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떻게 소수자를 국민화하는가

[워커스 명숙의 무비무브]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 감독 데오도르 멜피 2016

‘숨겨진 사람들(영웅들)’이라고도 번역되는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감독 데오도르 멜피, 2016)〉는 일터에서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맞선 개인들의 서사다. 1960년대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누가 먼저 우주에 도착하느냐로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던 흑인여성 세 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들은 흑인여성이었기에 불가능했던 우주과학(또는 엔지니어링)의 꿈에 도전했고 국가정책에 참여하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다. 수많은 부당함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공로는 쉽게 숨겨졌다. 달리 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으나 그때는 말할 수 없었던 숨겨진 존재들의 투쟁기다. 사회의 주류가 지우고픈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만으로도 영화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출처: 21세기 폭스]

경쾌한 음악과 중간에 삽입되는 당시의 영상은 관객들을 20세기로 가볍게 끌어당긴다. 킹 목사도 나오고 케네디 대통령도 나온다. 아마도 미국인들은 영화를 보며 ‘맞아, 옛날에는 흑인들이 화장실도 따로 쓰고, 음식점이며 도서관도 같이 갈 수 없었지’ 하지 않았을까.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과거가 아닐까.

하지만 똑똑한 흑인변호사 오바마처럼, 영화에서도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맞선 무기는 주인공들의 천재성일 뿐이다. 천재가 아니라면, 뛰어난 능력이 없었다면, 뚫을 수 없는 편견이라니 더 무섭다. 그만큼 평범한 흑인여성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을 차별의 사회구조는 견고하다. 그래서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라는 영화 홍보리플릿 문구는 불편하다. 능력 있는 개인만이 인종과 여성차별의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영화는 엘리트적일 뿐 아니라 너무나도 미국적이다. 미국식 국가주의의 국가안보와 경쟁주의를 바탕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훌륭한 인재는 ‘국가발전을 위해’ 등등하게 기용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여성이든 흑인이든 모든 미국인의 힘을 끌어 모아야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므로 애국의 깃발은 더욱 강조된다.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해야’ 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일본 제국주의 사회를 분석하며 국가가 어떻게 여성을 ‘국민화’하는지 말한다. 국가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여성의 역할을 재규정한다.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국가에서 주로 사용된 ‘분리형 젠더전략’은 후방의 여성들에게 병사를 출산하는 역할과 생산자(근로동원)로서의 역할을 요구한다. 영국이나 미국 등 연합국들은 여성징병을 포함한 ‘참가형 젠더전략’으로, 여성도 참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두 전략 모두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리지는 않았다. 전쟁은 여성을 ‘국민화’시키는 데 중요하다.

이는 여성만이 아니다. 흑인도 그렇다. 단지 온 국민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때이므로, 그녀들이 필요할 뿐이다.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국민으로 포섭되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계기는 전쟁이며, 영화에서는 미소 냉전 체제다.

흑인전용화장실은 누가 깨는가

소수자 국민화 전략은 한계가 분명하다. 국가의 젠더전략은 젠더의 경계를 없애지 않을 뿐 아니라 한계선도 분명하다. 시혜적 전략이 그렇듯 결정은 당사자가 아니라 권력이 정한다. “흑인 화장실은 이제 없어. 나사NASA에 화장실 구분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 명대사로 뽑는 이 장면은 칼자루를 누가 쥐었는지 분명하게 전해준다. 흑인과 백인이 화장실을 같이 쓸 수 없었던 시대에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은 빡빡한 근무시간에 유색인종 화장실을 찾아 왕복 1.6km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불합리와 불평등의 상징인 흑인화장실의 명패를 떼는 사람은 싸우는 흑인여성이 아니라 백인남성인 해리슨국장(케빈 코스트너)이었다. 그 사회의 규칙을 바꾸는 사람이 여전히 주류라니, 씁쓸하다. 여성을 지켜주겠다는 남성의 가부장적 보호주의다.

그럼에도 영화는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차별을 인식하기조차 어렵다는 걸 쉽게 풀어냈다. 최초로 흑인여성 NASA엔지니어를 꿈꾸는 메리(자넬 모네)는 백인들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의 강좌라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없다.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는 공석인 주임(슈퍼바이저) 역할을 실제 하고 있지만 그녀를 주임으로 승진시키지 않는다. ‘유색인종 팀에 배정되는 고정직 주임은 없다’는 이유다. 모두 합법적이며 규정에 따른 것으로 절차에 문제는 없다. IBM컴퓨터 관리법을 배우고 싶던 백인관리자가 도로시에게 부탁을 하려고 “당신 흑인들에게 악감정이 있지는 않아”라고 변명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개인에 사회화된 차별이 미치는 영향을 보여줄 뿐이다. 백인관리자는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고 말하지만 흑인들이 차별당하는 불합리에 대해 침묵하거나 때로는 차별에 동참하며 그녀들의 노동을 무시했다. 악감정이 아니라 사회의 질서라 강변한다. 도로시는 이를 명쾌하게 꼬집는다.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우리의 자매애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 승진에 탈락한 도로시가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펼치는 두 친구의 활약을 응원하며 건넨 말이다. 기꺼이 서로의 분투와 승리를 축하해 주는 자매애다. 누가 승리하든 모두의 승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성들 간의 시기와 질투만을 부각시키는 서사와 다르다. 반면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이 연대하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는 연대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안다. 150만 이주민 시대에, 여성혐오와 성소수자혐오가 판치는 시대에, 우리의 자매애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자문해볼 때다.[워커스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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