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어 주고 이해해주는 그림 그리고 글”

[워커스 27호] 하림, 봉현을 듣다

[출처: 사진/ 정운]

고요히 보낸 하루를 담담히 풀어낸다. 반려동물을 챙기고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로 향해 그림을 그리고 가끔 마음 맞는 지인들과 차를 나누어 마시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술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그려나가는 예술. 자신의 이야기로 자신과 관계된 주위를 살피며 그림과 글을 꾸려가고 있는 작가, 하림이 봉현을 만났다.

하림(하) 봉현 작가를 처음 알았을 때 드로잉을 하니까 만화가인가 했는데, 글도 쓰더라고요. 본인의 정체성을 표현하자면 무엇일까.

봉현(봉)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어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라하기 애매한 게 글을 써요. 글을 쓰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특이한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또 그림으로 전시를 하기보다는 책이나 매체로 가볍게 다가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도가 아직 내게 맞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림으로 봤을 때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들, 전문적으로 글을 배우고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글을 쓰니까 두 개가 맞물려서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그림에서 표현하기 부족한 것 글로 하고 글에서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예술가의 범주로 봤을 때,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네요.

음…. 좀 다른 점은 화가나 다른 예술들이 상상의 것을 표현하거나 허구를 표현하거나 비판하거나 할 수 있는데, 저는 직설적으로 표현해요. 내가 겪은 일, 내가 느낀 점, 내가 본 것밖에 못 그리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림도 글도 못하겠더라고요.

주로 어떤 것을 하며 하루를 꾸려 나가나요.

집이랑 작업실에서 머물러요. 두 곳 모두 홍대 근처에 있으니까 대중교통 탈 일도 없고,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친구들도 홍대 근처에 있고. 홍대 밖을 벗어나지 않고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삶이에요. 온종일 하는 게 많지 않아요. 일어나서 자전거 타고 작업실 가서 작업하고 운동하고 집에 가서 자고. 이렇다 하게 노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대화하고 카페에서 글 쓰거나 책 읽다가. 누가 보면 노는 것인데 내게는 일상이고 일이 되어 버렸어요. 홍대에 사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창작하는 삶을 중요시하는 거 같아요.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생활 패턴, 누리고 생각하는 것들이 소중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사는 게 아닐까. 부모님이나 어른이 보기에는 철없이 산다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는 삶이죠. 홍대 근처에 사는 이유가 저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서로 응원할 수 있어 외롭지 않고요.

그런 삶을 드로잉이라는 장르, 본인의 글을 통해서 풀어나가고 있고.

제가 20대 때 2년 동안 세계여행을 했어요. 방랑자이고 떠돌이였죠. 여행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랑하다시피 떠돌아다녔어요. 그 날들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좋게 봐준 편집자가 있어서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라는 책을 내게 됐어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큰 변화가 생겼죠. ‘여백이’를 만났거든요. 여행 당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읽었는데, 책에 ‘내 삶의 여백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게 참 좋더라고요. 쉬지 않고 쫓기듯이 불안하고 외로워하며 살았던 시간을, <윌든>을 통해 도움도 받고 위로도 받았죠. 그리고 고양이를 만났는데, 이름을 ‘여백이’라고 붙였어요. 고양이가 내 삶의 여백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아서 ‘여백아 여백아’ 부르고 있는데, 말에 힘이 있잖아요. ‘여백아’라고 하면 그게 나한테 좋은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두 번째 책은 여백이와 제 삶에 대해 풀어나갔어요.

삶의 여백이 왜 필요하다고 하게 됐을까. 보통 그냥 살아갈 수도 있지 않나요.

2년 동안 한국에 한 번도 안 들어오고 외국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왜 2년이냐고 묻더라고요. 사실 2년이라는 시간을 정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의 궁금함이 해소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에요. 나는 왜 살고 있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사실 정답이 없는 건데 정답을 찾아야 할 거 같은 압박감을 느꼈어요. 알 방법이 없으니까 계속 공허해 하다가 이럴 거면 도망가자 해서 외국으로 갔는데 그 어디에도 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어디에 답이 있다면 평생 떠돌아다녀야 할 거 같은데 답이 없더라고요.

