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난민 신청자들, 한국 정부 상대 시위 준비

난민 인정 호소...“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족이 보고 싶어요. 진짜로.” 예멘을 떠난 지 이제 만 3년이 된 무함마드 알리(가명) 씨가 한국말로 띄엄띄엄 말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도중 추석을 앞두고 나온 가족 얘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동료, 알바나니 살레(가명) 씨는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수 있게 되면 ‘한국 정부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었구나, 나와 함께 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8일 서울 안국동 공익법센터 어필 사무실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예멘 청년 두 명. 이들은 300여 명의 예멘 출신 난민신청자를 대표해 한국 언론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예멘 난민 지위 신청자들은 현재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난민 신청자의 인권 보장과 난민 지위 인정을 호소하기 위한 노력이다.


예멘 내전 20개월...사망자만 1만명

예멘에선 현재 20개월 가까이 내전이 진행되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일어난 혁명 뒤 지속된 정치 세력 간 분쟁 속에서 지역 열강이 개입하며 일어난 일이다. 2014년 후티 반군은 정부가 친정부 세력 중심의 연방제안을 굽히지 않자 무력 시위에 나서 수도를 장악했고 이어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연합군이 정부 편에서 대응 공격에 나서며 전쟁은 시작됐다. 연합군에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레이트, 쿠웨이트, 카타르 등이 참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터키의 지원도 받고 있다. 알카에다 아라비아 반도 지부 또한 예멘 중부와 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고 자칭 이슬람국가(IS)도 내전에 가세하고 있다.

예멘 내전은 시리아 내전 만큼이나 처참하다. 지난달 25일 유엔이 발표한 ‘예멘 내전 보고서’에 따르면, 내전이 시작된 뒤 지난 8월까지 민간인 3,799명을 포함해 약 1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민간인 사망자의 60%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연합군의 공습에 희생됐다. 민간인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멘 인구 2600만 명 중 30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고 이중 2만 명은 해외를 떠돌고 있다. 1400만 명 이상이 먹을 것이 부족해 고통당하고 있으며 추가 700만 명은 영양부족 상태다.

민간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달 유엔이 “사우디 주도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혼식장과 시장, 학교와 병원에서도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며 “이러한 공격의 경우, 군사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연합군은 세계적으로 100개 이상 국가가 금지한 미국산 집속탄으로 민간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이후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등은 이를 여러 번 비난했다. 연합군은 지난해 10월에는 ‘국경없는의사회’가 관할하는 병원도 폭격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전과 민간인 피해 상황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의 대중감청 프로그램 존재를 폭로한 글렌 그린월드가 지난해 <인터셉트>에 “무고한 예멘인의 죽음은 미국 정부와 그의 전제적인 동맹의 손에서 자행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언론이 그 어떤 희생자에 대해서도 보도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고 지적한 내용과 같다. 미국 중동정책을 추종하는 한국 정부와 주류 언론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시리아와 비슷한 예멘 내전

예멘 내전의 실상이 은폐되면서 피해를 입는 이는 무고하게 죽어가는 예멘 현지인뿐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난민들, 그리고 살기 위해 한국까지 피난해야 했던 예멘 난민들도 같은 처지다.

알리 씨는 “우리 상황은 시리아와 같은 수준입니다. 언론은 시리아 내전에 대해선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주지만 예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내전이 정말 극심한데 왜 한국 정부가 우리의 난민 신청을 거부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알리 씨는 2013년 6월에 한국에 왔다.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됐을 때 받은 인상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출입국관리소에 가 난민 신청을 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티비에서 봤던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자신을 짐승처럼 대했다고 한다. “출입국관리소 사람들은 우리를 짐승처럼 봤습니다. 인종주의자들이었어요.” 그도 예멘에서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졸업 후에는 6개월 동안 직장 생활도 했다. 하지만 혁명 뒤에도 정국이 다시 불안정해지면서 난민 길에 올랐다. “2004년부터 후티 반군이 정부에 대항해 싸우기 시작했어요. 2011년까지 7차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2011년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물가가 오르면서 혁명이 일어났어요. 혁명 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또 다시 전쟁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도저히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살레 씨는 2014년 초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후티군과 싸워야 했던 군인이었지만 정부에 버림 받았다고 한다. “2006년 2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전투에 투입됐습니다. 대대 50명이 7만명에 달하는 반군과 싸워야 했어요. 그때 동료 군인 2명이 죽었는데 정부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죠.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피했는데 벌써 반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말레이시아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8년을 보냈어요. 결국 가족이 너무나 보고 싶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았는데 반군의 세는 더 커져 있었죠. 그래서 인도네시아로 다시 피했는데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 한국을 찾게 됐습니다.” 그의 가족은 현재 이집트, 사우디, 미국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의 아들도 인도네시아에 있다.


“정부가 난민들에게 장사를 하는 것 같아요”

두 명의 난민은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하고 대기 중이다. 전쟁 위험을 피해 왔지만 둘 다 3년 가까이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13년 제정된 난민법에 따라 난민들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면 법무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것이다.

