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독재자, 가난한 청년들의 항거로 쓰러지다

[기획] 21세기 민중봉기가 끌어내린 대통령들(1)

[편집자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대중적 분노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됐다. 신자유주의로 노동조건을 끝없이 유연화 하여 살인적인 노동 시장을 만들고 사회 안정망을 해체해 쑥대밭이 된 ‘헬조선’의 민낯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항쟁과 혁명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맞서 분출됐다. 특히 자본주의 위기가 더욱 짙어지면서 이 운동의 부침은 더욱 잦아지고 있다. 우리는 97년 신자유주의가 전면화 된 뒤 20년 만에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이 쏟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맞선 민중의 저항과 봉기는 과연 어떻게 진행됐을까? 어떻게 기존 체제를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를 세웠을까? 이 성과와 한계를 중심으로 주요 혁명 사례를 살펴본다.

(1) 튀니지의 신자유주의 독재자, 가난한 청년들의 항거로 쓰러지다
(2) 물밀듯 밀려오는 시위대 앞에 무릎 꿇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3) 긴축 5년의 투쟁 끝에 들어선 포르투갈 좌파연정

[출처: tagblatt]

“혁명, 만세!” 한 청년이 정부 청사 회벽에 검은 스프레이로 글을 써내려 간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23년 간 독재 권력이 호령했던 이 정부 청사는 거리 시위대가 장악했다. 독재자가 도주하기까지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채소를 팔며 생계를 전전하던 26세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 무허가 노점이라는 이유로 채소 수레를 빼앗기고 경찰에 구타당한 뒤 “가난을 끝내라, 실업을 끝내라”라고 외치며 절망적으로 분신한 것은 2010년 12월 17일이다. 그의 절규에 동참하며 들불처럼 번진 민중의 봉기는 28일 만인 이듬해 1월 14일 독재 정권을 끌어냈다. 그의 분신 후, “일, 자유와 존엄”을 외치는 청년실업자, 빈민 등 일자리와 미래를 빼앗긴 계급의 폭동과 시위가 빈민가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했다. 결국 대통령은 해외로 도주했고, 이 혁명은 국경을 넘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뒤흔든 ‘아랍의 봄’의 도화선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아프리카 북단 튀니지에서 일어난 혁명의 이야기다. 당시 이 혁명은 지금의 한국에서처럼 세계의 시선을 잡아맸다.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이 튀니지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독재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는 시대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미 유사한 분신 항거와 시위가 줄을 이었고 급기야 부아지지의 분신을 계기로 가난한 지역의 가장 헐벗은 사람들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느 단체가 동원하지도 언론이 보도하지도 않은, 이들의 자발적이며 헌신적인 투쟁은 SNS를 타고 가난한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결국 수도 튀니스까지 확대했다. 이 투쟁에 군부는 거리를 둔 한편, 노동조합과 법률단체 등 대중조직과 전문가단체, 사회운동이 가세하면서 혁명으로 진화하는 분수령을 이뤘다.

벤 알리와 40인의 도적

튀니지 민중이 쫓아낸 벤 알리 대통령은 애초 1987년 쿠데타로 부르기바 ‘전제정부’를 쓰러뜨리고 집권했다. 그는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민주적인 정권임을 자임하면서 수감된 노동자 석방, 몰수된 재산 반환 등 상징적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정치 기반 아래서 정치적인 이견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혁명 전 모두 8개의 정당이 있었지만 이중 5개가 금지됐다. 집권당인 입헌민주연합당(RCD)과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2개의 정당만 허용됐고, 공산주의와 이슬람주의를 비롯해 민주주의 세력은 불허됐다. 또 언론 검열과 함께 방대한 비밀정보기관과 경찰에 의한 고문과 구금 등 국가폭력이 횡행했다. 벤 알리는 국가기구와 집권당을 구분하지 않았고, 집권당인 RCD는 국가였고, 국가는 벤 알리에게 봉사했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벤 알리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며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하는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했다.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의 주요 수혜자는 ‘벤 알리와 40인의 도적’이라는 별명처럼 그와 친인척이었다. 슈퍼마켓 체인, 은행, 운송수단, 빌라, 호텔 등 주요 산업을 벤 알리와 그의 부인 또는 친인척이 독점했다. 이러한 경제 개혁을 놓고 세계은행과 서구는 균형적인 성장을 이끌고, 빈곤을 퇴치했으며, 사회지표를 개선했다고 칭송했지만 경제적 격차는 확대했다. 벤 알리 몰락 전 실업률은 14%에 머물렀고 인구의 42%가 25세 이하인 조건에서 청년실업률은 약 40%로 더욱 심각했다. 더구나 2008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고 수출이 하락하면서 튀니지 민중의 삶의 여건은 더욱 어려워졌다. 산업이 불모한 시드 부지드나 탈라와 같은 지역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웠다.