예술가는 자신이 삼는 질문이 있잖아요. 봉현 작가는 그걸 찾았나요.

예술이나 창작에 몰입하기보다 삶에 더 치중하며 살고 싶었어요.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한 삶이요. 저는 그런 것을 보듬어 주고 충족시켜주고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써 예술을 선택했어요.

그런 삶을 드로잉으로 풀어내는 거군요. 나는 여행을 다니며 드로잉을 하는데, 드로잉은 대상을 애정 있게 보게 되더라고요. 오래 관찰하면서. 어떤가요. 드로잉하며 무슨 생각을 하나요.

제 그림의 특이한 점은 내가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 어떤 환경과 상황에 놓인 자신을 스스로가 볼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내 모습을 내가 볼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그걸 보고 그려요. 풍경 속에 놓인 나,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나 같은.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볼 수는 없지만 계속 보려고 해요. 그리고 그림으로 드러내고요. 나는 어떻게 살고 있고,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계속 끊임없이 기록해 나가는 것 같아요.

그림이 따뜻해요. 일상을 기록했다고 하기엔 판타지도 녹아있고. 선들로 표현되는 세상이 예뻐요. 본인이 판타지를 담아서 작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판타지라기보다는 불행보다는 행복을 보고 담아내고 있어요. 제가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힘든 일이 있어도 결국은 행복해지거나 좋아질 거라 믿는 게 큰 사람이에요. 안 좋은 상황에서 긍정적인 것을 그림으로 극복하고. 힘든 상황에서 더 힘들게 파고드는 게 아니라 힘든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조금 더 좋고 따뜻한 것을 그리며 치유 받고. 그래서 점점 더 따뜻해지는 거 같아요.

사람들도 그걸 느끼고 서로가 따뜻해지는 거 같아요.

아까 2년간 세계여행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 시간이 전혀 환상적이지 않고 힘들었어요. 20개국을 혼자 여행했으니까요. 지금 갈 수 없는 시리아도 갔어요. 나오자마자 내전이 터졌어요. 인도에서 3박 4일 갇혀서 설산에서 얼어 죽을 뻔하고, 이집트에서 납치당할 뻔한 적도 있어요. 또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길에서 그림 그리며 팔고 하루를 꾸려갔어요. 농장에서 당근 심고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 너무 가난하니까 세계여행에서 틈틈이 할 수 있는 스킨스쿠버 이런 것 하나도 못했어요. 잠잘 곳과 먹을 것만 있으면 감사했거든요. 살다시피 여행을 한 거죠. 풍족하지 못한 여행이니까 힘들고 혼자 다니니까 외롭죠. 돌아갈 날도 정확하지 않고 돈도 없고 여행이 끝난다고 이렇다 하게 해소되는 것도 없고. 그 막연함이 힘들었고 금전적인 어려움도 컸어요. 그런데 지나고 나니 좋은 것만 남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요. 일상의 당연한 것이 다 깨지는 것이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한 것이 여행의 매력이었고 제게 남은 선물이기도 하고요. 지나고 보면 좋은 기억밖에 없어요. 기억 속에서 힘들었던 것도 결국에는 좋아요. 돌아보면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재밌었다 웃을 수 있는 게 즐거움 같아요. 지나온 시간을 웃으면서 그림으로 그려내고 글로 표현하는 게 과거의 힘든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요.

그렇게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책에 담겨 있어요.

어느새 세 권이에요. 세 권이 연장선에 있어요. 첫 번째 책인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는 20대의 방황,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찾아 헤맸던 어린 시절의 성장이라고 한다면 <여백이>라는 책은 그런 방황을 일단락 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정착하는 상황이 담겨있어요.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이죠. 더는 혼자가 아니기에 고양이라는 다른 생명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담았어요. 가장 최근에 나온 <오늘 내가 마음에 든다>는 직업과 일, 친구들이 생기는 과정에서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시간. 내가 다니는 장소와 만나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인 책이에요. 내가 계속 발전해나가고 있다,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다음 책은 좀 더 깊이 가서 개인 대 개인, 연애 얘기를 쓰고 있어요. 좀 더 깊은 얘기라 겁이 나는 상황이기도 해요.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자신의 과거 연애를 밝히는 걸 굉장히 조심스럽게 생각하잖아요. 저는 그게 싫었어요. 저는 부끄러운 게 없는데, 제 연애를 밝히는데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게 싫더라고요. 내 인생에서 연애가 엄청나게 큰 의미고 사랑으로 많은 삶이 바뀌었는데, 그 얘기를 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연애와 관계를 포함한 내 얘기를 쓰고 있어요. 제가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 사람들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잖아요. 다만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것뿐이죠. 이렇게 점점 나중에는 부모님 이야기, 아이에 대한 이야기, 할머니가 되면 노인으로서의 삶을 얘기해보고 싶고 계속 작업을 해나가고 싶어요.

