윤율 하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금융 자본 확산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정치·경제적 압력을 통해 제3세계 국가의 금융 시장 개방을 독촉했다. 레이건 정권이 전두환 독재 권력을 승인한 후 제일 먼저 요구했던 것이 바로 한국의 금융 시장 개방이었다. 1980년대 한국의 국가 부채가 급속히 증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 미 금융 자본은 구조조정을 대가로 한국 경제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적 독립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달러 패권이 유지 혹은 오히려 더욱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주변국들이 미국의 군사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는 달러-금 태환의 달러-안보 태환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사드와 남중국해 문제도 단순히 군사 안보적 영역에 있어 미-중 간 충돌이라 볼 수 없다. 중국으로서는 남중국해가 지리적으로 일대일로의 출발점이고 따라서 달러 중독에서 벗어나는 지경학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상식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구단선’을 그어 남중국해 거의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핵심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미국은 남중국해를 막아 중국의 경제 독립을 초장부터 견제하려 하는 것이다.

사드는 어떠한가? 사드는 동북아의 세력권 관리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미국은 동북아 핵심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을 달러 세력권으로 묶어 두기 위해서라도 사드가 필요하다. 즉, 사드는 미국의 강건함을 과시하고 이들 국가의 달러 수요를 지속해서 창출하기 위한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최근 한중 관계는 전승절 행사에서 보이듯 매우 결착된 양상을 보였다.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박근혜 정권은 한국이 “위안화 국제화의 금융 허브”가 되겠다는 공언까지 했다. 미국으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전개다. 사드는 이러한 한중 관계를 흐트러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사드와 남중국해, 그들만의 리그

영화 <설국열차>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열차의 통치자가 꼬리칸 민중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너희가 추위에 얼어 죽지 않는 게 뭣 때문이라 생각하나? 추위를 차단하는 기차 외벽 때문이라고? 웃기지 마! 그건 바로 기차 내의 ‘질서’ 때문이야.” 그렇다. 지배 권력의 단 한 가지 목표는 세상의 질서일 뿐이다. 국제 정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헤게모니 미국과 현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최대 수혜자 중국은 다소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안정 그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 소위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한 강력한 공감이다.

그런 미-중 양국이 한반도에서 또 남중국해 문제 때문에 전쟁을 한다고? 그것은 <설국열차>의 지배 권력이 스스로 열차를 폭파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도 그들 스스로는(특히 미국) 미-중 갈등에 관한 담론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적대적 공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남북의 통치 권력이 반세기 넘게 상대방의 위협을 과장해 내부 단속에 활용하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권력의 보편적 속성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노동자는 언제까지 이러한 블랙 코미디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사드? 남중국해? 그게 도대체 뭐라고.<워커스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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