28일 간의 항쟁...대통령 퇴진과 개헌 요구 총파업

“가난을 끝내라, 실업을 끝내라!”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화염 속에서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것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였다. 그리고 이 절규는 튀니지 청년의 가슴에도 불을 질렀다. 이미 모두가 생계로 숨이 턱턱 막히는 처지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태어나기도 전에 들어선 독재의 공안 폭력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2010년 11월 말 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문서를 폭로해 대통령가의 부패가 알려지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하나둘씩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 당일 부아지지가 살던 시디 부지드를 시작으로 시위는 3주 만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시위가 터져 나오자 화들짝 놀란 튀니지 정부는 부아지지의 분신 3일 만인 12월 20일, 실업 해소를 위해 1,000만 달러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히며 성난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거리 민중의 반발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22일에는 “끔직한 세상은 이제 그만, 실업도 그만”이라고 외치며 22세의 청년이 또다시 분신했고 이틀 뒤에는 18세 청년과 44세의 남성이 시위 중 경찰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대치는 극에 달했다. 결국 25일 튀니지 정부는 사과 성명을 내고 발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지만 시위대를 달랠 수 없었다. 급기야 28일에는 벤 알리 대통령이 TV 회견을 통해 소수 극단주의자들이 거리 폭력을 선동한다며 단호하게 법을 집행할 것이라는 엄포를 놨다.

그러나 이미 친구와 동료의 목숨을 빼앗아간 정부에 튀니지 민중의 대답은 더욱 강력한 저항뿐이었다. 그 뒤 1월 3일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동맹휴업을 벌이고 가두를 행진했다. “모두를 위한 일자리!”, “연줄과 뇌물 청산!” 그리고 “자유로운 튀니지!”, "벤 알리 퇴진!”을 외쳤다. 그러나 경찰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격렬한 시가전이 발생했다. 시위대는 불타는 자동차타이어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여당 사무실도 불길에 휩싸였다. 분신한 뒤 사투를 벌였던 부아지지가 5일 끝내 사망하면서 장례식을 치르려 했지만 정부가 막으면서 더욱 큰 공분을 불렀다. 6일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가 시위대를 지지하며 파업을 벌이고 연대했다. 튀니지 법률인 협회도 파업으로 가세했다. 시위대는 경찰에 최루탄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정부 청사에 진입해 불도 질렀다. 그러나 정부는 암살단을 동원해 시위대를 암살하면서 격분한 사람들의 시위는 실제적인 전국 봉기로 치솟았다.

결국 13일 벤 알리 대통령은 다시 TV 회견을 통해 재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며 자유와 개혁을 보장하겠다는 등의 양보 조처를 밝혔지만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물결은 가라앉지 않았다. 14일 예기치 않게 TV 방송은 갑자기 중단됐고, 간누치 총리가 나와 자신이 헌법에 따라 과도 대통령의 역할을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비로소 대통령의 도주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튀니지 혁명은 평화적인 민주화 과정을 밟았다고 평해지지만 사실 338명의 사망자와 2000명이 넘는 부상자라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얼굴만 바꾼 대통령...다시 거리로 나서는 청년들

대통령을 축출한 뒤에도 튀니지 민중의 투쟁은 계속돼야 했다. 의회와 정부에는 구 지배권력의 부역자가 득실댔고 야당도 무늬만 야당이었다. 결국 봉기가 계속되면서 벤 알리의 입헌민주연합(RCD) 잔당도 과도내각에서 사퇴, RCD도 해산했다. 튀니지는 2011년 10월 23일 제헌의회 선거를 치렀고 여기서 이슬람주의의 엔나흐다당이 다수를 획득했다. 시위는 청년과 대중조직이 주도했지만 이를 대표할 수 있는 대안의 정치세력은 없었다. 결국 과도정권을 거쳐 2014년 10월 총선과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렀지만 구 독재세력이 새로 만든 정당인 나다투니스의 베지 카이드 에셉시 후보가 당선해 권력에 다시 돌아왔다. 다만 튀니지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 정당연합인 인민전선은 2011년 5석에서 2014년 9석이 늘은 16석을 확보했다. 다시 수권한 기득권 세력은 일부 양보 정책 외 근본적인 개혁안을 내놓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전도사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튀니지 정부에 관료제를 간소화하고 민간부문을 장려했다고 칭찬하면서 공공부문 임금과 정부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기도 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는 한편 이슬람국가(IS)도 부상하면서 튀니지의 여건은 더욱 힘겨운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노벨상위원회는 튀니지 혁명 뒤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튀니지 노총, 상공협의회 등 ‘국민 4자 대화기구’에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몇 달 뒤인 올 1월, 튀니지 중동부 스팍스 주에서는 젊은 노점상이 다시 경찰에 물건을 빼앗겨 분신했다. 중서부 카세린 주에서는 24세의 청년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전봇대에 올라갔다가 감전사한 뒤 시위가 재개했다. 그 사이 6만 명의 청년이 유럽을 향해 난민 길을 떠났다. 인근 IS나 리비아로도 가장 많은 청년이 용병으로 합류했다. 2건의 대형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5년 전에 비해 실업률은 3% 이상 증가했다. 튀니지 언론 <튀니지아라이브>는 “혁명 뒤 시작된 정치에서 청년들은 배제됐다. 기성 정치인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요구인 사회, 경제적 변화를 추동하는 데 눈을 감고, 오직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만 치중했다. 이들이 다시 청년들을 거리로 나가게 하고 있다”고 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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