요즘 사람들이 예술을 평범한 일상의 이벤트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봉현 작가는 많은 사람이 이벤트가 아닌 일상을 드로잉으로 표현하도록 하죠.

여러 곳에서 그림을 전혀 그려보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일을 2년 가까이 했어요. 정말 연령대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요. 중학생부터 60대 할머니까지, 비구니 스님도 함께했었어요. 그 모든 사람의 목적은 자기가 그림을 너무 잘 그리고 싶고 화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만 봐도 괜찮으니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명암을 넣으라거나 디테일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눈을 감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것을 스케치북에 옮겨보자고 해요. 자신이 누구인지 작은 캐릭터로 만들어 보라고 했어요. 수업이 끝날 때마다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데, 이 시간이 자신의 인생, 최근의 삶 중에 가장 특별한 순간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일상이 너무 무료했었다는 거예요. 특별한 사건이라는 게 하나도 없어서 심심해서 신청했는데, 그 심심함을 그려가면서 풀어내는 거죠. 그런 것들이 자기 삶에 풍요로운 시간이 됐다고 하시더라고요. 제 강의를 듣는다고 예술가의 자질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적어도 제가 원하는 건 그 시간이 끝나도 혼자서 언제든지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내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그리는 거예요.

곧 아프리카로 떠나죠. 본인의 예술적 상상력으로 일상을 밝게 만들었는데, 아프리카의 일상에 예술을 던지러 가잖아요. ‘Color for Africa, Color for Life’

하림 씨가 기획자로 참여한 프로젝트죠.(웃음) 아프리카에 가서 뮤지션과 음악으로 소통하는 아이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계속 기록할 생각이에요. 아이들과 자화상도 함께 그리고요. 단순히 얼굴의 외모, 생김새가 아니라 너의 환경, 너의 생각, 가족, 꿈, 희망, 힘든 것들. 살아가며 느끼는 슬픔과 행복 모든 것이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이잖아요. 그 아이들이 표현할 기회를 함께 하고 싶어요. 내가 했던 방식의 이야기와 그림을 아이들도 하면서 예술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그런 작업이 아프리카 친구들의 일상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그림을 그린 이유도 어떻게 보면 단조롭고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을 잠깐 잡아두고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힘이 되더라고요. 아프리카의 삶을 잘 모르지만 모두 허공에 공기처럼 지나가잖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삶의 색채를 입히는 것 아닐까요. 하얀색 백지의 삶,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 위에 컬러를 입히면서 그 종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고 어떤 색깔이 있는지 덧칠하다 보면 그 삶을 절대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 요즘 하고 싶은 게 뭐가 있어요?

저는 그림 작가로 알려져 있어요. 글을 쓰는 작가로는 이렇다 할만하게 배운 거나 경력이 없어요. 어느새 주위에 많은 선배 작가들이 생겨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요. 다들 시인이거나 소설가인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제가 꼬맹이이더라고요. 내 또래의 여자 작가가 없다는 걸 알았어요. 같이 성장해 나갈만한 여자 동료가 있다면, 젊은 여성 작가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부터라도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민이나 연애, 결혼, 육아, 친구들, 사회에서의 관계를 너무 과장하지 않고 판타지적이지 않게 ‘나도 그래’라며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조금 더 잘 쓰고 싶어요. 지금 쓰는 책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책을 너무 잘 쓰고 싶어요.

* 인터뷰 하림 / 정리 신나리 기자 / 사진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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