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 선인가 악인가?

[워커스 23호]지금까지와는 다른 대통령, 어떻게 봐야 하나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 관해 글을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임을 미리 고백한다. 최근 필리핀 news5의 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에 취임한 지 3개월이 지난 그의 지지율은 무려 97%다.1) 7월 지지율이 91%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97%의 지지율이 여론조작의 결과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 지지율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석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지만 지금까지 두테르테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고민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출처: 필리핀 대통령실 페이스북]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통령

필리핀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력 가문들의 정치 장악과 극심한 빈부 격차이다. 마르코스 독재가 민중 항쟁으로 물러났지만, 마르코스 이후에 유력가문 엘리트들이 농지개혁이나 내전 종식과 같은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국민의 정치적 불신은 높아만 갔다. 그러다 보니 별다른 정치적 업적이 없음에도, 얼굴이 알려진 영화배우가 대통령이 되거나(에스테라다 전 대통령), 영화배우의 딸이 아버지의 인기에 힘입어 유력 대통령 후보(그레이스 포 상원의원)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오랫동안 필리핀 공산당은 무장투쟁을 지속해 왔는데, 노동조합-농민-환경활동가들에 대한 필리핀 정부의 비사법적 살인이 횡행했다. 부패한 정치권은 외국 자본에 대한 투자를 유치하면서, 노조를 탄압하고 최저임금조차 지키지 않는 기업들에 대해 아무 제재도 취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별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필리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그런 면에서 두테르테는 마르코스 독재 이후의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정치 엘리트 가문 출신이기는 하지만. 기존 대통령들처럼 유력 정치인의 부인이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후광에 기대기보다는, 검사 출신으로 시작해서 무려 22년간 필리핀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다바오를 필리핀에서 제일 안전한 도시로 만든 정치적 업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엘리트 정치인들의 부패와 무능에 질린 필리핀 국민은 그가 다바오 시장 시절에 범죄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다는 비판에 상관없이 그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것이다.

자신을 사회주의라 명명하는 대통령

두테르테는 자신을 필리핀 최초의 사회주의자(Socialist)대통령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필리핀 학자의 칼럼2)에 따르면, 두테르테는 좌-우 이념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기존의 우파적 경제접근(낙수효과와 같은) 대신에 빈곤개선이나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 간의 공정한 경쟁을 추진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정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두테르테는 내각에 좌파인사들을 등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필리핀 농업개혁부 장관으로 임명된 라파엘 마리아노(Rafael V. Mariano) 씨다. 그는 오랫동안 필리핀 농민 운동의 지도자였고, 무장투쟁을 지속해온 필리핀 공산당 계열에서 활동해 왔다. 봉건적인 소작농 시스템이 필리핀 사회발전을 가로막아왔다는 점에서, 농민운동 지도자가 농업개혁의 수장으로 임명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두테르테 정부가 필리핀 공산 반군과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것도 좌파 출신 정치인들을 과감히 내각에 등용시킨 두테르테였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부패한 억만장자를 기소하고, 필리핀의 좌파 여성정당 출신 국회의원을 국가 빈곤퇴치 위원장으로 임명한 두테르테를 두고 필리핀 운동진영은 상반된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필리핀 공산당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은 두테르테에 대해 기대를 표명하고 있지만, 시민사회 운동진영은 두테르테가 벌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약과의 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두테르테가 벌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전시 상황에서 발생하는 온갖 인권침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장 없이 구금하고, 판결 없이 살해하는 초법적 살인이 정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된다. 설사 필리핀의 마약 문제가 국가적으로 심각한 사회 문제라 할지라도 마약사범에 대해 자행하고 있는 무차별 살인과 구금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이미, 마약과 상관없는 사람까지도 살해당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자, 두테르테는 유엔을 탈퇴할 수도 있다고 발언한 것에 이어서, “히틀러는 3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필리핀에 300만 명의 마약중독자가 있는데 나는 그들을 학살하면 행복할 것 같다”라는 망언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

현재까지는, 두테르테가 하는 마약과의 전쟁이 부패와 범죄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필리핀 국민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 해결의 실질적 도움은 주지 못하면서 ‘인권’이란 이름으로 국제사회가 위선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는 두테르테의 주장이 필리핀 국민에게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테르테를 어떻게 봐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 수밖에 없다. 인권 활동가 입장에서 두테르테의 초법적 살인은 용납할 수 없다. 억울한 피해자가 양산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극심한 빈곤으로 마약 거래를 생계수단으로 삼아온 이들을 ‘처형’하겠다는 국가의 폭력은, 인류가 진전시켜온 인권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필리핀 국민이 두테르테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기존 정당과 엘리트들이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싸울 뿐, 정작 민중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두테르테나 트럼프를 통해서 분출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두테르테를 다루는 기사의 댓글을 보면, 한국 정치에 대한 혐오와 함께 두테르테를 지지하는 한국 네티즌의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도 ‘강력’하게 범죄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테르테는 선인가 악인가?

두테르테는 올해 4월 대선 운동 중에, 1989년 다바오 교도소 폭동 사건 때 수감자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호주 여성 선교사에 대해 “그녀는 아름다웠다. 시장인 내가 먼저 해야 했는데”라고 말해 호주 대사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아시아 시민사회에서 신망이 높은 치토 가스콘 필리핀 국가인권위원장이 이 발언에 대해서 여성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자, 국가인권위원장을 두고 “순진(Naive)하고 얼간이(Idiot) 같다”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러한 언행은 미국의 유력 대선 후보인 트럼프를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두테르테가 벌이고 있는 (포퓰리스트적인) ‘사회주의자’ 대통령 행보는 차베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국의 식민지로까지 간주 되어왔던 필리핀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날리는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결국, 두테르테 정권에 대한 평가는 마약과의 전쟁보다는 빈곤퇴치와 농지개혁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 필리핀 경제는 연 7%의 성장을 지속하고 있지만 빈부 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자신은 경제를 잘 모른다면서. 전임 아키노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어버린 수많은 필리핀 노동자들과 여전히 소작농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필리핀 농민들이 언제까지 마약과의 전쟁을 지지할지도 주목된다. 필리핀의 마약범죄와 공무원의 부패는 지주 가문으로 상징되는 필리핀의 오랜 불평등과 착취라는 구조적 요인에서 접근해야 한다. 원인 해결 없이 현상 제거에만 열을 올리는 개혁은 곧 한계에 부닥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워커스 23호>

1) http://philnews.ph/2016/09/26/president-duterte-trust-rating-increased/
2) http://opinion.inquirer.net/97575/the-ideology-of-duterte
3)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rldviews/wp/2016/09/29/duterte-hitler-killed-3-million-jews-i-will-kill-3-million-drug-deal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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