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134일의 긴 여정이 끝났다. 사실상 박근혜는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 이미 파면된 것이다. 아니, 사상 유례없는 100만 명 이상이 모인 11월 항쟁에서 이미 탄핵당한 것이다. 비록 법적 절차를 거쳐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에 이르렀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민중에 의해 이른바 ‘민중 탄핵’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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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적 승리
이번 촛불항쟁은 노동자민중에 의한 ‘시민혁명’이자 ‘명예혁명’이다. 정치적 주체로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은 노동자 민중이고 국민이고 인민인 것이다. 이들 ‘시민’은 80년대 민주 항쟁과 97년 이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서 성장을 거듭했지만, 세월호 대참사 이후 주권자 ‘시민’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사회가 한국전쟁 이후 반공·안보·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조화되면서 지배계급의 폭력적 통치와 민중 배제는 일상이 되었고, 일반 대중에게 자기검열과 피해의식 그리고 패배주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보수적 민주화로 귀결된 87년 체제는 신자유주의를 전면 도입한 97년 체제로 이어지면서 불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퇴행을 반복하였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위기를 일상화했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비정규직의 양적 확대와 불안정 노동은 노동자민중의 생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로 인한 존재감 상실은 심리적 절벽으로 내몰려 상심을 극대화했다. 자기검열과 차별에 익숙했고 불편해도 감내했다. 전망 부재는 ‘헬조선’ 또는 ‘헬자본주의’를 완성시켰다. 사회적 방향은 상실되고 노동자민중의 사유체계는 ‘분열’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빈곤과 불투명한 전망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인내심을 담보하기가 어려웠다. 노동자민중의 ‘분열’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전화되어 직접행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수구 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궤멸적 타격을 입은 노동자민중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선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87년 체제의 총체적 위기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는데, 특히 세월호 참사로 확인된 지배계급의 국가파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일상화된 지배계급의 불법·탈법·초법적 범죄와 부패에 대한 무딘 감각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권의 폭력성, 소통부재, 일방적 지시와 명령체계, 거짓말과 꼼수 등은 노동자민중으로 하여금 국가권력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직접행동으로 맞서게 하였다. 이들의 시민권은 자유의지에 대한 본성이었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었기에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판단 기준은 정상과 상식이었다. 비상식적인 박근혜의 인식과 행태는 결정적이었다. 어느 정부에서나 비선실세는 존재했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통령도 낯설지 않다. 권력이 있는 곳에는 늘 부정부패가 있었다. 하지만 최순실과 같이 전방위적으로 권력과 자본을 사유화한 비선실세와 박근혜의 무능함과 무책임은 역대급이었다. 청와대가 탄핵이 기각될 것이라는 난관적인 전망과 거짓 정보를 듣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5단 케이크를 준비했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촛불항쟁의 소중한 성과
이번 촛불항쟁은 노동자민중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직접행동으로 대의민주주의를 소박하게(?) 완성시켰다. 촛불은 처음부터 직접행동으로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했지만, 국회의 의결과 헌재의 결정으로 박근혜를 몰아내면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일보시킨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대의제가 대의민주주의를 완성시킨 역설의 정치혁명인 것이다.
민주노총에 의해서 촉발된 촛불이 헌재에 의해서 종결되었지만, 헌재의 판결이 가지는 한계는 명확하다. 헌재는 제출된 모든 사유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박근혜를 파면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중대한 헌법 및 법률 위반 행위임에도, 기업의 영업 자유 및 사유재산권 침해와 지인의 사익 도모를 위한 직권남용과 기밀유지의무 위반을 탄핵사유로 인정했다. 그런 나머지 ‘세월호 7시간’, ‘언론의 자유’, ‘권력에 의한 심각한 인권유린’ 등과 같은 정작 중요한 탄핵사유를 배제해버렸고, ‘재벌의 뇌물공여’를 ‘기업의 사유재산권 침해’로 정당화해주는 결과마저 나타났다. 이런 헌재의 최소주의적이고 타협적인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태생적으로 주권자의 보편적 의지를 받들기에는 한계가 많은 보수적 사법 관료기구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민중의 분노에 응답하고 정당한 법 절차에 근거해 입헌민주주의를 바르게 세웠다는 평가는 아쉽겠지만 정당하다. 이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헌법을 수호하고 정의로운 법질서 확립이 촛불항쟁의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통해 미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 새로운 사회시스템 건설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은 매우 커다란 성과이다. 촛불항쟁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태도를 가르쳤다. 모든 개인은 다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줬다. 이에 따라 광장의 모든 촛불은 형제, 자매, 동료, 동지의 사회적 연대로 맺어져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 다양한 주체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면서 지배세력과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이재용 구속은 정말 획기적인 성과다. 이번 국정농단을 통해서 뇌물공여와 재벌의 불법적 이권교환 메커니즘, 재벌의 담합과 수구보수의 최종적 지원자로서 전경련의 실체 부각, 적극적인 민영화 정책과 공공성을 포기한 정부경제정책, 총체적 규제철폐와 재벌중심의 반(反)노동정책의 전면화, 적나라한 재벌공화국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이는 전근대적이고 초독점적인 재벌지배체제의 구체적 양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재용 구속은 재벌체제 해체를 향한 투쟁의 물꼬를 텄고 향후 재벌체제는 어떠한 형태로든 급격한 변동을 겪을 수밖에 없다.
투쟁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밖에도 이번 촛불항쟁이 거둔 성과는 많다. 반면 그 만큼의 문제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섣부른 평가는 신중해야 할 것이다. 87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30년 동안의 사회운동에 대한 일부 교수연구자들의 비과학적이고 반실증적인 평가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할 일도 많고, 시간도 많다. 다만 지독히 외롭고 힘든 상황 속에서 꾸준히 투쟁해온 노동자민중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으면 좋겠다.
박근혜의 파면과 함께 공식적인 촛불집회가 끝나면서 일상으로 복귀한 촛불들 일부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난무하다. 광장은 뜨거운 데, 일상은 차갑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물러났다고 해서 당장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를 물러나게 하는데 134일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직 손도 못 댄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은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봄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2단계의 새로운 투쟁이 기나긴 장도에 오르게 된다. 5월까지 존속하기로 한 퇴진행동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촛불의 욕망과 열정을 담보할 수 있도록 광장의 정치를 유지해야 한다. 주말집회가 안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기획이 필요하다.
대중들과 조직이 호흡을 같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제도적 방식과 실천적 운동을 병행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고, 사회적 힘으로 진전된 촛불의 힘을 더욱 확대·심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곳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고 발 딛고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 건설이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를 확보하는 첩경이다.
지금까지는 운동진영이 촛불의 등에 업혀서 신나게 달려왔다. 이제는 운동진영이 광장을 유지하기 위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방향은 명확하다. 필요하면 조직노동자가 선도투를 자임하는 것도 괜찮다. 특히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정도 물적-인적 기반이면 차고 넘친다.
87년 이후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우리는 지배계급과 사회질서가 요구하는 분할의 논리에 애써 눈 감아줬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거대한 불의와 부조리에 맞서 싸우다가도 현실 적응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만들려는 선택을 흉내 내는 코스프레에 능숙했는지도 모르겠다. 노동해방, 민중해방, 인간해방을 외쳤지만 자기 해방도 못하면서 전전긍긍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의 모순은 안에서 깨고 밖에서 쪼아대는 ‘줄탁’(啐啄)이 함께해야지 극복된다. 투쟁하지 않으면 권리를 찾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데모스의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