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지 말고, 싫어하는 것은 하지 말아라"

홍재희, 최광희를 듣다

최광희 영화 평론가를 만난 날은 장맛비가 올 듯 말 듯 흐린, 초복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의 제안으로 인터뷰는 홍대 뒷골목, 동네 사람만 아는 맛집이 분명한 삼계탕 집에서 이루어졌다. 인삼주 한 잔에 소주 한 병을 곁들여.

  사진/ 정운


홍재희(홍) 인터뷰 고수에게 인터뷰를 하다니 좀 이상하긴 하다. (웃음)

최광희 하긴 난 인터뷰를 하는 쪽이지 인터뷰를 당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웃음)

인터뷰를 당할 때 주로 어떤 질문을 받는가.

영화 평론가에게 묻는 질문이야 뻔하지. ‘어떤 관점으로 평론을 쓰는가’, ‘어떤 영화가 좋냐’…. 직업적 정체성이 영화 평론가인데 그걸 빼면 내가 한 인물로서 무슨 재미가 있겠어.

흠…. 나도 그런 뻔한 질문을 할 텐데 인터뷰에 응해 줘서 감사하다.

나야 늘 시간이 많아서. 원 데이 원 샷(One day, one shot)주의다.

무슨 뜻인가.

다층적인 의미다. 술 마실 때 원 샷일 수도 있고 총 한 방 필름 쇼트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일을 잡다하게 하지 말고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자가 내 모토다.

정말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하는가?

그게 마음대로 되겠나. 가급적 여러 일을 안 하려고 하지만 생각대로 안 된다.

그럼 지금 인터뷰 하는 건?

이건 일이 아니지. 약속 만남은 일로 생각 안 한다. 대신 방송이나 시사회는 일이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건 자기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다. 프리랜서의 삶은 자유를 얻는 대신 생활을 잃는다.

난 자유도 있고 생활도 넘치는데 돈만 없다.

갑이 부르면 언제든 가야 하는 게 프리랜서의 삶이잖나. (웃음)

난 불러 주는 갑도 없다. (웃음)


드디어 삼계탕이 나왔다. 소소한 웃음이 오고 간 후 술잔을 들어 건배했다.

개봉 영화는 다 보나?

다 볼 수는 없다. 방송을 해야 하니까 한 주에 소화해야 하는 게 세 편이다. 신작 세 편을 봐야 한다. 그걸 가지고 계속 재활용한다.

이 방송에서 소개한 영화를 저 방송에도 소개하는 건가?

청취자와 시청자가 다 다르니까. 하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소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라디오는 좀 더 편안한 화법으로, 방송에서는 정해진 형식에 따라 원고를 직접 쓴다.

보는 게 시간 낭비 같은 영화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 그래도 봐야 하나?

그런 건 안 본다. 건너뛴다. 하지만 쓰레기 영화인데도 꼭 봐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영화는 산업적 논리에 따라 스크린 독점을 할 거고 결국 대중이 굉장히 많이 볼 수밖에 없어서다. 그런 영화는 반드시 보고 논평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낚여서 볼지라도 어떤 평론가가 이 영화에 대해 이런 비판을 했구나 알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영화라서 외면해 버리면, 그 영화가 천만이 넘었는데도 관심 없다면 그것 또한 평론가의 직무 유기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는 흥행이라는 현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왜 이 영화가 21세기 2016년에 천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는지, 그 사회적 맥락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7번방의 선물처럼 영화가 정말 형편없는데 관객 수 천만을 넘었다. 그럼 이게 뭘까 치밀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거다.

그 영화는 킬링 타임용 영화 아닌가. 가족들이 다 모인 명절 같은 날 함께 TV 보기 애매할 때 틀어 놓으면 딱 좋은 영화?

그렇게 말하니까 영화감독이 정말 무책임한 거야.

이거 한 방 맞았는걸. (웃음)

시간이나 죽이는 영화라도 영화평론가는 왜 그게 천만 명이 넘었느냐를 분석해야 한다. 영화감독은 제 영화만 잘 찍으면 된다. 하지만 평론가는 영화 수백 편을 보고 그 영화에 대해 고민하고 시대적인 상관관계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다.