알리 씨는 “지방법원, 대법원까지 가는 데 수십만 원씩 듭니다. 변호사비, 번역료와 통역비, 교통비 등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에요. 저는 지난해에는 약 300만 원을 써야 했어요”라고 토로했다. 살레 씨도 “최근 두 달 간 일을 못해서 한 달 치 방세도 내지 못했어요. 하지만 내일 당장 재판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정부는 마치 난민들에게 장사를 하는 것 같아요”라고 푸념했다.

일자리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난민들에게 이런 금액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살레 씨는 기자에게 호주로 망명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친구 사진을 보여주고는 호주에선 난민 신청자에게 취업 전까지 매달 약 1000불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 속 친구는 난민 인정 소송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살레 씨에게 “왜 난민이 돈을 내야 해?”라고 물었다. 한국에선 난민 신청 뒤 6개월이 지나면 일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분이 불안정한 이들이 안정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알리 씨나 살레 씨 모두 그렇게 기약 없이 일을 했다. 단순 일용직 아르바이트도 하고 공장 일도 했다. 모두 임금도 적도 노동계약도 없었다. 살레 씨는 “일을 하려고 공장에 가서 난민 신청자라고 말하면 ‘가, 가’라고 하면서 그냥 돌아가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일을 할 때는 보통 12-13시간 정도 했고 주야 교대로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친구들이 십시일반 모아 치료비를 대기도 하고 운이 좋을 경우에는 정부가 20% 정도를 보조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자리가 불안정하기도 했지만 이들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된 건 인격적인 모독이었다. 살레 씨는 “사장 뿐 아니라 직원 모두가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아요. 매일 ‘시팔, 이 새끼야’라고 부릅니다. ‘빨리 빨리’라는 말과 함께요”라고 말했다. 알리 씨도 비슷한 경험을 털어 놓았다. “일을 하고 집에 가에 가면 공장에서 있던 일 때문에 잠을 못 자기도 했어요. 내전이 있고,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그렇지 않아도 힘들고 외롭고 슬픈데 공장에 가면 사람들이 매일 같이 욕을 하니까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도망쳐 왔는데 예멘에서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어요. 마치 감옥 같습니다.”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리 씨는 애초 한국 정부에게 큰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한국어 교육이나 직업 또는 문화와 관련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제공받을 수 없었죠. 정말 큰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료보험이 안돼서 병원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내야 하죠.” 살레 씨도 “한국은 안전한 나라이지만 난민에 대해서만큼은 인간적인 대우를 하지 않아요. 우리를 마치 벌레처럼 취급합니다. 한국 사람들도 내전 때 난민이 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기꺼이 받아 주리라 생각했어요. 터키는 수백만 명의 난민을 받았지만 여기 예멘 난민 신청자들은 고작 300명뿐이잖아요”라고 말했다.

현재 이들은 한국 정부에 난민 인정을 호소하기 위해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예멘 출신 난민 신청자 약 100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 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한국 정부에게 호소하려는 것이 집회의 목적이다. 또 한국 사람들이 예멘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알리고 싶다고도 했다.

알리 씨는 난민의 인권 뿐 아니라 테러를 막기 위해서도 한국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서는 한국을 존중하지 않고 핵 개발한다고 비난하면서 어떻게 우리는 이렇게 모욕하고 존중하지 않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부들이 난민을 거부하면 IS에게만 좋을 뿐입니다. 만약 온통 전쟁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이 예멘의 전쟁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내전 발발 2년이 다 되가는 예멘. 매일 13명이 전쟁에 죽어가는 고통은, 이렇게 한국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알리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 정부가 난민 신청을 불허하며 준 두 달 짜리 출국 유예 기간이 찍힌 친구의 여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데 왜 돌아가라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출국 통지서를 받은 난민 신청자의 마음은 어떨까?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사망통지서를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날 인터뷰는 공익법센터 어필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통역은 이동규 어필 인턴이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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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에겐 긍휼을 베풀어야 하되, 진정 그들이 '난민 지위 인정받아대한민국에 합법적 거주하게 된 이후에 숨겨둔 그 색채(?)를 흩뿌리고자 하는 일들로, 이미 십 수년 전에 그렇게 받아준 벨 ᆞ프ᆞ독 등 저 유럽에서 발발하여 수백 명의 자국민들이 이슬람ISᆞ탈레반같은 극렬ᆞ극단주의자들의 접선ᆞ교육ᆞ조종과 자금을 받아 일으킨 테러로써 죽어가는 단초를 마련하는 엄청난 자충수를 알고도 받아들일 것인가요?

    저들의 이 이러한 읍소에 인정국면읃노 들어간다면, 또다른 이슬람권 난민들이 "한국에서 받아준다"라는 소문은 금새 번질것이고, 그 방법까지 그대로 전해져 무수한 저들이 당연히 안방 차지하듯 들어와 자치구ᆞ자치국으로 변질시킬 것은 벨기에의 몰렌베이크를 보면, 누구나 확인하여 짐작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된 표본(?)이 되어 있으니...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