봐야 할 영화, 보기 싫어도 유의미성 때문에 본 영화 말고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본 영화도 있지 않나. 그런 건 따로 챙겨 보나.

소위 쟁점이 될 만한 영화라고 판단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본다. 하지만 요즘에는 잘 안 그런다. 내가 지나치게 영화에 의미 부여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참여했던 다큐멘터리 <정조문의 항아리>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달라.

작년에 전주영화제 상영 이후, 일본에서 공동체 상영 중이다. <정조문의 항아리> 같은 영화는 지금 한국 영화 현실에서 극장 개봉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한다. 돈 버는 영화가 아니니까. 다른 경로로 관객에게 다가가야겠지.

참, 영화 만든다 하지 않았나?

내가 장편 극영화로 시나리오 쓴 게 하나 있다. 판타지 멜로, 저예산 상업 영화.

해피 엔딩인가?

새드 엔딩이다.

다음에는 영화 평론가가 아니라 감독으로 만나겠다.

그게 뭐 대수인가. 요즘엔 감독도 평론 많이 하는데. 평론가나 배우와 감독과의 경계는 이미 없어진 거 같다. 감독은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말만 분명히 알면 된다. 나머지는 스탭이 다 알아서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다 망하는 수가 있다. (웃음)

아니 내가 카메라에 대해 촬영 감독보다 뭘 더 알겠어. (웃음)

왜 영화 평론을 시작했는가.

편하니까. 보고 말하고 보고 말하고.

편하다고? 보고 말하고 글 쓰고 또 보고 말하고, 피곤하지 않나.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 영화 평론가다. 본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쓰면 되는 거니까. 방송 기자 할 때다. 방송은 정해진 형식이 있다. 뭐든 거기에 딱 맞춰야 한다. 예를 들어 문장 9개에 내가 그날 취재하고 보고 느낀 걸 전부 우겨 넣어야 한다. 그것도 외압이나 데스크 입맛에 따라 고쳐진다. 하지만 평론은 그런 게 없다. 정해진 규격 형식이 없어 자유롭다.

그래서 필름 2.0이라는 영화 잡지 기자가 된 건가.

영화 기자가 하고 싶어서 간 게 아니다. 방송 기자가 하기 싫었는데 날 받아 주는 데가 영화밖에 없더라. 그래서 간 거다. 기자 시절? 전혀 그립지 않다. 내가 강연할 때 ‘어쩌다가 영화 평론가가 되었나’, ‘언제부터 영화 평론가를 꿈꾸었나’라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면 난 ‘삶은 꿈꾸는 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을 보면 ‘이건 정말 하고 싶어’보다는 ‘이건 죽어도 하기 싫어’라는 게 더 많다. 그러니까 그걸 하지 말라는 거지. 싫어하는 것만 피해도 살아지더라. 요즘 한국 사회 주류 담론이 ‘꿈은 이루어진다’, ‘희망을 꿈꿔라’ 이따위 소리잖나. 그런데 이 사회 사람 중에 도대체 몇 퍼센트가 그 꿈을 실현하고 살고 있겠어. 기만인 거지. 그런데 그 기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하기 싫어도, 힘들어도 참으라고 하는 거처럼?

그렇다. 그러니까 참지 말라는 거다. 여러분! 꿈꾸지 마시라. 대신 싫어하는 건 절대, 죽어도 하지 마시라.

대화를 강연으로, 인터뷰를 논쟁으로 바꿔 버리는 게 바로 평론가의 정체성인지 모른다. 싫은 건 죽어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최광희 영화 평론가는 총총 자리를 떴다. 그 말이 맞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하기 싫은 게 더 많은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는 까칠하게 꿈꾸지 말라지만 그래도 난 내 멋대로 꿈꾸련다. 평론가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그가 만들 영화가 바로 그를 닮은 영화, 싫은 일에는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와 동시에 좋은 걸 찾아내는 여유가 있는 영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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